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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성립과 발전(3)-청의 중국지배

구름위 2013. 3. 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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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以漢制漢)과 한간(漢奸), 섭정 다이곤(多爾袞)

 

가. 자금성의 새 주인                                                   

 

(1)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 중원으로

 

베이징의 자금성청태종이 급사하자 후계 문제를 두고 다소간의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러내지 않고 태종의 아홉번째 아들 복림(福臨)을 세워 연호를 순치(順治)로 개원했다. 이가 청나라 3대 황제인 세조순치제(1643 ~ 61)다.

 

이때 순치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1638 ~ 1661), 따라서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도르곤 / 누르하치의 제14자)과 정친왕(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 / 지르하란 / 누르하치의 동생인 小酋=슈르가치의 제6자)이 보정왕(輔政王)이 되어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이곤(도르곤은 곰을 뜻이라고 함)은 사실상 섭정(攝政)으로 정치를 전단 하였고, 그에 의해서 한인(漢人)들을 앞세워 베이징에 들어가고, 중국을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이 변방의 이민족을 지배 내지는 복속시키는데 사용했던 전형적인 방법으로 기미(羈 ?)정책이라는 것과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두 가지 수법이 있었다.

 

기미(羈 ?)란 말의 재갈과 소의 코뚜레를 말하는데, 재갈 물린 말이나 코를 꾀인 소가 주인이 고삐를 당기는 대로 움직이듯이, 종주권(宗主權)이라는고삐만 그들이 쥐고 있으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멋대로 풀어두고 자치(自治)를 허용한다 해도 멀리 달아나지는 못한다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사회에 대해서 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 서로간에 물고 뜯고, 할퀴고 험집 내도록 교묘히 조정하여 힘을 뺀 후, 정복하거나 복속시키는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술법이다. 몽골이나 만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주로 이런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이런 낡은 중국의 전통이 이때 와서는 역으로 이한제한(以漢制漢) 곧, 중국인으로서 중국인을 제압한다는 방침을 청나라는 세웠고, 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만든 덫에 자기가 걸려던 셈이다. 역시 알 수 없는 것은 세상 일이다.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은 청나라 조정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이곤은 모든 병력을 서쪽으로 옮겨 산해관 동쪽 1백㎞ 지점에 위치한 영원(寧遠/닝위안)까지 나갔다. 이곳은 1626년 누르하치가 산해관을 넘으려고 나갔다가 원숭환의 대포 세례를 받고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곳이다.

 

이때 다이곤의 휘하에는 만주 8기와 몽골 8기, 그리고 중국인들로 구성된 한인 8기가 있었으며 참모로는 포로가 되었다가 귀순한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따르고 있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베이징 동쪽300 ㎞ 지점에 위치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야 한다. 산해관은 중국 장성(長城)의 동쪽 끝에 해당하며, 글자 그대로 산과 바다가 잇 대어 있는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다.

 

일찍이 청 태종도 산해관 돌파를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 했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반년이 겨우 지난 1644년 4월, 다이곤의 청나라 군대는 산해관을 넘어 5월 2일에는 중국인들이 길에 향을 사르고 영접하는가운데 당당히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뒤를 따라 체두변발(剃頭?髮)이라는 기절초풍할 오랑캐의 머리 모습으로 변신한 오삼계 이하 명나라의 중국 장졸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연출이 가능했을까? 여기에는 이런 사연들이 전해지고있다.

 

(2) 자금성의 새 주인

 

자금성의 전경1644년 3월,18일, 이자성의 유적집단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오삼계(吳三桂)가 이끄는 명의 최정예부는 산해관에서 더 동쪽으로나아가 청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청나라가 이를 쳐부수고 다시 산해관을 넘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자성의 침입을 받게 된 명나라 조정에서는 너무도 급한 나머지 오삼계에게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자성을 막으라는 명령을 보냈다.

 

이런 명령을 받은 오삼계는 베이징을 향해 군대를 돌렸으나, 막상 그가 산해관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의종(毅宗) 숭정제는 이미 자결한 후였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없는 마당에서 오삼계의 군대는산해관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그들에게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吳襄)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다시 은(銀) 4만냥을 미끼로 오양(吳襄)을 시켜서 아들의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고,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오삼계는 투항을 결심하고 산해관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 된영문인지 막상 베이징 근교에 다다르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꾸고 다시 산해관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으로 싸웠던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살해되었다. 나는 이원수를 갚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야 하는데,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한다..........."

 

이런 제의를 받은 다이곤은 뛸 듯이 기뻤다. 면도 칼보다 예리하다는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을 멸하고, 중국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당장 군대를 이동하여, 4월 5일, 그렇게도 염원했던 산해관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한편 베이징의 이자성은 오삼계의 군대가 산해관으로 되돌아 갔다는 소리를 듣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삼계를 잡기 위해 산해관으로 나갔다. 4월 22일, 드디어 이자성과 오삼계의 군대가 정면 충돌하여 전황이 급박할 때, 만주의 8기군이 이자성 진영으로 질풍처럼 달려 들었다.

 

만주 기병 출현에 혼비백산 된 이자성은 베이징으로 줄행랑 쳤다가 오삼계의 아버지를 죽이고, 약탈한 보물들은 시안(西安)으로 실어보낸 후, 4월 29일 그의 7대조상까지 황제와 황후로 높이고는 자금성을 불지른 후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5월 2일, 쉽게 베이징에 들어온 다이곤은 약탈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비명에 죽은 황제(숭정제)의 장례를 정중히 치렀다. 그리고 방대한 군사비에 충당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각종 세금을 폐지하고 지세(地稅)에 대해서도 우선 1/3을 탕감한다고 발표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일체의 잘잘못은 묻지 않는다고 발표하고, 명나라의 제도와 관료들 대부분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과거를 열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식인들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이라는 유적이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인들이 이리 떼처럼 사나운 약탈자가 아니라 예절과 도덕을 중시하는 빼어난 민족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중국의 인민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해방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한편 다이곤은 명나라의 멸망을 기정 사실화하고, 청나라가 정당하게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명사(明史)의 편찬을 서둘렀다. 전조(前朝)의 역사를 그 다음 왕조가 쓰게 됨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이어가는 것이 중국의 관례다. 따라서 명나라의 역사를 청나라가 쓴다는 것은 청나라가 중국지배에 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주도면밀한 계획까지 다이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636년,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라는 홍역을 치렀고, 이듬해인 1637년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다이곤을 따라서 산해관을 넘어 북경까지 갔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때의 사실들을 소상하게 적어서 본국에 보냈다.(소현세자가 보냈다는 글은 본문 말미에 실었음)

 

국내 외가 어느 정도 안정된 1644년 9월, 다이곤은 선양(瀋陽)으로부터 어린 순치제를 베이징으로 모셔와 제법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고, 비에 흠뻑 젖은 명나라의 관료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새로운 자금성의 주인을 마지하였다.

 

이미 선양에서 즉위식을 올렸던 순치제가 다시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즉위식을 올렸다는 것은 청나라가 자금성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다.

 

청나라는 몽골족이 세웠던 원나라와는 달리 서방세계와의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그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명나라의 제도는 대부분 그대로 계승시켰으며, 관료들의 사회에서도 같은 수의 만주인들을 복수로 채용하여 만·한 병용 정책을 추진하였을 뿐이다.

 

이를 두고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촌 떼기 만주족을 데릴사위로 맞아들여 기울어져 가던 중국이라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 천년간 이어온 중화라는 전래의 중국적인 자존심이 여기서 단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다음 기회를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몸에 베어 있었다.

 

(3) 한간(漢奸)과 이한제한(以漢制漢)

 

청대의 청화백자 주전자, 고궁박물관 소장중국에서는 왕조의 고체를 혁명이라고 하고,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통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유혈의 대가를 치루고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왕조교체의 범주를 넘어서 이민족인, 그것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이 큰 무리없이 이런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에서 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매국노(賣國奴)를 한간(漢奸)이라 한다.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명나라가 망할 당시, 막상 숭정제를 따라 자결한 사람은 환관 한 사람뿐이었으나,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거했을 때 궁녀200 여명을 비롯해서 40 여명의 관료들이 자결하여 고고한 지조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황후의 친정 아버지를 비롯해서 수 많은 관료들은 이자성 부하들의 흙 발에 체이고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얼굴에는 비굴한 웃음 기를 머금고 목숨만은 보전코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오자 이들을 마지하기 위해 향을 사르고, 충성을 맹세하고,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가 한간(漢奸)들이다. 이런 형편없는 무리들을 만주족은 돈이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믿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빠져든다는 것은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고 서로가 흉허물 없이 지내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진정한 애국의 길을 아는 사람은 혁명 초기의 서슬 푸른 예봉(銳鋒)은 일단 피하고 본다는 음흉하고도 간사한 계산을 많은 중국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 사회가 안정되고 정의가 바로 서게 되면, 이들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고 얼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것을 노회(老獪)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나라가 망했을 때 만주족은 소리없이 사라진 반면 중국은 다시 중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한간으로 매도된 사람이 오삼계와 오삼계의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 그리고 명나라의 병부좌시랑으로 있다가 청조에서 다시 내각 수보를 지낸 김지준(金之俊) 등을 꼽을 수 있다.

 

오삼계가 조국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붙게 된 사실에 대해서, 진진원(陳圓圓)이라는 기생과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하고,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의 권유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윤색가필되어 흥미로운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애첩 진랑(陳娘)을 베이징에 두고 전선으로 떠났던 오삼계는 오매불망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순하기로 결심한 오삼계가 베이징 근교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도 보곺았던 진랑이 이미 이자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충격을 받고 산해관으로 되돌아 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게는 나라의 운명이, 작게는 가족의 안위가 달려있었고, 여기에 각기 사정이 다른 많은 부하를 거느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랑놀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뭇 사나이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진진원이라는 기생이 오삼계의 애첩(愛妾)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홍승주라는 사람은 복건성(福建省/푸젠) 출신의 문관이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군략가로서 이자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인정 되어 요동지방의 총수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의 요동 총수란 전쟁에 이기면 시기를 받아 목숨을 잃고, 지면 문책을 받아 처형되는 죽음의 자리였다.

 

홍승주 역시 오삼계 등 부하 장졸을 이끌고 산해관 동쪽에서 청 태종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청 태종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일화도 수 없이 전해 오고 있지만 그 진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반청세력의 토벌에 앞장서고 청조를 위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김지준은 명나라에 출사했다가, 다시 이자성에게 벼슬하고,그러다가 청이 베이징에 들어 왔을 때 다이곤에게 10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용되고 내각의 수보가 된 사람이다.

 

이가 제시했다는 열 가지 조건이란 그야 말로 당시로서는 별 소용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런 것들이었다.
⑴ 남자는 청나라 조정에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⑵ 산 사람은 따르되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
⑶ 남편은 따르되 아내는 따르지 않는다.
⑷ 관료는 따르되 아전은 따르지 않는다.
⑸ 노인은 따르되 젊은이는 따르지 않는다.
⑹ 유학자는 따르되 승려나 도사는 따르지 않는다.
⑺ 기생은 따르되 광대나 배우는 따르지 않는다.
⑻ 벼슬길은 따르되 혼인은 그전대로 한다.
⑼ 나라 이름은 따르되 벼슬 이름은 그전대로 한다.
⑽ 부역이나 납세는 따르되 말이나 글은 그전대로 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여질수 있다 그래서 다이곤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그를 내각 수보로 임명했다. 내각의 수보가 된 김지준은 다시 왕공은 수도를 벗어날 수 없고, 기인(旗人)은 상업에 종사할수 없으며, 환관들이 궁성 밖으로 나오면 참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것이 당시로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열 가지를 다시 요약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청나라 조정에 따르는 것은 남자에 한하며, 그것도 가장이나 지식계층 및 고급관리 등 책임있는 사람들은 한간이 되어 기꺼이 따르겠지만, 반면 여자들과 젊은 이들, 아전과 승려 및 도사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대나 배우,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락과 풍속과 장례 및 묘지에 관한 중국적인 문화전통에 대해서는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이 열 가지 조건이 받아짐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자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듯이 여자들에게도 전족을 금지시켰으나 이는 소용이 없었다. 여자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례나 묘지를 옛 습관대로 지키게 되고, 이로써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불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전이 따르지 않는 다는 것은 관(官)과 이(吏)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중국사회지만 말단 행정을 담당했던 아전이란 대대로 세습하면서 그 고장의 터줏대감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황제는 이들을 파면하거나 새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의 명령은그가 임명한 관(官)에서 그치고 실제 지방 행정의 담당자인 이들 아전들에게는 먹혀들 수가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 났으며, 오랑캐가 싫은 이름있는 지사나 학자 및 문인들은 승려나 도사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수 있는 길이 열였고, 연극, 예술, 문자, 노래 등도 간섭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와 전통, 그리고 향락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옹정·건륭연간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와 별도로 김지준이 내각수보가 되어 만들었다는 "왕공은 도성을 벗어날 수 없고,....기인들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등의 당시로서는 별 의미 없었던 이런 것들이 천하의 악법이 되어 만주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되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祖法/조상이 만든 법)은 한자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좀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에 그때 맞추어 하기로 하고 한간들의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보자.

 

청의 중국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세 가지 였다. 첫째가 이자성의 잔당들이 였고, 둘째가 이자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장헌충의 무리들로서 이들은 사천성을 중심으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남의 곳곳에는 명의 황족을 모시고 18년간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들 전부를 남명(南明)이라한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토벌하기 위해 즉각 정벌군을 편성했다. 청군의 추격을 피해 섬서(陝西/산씨)로 줄 행낭을 쳤던 이자성의 60만 대군은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게 되자 산속을 헤매던 끝에 이자성은 농군에게 붙들려 살해되고 그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하였다. 이로써 순치 2년(1645) 이자성의 반란은 매듭을 지었다.

 

안휘(安徽/안후이), 호북(湖北/후베이), 사천(四川/쓰촨)을 휩쓸던 장헌충은 1644년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들어가 대순황제가 되었을 때, 사천의 성도(成都/청두)에서 대서국(大西國)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를 잠칭하고 있다가 청의 토벌군이 밀어 닥치자 피에 주린 흡혈귀 마냥 살육과 약탈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광란(狂亂)을 펼쳤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아무리 깊은 산중에 숨어 들어가도 그 부하들을 시켜 찾아내게 하여 죽인 후 그 증거로 손을 잘라오게 하였는데, 많이 잘라 온 사람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고, 아예 사람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하였다. 적군인 오랑캐에게 단 한 사람도 남겨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술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융숭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고 나서는, 그의 부하들을 시켜 돌아가는 길목을 지켰다가 목을 잘라오게 하여, 그 잘린 목을 옆에 두고 술친구로 삼았다.

 

이런 참혹한 양상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이 보다1세기 후 편찬된 촉벽(蜀碧)이란 책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흥미 본위의 많은 픽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부를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겠고, 그렇다고 전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기에 정신 도착 치고는 너무나 무서운인간 종말의 광기(狂氣)였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표현이 없다.

 

사천에 청의 토벌군이 도착한 것은 순치 3년(1646)말, 장헌충을 토벌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은 운남(雲南/윈난) 방면으로 달아나 사천지방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나 운남으로 도망친 그 잔당들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베이징에서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명의 배도(陪都/준수도) 난징에 전해지자 신종의 손자가 되는 복왕(이자성에게 피살되었던 복왕의 아들)이 사가법(史可法) 등에게 옹립되어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고 명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간에 분란이 일어나고 수하 장졸 역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순치 2년(1645) 5월 15일, 난징은 함락되고 복왕은도망치다가 난군의 손에 잡혀 죽고 이곳의 문무백관들은 머리를 갂고 변발을 하였다.이때 토벌군의 총수는 한간(漢奸) 홍승주였다. 최소한 강남지역이남아 지키고자 했던명나라 구신(舊臣)들의 소박한 꿈도 결국은 또 다른 명나라의 옛 거물에게 짓 밟히고말았다.

그 후로도 명의 부흥운동은 한 동안 계속되어, 명나라의 후손이었던 당왕(唐王)은 복주(福州/푸저우)에서, 계왕(桂王)은 광동(廣東/광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부흥을 도모했지만 모두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정성공(鄭成功:1624∼62)·장황언(張煌言:1620∼64)등은 해상세력을 동원하여 청군(淸軍)과 해전을 벌였으며, 자주 본토의 내륙 깊숙이쳐들어가기도 하였지만 역시 이곳 지리에 밝고 해전에도 익숙했던 홍승주가 난징에 진을 치고 마치 그물 코를 잡아당기듯 속속들이 이들을 차례대로 토벌했다.

 

1662년 홍승주에게 밀린 계왕(桂王)은 운남(雲南/윈난)성의 곤명(昆明/쿤밍)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이자성에게 붙들려 살해되고 18년간 계속되었던 부흥운동도 막을 내렸고 청의 중국지배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청으로서는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 삶을 일만 남았다.

 

국역조선왕조실록(인조 22년, 1645년 5월 23일)
《 인조 045 22/05/23(경술) /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수서로 치계하다 》

  세자가 금군(禁軍) 홍계립(洪繼立)을보내어 수서(手書)로 치계하였다.
  “구왕(九王/다이곤) 이하 여러 진영은 유적을 대파시킨 후에 이미 승승장구의기세를 얻은 데다, 또 오삼계가 미리 전로(前路)의 주현(州縣)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왕의 군대가 무령현(撫寧縣)에 도착하자그 성중의 백성들이 5리쯤 되는 길을 미리 마중 나와 기다렸다가 구왕을 영접하여성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구왕이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효유하고, 또 고시문(告示文)한 장을 주어 각기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이때 구왕은 성 안에들어가지 않고 현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묵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찍 출발하여 영평(永平)의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현의 서쪽 아랫길을 향하여 갔으니, 이는 대개 유적이왔다간 후로 연도에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아랫길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풀이 있어 말을 먹이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 저녁에는 창려현(昌黎縣)에도착하여 묵었습니다.

  27일에는 영평부(永平府) 난하(?河)의하류인 난주(?州)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開平衛)의 성 서쪽으로 10리쯤되는 곳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玉田縣)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州)의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월 1일에는 통주강(通州江)의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하루 평균 행군이 1백 20∼30리 정도가 됩니다.

  지난번 계주에 있을 적에 유적 1백여인이 와서 항복하며 말하기를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은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줄 알고 황급히 재화(財貨)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29일 저녁에 화약을 터뜨려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으로 도망쳐 나갔다.’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여러 진영의정예한 군졸들을 뽑아 팔왕(八王)과 십왕(十王) 및 오삼계 등에게 주어 그들을 급히추격하도록 하고 구왕도 이틀 길을 하루로 당겨서 급히 전진하였기 때문에, 일행의짐 보따리가 미처 통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은 그런대로 잘 먹고 지냈습니다마는,시강원 이하는 모두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었습니다.

  2일에는 일찍 출발하여 황성(皇城)을둘러 나갈 적에 구왕이 황제에게서 지난번에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삼고, 가마를 타고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양문(朝陽門)으로부터들어가 대궐문 근처에 이르니, 금의위(錦衣衛)의 관원이 황제의 황옥교(黃屋轎)와의장(儀仗)으로 구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구왕은 황옥교를 타고 의장을 앞길에 배열하고서,장안문(長安門)으로부터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에 당도하여서는 황옥교에서 내려걸상에 올라 앉아,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궁전 앞에 나열시켰습니다.

  신은 이때 구왕의 참모관과 함께 동서로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환관을 불러 유적의 형세와 황성이 함락된 이유를 물으니,환관이 대답하기를 ‘유적이 2월 20일경부터 황성을 포위하여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으로성중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받지못하여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져서 밖으로 흩어져 나가 있다가 미처 성을 들어오지도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4∼5첩(堞)씩을 지키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모두 성을버리고 달아났다. 그러자 적이 마침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皇子)인 세 왕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후 황성의 백성들이황제와 황후를 황성에서 1백 리쯤 떨어진 북쪽 진산(鎭山)에 장사 지냈다.’ 하였습니다.

  적이 이미 성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대순(大順)이라하고, 원년의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서 황제라 자칭 한 지 42일 동안에 인심을수습하기 위해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산해관에서 패배하여 돌아온 이후로성중의 재물과 보화를 모조리 수탈하여 가지고 가면서 화약으로 궁전과 여러 성문을불태웠으나, 다만 인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가자, 황성의 백성들이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경의를 표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중의 크고 작은 관원(官員) 및 환관 7천∼8천 명이 또한모두 명함을 내밀고 와서 배알하였습니다. 궁전이 모두 불탔는데 오직 무영전만이우뚝 하게 홀로 남아 있었고, 내금천(內禁川)·외금천(外禁川)의 옥석교(玉石橋)도파손된 데 없이 완연하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불타버린 집에서 나온 제비들은 높게혹은 낮게 하늘을 까맣게 가리어 날으니 ‘봄 제비가 숲에 둥우리를 튼다[春燕巢林]’는말이 참으로 헛 말이 아닙니다.

  구왕이 무영전 앞 행랑 채에 신의 처소를정해 주었는데, 공간이 비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구왕에게 말하여 무영전 동쪽 방을얻고 나니, 전보다는 조금 넓고 또 침상·탁자·병기·의장 등도 있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온 후로는 장수 용골대(龍骨大)등을 시켜 성문을 관장하게 하여 청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을 출입하지 못하도록엄금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신을 따르던 일행의 인마(人馬)들이 모두 성 밖에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사람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인편을 만나, 대단히 바쁘고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