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청의 성립과 발전(4)-호복변발, 팔기, 녹영

구름위 2013. 3. 2. 22:51
728x90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변발과 팔기(八旗) 그리고녹영(綠營)

 

나. 회유(懷柔)와 강경(强硬)                                         이길상

 

(1) 호복(胡服)과 변발(? 髮)

 

천안문 광장과 중국 군경다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대가 베이징에 입성 후 다른 것은 죄다 명의 유습을 존중하고 그대로 두었으나 복장과 머리털 모양만은 그네들의 방식을 따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소위 호복변발을 강요하고 이를 명령한 것이다.

 

이런 명령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만주족의 복장인 호복(胡服)은 비교적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앞과 옆 머리는 빡빡 깎고 뒷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수염도 콧수염만 좌 우 열 개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깎아 버리는 소위 체두변발(剃頭 髮)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과 물의(物議)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의관(衣冠)이 곧 신분을 표시하던 동양적인 전근대사회에서 각 민족은 머리털 또한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무인이 중심이었던 흉노(체두-剃頭)와 선비(삭두-削頭), 그리고 몽골(개체-開剃)이나 여진(체두-剃頭), 일본(권발-卷髮)에서는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르나 남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다.

 

반면 문신 중심의 중국(長髮과 束髮)과 조선(結髮)에서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내 몸과 터럭과 살갗은(身體髮膚)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受之父母), 감히 이를 손상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不敢毁傷) 효도의 시작(孝之始也)으로 보았고, 특히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는 것은 금기(禁忌) 중의 금기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중국인들이 몽골 족이 세운 원의 지배하에서는 개체(開剃) 변발이라 하여, 앞 머리에서부터 뒤 꼭지까지는 빡빡 깎고 좌우 옆 머리만을 남겨 이를 두 가닥으로 길게 땋아 늘여 뜰이는 치욕을 당했다가, 명의 성립과 동시에 머리털도 중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와 돼지꼬리 같은 이런 머리모양을 강요하자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그래서 다이곤도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반발이 거세자 20 여일 만에 일단 취소하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다시 변발을 강요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끈질기게 변발을 강요했는가?

 

여진 사회에서 머리를 기르는 것은 상중(喪中)임을 표시할 뿐, 머리를 깎는 것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만주시절부터 투항(投降)이나 귀화(歸化)해 온 외국인들에도 어김없이 변발을 강요하였고, 심지어 적(敵)·아(我)를 머리털로 구별하였다.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털가죽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여름이면 이를 벗어 던져 더위를 피하는 원초적인 생활습관에서,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조차 재대로 하지 않는 이들에게 머리털은 귀찮은 존재일 뿐, 다른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19세기 Formosa(타이완) 사람들 / 사진자료기후와 풍토가 만주와는 다른 중국에서 굳이 이를 강요한 것은, 복장과 머리털을 포함한 전래의 외형을 그들 스스로 지키고, 이를 중국인들에게 강요함으로서 중국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대한 포석도 동시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힘에 못 이겨 별 수 없이 머리를깎았다. 그런데 이것이 남쪽으로 올수록 반발은 심해졌는데, 순치 2년(1645) 6월,강소성(江蘇/장수)에 변발 명령이 내렸을 때, 이곳 사람들은 하루만에 모두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양자강 남쪽 절강성(折江/저장)에 같은 명령이 전달되자,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반시민, 농민들이 가세하여 들고 일어나 어느 변란(變亂)때 보다도 강경하게 반항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기 위해 내려온 만주 인들을 몰아내고 일 년 간은 머리털을 지켰다. 그러나 조직력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일단 머리털을 지키는데 안도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고 있다가, 결국 저항력은 무너지고 차례대로 머리는 깎였다. 이래서 3년 후에는 전 중국인들이 체두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거리를 메웠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앞서 김지준이 제시한 열 가지 조건 중에 도사나 승려 등은 청의 관습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적용되고, 이들은 호복과 변발에서 제외되자, 자존심 강한 학자나 지사들 중에는 출가하여 이를 피하고 지조(志操)를 지켰다.

 

그런데 풍속이나 유행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기존의 제도에서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면 몸에 박힌 가시를 뽑아 내야 하듯 처음에는 완강하게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이질문화에 몰입되고 만다. 이것을 원래대로 복원하려면 이때는 다시 복원 자체를 거부한다.

 

1851년 청조에 반기를 들고 태평천국을 세웠던 홍수전(洪秀全)은 변발을 버리고 장발로 돌아가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변발을 금지시키자 이번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다시 일어났었다.

 

머리털을 두고 시끄러운 것은 예나 이제나 우리들에게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개화기 우리나라에도 을미사변 후 성립된 제 4차 김홍집내각에서는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채택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1일로 정하고, 연호를 세워 건양(建陽) 원년이라 했다.

 

동시에 임금 고종이 솔선하여 머리를 깎은 후, 당시 제 4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의 고시로 이른바 단발령을 발표하였고, 국왕을 비롯한 관리들의 복장도 바꾸었다. 그리고는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길거리에 나서서 상투머리를 보는 데로 잘랐다.

 

그러나 민비시해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있었고, 음력의 폐지와 단발령 또한 일본의 간계라 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이런 정책에 심하게 반발하다가 결국 의병으로까지 확대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대다수의 친위대가 지방으로 내려갔고, 임금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한 심기를 감주지 못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는 임금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는데(俄館播遷) 이 과정에서 김홍집과 어윤중은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다시 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고, 자격 면허를 얻어 머리를 전문적으로 손질해 주는 이발사(理髮師)가 등장하고, 이발관도 수없이 생겨났으며, 바리캉이라는 프랑스제 머리 깎기 기구도 들어와 서양식 머리문화가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일본내각총리 및 육군대신을 겸했던 동조영기(東條英機 / 도조히데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머리를 깎고 설치자 일본조야가 머리를 깎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 여파가 조선에까지 닥쳐 남자들은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다.

 

광복 후 어른들은 상투머리 아닌 서양식 머리모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계속 삭발을 강요하였고, 헌법에 신체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가위를 들고 서슴없이 잘랐다.

 

이를 두고 학부모나 그 말 많은 언론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예 입을 봉했다. 그래서 이들이 교문을 떠나면 대부분 우선 머리부터 길게 길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머리모양이 유행 따라 장발이 주류를 이루자, 이것이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 하여 거리에서 경찰이 이들을 단속하고, 단발(短髮)을 지시했다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경범죄로 처벌하였다.

 

1980년대 중·고등학생들에게도 드디어 두발과 교복자율화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자율과 자유는 다르다는 억지 논리가 등장하고, 논란 끝에 교모(校帽)는 사라졌지만, 교복(校服)은 부활되었고, 두발만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는 했으나 학교마다 단속 기준을 정하고 그 간섭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물론 여기에는 힘없는 학교가 이런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간섭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청소년보호라는 명분 아래 사회가 합의하고 이를 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인데, 지금도 염색된 노랑머리 청소년을 바라보는 많은 성인들의 시각으로는 그 자체가 불량일 뿐 개성있는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고 보면, 이런 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간섭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2) 팔기(八旗)와 녹영(綠營)

 

청나라가 명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데는 홍승주와 오삼계를 비롯한 중국인 장졸들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만주의 팔기 병들이 따르면서 감시와 독전(督戰)을 병행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청나라 군사의 핵심 정예(精銳)는 기병(騎兵)들이었고, 이들이 사막이나 초원지대에서는 십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본토에 들어서면 사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산과 바다, 강과 호수가 많은 중국 지형에서는 우선 산악전(山岳戰)과 수상전(水上戰), 그리고 장기전(長期戰)을 기본으로 치러야 하고, 이런 전투에서 기병의 위력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무덥고 늪과 호수가 많은 남쪽 지방일수록 청나라 군사들은 맥을 못썼다. 청나라는 이런 고민을 풀기 위해 중국 전래의 전투방법을 채택하고, 명나라의 군사 중 희망자를 따로 모아 이들의 깃발을 녹색(綠色)으로 하여 한인팔기(漢人八旗)와 구분하고, 깃발의 색깔에 따라 녹영(綠營)이라 불렀다.

 

팔기(八旗)란 글자 그대로 여덟 개의 깃발을 말한다. 황·백·홍·남색의 4색 깃발과, 각 색의 깃발에 태를 둘러 다시 네 개를 더 만들어 모두 여덟 개로 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 글에서 이야기 한데로 이것은 원래 여러 부락이 공동으로 산을 에워싸고 몰이 사냥을 할 때 만든 진형(陣形)을 누르하치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행정·군사제도로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몰이 사냥 방법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짐승이 달아날 수 있는 길목에는 황색기를 든 추장이하 부락민이 자리하여 미리 지키고, 그 황색기를 중심으로 남색기를 든 부락민이 좌우로 갈려 타원형으로 진형을 이루고 산을 에워싼다. 여기에 홍색기와 백색기를 든 부락민들은 포위망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각각 양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짐승들을 황색기 있은 곳으로 몰아내어 잡는 방법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백색기와 홍색기는 가운데서부터 몰이 역할을, 남색기는 옆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포위 역할을, 황색기는 한 곳으로 몰려온 짐승들을 포획(捕獲)하는 역할을 각각 나누어 맡았는데, 이런 집단 사냥 기술을 군대의 편제와 전투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족에게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고, 모든 씨족을 팔기(八旗)에 소속시키고, 기(旗)를 구사(gusa/固山)라 불렀다. 구사의 우두머리를 구사에젠(Ejen/額眞)이라 하여 그 일족을 배치했는데 에젠이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훗일 도통이라고도 불렀다.

 

각 구사(gusa/固山/旗)에는 5 갑라(甲喇/잘란/무리라는뜻)를 두었고, 각 갑라는 5우록(牛 ?/니루/화살이라는 뜻)으로 나뉘고 각 우록에는 300명의 장정이 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gusa(旗)에서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 장정은 7500 명에 달하였고, 이들 장정들을 기인(旗人)이라 하였다. 이들을 전부합하면 6만 명이 된다.

 

처음에는 만주인들 만으로 팔기를 만들었다가 1635년 몽골인 들로 구성된 몽골팔기가 1642년에는 한인(漢人)들로 구성된 한인팔기가 만들어져, 만주8기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8기의 총 병력은 18만명이 되었다.

 

다이곤이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 왔을 때 팔기병의 총 병력은 10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베이징에 들어와서 일반인들을 성안에서 몰아내고 궁궐 수비와 수도 치안을 맡으면서 천하를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 후 수도에 주둔하면서 중앙을 수비했던 부대를 금려(禁旅) 팔기라 하였고, 지방의 요소에 배치된 부대를 주방(駐防) 팔기라 하였다. 팔기에 소속된 기인(旗人)들은 기지를 포함하여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 지위가 자손에게 세습되어 특이한 무사 신분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저 김지준이란 자가 기인(旗人)은 상업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법을 제정했을 때 설마 자기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된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웃어 넘기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사회는 안정되고 역할은 축소되어 이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을 때, 그 후손들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보복인가를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祖法/조상이 만든 법은 고칠수가 없다)이라는 족쇄가 이들은 단단히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영(綠營)은 명나라의 군대로 있었던 사람들이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지원하여 다시 청나라 군대로 이름만 바꾼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부대의 편제나 편성도 명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청은 60만에 이르는 이들 녹영을 전국 요소에 배치하고 팔기로 하여금 이를 감시하게 하였다. 반청세력과 잔적(殘賊)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을 때,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녹영을 앞세우고 그 뒤를 팔기가 따르게 하였다.

 

그 후로도 강남지방 일대에는 해적을 비롯한 반청세력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계속 나타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유력한 한인(漢人) 출신의 군벌들을 왕으로 세워 이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런 군벌로서 왕이 되었던 사람이 오삼계와 상가희(尙可喜), 그리고 경중명(耿仲明) 등이 었다. 이들을 흔히 3번(三藩)이라 불렀다.

 

이들 3번이 강희제(康熙帝/1661 ~ 1722) 때 난을 일으켜 청나라에 대항했다가 모두 토벌되었는데 이를 3번의 난(1673 ~ 81)이라고 한다.

 

(3) 젊은 황제 순치제의 순애보(殉愛譜)

 

청대의 자기불과 여섯 살 나이에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는 철저하게 유학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금성에 들어와서도 그 주위에는 이름 있는 학자들은 불러 모으고 이들과 담론을 즐기면서 더욱 유가적인 교양을 쌓았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실권은 그의 삼촌이자 섭정(攝政)인 다이곤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황제로서 치세한 기간은 다이곤이 사망한 1653년부터 61년까지 햇수로 불과 8년 남짓하다.

 

그런데 그가 다이곤에게 실권을 맡기고 한 창 유가적인 교양을 쌓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

 

몽골 출신의 순치제의 어머니, 즉 태종 홍타이지의 황후는 이때 황태후가 되어 있었는데, 이 황태후가 그의 시동생이자 태종의 동생이며 순치제의 숙부(叔父)인 섭정(攝政) 다이곤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맞이하는 이른바 형사처수(兄死妻嫂)가 만(滿)·몽(蒙)사회에서는 전래된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조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이는 흉노와 같은 풍속"(兄死妻嫂 匈奴同俗)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들의 풍속이며, 이때까지 그 풍속은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사회의 풍속이고, 이런 일을 생전 처음 보게 된 중국 관료들은 밝은 대낮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들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연신 축하한다고 다이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이들 중국인들이 더욱 놀랬던 것은, 비록 다이곤이 섭정으로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서열 상 황태후보다는 분명히 몇 단계 아래인 신하의 신분이다. 황태후가 어떻게 신하에 해당하는 사람과 내리 혼인(降婚)을 할 수 있는 가라는 점은 호기심 이상으로 이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철이 들었고, 유가적인 교육으로 이미 중국적인 사고가 몸에 벤 순치제로서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진족은 몽골 족이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몽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왕실에서는 몽골 여자를 황후로 삼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순치제는 몽골출신의 어머니가 싫었고, 숙부에게 혐오감(嫌惡感)을 갖는 동시에 몽골 족까지 밉게 보았다. 순치제의 상심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무분별한 정사(情邪)를 막고 군주독재 권을 확립하기 위해 궁중 법도를 새로이 마련하여 조법으로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중국의 관습상 일부일처는 필부들에게나 해당되는 부끄러운 것이고, 남자가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진나라 시황제가 아방궁을 짓고 3천 궁녀를 거느리면서, 궁녀들 방 앞에는 양의 먹이를 두게하고, 양을 몰고 다니다가 먹이를 먹는 방에 들어가 동침하고 그 정표를 남겼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제가 수 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그 몸에서 수 많은 자녀가 태어난 것은 역대 제왕들의 공통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청대에 이르러, 황제의 침실을 관장하는 경사방태감(敬事房太監)이란 환관이 저녁 수라가 끝날 무렵이면 크다란 은쟁반에 황제가 총애하는 비빈의 이름이 적힌 녹두패(錄頭牌)를 올리면 황제가 이를 보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물리고, 그중 하나를 뒤집어 놓으면, 그 날밤의 행운(?)은 그 녹두패의 주인공이 차지하게 되는데, 엄격하게 시간이 정해지고,.. 일이 끝난 즉시 자기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경사방태감은 황제에게 수태(受胎) 여부를 물어보고 유념하라고 하면, 대장에 성명과 연월일시를 상세히 기록하여 훗일 증거를 남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출산을 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평소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아도 황후의 승인이 없으면 그 후궁은 황제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 주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적서(嫡庶)의 차별없이 태어난 순서에 따라 제1 아고(황자) 제2 아고 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 아고방이라는 곳에 같이 수용시키고 아무 차별없이 교육을 받게 한 후 그 중 가장 뛰어난 아고에게 다음 제위를 계승케 했다.

 

이런 것이 순치제가 만든 조법이다. 로맨틱한 장면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씨받이 내지는 씨내리가 남녀간 사랑의 전부라고 할 수있는 이런 무미 건조한 법을 만들어 후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한 여인을 사랑하다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한다.

 

1653년 다이곤이 죽자, 죽은 그를 벌(罰) 주고, 몽골출신의 황후를 폐위시킨다고 선언하여 신하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래게 만들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간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습상 몽골 여자를 다시 황후로 세웠지만, 새 황후 역시 버릇 없다는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상심 속에 시름없이 지나던 이 젊은 황제 앞에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할 만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동귀비(董貴妃)라고 불렀던, 기록상으로는 만주출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다니는 소문으로는 양주(陽州/양저우)에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부호의 애첩 동소완(董小宛)이라는 미모의 여인이, 양주가 변란으로 시끄러울 때, 포로가 되어 베이징으로 왔다가 어떤 연줄을 따라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젊은 황제를 사로잡았고 한다.

 

이 젊은 황제는 동귀비가 옆에 없으면 수저도 들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동귀비가 순치 17년(1660) 8월 병을 얻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비탄에 잠긴 황제가 이번에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로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주위에서 부당함을 간곡하게 아뢰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자금성의 황제자리를 팽개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죽치고 앉아서 아무리 신하들이 권해도 나오지를 않자 할 수 없이 황제가 사망하였다고  발표하고 어린 그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세워 이를 수습하였다.

 

이런 것은 다만 민간에서 쉬쉬하는 가운데 소문으로만 전해졌을 뿐, 공식 기록에는 순치 18년(1661) 정월 초 이튿날, 황제가 마마를 앓는다고 알려지고, 곧 이어 24세의 젊은 황제의 죽음이 발표되었다.

 

곧 유조(遺詔)가 발표되고 순치제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여덟 살의 현엽(玄燁)이 청의 4대 황제로서 뒤를 이었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 / 1661 ~ 1722)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