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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성립과 발전(1)-후금의 성립

구름위 2013. 3. 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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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성립과 발전(1) -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

 

가. 후금(後金)의 성립                                                        

 

(1) 건주위(建州衛) 여진족(女眞族)

 

만주지방 일대1644년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자금성(紫禁城)의 주인이 되었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질 때 까지,

 

약 2세기 반 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청(淸)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지금의 중국 동3성(東三省)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를만주(滿州)라고 부른 것은 청나라 때부터였고,

 

그 전까지는 여진족을 포함한 퉁구스제족이 중국과는 다른 각자의 생활문화를 가지고 살았고 그 명칭 또한 시대에 따라서 달랐다.

 

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진족은 불교를 받아들인 후 그들의 추장을 반야경을 결집 편찬했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 생각했던 신앙에서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여진족 역시 퉁구스 제족과 마찬가지로 조상신을 받드는 샤머니즘을 신봉하다가, 이런 토속신앙에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실적으로 그들을 지배 보호하는 추장을 살아있는 문수보살로 보았던 것이다.

 

원, 명의 교체기인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이르는 사이, 여진 사회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 3개 집단으로 통합되었는데, 흑룡강 하류에서부터 연해주 일대에는 야인여진부가, 松花江(송화강/쑹화장) 주변에는 해서여진부가, 牧丹江(목단강/무단장)상류에서 長白山(장백산/칭바이산/白頭山) 일대, 즉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산간지대에는 건주여진부가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야인(野人) 여진(女眞)에서는 어로(漁撈)를 주 생업 삼아 어렵게 살고 있었고, 평야와 산간에 의존해서 살고 있었던 해서(海西)여진과 건주(建州) 여진에서는 목축(牧畜)과 수렵(狩獵)으로 역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이들이 어렵게 살았다는 것은, 어로는 기술이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목축이래야 몇 마리 정도의 가축 사육 수준에 머물렀으며, 수렵 역시 사냥 감이 늘 풍족한 것은 아니다. 주변에는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가 일망무제로 펼쳐 있었지만 이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조선에서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가난했고, 만주에서는 사냥감이 부족해서 가난했었다.

 

이런 상태에서 글을 배우고 유교적인 도덕률을 지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였지만, 이들 여진사회에서도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문화수준도 어느 정도 높아지면서 식량과 옷감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생산기술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이런 것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구하야만 했었다.

 

다만 이들은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면서 익힌 사냥솜씨 만은 대단히 뛰어났다. 이런 짐승 잡는 사냥기술을 전투에 응용하면 날새고 사나워서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천명의 중국병사가 여진기병(騎兵) 하나를 당할 수 없다"고 할정도로 이들을 몹시 두렵게 생각했다. 

 

이들에게 밑천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었으나, 이 하나의 밑천으로 결국 중국을 지배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이들이 명나라와 싸우면서 놀라울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던 군사력은 그들이 만들어 낸 8기(八旗)제도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냥 기술을 전투에 응용한 것이다.

 

이런 여진족이 우리나라(韓族)와 연결되면 명으로서는 더 무서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우리나라와 여진족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있었다.

 

원·명의 교체기에 명나라에서는 그 길목인 요동(遼東)지방에 진출하여 정료위를 설치하고, 1387년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로부터 항복을 받아 고려와 북원과의 연결을 끊은 후, 다시 철령위를 설치하여 여진과 고려와의 연결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1388년 명은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당시 최영의 고려조정에서는 이를 받아 들일 수 없다 하여 명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요동정벌 군을 보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고, 이로 인해서 1392년 드디어 고려가 망했다. 그 뒤를 이은 조선은 사대(事大) 친명(親明)를 표방하고 명에 대한 반항의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의심 많은 주원장은 이런 조선에 대해서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받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로 보낸 사신을 몽둥이로 내리치기도 했고, 하정사(賀正使)가 가지고 간 표(表)·전문(箋文)에 이상한 글귀와 글자가 있다 하여 그 작성자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는 등 조선에 대해서도 경계의 태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 후 성조 영락제(1402 ~ 24)는 이곳 만주지방에 많은 위(衛)·소(所)를 설치하고 여진족의 추장(酋長)에게 도독(都督)이나 지휘사(指揮使)라는 명예직을 주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여(賞與)와 무역의 특전도 주어 일면 이들을 회유하고 일면 이들간에 분열을 획책하였다.

 

1403년 영락제는 남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길림(吉林/지린) 부근 휘발천(揮發川) 상류에 건주위를 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유역 회령(會寧)에 건주좌위를 이어서 그 동쪽에 모련위(毛憐衛) 건주우위를 세웠는데 이것을 건주 3위라 한다.

 

그 후 건주 3위는 만주의 혼하(渾河) 유역으로 이전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전통적으로 써 오던 이간(離間)과 회유(懷柔)를 병행한 이른바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게 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교모한 술책(術策)으로 이들 여진족이 뭉치고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위(衛)·소(所)란 명대의 군사제도로서 최소 단위인 백호소(百戶所)에는 소대장 급인 총기(總旗) 2명과 분대장 격인 소기(小旗) 10명을 두고 그 아래 병졸100 명을 배치했다. 다시 백호소 10개를 합하여 천호소(千戶所)라 했고, 천호소 5개가 모인 것을 위(衛)라 하고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두어 이를 관장하게 했다. 따라서 1위의 병력은 5천 6백명이 되고 이런 군대의 주둔지 이름을 붙어 건주좌위니 우위니 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 명칭이 되었다.

 

이런 위·소가 영락연간에 180 여 개나 되었고, 다시 정통연간(1435 ~ 67)에는 300 여 개로 불어났다. 그러나 만주의 모든 지역을 이런 제도로 묶을 수는 없었고, 위·소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상여(賞與)나 마시(馬市)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자주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늘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건주여진도 야인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에서도 이들에 대한 강(强)·온(溫)정책을 병행하여 때로는 정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래야만 했다. 세종 때 최윤덕(崔閏德)·김종서(金宗瑞)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각각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다. 그런 한편 야인들을 토관(土官/현지인으로 채용한 관리)으로 임명하였다.

 

세조 때 이곳의 토관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보내어 토벌한 후, 건주여진의 세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살길이 막막한 이들은 그 후에도 툭하면 무리를 지어 자주 변경을 침범하자, 별 수 없이 각 가지 회유책(懷柔策)으로 다시 이들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이 가난하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은 그 시절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태종 때부터 국경지대에 무역소를 열어 필요한 물자를 교역해 가도록 하기도 했고, 상경야인(上京野人)이라 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는추장(酋長)에게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호군(護軍), 사직(司直), 도만호(都萬戶),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명예관직과 함께 얼마간의 녹봉(祿奉)도 주었다.

 

결국 명과 조선의 대 여진정책을 같다고 볼 수 있는데, 명으로서는 조선과 여진이 가깝게 되는 것을 몹시 불안스럽게 생각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자기들이 이미 준 벼슬을 조선이 다시 준다는 것은 명에 대한 도전이라고 엄포를놓고, 각가지 방법으로 압박을 가하게 되자 조선으로서는 이 마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한편 회유든 이간이든 이런 제도를 통해서 중국인들과 중국문화가 만주에 이입(移入)되고, 질박 단순한 사냥꾼에 불과했던 여진사회에서도 정착 농경이 이루어지고, 흥정하는 수법과 음흉한 상술(商術)도 배우게 되었으며, 민족이라는 개념도 나타나게 되었다.

 

가정연간(1521 ~ 66) 명나라가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시달리게 되자 동쪽의 방어선을 요하(遼河)까지 후퇴시키고 만주에서 거의 철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주지방에는 군웅할거(群雄割據)라는 만주 판 전국시대가 나타났고, 이런 토양은 누르하치가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2) 누르하치(奴兒哈赤/1559~1626)의 거성(居城) 혁도아납(赫圖阿拉/ 헤투알라)

 

누르하치는 애신각라(愛新覺羅/아이신줴뤄)의 성(姓)을 쓰는 건주좌위 여진의 추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583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나라 군사에게 잘못 피살되자 스스로 추장에 올랐다. 처음에는 명나라와 조선에 대해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다만 부족통합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1587년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남만주의 소자하(蘇子河/ 쑤즈허) 상류의 무순(撫順 / 푸순) 동쪽 1백㎞ 지점에 "평탄한 언덕"혹은 "가로의 뫼"라는 뜻이 담긴 혁도아납(赫圖阿拉 / 헤투알라) 성채(城砦)를 세웠다.

 

이곳을 근거지로 더욱 세력을 팽창시켰는데, 이것이 누르하치가 세운 최초의 거성(居城)으로서, 지금은 흥경노성(興京老城/싱징라오청)이라고 부르는 한미한 촌락에 불과한 곳이다.

 

1592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자 누르하치는 사람을 보내 원조해 줄 뜻이 있음을 알려 왔으나, 조선에서는그 참뜻을 알 수 없어서 완곡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누르하치는 1593년 해서여진과 몽고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만주의 서남부를 장악하고, 이른바 만주 5부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조선으로서는 위협적인 것이었고 이로 인한 북변이 위험하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조선에서는 임진란의 경황 중에서도 그 실상을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 누르하치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이래서 선조 28년(1595) 12월에 신충일(申忠一)과 하세국(河世國)이 누르하치의 거성(居城) 혁도아납(赫圖阿拉 / 헤투알라)에 들어갔다가 그 이듬해인 1596년 정월에 돌아왔다.

 

이들이 그곳에 머물렀던 약 1주일 동안 누르하치의 성곽과 생활 모습에서부터 서민들의 주거와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것을 신충일은 상세히 기록하여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이름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당시의 한(韓), 만(滿) 관계사는 물론이고 누르하치와 건주여진족과 그 주변종족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조 29년(1596) 1월 30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신충일이 혁도아납(赫圖阿拉 / 헤투알라)에서 돌아온 즉시 그간의 모든 사실을 문서(書契)로 보고 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노추(努酋/누르하치)는 비대하거나 수척한 편도 아닌데, 체구가 건장하고 코는 곧고 크며, 얼굴은 야무지면서 길었고, 머리에는 초피(貂皮/ 담비 가죽)를 얹고 그 위에 이엄(耳掩 / 귀 덮게)을 썼는데, 그 위에 꽂은 상모(象毛/ 모자 위에 단 수술)가 주먹만 하였다.

 

또 은(銀)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그 받침 위에 인형(人形)을 만들어서 상모 앞에 장식하였는데, 모든 장수들이 쓰고 있는 것도 역시 같았다. 몸에는 5색 용문(龍文)의 철릭(天益/무관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상의의 길이는 무릎까지 이르고 하의의 길이는 발등에 까지 이르렀으며, 초피(貂皮)를 재단하여 연식(緣飾/ 이어 붙임)을 하였다.

 

모든 장수 역시 용문(龍文)의 옷을 입었으나, 연식은 초피(貂皮)나 표피(豹皮), 혹은 수달피(水獺皮), 혹은 산서피(山鼠皮)로 하였다. 허리에는 은입사금대(銀入絲金帶)를 매고 여기에 세건(?巾/수건)·도자(刀子/작은칼)·여석(礪石/숫돌)·장각(獐角/ 노루 뿔) 등을 한 줄에 꿰어 찼다. 발에는 녹피올라화(鹿皮兀剌靴/ 무관 신발)를 신었는데, 혹은 황색, 혹은 흑색이었다.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뇌후(腦後 / 뒤통수)에만 조금남겨 두 가닥으로 땋아 드리웠으며, 윗 수염 역시 좌우로 10여 개만 남겨 두고 모두깎아 버렸다.

 

노추가 출입할 때 특별한 의장(儀仗)은 없고 군뢰(軍牢/헌병?)등이 길을 인도하는데, 2명 혹은 4명의 장수가 짝을 지어 노추가 타면 같이 타고노추가 걸으면 같이 걸으면서 앞을 인도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갔다.

 

양식은 각처의 부락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그 부락의추장으로 하여금 경작을 관장시켜 그곳에 그대로 쌓아 두었다가 사용할 임시에 가져다쓰며 성중에는 쌓아 두지 않는다. 전지(田地)가 비옥한 곳이면 1두의 조를 파종하여8∼9석은 수확할 수 있고 척박한 곳이면 1석도 겨우 수확한다.

 

호인들은 모두 물을 따라 살기 때문에 호인의 집은냇가에 많고 산골짜기에는 적었다. 집집마다 모두 닭·돼지·오리·염소 등의 짐승을길렀다.

 

노추는 형장(刑杖)을 쓰지 않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그 웃옷을 벗긴 다음 명적전(鳴鏑箭 / 요란한 소리만 내는 화살, 선전포고용으로사용)으로 등을 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쏘는 숫자가 다르며, 또 뺨을 때리는 체벌도있다.

 

위원에서 인삼을 채취하는 호인들을 노추가 각 부락으로하여금 색출하게 한 다음, 1인당 소 한 마리 혹은 은자 18냥을 징수하여 자의로 강을건넌 죄를 갚게 하였는데, 그 중 가난하여 은자와 소를 구해내지 못하는 자는 그가솔을 잡아다가 사환으로 부린다.

 

노추의 성에서 서북쪽으로 중국 무순(撫順/푸순)까지의거리는 이틀 길이며, 서쪽으로 청하(淸河/칭허)까지의 길이는 하루 길이며, ....남쪽으로압록강까지의 거리는 하루 길이다.......조선으로부터는 물자보다는 관작(官爵)을원하고, 상경(上京/서울에 오는 것) 여부를 물어 보았다......"

 

선조 29년(1596년) 1월30일 (정유) / 신충일의 서계를 보고 (임금 선조는)오랑캐의형세가 심상치 않으니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신충일(申忠一)의 서계를 보니 노을가적(老乙加赤/누르하치)의 형세가 매우 심상치 않아 끝내는 필시 큰 걱정이 있을 것 같다.....지금 남북에 이처럼 큰 적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천지간의 기화(氣化)가 일대 변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앞뒤로 적을 받게 되니, 이른바 옴[疥]에다가 치질[痔]까지 겸했다는 격이다.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모든 방비는 힘을 다해 조치해야 하겠다. 반드시 산성을 수축하여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켜야 한다....이것은 도체찰사의 소관 지방이니, 범연히 회의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것을 비변사에 말하라.”.....

 

중국에서 본 백두산(장백산)(3) 후금의 성립

 

만력(1573 ~ 1620) 초기 10년간, 내각 수보 장거정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면서 이 만주지방에는 조선출신의 군벌 이성량(李成梁)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그로 하여금 이 지방의 여진족도 다스리게 했다.

 

그러다가 장거정이 죽고 정치가 혼탁해 지면서 소설금병매에 묘사된 것과 같이 뇌물(賂物)이 판을 치고, 사회는 타락하고, 문화는 난숙하는 광기(狂氣)가 도처에 나타났다.

 

상류층에서는 정력강장제(精力强壯劑)로 인삼과 녹용을 찾게 되고, 모피(毛皮) 역시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사치품이 였다. 물건은 동이나고 값은 뛰기 시작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장백산 인삼은 은(銀)과 같은 무게단위로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장백산 인삼과 모피는 건주위 여진의 특산품이 였고, 따라서 중국 상인들이 이곳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위소의 장졸들과 현지 거주 중국인들 간에는 흥정으로 다투고, 사기(詐欺)와 고함과 주먹과 뇌물이 오가고는 등 온통 시골 장터처럼 북적대기 시작했다.

 

이곳의 인삼과 모피를 장악하고 있었던 추장 누르하치는 만주의 실권자 이성량에게 뇌물을 바치고 다시 그의 딸을 첩으로 보내서 세력을 굳건히 하고 큰 돈을 모으고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615년 명나라의 세력판도가 바뀌면서 이성량은 실각되고, 누르하치는 많은 돈을 관리들에게는 뜯기었고, 상인들에게는 떼었으며 여기에 심한 간섭까지 받게 되었다. 이성량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사라진 누르하치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만주의 절반을 그의 수중에 장악한 마당에서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이해타산이 밝은 중국 관료나 군인들에게 잘잘못은 제쳐두고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도 체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1616년 정월, 누르하치는 스스로 칸(Khan)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금(金 / 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건원하고 명나라와 결별을 선언했다.1618년에는 선수를 쳐 앞 글에서 이야기 한 대로 명에 대한 부조(父祖)의 원수를 포함한 7대한(七大恨)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만주의 관문인 무순(撫順/푸순)과 청하(淸河/칭허)를 삽시간에 빼앗았다.

 

누르하치로서도 생각보다는 명나라 군대는 너무 힘없이 무너졌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남만주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 기간 8기제도가 완성되었으며, 여진문자도 다시 손질하였다.

 

만주에 독립정권이 수립되자 이곳에 머물고 있던 관리나 군인을 포함해서 중국인들이 줄줄이 그의 군문에 항복하고 본토 침략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주인들은 한 손에는 칼을 잡고, 다른 손에는 돈을 가지고 이들을 앞세우면 쉽게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점령된 성안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관리들의 고급주택을접수하고 정착민의 호사를 맛보면서 정복자로서의 쾌감을 더욱 실감하였다. 식민지나다름 없는 만주인들로서는 이런 호강이 싫을 리가 없다. 중국인을 앞세워서 중국을정복하겠다는 계획과 야심을 점점 굳혀갔다.

 

만주에서의 급보를 접한 자금성에서는 군비로 3백만냥을 황제에게 요구했으나 구두쇠로 이름 난 신종 만력제는 동전 한 닢도 내 놓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임진난의 책임을 물어 파면시켰던 양호를 다시 기용하여 총대장으로 삼고, 급한대로 병력을 모아 누르하치의 거성 헤투알라로 향했다.

 

1619년 3월, 헤투알라 서방 50㎞ 지점 살이호(薩爾滸/사르후,사르푸)에서 후금의 정예 3만과 명나라 군사 10만, 그리고 조선군 1만 3천이 대회전(大會戰), 결과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금의 각개 격파 작전의 성공으로 끝났고, 명나라는 4만 6천의 병력을 잃고 크게 참패하였다.

 

이 사르후 전투가 명·청을 교체시키는 분수령이었다.(앞 글에서 이야기한대로 이때 강홍립이 이끌었던 조선 군은 전투 시작 전에 전원 항복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했다)

 

계속해서 누르하치는 개원(開原/카이위안)을 뺏고, 1621년 요양(遼陽/랴오양)을 점령하여 요하 이동의 전만주 지역을 석권하고 그의 거성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1625년에는 심양성(瀋陽城/선양)을 공략하여 궁성을 세우고 다시 이곳으로 천도했다.

 

1626년 다시 요하(遼河)를 건너 산해관 돌파를 시도했으나,도중에 영원성(寧遠城 / 興城)을 지키던 맹장 원숭환(袁崇煥)의 대포(大砲) 세례 앞에서는 그의 기병도 맥을 못추고 주저 앉고 말았다.

 

포르투갈의 대포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그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다시 4월에는 몽골을 원정했으나, 상처가 악화되어 그 해 9월, 대청제국의 기반을 다음 대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의 후유증으로 1624년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난은 평정되었으나 여기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후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皇太極/홍타이지)이그 뒤를 이어 칸이 되었고, 그 이듬해인 1627년에는 조선을 침공했다. 이를 국사에서는 정묘호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