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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 1368 ~ 1644)의 쇠망(2) -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구름위 2013. 3. 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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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 1368 ~ 1644)의 쇠망(2) -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1) 소설 금병매(金甁梅)

 

명대의 회화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명나라 가정(1521 ~ 66) 만력(1673 ~ 1620) 연간은 사람들이 힘들 정도로 정치는 부패했고 민심은 사나웠다.

 

가정제가 도교에 심취되어 정사를 뒷전으로 미룬 사이 엄숭(嚴嵩)이란 선비는 사대부들이 기피하는 푸른 종이에 붉은 글씨로 쓴 도교의 제문(祭文)인 청사(靑詞)를 잘 지어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고 20 여 년 간 내각의 수보(首補)로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였다.

 

1565년, 결국 그 아들은 처형되고 엄숭은 가산을 몰수당하여 남의 집에 얹혀 살다가 86세의 고령으로 죽었지만, 소위 탁류가 아닌 청류의 내각 수보가 자신이든 아들이든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 선례를 남겼다.

 

위로는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바라는 것은 복록(福錄)과 장수(長壽)였고, 원하는 것은 황금이었다. (명대의 내각이란 문장력이 뛰어난 태학사 출신 3명정도가 모여 條旨, 표의, 유조 등을 작성하는 황제의 자문기관에 불과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서열에 따라 수보, 차보 등으로 불렀고, 遺詔와 標擬의 작성권은 수보에게 있었으므로 명대 내각의 수보는 사실상의 재상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됨)

 

그런데도 도시는 번성하고 상업자본이 형성되었으며, 서민들도 밥술이나 챙기고 글도 배워 조금이 남아 여유와 멋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명 나라 사회가 이런 변화의 조류를 타게 되자, 선비들 중에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도덕군자가 나타나는가 하면, 이런 도덕군자들의 따분하고 고루한 태도를 비웃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무슨 산인(山人)이니 거사(居士)니 하는 아호(雅號)를 짓고 제멋에 도취된 부류도 있고, 아예 혼탁한 세상에 어울려 주색잡기(酒色雜技)를 본업으로 삼는 광기(狂氣) 어린 부류도 등장하게 되었다.

 

사회풍조가 이렇게 되면 정직은 위선이고 반항이 정의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런 가치전도의 세상에서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인간성은 해방되고 개성있는 예술은 등장한다. 명대 문화가 이 시기에 이르러 난숙기에 접어든 것도 흥미 있는 사실이다. 자금성의 황제가 어떻든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융경 원년 1567년에는 타타르 부족과의 마시(馬市)무역을 재개하면서 2백년간 고수했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사실상 포기했다. 무역이 정치적인 목적 외에 경제적인 이익이 크다는 것을 명분으로 세웠으나, 퇴직관료(鄕紳)들까지 가세하고, 심하면 해적으로까지 둔갑하는 밀무역을 넓은 국경선을 두고 있는 명나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 현실적인 이유였다.

 

요지(要地)에는 동향(同鄕)출신의 동업상인(同業商人)들이 회관(會館)과 공소(公所)를 세우고 상업활동에 열중했으며, 교초라는 불환지폐 대신에 은화(銀貨)의 유통이 일반화 되자, 만력제 때 내각 수보 장거정은 지세(地稅)와 정세(丁稅)를 은으로 받아들이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새로운 조세제도(租稅制度)를 마련하였다.

 

혼미한 세상일수록 문화와 예술은 한 단계씩 도약하는 이상한 징조를 보인다. 명대의 문화도 이런 기류를 타고 한 단계 도약을 하게 되었다. 도예(陶藝)는 청자와 청화백자에 이어 수려한 색채가 가미된 명삼채(明三彩)가 등장하여 가정년간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만력년간에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림은 환관이 우두머리로 있는 어용감(御用監) 아래 화원(畵院)이 있어서 관료화된 직업화가들이 기교본위의 복고주의 화풍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런 형식적인 화풍(北宗畵 혹은 北畵 또는 彩色畵)에 반발해서 심주(沈周/1427 ~ 1509), 문징명(文徵明 / 1470 ~ 1559), 당인(唐寅 1470 / 1523), 구영(仇英/ ?) 등 소위 오파(吳派)라고 불리는 문인화(文人畵 ' 南宗畵, 南畵, 水墨畵)의 4대가가 등장하였다.

 

이들을 오파라고 부른 것은 강소성(江蘇省/쨩쑤성)의 남쪽도시 오현(吳縣/蘇州)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오현 이웃 송강(松江/쑹쟝)에서 태어난 동기창(董其昌/ 1555 ~ 1636)은 남화(南畵/文人畵)를 이론적으로 완성시켰고, 측윤명(祝允明 /1460 ~ 1526)과 더불어 명대 제일의 서예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들어온 것이 1562년이고, 만력제에게 자명종(自鳴種)과 양금(洋琴) 등을 선물하고 베이징 정주를 허락 받고 정식으로 포교활동에 들어간 것이 1601년의 일이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구세계가 알려지고 새로운 문물의 도입은 중국인들의 우주관에도 많은 영향을 입혔다. 또 하나 이때를 즈음하여 아편(阿片) 이라는 좋지 못한 마약흡연(魔藥吸煙)이 궁정과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편문제는 훗날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광기(狂氣)어린 세태 및 예술세계의 변화는 문학에서도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원곡(元曲)에 허구가 가미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된 장편소설이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관중이 썼다는 이야기 삼국지와 시내암의 작품이라는 수호지, 그리고 오승은의 작이라고 하는 서유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창작이라기 보다는 전해오던 여러 장면들의 잡극(雜劇)을 한데 모은 것으로,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남녀간의 정사(情事)장면이 거의 없는 반면, 중국 특유의 해학과 허풍과 기상천외의 도술까지 덧씌워서 한 번 책을 손에 잡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날 새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 진진한데 있다.

 

그런데 금병매(金甁梅)라는 소설은 이와는 딴판이다. 가정(嘉靖)말년으로부터 만력(萬曆) 중기의 창작으로 추정되는 이 소설은 수호지(水滸誌)에 잠깐 삽입된 무송(武松)의 형수 반금련(潘金蓮)과 약종상인으로서 거금을 모은 서문경(西門慶)과의 간통 사건 및 이와 관련된 몇 구절의 내용을 부풀리고 늘려서 명대 후기 사회의 어둡고 추악한 작태를 폭로한 고발성 소설이다.

 

주인공 서문경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고, 많은 처첩을 두고도 간통을 밥 먹 듯 하다가 방탕 생활 끝에 죽는다는 한 탕아(宕兒)의 회화적인 인생역정을 묘사한 이런 통속소설이 일세를 풍미(風謎)할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갈채와 핀잔을 동시에 받게 된 것은, 신흥상인의 파렴치한 부정축재, 남녀 성행위의 노골적인 묘사, 어린 여자아이를 매매하는 밑바닥 서민생활의 애환 등을 여과없이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성격을 명확하게 나타냈고, 돈과 여자와 지위를 싸고 불쌍할 정도로 타락한 본능적인 추악한 몰골의 군상들을 냉혹하고 대담하게 그렸으며, 흔히들 있기 마련인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같은 교훈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풍기문란하고 방자치졸한통속소설이 어느 시대건 환영 받을 수는 없다.

 

금병매를 비롯한 이런 구어체(口語體) 문학작품이 한(漢),당(唐)으로부터 전래된 시(詩), 부(賦)를 짓고 사서삼경을 익히는 것이 학문의 출발이자 끝이라고 본 전통적인 사대부들에게는, 음란(淫亂)이나 도둑질, 만용이나 요행을 가르치는 쌍스럽고 천한 것으로서,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시정잡배들의 글장난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였고, 아무리 너그럽게 봐 준다고 해도 무지한 서민들의 심심풀이 정도밖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양학좌파로서 기존의 제도문물을 깡그리 비판했다가 감옥에서 자결한 이탁오(李卓吾 / 1527 ~ 1602)는 이런 구어체 소설이야말로 위선이 없는 최고선(最高善)인 순수한 동심(童心)의 발로이며, 오히려 사대부들이 옛 것이나 찾으면서 즐기는 문학은 모방이고, 가짜며, 죽은 송장과 같다고 비판하고, 손수 삼국지연의(이야기 삼국지)와 수호지의 감상문을 써 크게 환영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4대 기서라로 부르는 이 구어체 소설가운데 유일하게 금병매는 작자의 본명이 없고, 흔흔자(欣欣子)가 썼다는 그 서문(序文)에 소소생(笑笑生)의 작이라고만 되어있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이라면 당대 제일의 학식을 갖춘 문장가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그도 끝내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소소생이라는 해학적인 필명만 남겼다.

 

이런 외설적인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명대사회가 개방되어 있지는 않았고, 청대에 와서는 금병매를 천하제일의 음란서라 하여 금서가 되었다.

 

한국문학사에서는 한글로 된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을 고대소설이라 한다. 여기에서 고대라는 시대적 개념은 역사에서 말하는 중세이전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16세기 이후의 조선 후기를 말한다. 이 시대에 소설다운 소설이 등장하였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고, 따라서 소설이라는 한국문학의 장르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춘향전 등이 한글 소설에서는 조상할아버지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러다가 개화기에 잠깐 등장한 국한문 혼용체 소설인 귀위성, 혈의누, 자유종 등에는 신소설이란 이름을 붙여 고대소설과 구분했고, 1917년에 발표된 이광수의 무정을 시작으로 이후에 등장한 많은 소설을 현대소설이라고 하여 다시 신소설과 구분하였다.

 

이런 고대소설의 공통점은 유교적인 권선징악과 정절과 효도를 지나칠 정도로 과장하여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역시 작가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어서 언제 누구의 작품인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未詳).

 

글을 많이 배운 사람이 쓴 것은 틀림없겠으나,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서는 이런 한글소설도 진서(眞書/漢文)에 비교하면 잡문(雜文)에 불과했고, 이런 잡문을 쓴 사람은 잡인(雜人/잡놈)이라해서 멸시하는 풍조가 끝내 이름을 밝힐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2) 환관 위충현(魏忠賢)

 

명나라 황제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하루에세 번 씩 외정에서 신하들과 접견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명나라 창업의 백년을 고비로 바뀌기 시작하여 8대 헌종 성화제때는 하루에 한번으로 줄였다가 다시 3일에 한번씩으로 더 줄였다.

 

이런 원칙이남아 후대에 와서는 없어졌다. 따라서 대신들이 직접 황제를 뵙기란 참으로 어려웠고 상주할 일은 환관들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었기에 환관들의 농간이 개입할 소지가 그만큼 많아지고 그 폐단도 늘어났다.

 

명의 15대 황제 희종 천계제는 그가 즉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환관 왕안을 신임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왕안은 동림파를 기용하여 정치 개혁을 서둘렀고, 비동림파는 정계에서 쫓겨났다. 정계에서 쫓겨난 비동림파는 그들만이 다시 결속하여 보복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광종에게는 그를 키운 궁인 이선시외에 유모(乳母) 객씨(客氏)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 야심 만만한 객씨가 환관 위충현과 내통하여 그의 채호(菜戶 / 환관의 情婦)가 되고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충현은 하북성 숙녕(河北省 肅寧 / 후배이성, 쑤닝)출신으로 불학 무식한데다가 도박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자 이름은 이진충으로 바꾸고 빚쟁이를 피해 다니다가, 스스로 거세하고 궁중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왕안 밑에 있으면서 왕안이 병으로 자주자리를 비운 사이 어린 황자에게 놀이를 가르쳐 총애를 얻고, 광종 태창제가 어이없게도 제위 한 달여 만에 죽고 이 황자가 희종 천계제가 되면서 위(魏)씨 성을 다시 찾고 충현(忠賢)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간악무도(奸惡無道)한 그는 그의 정부(情婦)이자 희종의 유모(乳母)인 객씨(客氏)와 손을 잡고 명나라 역대 황제 중 가장 어둡고 어리석었다는 희종을 등에 업고 정권을 어지럽게 하여 명나라 멸망을 더욱 재촉하였다.

 

그는 비밀경찰이며 정보기관인 동창을 장악하여 그를 길러준 왕안을 추방한 후 죽이고, 비동림파와 손을 잡고 말썽 많은 동림당을 탄압하기시작했다. 동림당은 투옥· 학살· 추방되고 각지의 서원도 문을 닫았다.

 

밀정(密偵)을 사방에 풀어놓고 그를 욕하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그 혀를 뽑고 산채로 껍질을 벗겼다. 이런 난세에 한 몫 챙기려는 아첨 배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고, 이들은 위충현을 공자(孔子)같은 성인이라고 추켜 세우고,사당(祠堂)을 세워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고 예배를 보게 했다. 이에 반항하거나예배의 태도가 불손하면 가차없이 목을 베었다.

 

위충현이 거리를 지나면 길가에 엎드린 관민(官民)이"9 천세"(九千歲)를 외쳤다. 황제에게 바치는 만세(萬歲)에서 천세가 모자라는 9천세를 외치게 함으로써, 그래도 황제보다는 못하다고 스스로 깨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영종 정통 연간의 왕진, 무종 정덕 연간의 유근에 이어 희종 천계 연간에 활약한 이 위충현 이야 말로 명나라의 말기적 병리(病理)를 한꺼번에 들어낸 환관 횡포의 대표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만주에서는 풍운이 급하고 국내에서는 이렇게 엉망인데도 황제인 희종 천계제는 구중궁궐 깊숙이 묻혀 그의 취미인 목수(木手)일에만 열중하고있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가 목수 일을 몹시 즐겨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목수천자(木手天子)라고도 빗대여 불렀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망국으로 치닫는 명나라 말기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 되고있었다.

 

그러다가 희종 천계제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위 7년만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고 당시 17세의 그의 동생 주유검(朱由檢)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명나라 16대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다. 위충현은 실각하여 귀양지로 가던 중 자결하고 객씨는 처형되었다.

 

(2) 유적(流賊)의 괴수(魁首) 이자성(李自成)

 

자금성 신무문에서 바라 본 경산의종 숭정제(毅宗崇禎帝 / 1627 ~ 44)는 비록 나이 어린 황제였으나 성격이 근엄하고 강직해서 환관 위충현을 제거하고 만력 이후 어지럽게 된 정국을 바로 세우고자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제 갈 길을 각각 걷고 있었다.

 

그의 치세 17년간 내각의 인원은 50명이 교체되었고, 형부상서 17명이 파면 혹은 사형되었으며, 총독 7명과 순무 11명이 피살되었다.

 

황제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혼탁해 있었고, 이런 세상을 건질 만한 인재는 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가중되는 군사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고, 백성들은 더 이상의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없었으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자연의 재해까지 기승을 부렸다.

 

숭정 원년(1628) 섬서(陝西/싼시)에 대기근이 닥치자 연안(延安 / 옌안, 지금의 西安)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폭동은 삽시간에 하남· 하북· 산서 지방으로 요원을 불길처럼 번져갔다.

 

이렇게 된 이면에는 나라에서는 국고가 바닥 나자 역참제도를 폐지했고 많은 위(衛), 소(所)에 배치되어 있던 병졸들에게는 군량미를 지급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역졸(驛卒)들과 군량미를 받지 못한 병졸(兵卒)들이 폭동에 가담하여 그 규모가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숭정 4년(1631) 산서(山西/싼시)에서는 화북지역 유적대집회(流賊大集會)라고 하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도적무리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이 집회에는 36개의 도적집단과 각 집단에 속한 20 만 명의 무리가 모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 역졸출신의 이자성(1806~ 45)과 병졸출신의 장헌충(張獻忠 / 1606 ~ 46)이 이끄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처단하고 빼앗은 돈과 식량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고 선전하여 민심을 사로잡았다.

 

이자성의 유적집단에는 규모가 커지자 많은 사대부들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 사대부들의 건의로 이자성은 그의 부하 장졸들에게 살인을 삼가게 하고, 약탈한 물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균분하는 균전제를 실시하고, 조세를 대폭 탕감해 주었다.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인기정책을 썼던 것이다.

 

이런 이자성의 선심 어린 내용이 알려지자 그의 군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이자성과 그의 무리들은 포악한 유적(流賊)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당당한 혁명군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새 세상이 온다고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와 비례해서 이자성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숭정 17년(1644) 정월 초 하루, 이자성은 연안(延安)에서 국호를 대순(大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하여 왕을 자칭(自稱)하고 곧 이어 군사행동을 개시, 강을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어 질풍같이 동쪽 베이징으로 나아갔다.

 

베이징에는 이를 막을 군대가 없었다.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정예부대 전부가 산해관 쪽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3월 18일,이자성에게 매수된 환관들의 도움으로 그의 군대가 초저녁에 쉽게 외성을 함락하고, 밤중에는 내성으로 들어갔다.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황태자와황자를 외가(外家)로 보내고, 황후(皇后)는 자결케 했으며 두 딸은 손수 죽였다.

 

주변을 정리한 숭정제는 3월 19일 새벽, 자금성 뒤뜰 만세산(萬歲山 / 景山)의 수황궁(壽皇宮) 올라, 옷을 찢어 "짐(朕)의 유해가 도적의 손으로 갈갈이 찢겨도 상관 없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게 하지 말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황후와 두 딸에게는 이들이 적도(敵徒)에게 당할 치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는 하나 냉혹할 정도로 비정했지만, 백성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구함으로써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다하였다.

 

그 날 낮 숭정제와 황후의 시신은 고리 짝에 넣어 성 밖으로 내다 버리고, 이자성은 자금성의 옥좌에 앉았다. 이렇게 해서 1368년 태조홍무제가 창업한 명나라는 1644년 의종 숭정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도적의 괴수 주원장이 창업했던 명나라는 276년 후 또 다른 도적의 괴수 이자성에게 나라를 빼앗긴 셈이다.

 

자금성의 옥좌에 앉은 이자성은 명나라 관리들의 투항을 촉구해서 3일 후에는 문무 백관들이 이자성에게 조하(朝賀)를 올리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4품 이하의 관리는 그대로 채용했으나 고급관료 800 여명은 고문을 당하고 알 거지가 될 때까지 뇌물을 바쳤으나 차례대로 죽어갔다.

 

이자성의 대순제국은 순조롭게 질서를 재편하고 베이징은 평온을 찾아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동쪽 장성 너머 요동벌판에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베이징을 향해서 풍운을 몰아 오고 있었고 자금성의 옥좌는 42일만에 다시 새로운 주인을 마지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양자 상속제도가 발달하지 못했던 동아시아에서는 이에 대신해서 반가(班家)라 할지라도 그 자식이 불충하면 영명(英明)한 데릴사위를 들여서 가계의 번영을 계속 유지코자 했던 유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중화라고 자칭하고 교만방자했던 명나라를 대신해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의 양자가 아니라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자금성의 옥좌를 차지하고 사상 유례없는 세력판도를 만들어 세계 중심에 중국을 다시 우뚝 세웠다. 그렇다면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그 여진족이 어떻게 중국을 차지하고 다스릴 수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