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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성립과 발전(5)-성조 강희제

구름위 2013. 3. 2.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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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발전(發展)(1) -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

 

가. 삼번(三藩) 의 난(亂)                                이길상

 

(1) 이한제한과 3번의 설치

 

삼번의 난으로 길게 이어진 전선 1661년 정월,젊은 순치제가 죽고(崩御), 그의 둘째 아들 현엽(玄燁/玄曄 / 1654. 5 .4 ~ 1722.12. 20))이 즉위하여 연호를 강희(康熙)로 개원하였다.

 

여덟 살에 청나라 제 4대 황제가 된 강희제(康熙帝/ 廟號. 聖祖 / 1661 ~ 1722)는, 아버지의 유조(遺詔)에 따라 섭정(攝政)을 두지 않고 만주시절부터 중신자리를 지켜온 4명의 기인(旗人)들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러다가 강희 8년(1669) 5월, 그의 나이 열 여섯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친정을 선언하고 과감하게 보좌정치를 폐지하여, 젊은 황제가 모든 정사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자신 만만한 이런 젊은 황제에게 어쩌면 만주족전체의 운명까지 가늠할 중대한 시련이 찾아 들게 되었다. 이것을 3번(藩)의 난(亂)이라고 한다.

 

거의 공짜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 와 자금성의 인이 될 수 있었던 만주족들에게 어김없이 역사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30 여 년 세월을 보낸 후 그 대가를 엄청나게 요구한 셈이다.

 

번(藩/fun)이란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청나라의 특이한 행정구역으로, 정복왕조로 들어온 청나라가 처음에는 중국의 남쪽, 즉 화남지방을 다스리기 위해서 설치했고, 이후 북서쪽의 신강(新疆/신쟝), 청해(靑海/칭하이), 서장(西臟/티베트)을 정복한 후 이곳에도 번을 설치하여 직할령과 구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청나라는 중국과 만주, 그리고 몽골은 직할령으로 하여 직접통치하고, 멀리 떨어진 변경에는 그 지역에 밝은 유력한 인사나 현지인에게 어느 정도 실권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를 번(藩)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번을 관장하기 위해서 통상적인 통치기구와는 별도로 이번원을 설치하여 번(藩)에 관한 일을 맡도록 하는 2원적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남지방에 3번을 설치하게 된 것은 청으로서는 이한제한(以漢制漢)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명나라 때부터 이곳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우글거리고 육지로 올라서면 정부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 운남(雲南/윈난)에는 사나운 묘족(苗族/마오족)들이 빈틈을 노리고 한 몫 챙길 기회 포착에 언제나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을 때, 명의 부흥을 빌미로 곳곳에 정권을 세우고 공공연히 청조에 반기를 든 곳도 이 지방이었다.

 

그러나 한줌밖에 안 되는 만주 8기만으로는 북변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웠고, 그 넓은 남쪽에 까지 주둔시킬 군대도 없었으며, 남쪽의 더위와 풍토에 만주 인들이 적응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이곳에 번을 세워 한인(漢人)들로 하여금 한인(漢人)들을 다스리게 하는 이른바 이한제한(以漢制漢)의 묘책을 강구한 것이다.

 

그래서 명의 부흥 세력들인 남명(南明)이 어느 정도 평정된 순치 16년(1659), 이 화남지방을 크게 세 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번을 설치하여 한인(漢人)으로서 청에 귀부(歸附)하여 공을 세운 유력한 군벌들에게 왕의 봉작(封爵)을 주어 각각 다스리게 했다.

 

(2) 삼번(三藩)의 난(1673 ~ 81)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으로 들어서는 귀주의 소수민족 대표들광동(廣東/광둥)에는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가, 복건(福建/푸젠)에는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1649)의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운남(雲南/윈난)에는 평서왕(平西王) 오삼계가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를 3번이라 하며, 이 가운데 오삼계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상가희와 경중명은 요양(遼陽/랴오양) 출신의 한인(漢人)들로서 명에 입사(入仕)하여 요동지방을 지키다가 1633년 태종 홍타이지에게 패하고, 그 휘하에 들어갔던 사람들로서 병자호란 때는 조선에도 들어 왔었고, 명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워 한인(漢人) 8기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들이다. 명나라에서 보면 매국노(한간)다. 하지만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어느 누구 보다도 강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는 화남지방을 정복한 공으로 순치 6년(1649) 각각 평남왕과 정남왕으로 봉해 졌고, 정남왕 경중명은 부하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자 왕작(王爵)을 그 아들 계무가 잇게 되었다.

 

오삼계 역시 요동출신의 한인으로서 산해관을 수비하다가 청으로 돌아서서 이자성과 장헌충의 잔적(殘賊) 소탕에 앞장섰고, 1662년 지금의 미얀마까지 피해간 명의 마지막 세력인 계왕(桂王)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미얀마에서 계왕을 잡아 보내자 이를 살해하여 명나라 최후의 숨통을 끊어 버리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아부 하듯 그 해 청 태종의 딸을 며느리로 보내고 평서친왕(平西親王)의 봉작을 내렸다.

 

원래 명나라 최강의 정예를 이끌고 있었던 그에게 청나라 조정에서는 운남(雲南/윈난)과 귀주(貴州/구이저우)의 병권과 문무관료의 임명권 등 방대한 권한을 주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장헌충의 유적 및 이곳 묘족(苗族/마오족)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그 무리들까지 합세하여 속칭 10만의 군대를 거느리는 최대의 군벌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군벌로 성장한 오삼계가 조정으로부터는 거액의 군사비를 받고, 티베트와 무역을 하고, 토착민에게는 세금을 걷고, 남해 무역까지 관장하여 큰 돈을 모았다.

 

막대한 부(富)까지 축적하자, 계왕이 있었던 오화산궁전을 개축하여 자금성을 흉내 내고, 경국의 미색 진원원(陳圓圓)을 위시하여 4면관음, 8면 관음 등 야릇한 이름을 붙인 천 여명의 처첩을 거느리면서 호강에 받혀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반청적(反淸的)인 중국의 인사들이 공공연히 모여 들였다. 청나라 조정에서 그를 당할 실력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오삼계는 엉뚱한 꿈까지 키워가고 있었다. 이런 오삼계에 대해서 멀리 떨어져 있던 베이징의 조정으로서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강희 12년(1873) 3월, 광동(廣東/광둥)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1604 ~ 76)가 70 고령에 접어들자 그 자리를 맏아들 지신(之信)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요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청원을 올리자 이 기회에 3번 자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조심스럽게 대두되었다.

 

이미 명의 부흥세력과 잔적들이 사라진 마당에 구태여 조정 예산에 절반이나 되는 매년 3천만 냥의 거금을 들이면서까지 이를 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폐지론 자들의 주장이고, 섣불리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아직도 불순세력이 남아 있고, 낮잠을 신나게 즐기는 맹수와 같은 번(藩)왕들에게 콧 침을 잘못 주는 결과를 만들어 더 큰 환란(患亂)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신중론 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조정의 양론에 대해서 젊은 강희제는 자신의 용단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급보가 오삼계의 귀에 들어가자 청나라 조정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그로서도 미쳐 몰랐고, 설마 하다가 이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곧 반란을 결심했다.

 

그러나 반란이 성공을 거두려면 각처에 산재해 있는군벌들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합세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계왕을 자신이 살해한 뒤라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었던 그는 결국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배만복명(排滿復明)"이라는 격문을 각처에 띄우고 행동을 개시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물리치고 그가 망치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던 명나라는 되찾자는 것이다.

 

비록 합당한 명분은 얻지 못했지만, 그는 노련한 장군답게 우선 운남과 귀주를 장악하고 군세를 곧 바로 호남(湖南/후난)으로 향했다.

 

이에 호응해서 사천(四川/쓰촨)과 광서(廣西/꽝시)에 있던 녹영(綠營)의 장군들이 가세하고, 이듬해 3월에는 복건(福建/푸젠)의 경정충의 군사들이, 12월에는 광동(廣東/광둥)의 상지신의 군사들까지 가담해 마침내 3번의 군사를 합한 오삼계는 크게 위력을 떨쳤다.

 

이에 맞서 자금성의 강희제는 티베트의 중재 요청과 몽골의 지원을 정중히 거절한 후, 8기군과 그 지배하에 있었던 녹영의 군사들을 동원하고, 예수회 선교사로서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베르비스트(Ferdinand Veriest / 南懷仁/ 1623 ~ 1688)에게 명령하여 경량(輕量)의 대포를 만들어 각 전선에 보내고, 특별통신망을 조직하여 친히 작전을 지휘했다.

 

이렇게 해서 동쪽으로는 복건(福建/푸젠)의 해안으로부터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의 감숙(甘肅/간슈)에 이르기까지 장장 수천 킬로미터의 전선이 형성되고,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긴박한 정황으로 중국대륙이 다시 술렁이게 되었다.

 

청나라로서는 최대의 위기였다. 녹영의 군사들이란 그 뿌리가 명나라다. 따라서 이들이 언제 돌아설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이미 귀족 화한 만주 2세들로 구성된 8기군은 더위와 낯선 풍토에 지레 겁을먹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 했다.

 

이에 젊은 황제는 하루에도 3, 4백 통씩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전황을 일일이 분석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잘못이 있으면 만주의 왕족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어 벌을 주고, 녹영의 장군들을 교묘히 추켜 세우거나 경쟁심을 유발하여 반란군의 돌파구를 막는데 일단 성공하고 버티기 작전인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오삼계(1612 ~ 78)는 이미 70 고령을 바라보는 나이가 약점이었다. 수하 장졸들이 베이징으로의 진격이나 강남 점령을 권해도 양쯔강 이남의 확보에만 급급할 뿐 한 발도 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분이 약한 반군 연합세력으로서는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76년 광동에서는 상가희가 그 아들 상지신이 반란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하자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복건에서는 1671년 경계무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정충(耿精忠 / ? ~ 1682)이 뒤를 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청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한 후, 이번에는 청군에 가세하여 반군 토벌에 앞장을 서 버렸다.

 

고립된 오삼계(吳三桂)는 1678년 5월 호남(湖南/후난)의 헝양(衡陽)에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고, 소무(昭武)라 건원(建元) 했으나 그 해 8월 병이 들어 황망(慌忙)히 저승 길로 들어갔다.

 

그의 손자 세번(世?)이 홍화(洪化)라 개원하고 뒤를 이었으나, 1681년 10월 곤명(昆明/쿤밍)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자살함으로써 8년간에 걸친 3번의 난은 막을 내렸는데, 강희제가 성급한 기마 민족답지 않게 지구전을 펼친것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한다.

 

나. 청의 대만(臺灣 / 타이완) 정복

 

(1) 열강의 대만 진출

 

타이완 전경도중국 복건성(福建/푸젠)에서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약 150 km 해상에 큰 고구마 모양을 하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 섬 대만(臺灣)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등장한 것은 기원 전 후 동한(후한)시대부터시작 된다.

 

한서(漢書)에 동곤(東鯤/둥쿤)으로 삼국지에 이주(夷州/이저우)라고 한 것이 지금의 타이완이라고 하는데, 명 대까지만 해도 말레이 - 폴리네시아 계 원주민들이 산간에 거주하였을 뿐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16세기 이래 동지나 해상에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무역선들이 무수히 내왕하였고, 여기에 곁들여 중국의 밀수업자나 해적들이 바다를 누비면서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나들게 되었다.

 

1590년 일찍 이곳을 찾은 포르투갈인 들은 이 섬을 일라 포모사(Ilha Formos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 뜻으로는 "아름다운 섬"이라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가 1622년 자바로부터 북상하여 펑후제도(澎湖諸島)를 점령했다가 푸젠군(福建軍)에게 쫓기자 1624년 타이난(臺南)의 안핑(安平)에 들어와 이곳을 타이오완(Tayouan)이라 부른 것이 청대 이후 섬 전체를 타이완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타이난의 서쪽 약 4㎞ 지점의 외항 안핑을 점령하고 이곳에 유럽풍의 성채(城砦)를 쌓고, 그들의 본국 북부지방에 있는 주의 이름을 따서 제란디아 성(城)이라 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 성을 각각 축조하고 그들의 지명을 차용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으나 1642년 네덜란드에게 쫓겨나고 네덜란드가 단독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2) 정성공(鄭成功)의 대만 진입과 청의 대만 정복

 

한편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는 푸젠(福建)을 중심으로 정성공(鄭成功 / 1624~1662)이란 자가 강대한 해상 세력을 이끌고 명나라의 부흥정권을 도우면서 청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은 푸젠(福建) 출신으로 서양사람들을 따라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해적 겸 해상밀무역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냈는데, 밀무역에 골치를 앓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달래고,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밀무역의 단속을 아예 그에게 맡겼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잡은 정지룡은 밀무역을 독점하고, 해상의 통행세도 징수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겨 재미를 톡톡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돈의 위력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푸젠(福建)에서는 주원장의 후손인 당왕(唐王 :隆武帝)을 옹립하여 부흥정권을 세웠는데, 정지룡은 그로부터 왕후의 첩지(牒紙)를 받았고 그의 아들 정성공은 당왕 곁에서 시중 들게 되었다.

 

정성공은 당왕의 부흥정권으로부터 충효백(忠孝伯)에 봉해지고, 어영중군도독(御營中軍都督)·초토대장군(招討大將軍)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직도 받았다. 또한 명의 국성(國姓)인 주씨 성을 하사 받고 이름을 정성공에서 주성공(朱成功)으로 고쳤다.

 

이렇게 되면 산전 수전 다 겪고, 노회(老獪)의 본보기나 다름없는 아버지와 그 그늘에서 고생 없이 자란 아들 간에는 현실과 명분이라는 두갈래 길에서 다투게 되고 다시 고뇌하자 않을 수 없기 마련이다.

 

아버지 정지룡이 당왕을 도운 것은 무슨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해상 독점 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방패였다. 새로운 정권에 빌 붙어서 최소한 본전이 남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푸젠(福建)에 홍승주가 들이 닥쳐 하나하나 토벌하자 이번에는 재빠르게 홍승주에게 붙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정성공은 일찍 난징의 태학에서 성리학을 배우면서 대의명분을 몸에 익혔고, 당왕으로부터 받은 분에 넘친 호의를 배반할 수가 없었다.

 

포모사(대만)의 징크선 그림자료그래서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청나라에 완강히 저항하고 공공연히 도전했기 때문에 아버지 정지룡은 1650년 청군에게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청(淸)나라는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 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아버지의 해상권을 이어 받아 진먼섬(金門島)과 샤먼(廈門:아모이)을 근거지로 무역을 하여 군비에 충당하는 한편, 자주 본토의 연안을 공략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당왕이 죽은 뒤에는 계왕(桂王 : 永明王 : 永曆帝)을 도와 명의 부흥운동을 계속하였으며 계왕으로부터 위원후(威遠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장국공(?國公)으로 오르고, 이어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이 되었다가 마침내 조왕(潮王)이라는 왕작(王爵)을 받았다.

 

1658 ∼ 59년 그가 벌였던 난징 공략은 기사회생의 일대 결전이었으나 패하여 아모이로 철수하였다.

 

순치 18년(1661년), 청나라가 연안 백성을 내지(內地)로 옮겨 그와의 관계를 두절시키는 이른바 천계령(遷界令)을 펼치자, 그는 타이완(臺灣)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이를 공략하여 새로운 기지를 확보하고 항청복명(抗淸復明)과 대륙 반격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해 4월, 2만 5천의 병력과 5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들어가 네덜란드인 들이 세운 프로빈시아 성을 우선 점령하고, 그 이듬해 제란디아성을 함락하여 네덜란드인 들을 섬에서 추방하고 타이완에 독자정권을 수립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한편 그의 아들 정경(鄭經)을 진먼섬(金門島)과 샤먼(廈門: 아모이)에 주재시켜 대륙진출의 시기를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9세에 요절했다.

 

일설에 그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히라도(平戶)출생으로서, 어머니는 일본 여자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남해안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중국 해적에 고용되어 수시로 양국 사이를 왕래하였고, 정지룡이라는 거물이 일본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현지처(?)를 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진위는 확실하지않다고 한다.

 

다만 그가 7세 때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부터 혼자 명나라에 건너가 난징의 태학에 들어갔고, 거기서 전겸익(錢謙益 / 1582 ~ 1664)이라는 당대의 대학자에게 사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후 정성공의 후계자들은 3번의 난 때, 일시 본토에 출격했으나, 난이 평정되자 타이완 섬에 들여 박혀 상속싸움이나 벌이고 있었다.

 

3번의 난이 평정된 후 청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타이완섬을 공격하자, 강희 22년(1683) 7월, 정성공의 손자는 호복 변발 차림으로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래서 타이완이 비로소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남쪽의 거센 바람을 잠재운 강희제가 이번에는 말머리를 서북쪽으로 돌리고, 남진해온 러시아를 막고, 텐산북로에 있었던 준가르부 정복에나섰다. 그리고 그가 추구한 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 聖王政治)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