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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발전(發展)(2) - 강희제와 성천자(聖天子)의 꿈

구름위 2013. 3. 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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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발전(發展)(2) - 강희제와 성천자(聖天子)의꿈

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이길상

라싸의 포탈라궁암석과 모래와 초원으로 형성된넓은 유라시아 북쪽 몽골 고원 일대는 고비사막을 경계로 내몽고와 외몽고로 나눈다.

유목(遊牧)과 기마(騎馬), 이동을 전제로 살아가는민족들에게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는 힘에 의한 약탈과 피가 피를 부르는무서운 보복과 살륙이 정당화되어 있어서 한 시도 편하게 살기가 힘들었다는 점도간과할 수 없다.

이런 관행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모두에게 손해라는알게 되었다. 따라서 풍토에 알 맞는 신을 모시고, 인간이면 누구도 고칠 수 없는신의 법을 마련하여 그 계율을 지킴으로서 서로간의 행복을 보장 받기를 원했다.

샤머니즘을 숭배하던 몽고족에게도 불교가 전래되고,윤회(輪廻)·전생(轉生)의 불교적 가치관 또한 큰 매력이었으나, 살생금지의 계율만은도저히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교묘히 변형 발전 시킨 것이 이른바 라마불교라는것이다.

물론 라마교의 본산은 티베트이고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에는 달라이라마가 정·교 양권을 쥐고 활불(活佛)로서 유목민들의 정신계에 군림하고있었다. 이들의 언어에서 라마란 스승 중의 스승, 즉 사장(師長)과 상인(上人)을의미하고 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라마교가 본격적으로 몽골 사회에 퍼지게 된 것은16세기 중반으로서, 저 유명한 알탄칸으로부터 왕공 귀족들은 모두 그 후원자가 되었고,넓은 초원 곳곳에는 흰색의 라마 사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라마교의 관한 보다상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많이 나올 것 같다.

17세기 청나라가 성립될 무렵, 내몽고 일대에는 차하르부족이, 외몽고 일대에는 할하 부족이 그 서쪽에는 중가르 부족이 비교적 큰 세력을펼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강희제가 3번의 난을 진압하고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을때, 중가르 부족에서는 갈단이란 자가 나타나 몽골과 티베트를 연결한 라마왕국의꿈을 키우고자 했다.

강희제가 이를 토벌함으로써 전 몽골이 청의 지배하에들어가게 되었는데, 몽골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이 우리들에게는 낯설고따라서 조금은 지루하고 골치도 아프지만 늑대보다 더 사납던 몽골족이 어떻게 청의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일부가 중국에 동화 잠식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잠시만따라 가 보기로 하자.

샤머니즘을 믿고 있던 만주족들은, 불교를 받아 들인후로는 그들의 칸을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하였고, 중국에 들어가서는 유교(유학)의가르침에 따랐다. 그러다가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는 라마교 역시아무 부담 없이 받아 들였다. 이런 것이 동이계 인종의 신앙상 특징이다.

농경정착 생활을 했던 중국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행복(福)과 재화(祿)와 장수(壽)를 바랄 뿐 윤회 전생의 과거와 미래는 속임 수에불과하다 하여 이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이런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전통이다. 따라서 만주족들이 아무 신앙이나 받아 들이는 것은 종교를 이용한 지배력을강화하려는 간계라고 비난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강희제의 북변 진출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붕괴된후, 황금씨족이라고 불렀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주로 내몽골에서,그 서북쪽 외몽골 일대에는 오이라트부족이 각각 유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15세기 이들 몽골족들은 명나라 영락제의 계속된 토벌로세력이 약해졌다가, 외몽골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오이라트부족에서 에센(Esen/也先/야선/? ~ 1454)이란 자가 나타나 전몽골 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힘으로 명나라의 국경을자주 침범하였다.

1449년 명의 정통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일으켰다가 자신이 포로로 잡힌 토목의변을 당한 후 다시 오로도스 안쪽의 장성을 겹으로 쌓아야 하는 부산을 떨었으나,1454년 에센이 피살된 후 이들 몽골 사회는 2 ~ 30 년간 다시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몽골의 타타르 부족에서 다얀칸(DayanKhan / 達延汗 / 1487 ~ 1524)이 등장하여 장자커우(張家口)와 귀화성(歸化城) 방면을중심으로 세력을 증대하고, 몽골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칭기즈칸계(系)가 권위를회복하였다.

그는 몽골족을 1만호 단위로 6개로 나누어 아들 손자들에게분봉 시키고 자신은 차하르(Chakhar / 察哈爾 / 찰합이)를 직할령으로 유목을 하는한편 명나라와의 마시(馬市)를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 양국관계는 평화를 유지하였지만,이를 계기로 몽골족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그가 죽은 후 이들 친족 간 다시 치열한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할하(Khalkha) 강 유역에는 다얀 칸의 여러아들 중 두 명에게 싱안링(興安嶺) 북부, 즉 할하강(江)의 동쪽과 서쪽의 목지(牧地)를주고, 공동으로 할하 만호(萬戶)를 삼았는데, 그 후 전자를 내(內)할하, 후자를 외(外)할하라고불렀다.

내할하는 15세기 전반 남하하여 명나라 동북변경을침범하였으나, 청 태종에게 정복되고 이후 청에 복속하였다

다얀칸으로부터 인산(陰山)산맥 부근을 영지로 받았던알탄은그의 조부 다얀칸이 죽은 후 자주 명나라를 약탈하는 이른바 북로(北虜)의 무리가되었고, 다시 외몽골을 원정할 때 외할하는 알탄을 수행하여 이후 서쪽으로 나아가이른바 할하 3부족을 형성하고 지금의 외몽골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 때 알탄은 오이라트부족을 더 서쪽으로 내몰고카라코럼과 청해를 차지하고 티베트까지 들어가 라마교를 받아 들였는데, 이때부터늑대보다 더 사납던 몽골족이 양처럼 순해진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아마도 윤회 전생에 겁을 먹고 후세에는 정말 늑대로 태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장자커우(張家口)의 북동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있던 다얀칸 직계의 차하르(Chakhar/察哈爾/찰합이) 부족은, 그 후 알탄으로부터압박을 받아 1547년 싱안링(興安嶺) 동쪽으로 이동한 후, 명나라의 랴오둥(遼東)을빈번하게 침범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북동에서 일어난 청(淸)나라에 눌려1627년경 다시 싱안링 서쪽으로 옮겨 하라친부(部) 등을 멸망시키고 다퉁(大同)·쉬안화(宣化)인근에 터를 잡았으나 1635년 청 태종(太宗)에게 멸망당하고 복속되었다.

청태종은 이들 부족을 해체하고 그들의 뛰어난 무력을살려서 몽고 8기를 편성하는 한편 그들을 한인과 분리시키고 만주족과의 통혼을 장려하였다.이후 내몽고는 자주성을 잃고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래서 내몽골은 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외몽골일대에는 다얀칸 계통의 할하 3부족이 독립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서쪽에는이들에게 밀려난 에센 계통의 여러 부족들이 흩어져 있다가, 초로스(綽羅斯) 부족의추장 카라쿠라란 자가 오이라트 전 부족을 통일해서 군주가 되었는데, 정복된 이들전 집단을 중가르부(Jungar)라 하였다.

초로스 왕가의 3대가 되는 갈단(Galdan / 1649 ~ 1697)이란자는 알타이산맥 서쪽에 근거로 다라이 라마의 지지를 얻어 라마교·중가르 세계국가의건설의 꿈을 안고, 1677년 오이라트 전체의 수장이었던 장인을 죽인 후 칸(汗)을자칭하고, 1682년에는 타림분지의 회부(回部)도 복속시켰다. 이어 1688년 알타이산맥을넘어 외몽골에 침입하여 할하부족과 정면 충돌했다.

힘에 밀린 할하 3부족은 청에 의지하고 전 부족이내몽고로 피난했다. 강희제는 만리장성 밖에서 친히 할하족의 왕공들을 인견하고,1690년 지펭(赤峰) 부근에서 갈단 군을 물리치고 외몽고를 청에 복속시켰다.

강희 35년(1696년), 갈단이 다시 침입하자 강희제는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차오모도(昭草多)에서 갈단을 격파하였는데, 황제가직접 고비사막을 넘은 것은 명의 영락제에 이어 강희제가 두 번째이다. 한편 라마왕국건설과 몽고통일에 꿈이 깨진 갈단은 이듬해 알타이 산중에서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그 후 갈단의 아들 손자 대에 다시 티베트를 침공하고 끈질기게 라마왕국을 실현코자하였으나 결국 청의 옹정, 건륭제에게 토벌되고 이후 중가르부와 티베트는 중국의영토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갈단이 패사(敗死)한 뒤 할하 부족은 다시 외몽고로돌아가, 이후 1부(部)가 증설되어 4부로 되었으며, 청나라는 이를 번부로 삼아 이번원(理藩院)에서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신해 혁명 후 청조가 무너지고. 1924년 소비에트의지원으로 독립하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국가가 되었다가 소련의해체 후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몽골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있다.

여기서 우리들이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만리장성이본래의 기능을 잃고 하나의 역사적인 유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의 세력 범위는만리장성을 훨씬 더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 尼布楚條約)

외몽골의 초원지대만주의 중·남부 지역은 청조의발상지인 동시에 8기의 영지(領地)라 하여 중국본토와 분리해서 특별한 군정구역으로두고 매우 신성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外) 싱안링(興安嶺) 산맥이 높낮이로 기복(起伏)을이루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도도히 흐르는 북만주 일대는 만(滿)·몽(蒙)계의 여러종족이 유목이나 수렵에 종사하는 원시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그들을 같은 종족이라 해서 수시로 징발하여전투시에 소모된 만주8기의 보충병으로 충당하였을 뿐 이곳은 그들의 자치에 맡기고있었다.

이런 신비에 가까운 태고 그대로의 땅에 금발(金髮)과벽안(碧眼)의 백인종들이 나타나 일확천금을 노리면서 소박한 원주민 사회를 무법천지로만들기 시작했다.

17세기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계속확장하다가, 1598년 류리크왕조가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갓 성립되었으나,내란으로 영일이 없었다.

모스크바 러시아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주변을 통합하자,이에 반발해서 변경지대에 모여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고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약탈과 용병으로 때로는 반란으로 위력을 발휘했던 기마전투에 능숙했던 무리들을카자크(코자크)라 부른다.

카자크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라진은 반란을 일으켰다가실패하고, 몸이 갈기갈기 찢겨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이보다 백년 앞서 예르마크(YermakTimofeyevich / ? ~ 1584)라는 카자크의 또 다른 수령은 처음에 볼가강·돈강 상류지역에서 약탈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가, 이반 4세의 토벌을 받고 카마강 상류로 도망가서페르미의 스트로가노프가(家)의 보호를 받았다.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스트로가노프가(Stroganov family)는시베리아 경영의 전진기지로서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 영지 내에 요새를 구축하고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 스트로가노프가에서 예리마크에게 시베리아정복을 맡겼다.

곰처럼 한겨울의 눈 속에서도 노숙을 할 수 있는 카자크기병대를 이끈 예리마크는 1581년 우랄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향하여 이르티시강유역의 시비르한국을 공략, 왕 쿠춤의 군대와 이르티슈 강변에서 싸워 크게 이겼고,이듬해 수도 시비르(이스케르)를 점령하여 정복지역을 이반 4세에 바치고 원조를구하였다. 시베리아라는 어원은 이 시비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584년 8월 갑자기 나타난 쿠춤군의 기습을받아 이르티슈강으로 쫓기다가 예르마크는 익사하여 스트로가노프가의 동진은 잠시주춤 했으나, 당시의 북만주에는 금과 은 그리고 모피가 무진장이라는 소문을 상업자본가로성장한 이 집안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중에 원주민들과 싸움을 계속하고 얼음과 추위와원시림으로 뒤덮인 시베리아 땅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1638년에는 오츠크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러시아의 군인들과 상인들은 방향을 남으로돌려 수렵족인 퉁구스 계의 원주민들을 압박하면서 흑룡강을 남하하여 네르친스크,아르바진에 전진기지를 구축했다. 러시아가 아류산 열도와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진출한 것은 이 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북만주에 진출한 러시아인 들은 질 나쁜 보드카(vodka)로원주민을 취하게 만들고 뺏고 빼앗기는 약탈이 공공연히 자행되자 이들 원주민들은반항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났다.

강희제는 정식으로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고 곧 철수할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는 사절을 베이징에 보내어 선물을 진상하고 통상이외에는딴 뜻이 없음을 천명하자, 서양식 외교를 몰랐던 강희제는 이를 조공으로 받아들이고신하의 예를 갖춘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 양해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계속 주둔하면서 침략의 손길을 송화강까지뻗치자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드는 러시아인들 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이렇게 러시아의 침략이 한창이던 약 30년간 조선에서도 청의 요청에 따라 두 차례이들의 토벌 길에 올랐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칼럼77호 17세기의 러시아 참조)

3번의 난과 대만 정복이 이미 끝났고, 갈단의 침략을저지한 청나라에서는 드디어 적극 책으로 돌아서 강희 28년(1689) 대군을 파견하여아르바진을 공격하는 한편 외교교섭도 병행하여 네르친스크에서 양측대표가 담판에들어갔다.

이래서 국경선이 외 싱안령 즉, 야블로노이와 스타노보이두 산맥과 아루군 강으로 확정되고, 러시아, 만주, 중국, 라틴 4개어로 조약문이작성되었다.

이것을 네르친스크 조약이라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의로마노프 왕조는 섭정 소피아가 정권을 잡고 있다가 총병대의 반란으로 실각하고표트르 1세가 제위에 복귀하였으나 그는 아직 17세의 나이로서 그 모후가 정치를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복잡한 국내 외 사정은 몹시 불안한상태였기 때문에 담판은 청나라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었고, 청나라로서도 중국역사상 유례없은 국경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던 벨기에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베르비스트 등은 강희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도러시아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다. 성천자(聖天子)의 꿈

40 대의 강희제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된 1689년은 강희제의 나이가설흔에 접어 들었을 때다. 같은 시기 앞서 이야기와 같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17세의 소년황제였고,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마흔 한 살의 장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동·서양이라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대왕 혹은 대제소리를 들었던 이들간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 열 살 이전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올랐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살림으로늘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루트였던 간 서로가 통하고 있었다.

다만 강희제는 중국인들이 혐오(嫌惡)하는 동이(東夷)계이적(夷狄) 출신의 오랑캐로 태어났다.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세운 창업의 군주도아니고 새로운 정치모델을 창안한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나 표트르 대제처럼어린 시절, 혹독한 시련이나 큰 고생을 당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랑캐 출신의 이 황제가 언감생심 공자의수제자가 되기 위해서 중국 역대 황제 중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힘들었던 철저한금욕생활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꿈을 키웠다는 것은 실로놀라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가 가르친 성리학에 따르면 오랑캐는 오랑캐일뿐 결코 성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성천자가 되기 위한 그의 희생적인 노력은황제가 아닌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에 관한 일화와 역사의평가는 수 없이 많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강희제가 여덟 살에 황제가 되고 열 여섯 살 때 친정을시작했으며, 예순 아홉 살로 타계할 때 까지 61년간 제위에 있었던 것은 중국 역사상그가 처음이다. 그렇다면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꾀나 난해한 과정을 거쳐 자기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修身) 단계를 그는 어떤 모습으로 임했는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는 그의 모습은 "황제의키는 조금 크며, 약간 살이 찐 얼굴에는 마마자국이 있고, 이마는 넓고 코와 눈은중국인들처럼 작으며, 그 동작은 부드럽고 정중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을 보면전형적인 퉁구스계 남성이다.

노년기 황제 자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어려서부터 사냥을시작하여 호랑이 135마리, 곰 20마리, 표범 25마리, 늑대 96마리, 그 밖에는 셀 수도없다고 사냥 솜씨를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뛰어난 자 만이 칸이될 수 있었던 그들 수렵사회에서 황제로서의 자질이 손색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정이 꿈쩍 달 싹도 못하는강궁(强弓)을 손수 매기고 능히 당기는 활의 명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호랑이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명의 수녀제(秀女制)를 계승·도입하여많은 후비(后妃)를 두었고, 그 후비들로부터 35명의 황자(아고)와 20명의 황녀를출산하였다고 하는데, 도합 55명의 자녀를 두었다면, 오늘의 가치관이나 당시 서양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망령 아니면 타락이다.

그렇지만 순치제가 만든 조법은 황제의 통정이 남녀간정사가 아니라 많은 자손을 얻는데 있었고, 이런 아버지의 유훈을 그 아들인 강희제는철저히 지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도 18명의 왕자와 4명의왕녀를, 9대 임금 성종은 15명의 왕자와 11명의 왕녀를 각각 두었지만 이들 군주가호색한이 아니라 명군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의 수녀제란 황실의 피를 신선하게 하고 외척의발호를 막기 위해 사족의 여아가 12세가 되면 궁중에서 생활하게 하였다가 그 중에서자질이 뛰어난 자를 가려 후비로 삼았던 제도다. 강희제는 이 제도를 받아들여 만주기인들의 딸 가운데 12살이 되면 궁중에 수녀로 보내게 하여 이들을 가려서 후비로삼도록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성한 체력을 가졌으면서도 술과 담배를 입에대지 않았고, 반면 피를 토하면서까지 4서 5경은 물론,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의학문까지도 폭넓게 익혔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을 아끼기 위해 궁중에서 사용하는화장품과 향응비를 전부 없애고 명나라 때 10만명이나 되었다는 환관과 궁녀의 숫자를4백명으로 줄였고, 황제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했다.

그런 한편으로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적극적으로나섰다. 황하의 치수를 위해 하도총독(河道總督)을 두고, 강희 16년(1677) 개수공사에착수해서 7년만에 완성시켰다.

소작인을 지주의 착취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토지와함께 매매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를 감면할 경우 소작료도감면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강희 20년(1681) 이후 사회경제가 신속히 회복되었으며인구가 증가하고 많은 도시와 농촌이 안정되었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정치 구호를 내 걸어도 실리가 없으면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 특히 계산이 빠르고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중국인들에게는더욱 그렇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는 세금뿐이다.

강희제는 군사비 지출이 가장 많았던 3번의 난 중에도매년 3 ~ 4백만냥의 감세 조치를 취해 강희 50년(1711)의 발표에 의하면 50년간의감세 총액이 1억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두세(人頭稅)를 강희 50년을 기준으로 장정수 2450만명을 정수로 하고 그 후의 증가분에 대해서는 매기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이것이야 말로 황제의 즉위 50년을 기념하는 대단한 선물이었다.

인구 증가에 비례해서 토지면적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인구증가에 맞추어 인두세를 증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그리하여 세금징수를 위한 장정의 수를 고정시키고 이보다 증가한 인구를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으로등록시켜 이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중국인들에게 만주인들은오랑캐가 아니라 구세주가 아니면 미륵보살인 셈이다. 민심이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없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학문을 서학(西學)이라고불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천문, 역법, 수학, 통계, 지리 등 폭 넓게배우고 익혔으나, 이들이 설교하는 크리스트교에 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한다.

.....그대들은 아직 천국에 가 있지도 않으면서, 언제나천국 일만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일은 믿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무엇이든 쓰일 때가 따로 있는 것이며, 상제(上帝)가 우리들 손에 쥐어 주신 것을잘 활용해야 한다. 그대들의 걱정은 오직 죽은 사람에게나 고마운 일이니, 그 걱정은죽은 다음에나 하는 것이 낫겠다. 짐은 저승 일에는 흥미가 없다.....

이런 황제 앞에서 선교사들은 손을 벌릴 틈이 없었다.중국의 축첩(蓄妾)제도와 현세적 사고의 벽을 깨뜨리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두터웠다.그래서 카톨릭의 신부들은 중국에서 전도는 오직 빈민들에게서만 효과를 거둘 수있다고 말 하였다는데, 일부일처란 이들 빈민들에게만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사회에서는 하위 층에 불과한 승려계급이서양에서는 높은 사회적 신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중국인들로서는 이상한 일로보였다.

어쨋거나 강희제가 서양 신부들의 손을 빌려 10년만에 청나라의 실측지도를 만들었는데,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라고 이름 붙인 그원도는 오늘날 전하는 것이 없고, 당밀이라는 프랑스 왕실 기사가 만들었다는 동판에의해 소위 "당밀의 지나(支那)지도"가 프랑스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지구는 네모로 되어 고정되어있고,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가 이 방형(方形)의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구체천동설이 아니라 방형천동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희제가 처음에는거리를 일일이 재고 그것을 그대로 네모로 된 종이에 옮겼다. 이렇게 되고 보니 위아래가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서양선교사들에게 명령해서 천체를 기준으로 삼각측량을 하고 경 위도를 그려서 중국의 실측 지도를 만든 것이 황여전람도 였다.

강희 16년(1677) 자금성의 건청궁 서쪽에 학문소를열고 이름을 남서방(南書房)이라 하였다. 황제는 틈틈이 이 남서방에 들려 출사한사람들을 상대로 역사, 학문,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이야기하고 이야기에 흥취가돋구면 밤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이 남서방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강희자전(康熙字典)을비롯한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적인 성군의 길에서 황제로서는문무를 겸전한 모범생이 아니라 우등생이었지만, 그도 제가(齊家)에서는 실패한 군주에속한다.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고금동서 천민에서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안타깝게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강희제는 만주 전래의 전통을 깨고 중국식의 황태자를미리 세웠다가 단단히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