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일본(日本) 국호의 유래

구름위 2013. 2. 2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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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일본견당사 정진성(井眞成)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묘지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국호는 일본(日本)이며, 재주는 하늘이 내렸다. 그래서 명을 받아 먼나라로 가서 상국(上國)을 돌아다녔다." 묘지명에는 '일본'이라는 국호가 쓰여있으므로, 최소한 734년이전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유일한 견당사에 관한 실물자료이며, 최초로 일본이라는 국명,국호와 일본이 국가로서 승인된 국보급 문화재이다. 고대중일문화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영문의 "China"는 '중국'을 가리키면서 '자기(瓷器)'를 가리키듯이, 영문의 "Japan"은 '일본'을 가리키면서 '칠기(漆器)'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자기와 칠기는 중국과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공예임을 알 수 있다.

 

칠천여년전에 중국인들은 칠수즙으로 기물을 아름답게 꾸몄다. 이것이 바로 칠기이다. 이천여년전에 칠기는 일본으로 전래되고, 크게 발전한다. 일본의 칠기공예는 정교하고 문양이 아름답다. 독창적인 회화술과 묘금칠로 세계에 유명해진다. Japan은 칠기의 영문명이 되고,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일본인들은 일본어발음으로 영문을 "Nippon" 혹은 "Nihon"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이 발음은 고대한어의 '일본'을 읽는 발음이라고 한다.

 

전국시대에 중국은 일본을 "왜(倭)"라고 불렀다. 고대중국은 자주 "부상(扶桑)"이라는 말로 일본을 표시했다. 그 외에 "동이(東夷)", "해동(海東)", "동양(東洋)", "동영(東瀛)", "봉래(蓬萊)", "영주(瀛州)", "봉영(蓬瀛)"등의 칭호가 중국의 전적에 흩어져 있다. 이를 보면 일본의 각종 이름은 중국과 연원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자고이래로, 동방의 최대국가인 중국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중화(中華)", "중국(中國)", "상국(上國)", "천조대국(天朝大國)"등으로 칭했다. "화이지변(華夷之辨,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것)"의 관념으로 외족을 금수로 취급해서 이름에 '짐승'이나 '벌레'를 가리키는 말을 썼다. 예를 들어, "적(狄)", "만(蠻)", "융(戎)"이 그것이다. 오로지 일본만 "이(夷)", "왜(倭)"로 불러 '사람 인(人)'을 넣었다. 이는 중국을 존경하던 일본인들이 기뻐하도록 만들었다. 어쨌든 중국은 자신들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 "왜"라고 불렀을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한다. "왜" 자는 "인(人)", "화(禾)", "여(女)"자로 구성되어 있다. 왜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학자들은 일본을 칭하는 "왜"는 일종의 음역(音譯, 발음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일본민족은 "대화(大和)"라고 하는데, "화(和)"는 "왜"와 발음이 같다.

 

"일본"의 한자상의 의미는 "해가 뜨는 나라(日出之國)",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다.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일본본토에서 보는 태양은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러므로 최초에 일본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일본"이라고 칭했을 리가 없다. 이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동방의 섬을 보면서 느낀 감정과 칭호일 것이다. 이것을 자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던 일본인들이 그대로 따라 쓴 것이다.

 

608년, 일본은 점차 성장하고, 성덕태자는 수양제에게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 이를 통하여 무릎꿇지 않고 대등하게 교류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수양제는 이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사신을 질책한다.

 

660년을 전후한 당고종 시대에, 장수절의 <사기정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무후가 일본이라고 하다(武后曰日本)." 무후는 여황 무측천이다. '일본'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났다. <구당서. 동이전>을 보면 일본으로 개칭한 데 대한 설명이 있다: "그 나라는 해의 가에 있어서 일본이라고 이름한다" 대화혁신을 통하여, 일본은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율령제국가체제를 건립한다. 국명을 정식으로 일본이라 확정한다. 이 칭호는 지금까지 1300여년을 사용하고 있다.

 

1200여년전에, 견당유학생 정진성은 일본국에서 파견되어 당나라 장안에 유학을 온다. 그러나 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당시의 당나라 황제인 당현종은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겨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후히 장사지내며,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이 기록은 중일우호관계사의 이야기이다. "정진성묘지명"이 발견되면서 다시 한번 그 이야기는 세상사름들에게 드러난다.

 

2005년, 중국은 일본을 순회하며 <견당사전>을 열었다. 이리하여 한 때 견당사붐이 일본을 석권한다. 그해 9월하순, 일본천황 아키히토는 황후와 함께 왕이(王毅)대사의 안내로 견당사전을 관람한다. 그리고 자세히 처음 발견된 일본견당사 정전성의 묘지명을 살펴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