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日本史 - 中世文化

구름위 2013. 1. 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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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中世) 일본의 문화

 

(1) 무가(武家)와 봉건윤리(封建倫理)

 

키타간손지의 참배객(연간 300만명이 참배)12세기말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 1192 ~ 1333)의 성립은 두 개의 이질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었고 이것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쿄토(京都)에는 전대(前代)와 같은 영화(榮華)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권위와 장원영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춘 궁정귀족들이 높은 문화를 향유하면서 건재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일개 한촌(寒村)에 불과했던 가마쿠라(鎌倉)에도 바쿠후(幕府)가 들어 서면서 많은 御家人이 이주해 오고 신사(神社)와사원(寺院)이 들어서게 되어 무가(武家)의 중심지로 변모하자 이들의 소비생활을 담당할 상공업자들이 모여들어 번창해 졌다.

 

단순(單純)질박(質朴)한 무인들로서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만한 학문적인 소양이나 축적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공가(公家)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 아래 신분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공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중세 일본, 바쿠후 성립 당시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 새로운 제도가 생겨나면 거기에 따르는 유형(類型)이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유형에 맞추어 다시 많은 아류(亞流)가 생겨난다. 이런 아류들이 세월이 지나면 또 다른 전통과 문화가 된다. 가마쿠라시대에 만들어진 봉건윤리가 이후 일본적인 문화전통의 근간이 된 것도 이런 유형이라 할수 있다.

 

가마쿠라시대의 일차적인 변화는 귀족의 일개 종자(從者)에 불과했던 사무라이(さむらい - 侍)가 전투시 도보(徒步)졸병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출전하는 신분으로 격상된다. 귀족의 하인이 아니라 말을 타고 수하에 졸병을 거느린 당당한 신분으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이들이 다시 바쿠후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상호간에 구속력을 바탕으로 주종관계를 맺고 御家人이 되어 실질적인 중추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사회가 바뀌는 것은 이들의 기존 질서 파괴에 대한 수위조절만 남았을 뿐 변화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御家人의 봉공(奉公) 중 가장 고귀한 덕목은 충(忠)과 군역(軍役)이었다. 주군(主君)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하는 것을 뜻한다. 평시에는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사냥 등을 통해서 무예를 연마하고전투에서는 용감하게 싸워 꼭 이겨야 한다. 이런 것이 일본의 사무라이들이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무사(武士)라고 불렀다. 붓 대신 칼을 휘두르는 양반이란 뜻이다.

 

따라서 무사로서의 최소한의 요건은 칼을 다룰 수있어야 되고 그 기량이 뛰어 날수록 위용과 권위도 높아졌다. 따라서 도검(刀劍)에 대한 무사들의 애정은 물신숭배(物神崇拜)적인 도검예술(刀劍藝術)로까지 이어지고도검은 곧 무사들의 무용(武勇)을 상징했다.

 

무사들에게 의리(義理)와 명예(名譽)는 생명과도 같은것으로서 부정과 거짓, 배신과 비겁한 행위는 용서치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여겨 경제적 이익추구는 천시하였다. 의리와 명예를 보존하는 최종의 방법은 셋뿌쿠(切腹)라는 할복자살이고 이것이 12세기 말 가마쿠라 바쿠후가 성립될 당시에는 습관화 되었다고 한다.

 

근엄한 의식까지 치르면서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동서고금 어디를 막론하고 일본 외에는 없다. 그 방법과 절차가 너무나 끔찍스러워 여기에 감히 소개조차 할 수 없지만 일본의 무사들은 가장 깨끗하고 고귀한 죽음의 하나로 셋뿌쿠(切腹)를 스스럼없이 택했고 이것이 미담(美談)으로 전해졌다니 일본인이란 역시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가부장적(家父長的) 주종관계는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가장(家長)의 친권(親權)은 절대적이었다. 아버지가 바쿠후의 승인을 받아 어느 자식에게 토지를 물려준 경우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자식에게 넘겨주거나그 자식이 죽었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처분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孝)는 자식의 효심(孝心)에서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런 강력한 친권(親權)을 배경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자식을 소유물 처럼 여겼고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주군(主君)을 위해 처자(妻子)를 희생하는 경우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일본의 봉건윤리가 서양과는 달라서 부녀자를 존경하거나 우대하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재산 소유권은 인정하였고 재가(再嫁)에 따르는 제한이나 차별은 없었다.

 

이런 인간적인 윤리도 개인의 이해관계와 맞닿으면 깨어지게 마련이다. 가마쿠라 바쿠후 성립당시 겐지(源氏)일가의 내분이나 아시카가씨(足利氏)나 닛타씨(新田氏)가 가마쿠라 바쿠후를 쓰러뜨린 것, 전국시대 하극상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도 의리와 명예가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떻게 굴절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사례라 할 수 있다.

 

(2) 장원(莊園)과 불교(佛敎)의 변화

 

13세기 바쿠후가 주도한 대송무역의 활성화로 송(宋)나라로부터 선종(禪宗)과 송학(宋學-朱子學)이 유입되고 때를 같이하여 공가(公家)의 지주였던 불교와 장원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소(本所) 혹은 영가(領家)라고 불렀던 장원영주는 쿄토에 거주하는 귀족으로서 장원에서 보내는 연공(年貢)이 주된 수입원(收入源)이었다. 이런 장원에 바쿠후가 보낸 御家人이 지토(地頭)가 되면서 사정이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쿄토의 영주들은 연공(年貢)만 받는 일종의 부재지주로 전락한 반면 지토(地頭)는 소령(所領)내의 경찰권과 징세권, 그리고 토지관리권까지 가지게 되어 농민들은 지토를 실질적인 장원주(莊園主)로 여겼다. 이를 계기로 지토의 장원 침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本所·領家인 쿄토의 장원영주와 地頭간의 토지분쟁이 심화 되자 바쿠후가 그 처리방안으로 내 세웠던 것이 앞 글에서 이야기 한 대로 하지중분(下地中分)이라는 것이다. 아예 장원을 둘로 갈라 하나는 원래의 장원영주가 다른 하나는 지토(地頭)가 나누어 갖게 만들었다. 공평하게 갈랐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토로서는 손해될 것이 없었지만 쿄토의 귀족들로서는 그 수입이 반으로 줄어드는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변화를 의미한다.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경제적 이익을 천시했던 무사들이 토지에 욕심을내고 장원의 소유주가 되었다는 것은 귀족화(公家)가 상당히 진전되었다는 것이고 종래의 귀족은 신분적으로 무사들을 천시했지만 그 힘에는 굴복했다는 것이 된다.

 

이를 즈음에 선종(禪宗)과 송학(宋學)이 들어왔다. 주돈이(周敦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로부터 시작된 송학이 주희(朱熹-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완성되었다 하여 주자학 혹은 성리학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일본에 전한 것은 선종의 승려(禪僧) 들이다.

 

태극에서 음양 2氣가 생기고 음양에서 5行이 생기며, 이것이 교감 결합하여 만물을 이루고 태극은 또한 만물에 내재한다(주돈이),...만물은氣가 모인 것이고 기가 흘러지면 太虛가 되며 태허는 기의 본체다(장재),....

 

만물은 음양의 消長이고 음양의 소장에 따라 만물을 만물로 만드는 것이 理다. 이 理는 천차만별로서 物을 떠나 理는 없고 리를 떠나 물은 없다.(정호 정이 형제),....태극은 형이상(形而上)의 리(理)며, 음양오행은 형이하(形而下)의 기(器 / 一氣)로서, 만물은 氣를 받아서 形을 이루고 理는 만물에 내재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은 理며(性卽理),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格物) 앎에 이른다(致知). ....(주희)

 

이상은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송학의 요지다. 그렇다면 만물에 내재되어 있다는 理의 본체는 무엇인가를 두고 중국 명나라의 왕양명은 마음이 곧 리(心卽理)라고 주장하여 양명학을 세웠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배불정책의 근거로 삼았다가 다시 4단 7정의 사변적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귀신(鬼神), 잡술(雜術)과 무속(巫俗) 등 이른바 미신타파에는 그런 대로 공헌했다.

 

이런 송학이 일본에 전래되었으나 새로운 이념으로 승화될 수도 없었고 연구하는 학자도 없었으며 禪僧에 의해서 이해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원학문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성리학의 명분론에 따라 公家가 武家를 타도할 이론적 근거는 마련되었지만 힘이 없는 公家로서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런 공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고(典故)에 의한 의식(儀式)이나 선례(先例)를 연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런 회고적 경향은 고전(古典)을 섭렵하고 이를 다시 정리하는 훈고학(訓 學)이 크게 유행하여 源氏物語(겐지모노가다리)를 비롯하여 伊勢物語, 古今集, 萬葉集, 古事記, 日本書紀 등의 주석(註釋)이 이루어져그런대로 학문적인 성과를 남겼다.

 

송학과는 달리 선종불교는 그 수도방법이나 간결한 이론이 무사들의 취향과 일치하여 크게 성행하게 되었고 구래(舊來)의 불교 역시 새로운 시대 풍조에 따라 간결 명쾌하게 이론적 체계를 세워갔다.

 

御家人은 무사로서 혹은 장원의 지배자로서 그 밑에다시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게 되고 이들 개별무사와 봉건적 주종관계를 맺은 종자(從者)를 이에노코(家子) 또는 로오도오(郞等)라 불렀다. 각개 무사들과 이렇게맺어진 주종관계를 당시에는 非御家人으로 불러 구별하였지만 후일 이들이 가신(家臣)으로 되면서 새로운 독자 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地頭는 장원 안의 주요 도로 연변에 아지로(網代-あじろ)라는 대나무 혹은 나무 가지로 된 울타리를 두르고 정면에는 출입문을 세웠는데 그 지붕은 짚으로 덮었다. 문을 들어서면 로오도오(郞等)들이 거처하는 도오자무라이(遠侍)라는 방이 있고 무기는 모두 여기에 보관했다.

 

이곳을 지나면 주인의 거소인 안채가 있고 그 안채와 떨어진 왼쪽에는 마굿간이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13세기경에 그린 두루마리 그림(繪卷物)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은 地頭뿐만 아니라 장원의 유력자인 莊官이나 名主의 집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보고 있다.

 

장원의 주요 구성원은 농민이지만 그 외에도 야장(冶匠-대장쟁이),목공(木工-목수), 토기공(土器工-질그릇 기술자) 등 자급자족에 필요한 직업군도 포함하고 있었다.

 

장원에서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구릉이나 양지바른 곳에는 신사(神社)나 특별한 신을 모시기 위한 사당(祠堂)과 절을 세웠는데 이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이나 승려(僧侶)들은 장원 내에서의 지식계급에 속했고 특별한 교육기관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장원구성원 자제들의 교육도 이들이 담당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鄕村制가 발달하고 그것이 슈고다이묘의 분국의 기초가 되었을 때도 표면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그 내부에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장원내에서 촌(村-무라)을 지배하던 모슈(名主)가 슈고다이묘의 가신(家臣)이 되어 村에서이탈함에 따라 그를 대신해서 중소 모슈가 鄕村의 운영을 지배하게 되었고 슈고다이묘로 부터 몇 개의 鄕村을 영토로 받은 무사가 地頭에 대신해서 향촌을 지배하기도 했다.

 

장원내의 절은 개인의 신앙 대상이었고 신사(神社)는 전체의 수호신을 삼기 위해 향촌에서 세운 것도 있고 모슈 개인이 숭앙했던 인물을 신으로 받들기 위해 세운 것도 있었다. 그리고 신사는 촌민 전체의 구심체로서 모슈를 중심으로 만든 미야자(宮座)라는 조직이 있었고 이것이 주민합의 기구인 요리아이(寄合)와 더불어 향촌자치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관음(觀音)보살과 지장(地藏)보살은 새로운 종파와는 관계없이 현세와 내세에서 영험이 있다고 믿어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고 종래의 귀족불교는 쇠퇴하고 간단 명료한 정토종(淨土宗)과 선종(禪宗)이 신흥 종교로서 신앙체계를 이끌어 갔다.

 

선종(禪宗)은 중국의 남북조시대(220 ~ 587)에 전설적인 인도의 승 달마를 조사(祖師)로 숭산을 본산(本山)으로 삼았던 불교로서 해탈의 경지에이르는 것은 불경이나 계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특이한 교리를 내 세우는 종파다.

 

쉽게 말하면 불경이나 염불보다는 뼈를 깎는 수양만이 자신을 깨우치고(頓悟) 부처의 경지(覺醒)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수양의 으뜸이 좌선(坐禪)이라는 것인데 양반다리(結跏趺坐)로 앉은 상태에서 눈은 1/3의 정도로 내려 뜨고 두 손은 가지런히 양 무릎 위에 살며시 얹고 기도에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선종이 훌륭한 선승이나 도량에 따라 5가(家) 7종(宗)으로 분파되고 이것이 5대(907 ~ 960)의 혼란기를 거쳐 송대(960~1279)에는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만 남게 되었다. 이 양종(兩宗)이 일본과의 무역(渡宋貿易)에 따라 주요 교역 품이던 송의 동전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왔고 그 가운데 임제종이 크게 위세를 떨쳤다.

 

에이사이(榮西 ~ 1215)에 의해 들어온 임제종이 14세기를 고비로 크게 발전하여 독특한 선불교적인 일본문화에 크게 공헌하게 된 것은 가마쿠라에 엔랴꾸지(延曆寺)를 세워 바쿠후의 보호를 받은 것이 첫째 요인이고 道隆(~1278)과祖元(~1286) 등 송의 승려들의 귀화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좌선(坐禪) 이외에 공안(公案)이라는 어려운 선문답(禪問答)으로 정신수행을 매우 중시한 것이 무사들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도겐(道元~1253)이 들여온 조동종은 현존권위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좌선(坐禪) 그 자체만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신앙으로서는 훌륭했지만 현실에서 임제종에게 밀렸다.

 

한편 榮西가 송에서 돌아와 즐겨 茶(차)를 마시는 습관(飮茶)이 널리 확산되어 일본인 전체가 차를 마시는 놀라운 변화를 보인 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짜노유(茶の湯)라는 일본 특유의 작은 것의 계발이 차를 마시는의식(飮茶儀)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선종의 도입과 함께 기존의 국내 불교계에서도 일대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1세기 초 겐신(源信~1017)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정토신앙은 이후 계속된 내전(內戰)과 기근(饑饉), 그리고 천재(天災) 등으로 고통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가지게 만들어 13세기에 와서는 호오넨(法然~1212)에 의해서 하나의 종파로 자리잡고 정토종(淨土宗)이 되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 한다는 간략 명료한 교리가 어려운 법어(法語)를 이해 못하는 일반서민과 무사들에게 크게 환영받았고 몰락 직전의 귀족들까지 신자가 되어 그 교세가 크게 번성하자 진언종과 천태종을모체로 하고 있던 전래의 불교계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들에 의해서 法然은 지방으로 쫓겨났고 오히려 이것이 지방의 무사들과 서민들에게 포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신자는 더욱 불어나게 되었다.

 

法然을 계승한 그의 제자 신란(親연 ~1262)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고 염불하면 착한 사람보다는 악인이 구제받기가 더 쉽다는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내세워 설교하더니 승려의 대처(帶妻)와육식(肉食)을 인정하고 구제를 위한 특별한 수도생활을 부정하였다. 신란이 세운이 새로운 교리를 진종(眞宗)이라 한다.

 

승려의 대처(帶妻-부인이 있는 승려)를 다른 종파에서는 강력히 부정하고 이를 비난하였으나 점차로 진종의 대처 풍습을 다른 종파에서도 조심스럽게 따르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화 되었다.

 

정토종에서 파생한 또 다른 교파로서 잇뺀(一遍~1289)이 세웠다는 시종(時宗)이 있는데 유행상인(遊行上人)으로 불렸던 잇뺀은 전국을 주유(周遊)하면서 염불을 널리 보급하였다.

 

또 하나 일련정종(日蓮正宗-니치렌 쇼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 불교교단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는 니치렌종(日蓮宗/일련종)이 이때 나타나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 남묘호렌게쿄)이라는 법화경의 제목만 외우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전체가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니치렌(日蓮/1222~ 82)이 주장하고 저술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의 근간이다.

 

일본을 불교의 중심지라 믿고 간단하게 남묘호렌게쿄만 외우면 불법에 의한 구제가 위정자뿐만 아니라 나라전체를 보호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바쿠후에 건의하기 위하여 주인(日蓮)과 손님(俗人)의 대화형식으로 엮은 것이 입정안국론이다.

 

1260년 가마쿠라 바쿠후의 執權 호죠씨(北條氏)에게 이를 건의했으나 바쿠후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성격이 과격했던 니치렌이 다른 종파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법화경을 정통으로 삼을 것을 요구하는 도전적인태도가 다른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바쿠후로서도 그 과격함을 방치할수 없어 귀양을 보냈다.

 

만년에 가이(甲斐-山梨縣)의 미노부(身延山)에 법화의 도량(道場)을 베풀고 많은 후진을 양성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일련종, 창가학회 그리고 공명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일본정계에까지 진출했다.

 

이상의 신흥 종파가 보이는 공통점은 실천적(간이,통속, 실천적), 실질적(정신수양, 신앙본위), 일반적(평민적, 대중적), 활동적(가두에 의진출)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원의 수입이 종전과는 달리 신도들의 시주나 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장원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으로 현실에 안주했던 나라시대 이래 교종(敎宗)의 제종파가 이러한 신도확보 경쟁(?)에 끼여 들기는 여러문제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한가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이들에게도 개혁이 필요했다.

 

천태종과 진언종은 여전히 큰 세력이긴 했으나 내부갈등으로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반면 화엄종과 율종, 그리고 법상종은 묘오에(明惠 ~1232), 닌쇼오(忍性 ~ 1303), 게다쯔(解脫) 등 고승(高僧)이 나타나 명성을 얻음으로서 일시적이나마 침체된 교단에 활력이 되었다.

 

특히 율종의 닌쇼오는 환자치료, 도로건설, 교량가설 등 사회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추진하여 고대불교가 의례적으로 행했던 사회사업을 부활시키기도 했으나 몇몇 고승(高僧)의 개인적인 명성과 이런 일시적인 처방으로 옛 영광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대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일본식 종교개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가마쿠라시대의 문화 유산들

 

공가(公家)와 무가(武家)가 병존했던 가마쿠라시대의 두 흐름은 문화유산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13세기 고토바상황의 명에 의해서 편찬된 신고금집(新古今集)은 공가문화를 대변하는 와까(和歌)의 결집이고 오까자끼 마사무네(岡崎正宗)가 만든 도검(刀劍)은 장인(匠人)의 경지를 넘어 마사무네(正宗)라는 이름의 도검이 일본도(日本刀-にっぽん とう)의 대명사가 되었다.

 

묘찐(明珍)이 만든 갑옷(甲胄)은 너무나 유명하여 자손 대대로 갑옷의 명장(明匠)이 되었고 가마쿠라 대불(大佛)이라 불리는 아미타상은 이름 없는 지방의 불공(佛工)이 만든 금동불(金銅佛)로서 지금도 가마쿠라의 명소를 지키고 있다.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오겐(道元)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 5년간 머물면서 도자기 기술을 익힌 가토 가게마사(加藤景正)가 귀국하여 오와리(尾張-愛知縣)의 세토(賴戶)에 가마를 열었는데 이것이 세토야끼(賴戶窯)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쿄토에는 공가에서 세운 대학이 있었다고 하나 유명무실 했고 1265년 호죠 사네토키(北條實時 ~ 1267)가 무사시(武藏-神奈川縣) 가나자와(金澤)의 쇼메지(稱名寺)에 설치한 문고는 일본과 중국의 많은 서적을 수장하고  일족을 면학에 전념케 했다고 하는데 누가 어떻게 가르치고 배웠는지 그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그 서적 중에는 상당수의 희귀본이 포함되어 있어서 가나자와문고(金澤文庫)로 더 유명해 졌다. 교육은 주로 선승(禪僧)이 맡았다고 한다.

 

두루마리 그림은 그 소재(素材)의 폭이 넓어지고 사화(似畵)라고 불렀던 초상화와 함께 지금까지 여러 작품이 남아 있어서 그림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도문물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인사회의 진전과 함께 이들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많은 소설이 등장했는데 그 가운데 헤이지가(平氏家)의 흥망성쇠를 담은 平家物語(평가물어-헤이지가의이야기)는 비파의 애절한 음조와 함께 낭랑(朗朗)한 목소리로 낭송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더욱 애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꾼을 비파법사라 불렀고 15세기중엽에는 5 ~ 6 백 명의 직업적인 이런 설화사(說話師)가 쿄토에서 흥행하고 있었다고한다.

 

14세기 중엽 무로마치시대가 되면 公家는 더욱 무력해지고 武家의 公家化는 가속을 붙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작은 것의 계발(啓發)"이라는 일본특유의 문화도 형성된다.

 

가마쿠라시대인 12세기 말부터 14세기 중엽까지 근150년간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일들도 일어나고 있었다. (머리를식히기 위해 주서 모아 본 이야기들이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오해 없이 눈 요기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1209년 영국 옥스퍼드 시에서는 어떤 살인사건에 몇명의 학생이 말려들어 시민들로부터 린치를 당하자 3천명의 대학생과 교수들이 몽둥이를 들고 시민들과 일대 난투극을 전개, 그 결과 절반에 가까운 학생과 교수가 아예 옥스퍼드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옮겨 버렸다. 이래서 케임브리지대학이 태어났다......

 

1215년 십자군 전쟁으로 여성인구가 과잉상태에 이르자 프랑스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와 수녀들의 생활이 문란해지고 드디어 성(性) 해방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 수도원에서 일어난 성 해방운동이 삽시간에 이웃 독일로 파급되었다....

 

1234년 바그다드의 대학에서는 최초의 여성교수가 강단에 등단하여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독점했다. 이슬람사회에서 세계최초의 여성교수가 등장했다 것은?......

 

1230년경 파리의 대학생들은 매춘옥의 2층에서 진을치고 공부를 하거나 토론에 열중하다가 지치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창녀와 동침하였고, 졸업 후 성직자가 되어서도 이런 버릇은 여전했다.........

 

1270년경 중국의 화남지방에서는 신부의 처녀성 검사(?)에 비둘기 알이 사용되었다. 그 방법은,....그래도 출혈이 없으면 시중 드는 여인이 흰 헝겊을 사용하고 그래도 없으면 그 여성은 결혼을 취소 당했다.........

 

1274년 스콜라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북이탈리아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이게 왠 떡이냐 하고 그 유체를 솥에 넣고 삶아 뼈와 살을 분리하여 나누어 가졌다.... 성인의 유체가 부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전쟁의 원인 중에 하나가 오리엔트에는 성유물(聖遺物)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고 당시의 유럽에서는 고가로 이를 매입하는 풍조와 함께 수요가 급증하자 주로 이를 공급했던 비잔틴제국에서는 가짜 성유물 제조업자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1275년 고려 충렬왕 원년, 太史官이 임금께 고하기를 "우리나라는 동방이고, 동방은 5행에서 木이 되고 색상은 청색을 숭상해야 되는데 백성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니 이는 심히 불가합니다. 서방은 金이고 금의 색상이백색이 되므로, 이는 상극에 해당하는 金克木(쇠는 나무를 이긴다)의 형상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에 따라 흰옷을 입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동시에 모두들 상투를 자르고 개체변발을 했다.....

 

무인(武人)문화의 성립

 

(1) 무인(武人)과 선승(禪僧)

 

요시미쓰가 세운 金閣寺가마쿠라시대는 공(公)·무(武)가 그런 대로  병존하였지만 무로마치시대가 되면 공가(公家)는 몰락하고 무가(武家)의 시대가 된다.

 

建武中興(건무중흥 - 1334년)으로 오랜 만에 공가에서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2년에 불과했고 남북조의 항쟁기를 거치면서 다시 무가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이룩된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문화란 이런 정치정세를 여실히 반영한 것으로 공·무의 병존(竝存)은 사라지고 무가로 통일된 양상을 띄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고작 싸움밖에 몰랐던 무인들이 귀족적인 교양과 경제적인 여유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소양(素養)이나 행정기술이 부족했던 무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담당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며 지식을 소유한 승려들, 특히 선종(禪宗)의 승려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해서 복원된무가정치가 무로마치 바쿠후라는 것이다.

 

무로마치 바쿠후를 개설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임제종의 선승(禪僧) 소세키(疏石 ~ 1351)의 건의를 받아들여 쿄토에 天龍寺를 세우고 자신이 괴롭힌 고다이고(後醍호) 천황의 명복을 빌었는가 하면 전국에 安國寺를 세워 전란으로 희생된 영령(英靈)들을 위무(慰撫)하기도 했다.

 

그의 손자 요시미쓰(義滿)는 쿄토에 相國寺(상국사- 쇼오고꾸지)를 세우고 이 절의 승려들에게 바쿠후의 외교사무를 취급케 했으며 주지(住持)에게는 모든 선승(禪僧)을 통제하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송의 선종(禪宗)5산(五山)제를 모방하여 쿄토와 가마쿠라에 각각 선종 5산을 두었는데 이것이 5 산(山)10 찰(刹)이라는 것이며 그 본원(本願)은 임제종이 맡았다.

 

대부분 외교사절은 5산의 선승(禪僧)이 담당했고 이들 가운데 대명무역에 관계하여 막대한 치부를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가마쿠라의 延曆寺(연력사- 엔랴꾸지)는 신흥불교를 가차없이 탄압하여 그 악명을 유감없이 남기기도 했다.

 

결국 칼을 휘두르는 무인과 가련한 영혼을 극락왕생으로 인도할 승려들이 같은 배를 타고 거침없는 항해에 나서게 됨으로서 검소한 무사들은 호사에 탐익(耽溺)한 신흥귀족으로, 유력한 사원의 승려들은 승의(僧衣)를 걸친 속된 권력자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모순의 결합이 오래 지탱할 수는 없다. 바쿠후의 통제력은 약화되고 다른 종파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갈 곳 없는 민중들은 하나로 뭉치는 조직력을 길러 폭력으로 대항했다. 이런 것이 오닌(應仁)의 난을 계기로 난세(亂世)로 접어들게 되며 이런 난세를 일본에서는 전국시대(1467~ 1573)라 한다.

 

(2) 기타야마(北山)문화와 히가시야마(東山)문화

 

무로마치 바쿠후의 3대 쇼군 요시미쓰(足利義滿 /1368 ~ 94)로부터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 / 1443 ~ 73)에 이르기까지 약 백년간에 걸쳐 오늘날 일본문화의 원류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요시미쓰가 쿄토의 鹿苑寺(녹원사 - 로꾸엔지)에 사원과 주택을 겸한 3층의 金閣(금각 - 긴카꾸)을 지었기 때문에 그 위치에 따라 이 시대에 나타난 문화를 北山(북산 - 기타야마)문화라 하고 요시마사는 慈照寺(자조사 - 지쇼우지)에 2층의 銀閣(은각 - 긴카꾸)을 지어 은퇴 후 만년을 보냈기 때문에 역시 그 위치에 따라 東山(동산 - 히가시야마)문화라 한다.

 

이들 문화의 기조는 간소하면서도 의지적인 무인들의 생활과 현실 도피적인 선종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公家的·貴族的 경향으로 접어든 무인들의 생활은 그렇다 치고 꾀나 까다롭고 난해한 선종불교의 흐름을 완전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복잡하다.

 

따라서 중국의 도교까지 가미시켜 만들어진 무로마치시대의 문화가 이런 것이다 하고 꼬집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직접적인 심미(審美)나 감상(鑑賞)을 통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것도 이방인으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일본사의 개설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어서 그 일부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형식과 조형을 애호하는 전통적인 감각, 자연과 인간을 합일(合一) 시키려는 도교적 경향, 우주의 근본 진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선교적(禪敎的) 사고가 상호간에 조화와 충돌을 반복하면서 가꾸어진 정태성(靜態性)과 인위적인 단순성(單純性)으로 정리되고 이것이 형식위주의 심미감(審美感)과 결합되어 자연의 진리와 미를 작은 것으로 세심하게 다듬어서 표현하려 했다.....

 

.....큰 것보다는 작은 것, 복잡한 것 보다는 단순한 것, 창조보다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 새 것 보다는 낡은 것, 완전한 것보다는 약간모자라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며,.....

 

...좁은 공간에서 절도 있는 완만한 행동과 볼품없는 다구(茶具)로 차를 마시는 습관, 복잡한 한자의 자획, 난해한 불교의 교리 등 외래문화의 이질감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자연을 좁은 공간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원(庭園), 분재(盆栽)와 꽃꽂이는 일본적인 속된 경향과 가식된 단순성으로 재구성된 표본적사례다......

 

일본적인 혹은 일본인의 성격을 말할 때 와비(わび)라는 단어를 쓰는데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길 수는 없지만 어느 일어사전에는 한거(閑居)를 즐기다, 한적한 정취, 한적한 생활 등으로 풀이하고 있어서 자칫 유유자적한 풍모처럼 보이나 사실은 상징적인 색채가 가미된 현실 도피적인 생활태도가 와비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타락하면 왜소(矮小)와 인위(人爲)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오히려 자연을 소외하거나 가공된 인공미(人工美)에 자가도취되어 본말이 전도되는 또 다른 모순에 빠지게 된다.

 

(3) 서민(庶民) 문화의 대두

 

공가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와까(和歌)가 이 시대에 와서는 무인과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고 여기에서 파생된 렌카(連歌)가 크게 유행하여 독립된 장르를 만들어 직업적인 連歌師도 등장하였다.

 

連歌란 글자 그대로 和歌의 上句와 下句를 서로 다른 사람이 지어 합친 것을 연속해서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원래는 기지(機智)와 해학(諧謔)을 곁들여 和歌의 여기(餘技)로서 유행하다가 이미 가마쿠라시대에 50句나 100句로 길게 연속해서 부르는 경우가 생겨나고 그 통속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어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노래(謠)와 춤(舞)과 가락(樂)이 함께 하는 가면극(假面劇)이 등장하여 무인사회의 새로운 예능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노오가꾸(能樂)라 한다. 장식 없는 무대에서 주로 두 사람의 연기자에 의해서 진행되는 이 가면극은 연기가 사실적이긴 하나 상징적이며 감정의 발휘보다는 암시적인 특징이 있어서 일본인들의 기호에 아주 적합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오(能)의 연극 막간에 가면을 쓰지 않은 코믹한 연기자가 잠깐동안 등장하여 시시 껄껄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교오겐(狂言)이라 하였는데 장중한 노오(能)의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 주로 저속한 비어로 관중들을 웃겼다고 한다.

 

서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으로 설화와 전설에서 소재를 취하고 노인들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를 독자로 한 오토기 조오시(御伽草子)라는 통속적인 단편소설도 이시기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새와 짐승, 물고기와 벌레, 풀과 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한 것으로 의인화 된 공가, 무인, 승려, 서민 등 모두가 서민의 입장에서 묘사된 것이 특징이라 한다.

 

이외에도 많은 것이 있으나 그것을 다 알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우리들과 일본과의 문화적 거리는 아직도 먼 것 같다. 15세기 말 전국시대부터를 일본사에서는 근세라 하여 장(章)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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