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 론
1.전국시대란?(전국시대의 개막 - 응인의 난)
중세의 일본은 천왕과 귀족의 정치가 끝나고, 무사들이 막부를 열어 통치를 했다.
일본 두 번째 막부인 아시카가家의 무로마치 막부는 말기적 증상으로 이미 쇼군의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국고를 축내었고, 여러 차례 덕정령(德政令)을 발표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차에 먼저 막부의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령가 3가문 중, 하타케야마, 시바 양가문이 가족상속으로 내분이 일어나 세력이 약화되었다.
오직 3관령가 중 호소가와(細川)家만이 멀쩡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쿄토 내외의 형사임무와 경비를 돌아가며 맏던 4직- 아카마쓰(赤松), 잇시키(一色), 야마나(山名), 쿄코쿠(京極) 4가문중 야마나씨가 두들어 지게 강성하게 되어 호소가와家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아카마쓰家가 쇼군을 암살하는 바람에 토벌당하게 되었고, 그 토벌을 야마나家가 맡아서 아카마쓰家의 영지를 차지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관령가 중의 하나인 하타케야마家에서 상속싸움이 벌어지고, 호소카와와 야마나는 각각 다른 사람을 지원함으로써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쇼군가의 상속싸움이 벌어졌다. 8대쇼군 요시마사의 동생 요시미와 쇼군의 처 히노 도미코의 늦둥이 아들 요시히사가 충돌했는데 요시히사측에서 요시미 암살을 시도했다. 유력 수호(지방 태수)들이 이에 반대, 군대를 상경시켜 대항했다.
결국, 암살은 실패했으나 쿄토에는 군대가 남아있었다. 1467년 정월, 하타케야마의 상속다툼이 교토에서 전면전으로 발발, 이로써 오닌(應仁)의 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5월에는 호소카와편(동군)과 야마나편(서군)의 편싸움으로 확대되었다. 동군 24개국 16만명과 서군 20개국 11만명이 쿄토에서 시가전을 벌려 쿄토는 잿더미로 변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지방으로까지 싸움이 번졌다.
1473년 양군의 리더 호소카와 모치토요와 야마나 가쓰모토가 병사하자 전쟁은 지루해졌다. 서군에 있던 요시히사 모자가 동군에 붙자 동군에 있던 요시미가 불편해서 서군으로 옮기는 등 전쟁의 목적부터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다음해 호소카와와 야마나 씨가 화해하고 1477년 남은 다이묘들도 화의를 하고 귀국해 버린다.
11년 간의 전란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전쟁은 끝났지만, 막부의 힘은 소멸했다. 쇼군은 쿄토 일대인 야마시로國만을 차지한 보통 다이묘로 전락했다. 막부권력의 해체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다이묘들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領國)을 통치하던 수호를 재치고 그 대리인이던 수호대나 그 영국내의 유력 인물이 영국의 주인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것이 전국시대의 개막이다.
2. 전국시대를 이해하는 용어들
-신분제
(1)천황(天皇:텐노)과 귀족
-원래는 조정의 중심에 서서 정치를 하며 각 국에 국사를 보내 장원과 각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지방에서 무력을 바탕으로 자생한 무사집단이 생성, 급기야 중앙정치 무대에 출현하자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메이지 유신 때까지... 정치와 동떨어져, 존재는 하지만 다스리지 않는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관직은 여전히 천황이 내리는 것이었다.
(2)국사(國司:코쿠시)
-지방의 행정단위인 국(國)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원래는 중앙귀족이 일정 임기로 파견되었다. 고로 조정에서 임명한 지방의 수령이며, 막부의 지방조직과 병존하게 된다.
(3)수호(守護:슈고)
-원래는 국내의 치안유지와 경찰권 행사, 국내 무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막부로부터 인정받아 한 국(國)에 한명씩 임명되었다. 한마디로 (조정:국사=막부:수호)의 구조로 국사와 병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점차 국사나 장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수호는 수호대를 지방에 두고 자신은 서울에서 막부에 출사함을 원칙으로 했다.
그로 인해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수호대에게 나라를 뺐기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4)수호대(守護代:슈고다이)
-수도에 있는 수호를 대신해서 일국을 다스리던 사람이다.
이 수호대로 인해 수호대명은 전국대명과 달리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영지를 갖는게 가능했지만, 전국대명의 시대로 들어서자 지방에서 실제 지배를 행하던 수호대들이 나라를 빼았고 전국다이묘로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5)수호대명(守護大名:슈고다이묘)
-남북조시대의 오랜 전란에 의해 중세 유럽처럼, 슈고끼리의 사적인 주종관계가 확대되어갔다. 거기다 국사의 기능까지 흡수하면서 일국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슈고다이묘(수호대명)라고 부른다.
(6)전국대명(戰國大名:센코쿠다이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한 영국 또는 분국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지방권력자이다.
수호대명은 어찌 됐건 간에 쇼군과 막부의 존재가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센코쿠다이묘는 오직 자신의 힘을 믿고 영지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7)사무라이(侍)
-귀족이 통치하던 헤이안 시대 말기에, 지방에서 토착 호족이나 실력자들은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고 무사(Knight)의 성격을 띄게 된다. 중앙에서 내려온 귀족(국사)으로부터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 뭉치는 가운데 사무라이라는 계급적 성격을 띄게 되고 나아가 중앙정부를 무력화 시킬 만한 실력을 갖춤으로써 일본사회에 사무라이는 신분이 확정되게 되었다.
(8)국인(國人:코쿠진)
-지방 토착 세력으로 호족화 해서 결국 전국대명이 되는가 하면, 전국대명의 가신단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9)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다이쇼군)
-원래는 이민족 토벌을 위해 조정에서 임명한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사무라이들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 변하게 되어 막부의 통치자가 되었다.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源)씨만이 할 수 있어서,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이 되지 못했다.
(10)관백(關伯:칸뱌쿠)
-어린 천황 대신 정무를 맡아보는 것을 섭정이라 했고, 천황이 성인이 되고도 정무를 맡아보는 것을 관백이라 했다. 히데요시는 미나모토(源)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이대장군이 될 수 없었기에 대신 관직에 집착하여 결국 일본 최고 관직인 정일품(正一位) 태정대신에 이어 관백이 되었다. 후에 관백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이를 태합(太閤)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왕의 아버지를 뜻하는 대원군을 주로 흥선대원군을 가르키 듯이, 일본에서 태합이라 하면 히데요시를 가르킨다.
(11)기관 막부(幕府:바쿠후)
-원래는 중국에서 전시에 왕이 천막에서 정무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정이 대장군이 세운 무사들의 정권을 뜻하게 되었다. 일본 역사 속에서, 미나모토家의 가마쿠라 막부, 아시카가家의 무로마치 막부, 도쿠가와家의 에도막부. 이렇게 3개가 존재했다.
Ⅱ.본 론
3.천하인의 가계도
(1)오나도 부나가
오다 노부히데
(나고야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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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찌보시 ㅡ 노히메(정실) - 오다우라꾸 - 노부유키 - 이치히메
(후일-노부나가) (사이토도산의 딸) (오미의 아사이나가마사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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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꾸히메 (이에야스의 장남 - 노부야스에게로 출가)
기묘마루 (노부다다)
차센나무 (노부까스 - 이복동생)
산시찌마루(노부다까)
오쓰구마루(하시바 히데까스 - 히데요시의 양자가됨)
<오나도 부나가의 가계도>
1)오다가의 중신들
①히라떼 마사히데 - 중신, 노부나가의 사부(오다가의 지혜주머니로 통함)
노부나가에 할복으로 간언함
②아케치 미쓰히데 - 사카모또 성주로 당대에 소문난 수재중의 하나. 후일 노부 나가를 치고, 천하를 노림
③다키가와 가스마스 - 노부나가 휘하에서 히데요시와 지략을 견줄만한 모장.
④이누찌요 - 노부나가의 시동 (후의 마에다 도시이에)
⑤마쓰이 유깐 - 노부나가의 명에의해 사까이를 다스림
⑥모리 란마루 -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혼노사에서 최후까지 노부나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함.
⑦시바타 가쓰이에 - 오다의 중신으로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 협력치 않고 대항. 최후에 자결함.
⑧게우께 이에떼루 - 가쓰이에의 근위무사. 주군을 대신하여 장렬히 전사함.
⑨이께다 노부떼루 - 이께다 쇼뉴.니와 나가히데, 호리 히데마사 등
2)노부나가의 일생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호랑이로 불리던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을 거부한 그였기에, 오와리의 바보, 멍청이, 또는 개망나니로 불렸다.
그무렵 인접국인 미까와에서는 오까사끼성주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순뿌로 인질로 보내게 되는데, 중도에 오다와 내통하고 있던 도다 일족에게 붙잡혀, 오와리로 오게 된다. 다 죽게된 다케치요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 노부나가는 다케치요에게 자신의 생활방식(후의 군전략이 됨)을 접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1467년이후 지속되어온 전국시대를 종결짓게 되는 두 영웅의 만남이었고, 히데요시 또한 평생을 견제해야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생의 동맹자로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하튼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은후 가문의 적대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천하통일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 첫걸음이 스루가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1/8의 병력으로 승리한 텐가쿠 골짜기의 전투이다.
또한, 자신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을 죽인 그 아들 다쓰오키를 공략하여 영지인 미노를 빼앗고, 에치고의 강자 우에스기 겐신과 대적하고, 매제의 가문인 아사이 가와 아사쿠라 연합과 싸워 승리한다. 그리고, 교토입성 직전에 가이의 야심가 다께다 신겐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미카타의 들판에서 이에야스의 학익진과 신겐의 어린진이 대결하게 되는데, 이 싸움에서는 이에야스가 대패한다. 그리고 노다성에서 농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신겐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다께다 신겐이 사라진 것이다. 신겐의 사후에는 아들인 다께다 가쓰요리가 그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지 않고 영지를 넘어 노부나가군과 싸우게 되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역사에 길이남을 총포부대의 사용으로 최강의 다께다 가문의 기마부대(풍림화산)을 전멸시킨다. 이 전투가 바로 나가시노 전투이다. 이리하여 "천하포무" 를 내세워 전국을 종결 짓고자 했던 난세의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인의 제일선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얼마후 고전하는 히데요시에게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원병을 파견하였는데, 돌연 회군하여 혼노사에서 주군인 노부나가를 치고 13일간 천하를 차지한 아케치 미쓰히데로 인해, 천하 통일을 향한 49년의 도전에 종지부를 찍게된다. (혼노사의 변)
(2)도요토미히데요시
기노시다야에몬 ㅡㅡ 오만도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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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쓰 차차히메(후실) ㅡ 기노시다 도오기치로 ㅡ 네네(정실) 하시바히데나가 아사히히메 ㅡ 사지히데마사 (히데쓰구의 생모) (요도기미) ㅣ (후일 - 도요토미히데요시) (정략으로 남편과 이혼후 이에야스의 정실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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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마쓰마루(1) 히로이(2) ㅡㅡ 센히메 히데쓰구(관백) 하시바 히데까스
(3세에 사망) (후일 - 히데요리) (히데다다의 맏딸) (양자) (양자 - 노부나가의 아들)
<도요토미히데요시 가계도>
★히데요시 이름의 변화 : 기노시다 도오기치로 - 기노시다 히데요시 - 하시바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백이란 관직과함께 조정에서 하사한 성)
1)히데요시의 중신들
①이시다 미쓰나리 : 히데요시가 총애하던 문관으로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가를 위해이에야스와 대적.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하여 죽임 을 당함.
②이께다 쇼뉴 : 前 노부나가의 가신. 히데요시와의 우정으로 이에야스와 싸우다
전사
③기요마사, 고니시 유끼나가 : 무장파의 대표인물, 임진왜란시 선봉장
④소요시또시 : 쓰시마섬의 성주로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받음.(유끼나가의 사위) ⑤아사노 나가마사, 오다니 오시쓰구
2)히데요시의 군사
①구로다 간베에 : 한베에 사후의 군사. 절름발이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들)
②센 리큐 (센 소에끼) : 히데요시의 다도 친구이자 말벗,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할복함.
③오무라 유꼬 : 히데요시의 행정기록 담당자
④다까야마 우꼰 :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추방
⑤시마이 소시쯔 : 사까이의 금융업자,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조선을 정찰함.
⑥고요시 히데까스 : 관백 히데쓰구의 동생. 대륙 출병시 조선에서 병사.
⑦요도야 조안 : 오사까의 거대상인으로 히데요시의 후원자.
⑧오노 하루나가 : 요도기미의 시중을 드는 오꾸라부인의 아들로 요도기미의 총 애를 받음. 히데요리, 쓰루마쓰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음.
⑨모꾸지끼 오고 : 신곤종 중흥의 고승인 동시에 호걸. 히데요시로 부터 깊은 신 임을 받음.
3)히데요시의 일생
히데요시는 1536년 지금의 아이지현 나까무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집을 떠난 후 하찌스까 고로꾸를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다. 그후 고로꾸의 밑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1554년 18세에 당시 두각을 나타내던 오다 노부나가의 짚신을 담당하는 아시가루 가 되었는데 항상 오다의 짚신을 품속에 품고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아 그 후 한 부대의 부장이 되었다. 모리 데루모도의 부장 시미즈 무네하루가 수비하는 다까마스 성을 공격할때, 오다가의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사에서 주군인 노부나가를 살해하고, 이를 알리는 밀사를 데루모도에게 보냈으나, 그 사자가 길을 잘못들어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를 알게된 히데요시는 모리와 화친한 후 즉시 되돌아와 야마사끼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하였다.
이후 오다가의 후계자 결정과정에서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불화가 있었으며, 그를 빌미로, 후일 시즈까다께에서 가쓰이에를 격파. 그의 거성인 기타노쇼성을 함락시켰다. 전국통일의 가장큰 걸림돌 이었던 가쓰이에를 제거한 후 각 국의 영주들을 차례로 항복케하여 100여년간 지속되어온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효자이며, 인정이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그가 전국을 통일했으면서도, 이에야스를 경계하여, 이미 혼인해 있던 동생 아사히 히메를 이혼시킨 후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고, 또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기 까지 하였다. 이는 이에야스의 세력과 야심이 남달랐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후실인 요도기미(차차히메) 가 낳은 쓰루마쓰마루 가 죽은후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는 1591년 12월에 조카 히데쓰구에게 관백의 직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1593년 8월3일 둘째아들 히데요리가 탄생하면서 히데쓰구를 할복시키게 된다. 그후 병세가 악화되자, 그는 5대신에게 자신의 사후 히데요리에게 충성할 것을 혈서로서 맹세케 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사후 그 맹세는 깨어지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거성인 오사카성을 2번에 걸쳐 공격하여, 끝내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키게 된다.
특이한 점은 히데요시는 자신의 배경지식이 고루해 진다하여 죽을때 까지 책 한권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글 한자도 못썼으며, 천하인이 되어서야 떠듬떠듬 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탁월한 독심능력과, 지모를 타고 났기에 난세의 풍운아로 불리는 노부나가의 생각을 정확히 간파하여, 오다 가문에 손꼽히는 중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천하를 통일했느냐 하는 것이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우리나라로선 임진. 정유재란을 일으킨 역적이겠지만, 일본에서는 청소년 존경 ranking 2위인 대단한 인물이다.
(3)도쿠가와이에야스
기요야스
ㅣ
마끼히메(2번째정실) ㅡㅡ 마스다이라 히로다다 ㅡㅡ 오다이(정실) ㅡㅡ 오히사(후실)
(오까사끼성주) ㅣ
오만(후실) ㅡㅡ 오아이(후실) ㅡㅡ 오까메(후실) ㅡㅡ 다케치요 ㅡㅡ 세나히메(요시모토의 조카딸)
ㅣ (후일-도쿠가와이에야스)
ㅣ ㅣ ㅣ ㅣ
오기마루(2) 나가마쓰마루(3) 고로따마루(7) 가메히메
(히데요시의 양자가됨-유끼히데야스) (히데다다) (요시나오) 노부야스(1) ㅡㅡㅡ 도꾸히메
후꾸마쓰마루(4) (노부나가에 의해 할복함) (노부나가의 맏딸) (다다요시)
노부요시(5) 다다떼루(6) 조후꾸마루(8) 쓰루치요(9)
(다떼마사무네의 사위가됨) (요리노리) (요리후사)
<이에야스 가계도>
★이에야스의 이름 변화 : 다께치요 - 마스다이라 모도노부 - 마스다이라 모도야스 - 도쿠 가와 이에야스
4.戰國時代 戰投(전국시대 전투)
(1)테도리가와 전투(手取川の合戰) - 노부나가, 겐신을 견제하다 -
-텐쇼(天正) 3년(1575) 5월의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다께다 신켄의 아들 가쓰요리(勝賴)를 도쿠가와(德川)와의 대연합군(大連合軍) 3만 4천으로 격파했던 노부나가는, 호쿠리쿠(北陸) 지방의 잇키(一揆)로 정책의 중점을 옮기고 있었다. 이 때, 이미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조부(祖父)이래로 금기시 해왔던 일향(一向) 패거리들과의 연대를 실현해 두고 있었다. 「노부나가와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양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겐신과 노부나가의 동맹관계는 무너졌고, 결국 자웅을 겨루게 되었는데, 이 전투가 바로 『테도리가와(手取川)의 전투 』인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 후, 노부나가는 비와호(琵琶湖) 동쪽에 위치한 아즈치산(安土山)에 대규모 축성공사를 시작했다. 이 성이 3년 후에 완성된 호화찬란했던 아즈치성(安土城)인 것이다.
노부나가가 기후성(岐阜城)에서 아즈치성으로 본거(本據)를 옮긴 이유 중 하나가 호쿠리쿠 대책에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즈치성에 본거를 두면, 지리적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에 호쿠리쿠(北陸), 토오카이(東海), 긴키(近畿) 지방을 끼고 있어 쿄토로 진출하려 하고 있던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당시 노부나가의 최우선 과제는,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이 죽은 후쿠리쿠 지방에서 겐신이 자유자재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한편, 겐신은 결코 동맹을 맺어 본 적이 없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와 손을 잡고, 엣츄(越中)․노토(能登)침공에 힘을 쏟고 있었다.
- 켄신, 한번에 호쿠리쿠를 제압 -
텐쇼 5년(1577) 윤 7월, 겐신은 하타케야마 요시쯔나(?山義網)의 아우로서『죠죠 우에스기씨(上條上杉氏)』를 상속하고 있던 요시하루(義春)를 노토(能登)의 수호로 옹립한다는 대의 명분을 앞세워 노토로 진격했다. 오랜 기간 하타케야마씨의 거성(居城)이었던 나나오성(七尾城)은 왕년의 융성함이 무색하게, 곧 함락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쵸오 쯔구츠라(長續連)․쯔나츠라(網連)』 부자(父子)는 아우인 쯔라타츠(連龍)를 아즈치(安土)의 노부나가 에게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한편, 겐신은 『유사 쯔구미츠(遊佐續光)』에게 하타케야마씨의 구령(舊領)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은밀히 쿠테타를 유발, 결국 9월 5일 나나오성을 함락시켰다. 이때까지 겐신과 노부나가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겐신에게는 「노부나가를 타도하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 명령이 있었다. 한편, 쵸오씨(長氏)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은 노부나가는, 8월 8일 시바타 카쓰이에 (柴田勝家)를 총대장으로 하는 4만 8천의 대군을 파견했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양군(兩軍)의 경계선이 되었다. 테도리가와(手取川)를 넘어 코마츠(小松), 모토오리(本折), 아타카(阿多賀), 토가시(富?)에 이르는 모든 마을을 불태우며 노토로 진격, 우에스기군과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9월 18일, 겐신은 노부나가의 대군이 테도리가와를 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9월 23일, 테도리가와 까지 군대를 진격시켰다. 결국 양쪽 군세는 결전을 개시했지만, 총대장 시바타 카츠이에를 비롯한 노부나가군은 나나오성이 함락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전의를 상실, 퇴각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뒤를 3만 5천의 우에스기군이 공격해 왔지만,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형국이 되어버린 오다군은 그 자리에서 1000 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고, 때 마침 불어난 물살 때문에 빠져 죽은 수는 전사자를 윗돌았다. 전격적인 기습작전으로 겐신은 노부나가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겐신은 이 전투 후, 「노부나가와 자웅을 겨룰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천하평정도 뜻대로 될 것이다」라며 회상했다고 한다.
이 승리에 의해 가가(加賀) 북반부와 노토(能登)․엣츄(越中)는 우에스기씨의 세력범위가 되었고, 노부나가는 가가 남부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텐쇼(天正) 6년 2월, 겐신은 호쿠리쿠 평정의 기세로 관동지방을 평정하고자 3월 15일을 출진의 날로 결정했지만 출진을 이틀 앞둔 3월 13일, 뇌출혈로 49년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2)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 - 이마가와 요시모토 움직이다 -
-스루가(駿河), 토도우미(遠江), 미까와(三河)와 더불어 오와리(尾張)일부를 영국화 한 요시모토는 다께다 신겐(武田信玄), 호조 우지야쓰(北條氏康)와 동맹을 맺고 배후를 공고히 한 후 상경을 결정했다. 영록(永祿)3년(1560)5월10일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本)의 선봉 이이 나오모리(井伊直盛)가 출진, 12일에는 요시모토 본대가 순뿌(駿府)를 출발했다.
스루가(駿河),토도우미(遠江),미까와(三河)및 오와리(尾張)일부에서 선발한 2만 5천의 대병을 이끌고 13일에는 掛川, 14일에는 하마마쓰(浜松),15일에는 요시다(吉田)로 전진해 18일에는 노부나가령의 쿠쯔카케(沓掛)에 도착해 노부나가와의 결전에 눈앞에 두었다. 한편 노부나가는 기요스(淸州)성에 있으며 요시모토의 쿠쯔카케(沓掛)도착 및 다음날의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공격의 정보를 받았다. 이때 林佐波守등의 중신들은 농성을 진언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전투를 해야 할 때를 잃고 죽어야 할 곳을 도먕치면 자멸한다, 반드시 국경을 넘었을 때 전투를 해야만 한다.」라고 하며 농성책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다.
요시모토의 대군이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공격에 군대를 보내 본군이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장이 되리라고 예상한 장소는 노부나가가 얼마 전에 시찰을 한 곳이고 우쯔케모노(うつけ者 - 바보, 멍청이..)라고 불리던 시절 군사 시뮬레이션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5월19일 마침내 요시모토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새자 마쓰다이라 모도야쓰(松平元康- 후의 이에야쓰(德川家康)〉가 마루네(丸根)를 급습해 사쿠마 모리타네(佐久間盛重)이하의 수비병을 쳐부수고 순식간에 함락시켜 버렸다. 동시에 와시즈(鷲津)를 아사히나 야쓰요시(朝比奈泰能)가 함락시켜 요시모토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연승에 취한 요시모토는 大高성으로 향하면서 자신만만해 있었다.오께하자마(桶狹間)에 도착한 요시모토는 전군에게 휴식을 명했다. 휴식지로 정한 곳은 오께하자마(桶狹間)의 중간에 있는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였다. 텐카쿠골짜기(田樂峽)는 구릉사이의 습지였다. 왼쪽엔 숲이 있고 오른쪽에는 진흙밭이 있었다. 본대는 종대대형인 채로 점심밥을 먹었다. 경계병은 있었지만 전망이 좋지 않은 지형이어서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노부나가는 오전11시경 밥을 물에 말아 먹은 후 「인간오십년」의 그 유명한 아쯔모리(敦盛)를 추고 결사의 각오로 출진했다. 오전8시 아쯔다(熱田)신궁에 도착, 따르는 총병사는 200기를 헤아렸다. 이윽고 전승기원에 보내졌던 군세가 합류해 10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전9시에 아쯔다(熱田)신궁을 출발 도중에 마루네(丸根), 와시즈(鷲津)함락 보고를 받은 노부나가는 전군에게 결사의 각오를 구했다.
하나가 된 노부나가군은 나루미(鳴海)방면에 측면 경계병 300명을 떼어내고 단케(丹下), 센쇼지(善照寺) 방어책의 병사를 합쳐 전진시키고 센쇼지(善照寺)동쪽의 병사를 점검했다.
- 노부나가 돌격하다. -
이때 노부나가에게 나루미(鳴海)분대의 괴멸의 정보가 날라왔다. 격분한 노부나가는 나까지마(中島)방면의 적을 향해 진군을 기도했다. 그리고 진군하려던 찰나 야나다 마사쯔나(梁田攻網)의 첩자로부터 요시모토 본군이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에서 휴식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요시모토의 수색병이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비교해 보면 이는 노부나가군의 정보전의 승리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요시모토의 위치를 파악한 노부나가는 1000명을 나카지마(中島)부근에 배치하고 자신은 2000의 병사를 이끌고 요시모토 본진으로 잠행진군을 했다. 전형적인 양동작전이었다.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훈시를 통해 최대의 전략목표를 향해 일치단결하게 하는 뛰어난 작전지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리고 있던 요시모토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이 가능해지고 승리의 길이 넓어졌다는 것을 전군에게 심어 주었다.
요시모토군 기습을 시작한 노부나가군은 북쪽의 구릉을 돌아 현재의 東海道를 거쳐 단번에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로 진격했다. 정오경 드디어 노부나가군이 텐카쿠하자마(田樂狹間)에 도착했을 때 소나기가 심하게 내렸고 요시모토 군에게로 심하게 몰아쳤다. 요시모토군은 나무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2시전 적의 이런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노부나가는 비가 그치는 것을 보고 곧 총공격을 명했다. 완전히 기습을 당한 요시모토군은 노부나가군의 공격인지 아군끼리의 싸움인지 구별조차 하지 못한 채로 창끝을 들이내는 노부나가군에게 무너져갔다. 무장을 풀어 놓았던 요시모토군은 더욱 그 혼란이 컷을 것이다. 오후2시경 요시모토의 본기가 노부나가에게 발견되었다. 노부나가의 지시가 전군에게 내려지고 전략목표인 요시모토의 머리를 향해 전군이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핫토리 고헤이타(服部小平太)의 칼이 요시모토의 목을 잘랐다.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전투는 전형적인 기습작전이라 할 수 있다. 양군에게는 모두 전투의지가 있었지만 이것은 노부나가가 치밀하게 조직한 전략의 승리는 아닐까. 어떤 전쟁에서 든지 정보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노부나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의 사정에 통달하고 있던 것, 비는 우연일지 모르지만 비 때문에 요시모토군이 습지에 빠져 이동이 쉽지 않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기다려 공격해 들어간 것은 지형의 이점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3)아네가와(姉川)전투 - 아사이(淺井)의 배반 -
-원구(元龜)원년(1570)4월20일에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의 공략을 위해 출발했다. 진격로는 22일에 日若州態河, 23일에 佐柿로 와카자(若狹)를 경유해 에치젠(越前)에 이르는 길이었다. 때때로 노부나가의 상경(上京)요청을 무시했던 아사쿠라(朝倉)로서는 노부나가의 공격을 에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북 오미(近江)로부터 직접 에치젠(越前)으로 가는 길은 아사쿠라의 경계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와카자(若狹)를 통해 에치젠으로 향한 것이다. 적의 예상방어선은 반드시 비껴가는 전략의 철칙을 노부나가는 지키고 있는 것이다. 佐柿를 출발한 노부나가는 25일에 데쯔쯔(天筒)산을 거쳐 26일에는 카네가자키(金ケ崎)성과 引壇성을 개성시키고 27일에는 코노메(木目)산을 넘어 아사쿠라씨의 본성 이치죠타니(一乘谷)의 문턱까지 왔다. 와카자(若狹)를 돌아서가는 공격을 보면 에치젠에 굉장한 속도로 진격해간 것이다. 그러나 28일 노부나가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동맹관계였던 북 오미(近江)의 매제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가 동맹관게를 단절해 버렸다. 나가마사는 절세미인인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お市)와는 부부였다. 노부나가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 소식에 「거짓말이다.」라는 그의 말로 보아 그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사이(淺井)측에서도 이유는 있다.
동맹을 맺을 당시 노부나가가 아사쿠라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경우 사전에 아사이가에세 양해를 구한다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통보도 없이 아사쿠라를 공격해 들어간 것은 명백이 노부나가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인 셈이다. 전국시대의 무대에 천하통일을 위해서는 도덕보다는 목적을 우선시하는 생각의 노부나가와 결과적으로 도덕과 의리를 우선시 했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를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편이 근대적 합리주의에 눈을 떳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가마사가 배반했다는 정보를 접한 노부나가의 행동은 신속했다. 곧 병사를 수습해 교토(京都)로 향했다. 퇴각을 위한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미방어의 도움으로 그 날 안에 쿠치기(朽木)를 넘어 교토(京都)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무리였다. 오미(近江)에서 잇키(一癸)가 일어나고 롯카쿠(六角)씨 또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5월9일 교토(京都)를 출발한 노부나가는 요지에 무장을 배치하고 기후(岐阜)로 도주했다. 5월19일에는 도중에 총포의 공격도 받았지만 추격병이 없는 길로 급하게 달렸다. 이 시점에서 보면 노부나가의 가장중요한 목표는 기후(岐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5월21에 기후에 도착한 노부나가는 병사를 정비하고 다시 오미 평정 길에 올랐다. 6월4일 六角義賢을 토벌해 남 오미를 평정,19일에는 일시귀국해 기후를 재출발해 도중에 長比,刈安의 양채를 함락시키고 21일에는 아사이씨의 본성인 고다니(小谷)성에 다다랐다.이 당시의 군세는 2만5천을 헤아렸다.
- 전투 개시 -
아사이 나가마사에게는 유리한 점이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고다니성이 299m의 높이를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또 하나는 노부나가군에게 비해 병력에 있어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다.(공성전에 있어 공략에는 10배의 병력이 필요했는데 수적으로 노부나가의 병력이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6월22일 노부나가는 일단 고다니성 목전에 병사를 배치하고 安如龍ケ鼻으로 진을 이동한 후 고다니성의 지성인 요코야마(橫山)성을 포위했다. 이 시점에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원군 6000명도 도착해 오다-도쿠가와의 연합군은 3만4천을 넘었다. 한편 아사이 군에게도 朝倉景健의 원군 1만이 도착해 아사이군도 만8천을 헤아렸다. 아사이-아사쿠라 측에서도 진중론이 있어 야전을 불가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요코야마성은 오미에서 에치젠에 이르는 충지에 있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양동작전으로 위기감을 적에게 심어줘 자신이 생각한 것으로 승패를 가른다는 노부나가의 전략대로 움직인 것이다.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은 야음을 틈타 6월28일 새벽 오요리(太衣)山에서 野田, 三田村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동은 이미 노부나가에게 간파당하고 있었다. 6월28일 오전4시 아네가와(姉川)의 남쪽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북에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이, 남에는 오다-도쿠가와의 연합군이 대치했다. 전투는 도쿠가와의 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 오가사와라 나가타다(小笠原長忠)의 부대가 아사쿠라군에게 돌격해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노부나가군은 아사이와의 전선에서 아사이군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磯野員昌)의 맹공에 의해 노부나가군의 제 2진인 坂井政尙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윽고 숨돌린 틈도 없는 난전이 되었다. 평야에서의 전투는 럭비의 스크럼과 같아 몸싸움으로 중앙부분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위험성이 있다.
노부나가군이 이런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사이군의 배수의 진을 친 배반으로 노부나가의 필승작전이 붕괴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쿠가와, 아사쿠라전선에서는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왜 총대장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가 총대장으로 출진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총대장 이에야스와 하나된 미까와(三河)무사단이 위력을 발휘해 아사쿠라군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붕괴된 아사쿠라군을 포착한 이에야스는 곧 사가끼바라 이에마사(神原康政)에게 측면공격을 명한 후 이어서 아사쿠라 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 좌익에서의 호전이 13단중 11단까지 무너진 노부나가군에게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도쿠가와군에 원군으로 출진했던 이나바 잇데쓰(稻葉一鐵)가 왼쪽으로 아사이군을 공격하고 요코야마 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氏家卜金,安東守就가 오른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예리한 칼과 같은 노부나가군의 공격이 아사이군의 허리를 짤라 대항도 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 노부나가 승리하다 -
고다니성을 향해 도주하는 아사이-아사쿠라군을 노부나가의 추격군이 오요리(太衣)山, 토고제(虎御前)산까지 추격했다. 아네가와(姉川)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얼마간의 전투유형을 보이고 있다. 우선 돌발사태가 발생한 각 전투에서의 곤란한 국면에서 보여준 스피드,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도 보이고 있지만 이 전투에서 보인 노부나가의 스피드는 다른 전국 다이묘(大命)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는 공격으로 아네가와(姉川)에서는 방어란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다음은 자신의 유리한 국면으로 전투를 이르게 하는 준비다.
고다니성 공략이 불리하다고 보고 야전으로 유인하기 위해 요코야마성을 공격했다. 백병전이 되면 반드시 수가 많은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아네가와(姉川)를 설정한 것이다. 야전에서는 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배치에서도 13단으로 구성하고 현실적으로 반 이상이 파괴되었지만 노부나가 본진까지는 돌파되지 않았다. 동시에 압도적인 수는 최후까지 여력이 되어 아사이-아사쿠라군의 숨통을 끊었다. 승리전으로 동요시키고 상대를 꾀어내고 유리한 곳에서 전멸시킨다. 이 아네가와(姉川)전투에서 보인 전략은 나중의 나가시노(長篠)전투에서 보다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아네가와(姉川)전투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反信長을 획책해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황한 요시아키는 反信長포위망을 좁힐 생각으로 각지에 밀서를 보낸다. 이윽고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原寺)가 병사를 일으키고 뒤이어 다시 아시이-아사쿠라가 오미에 출진한다.
이세(伊勢)의 나가시마(長島)의 잇코잇키(一向一癸)도 일어난다. 하지만 아네가와(姉川)전투에서 노부나가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각개격파로 무찔러 나간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 천정(天正)원년(1573)에는 아사이,아사쿠라,미요시(三好),천정2년(1574)에는 나가시마로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을 각개격파하고 있다
(4)나가시노(長篠)전투 -신겐(信玄)의 사망-
천정(天正)원년(1573)4윌12일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이 향년 53세로 사망했다.
노부나가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원구(元龜)2년(1571)의 겨울까지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사쿠라(朝倉),아사이(淺井),엔랴쿠지(延曆寺),마쯔나가(松長),롯카쿠(六角),나가시마(長島),잇키(一癸),모리(毛利)를 포함한 反信長포위망을 이루고, 원구(元龜)3년에는 미카다까하라(三ケ原)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완승했을 때의 신겐은 노부나가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당시는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천정(天正)원년 7월18일에 장군 요시아끼를 추방하고,8월18일에는 아사쿠라,27일에는 아사이씨를 멸망시켰다. 신겐의 죽음으로 노부나가를 고립시켰던 포위망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있다. 이어 천정(天正)2년 정월에는 가쓰요리가 아케치(明智)성을 포위하고 6월19일에는 동 토도우미(遠江) 최대의 요지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이 함락되기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기에 신장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신겐의 죽음을 알고 곧 아사이, 아사쿠라를 멸망시키고 가쓰요리를 긴장시킨다. 가쓰요리가 본거지에서 나오면 두려워 하는 척하여 과신,자만하게 만든다. 미카다까하라(三ケ原)에서 압승했던 다께다(武田)군단의 강력함을 아는 가쓰요리를 자만심의 함정에 빠뜨리고 무리한 전투로 이끌어 내는 것이 노부나가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만약 다께다군단이 정면충돌을 피한다면 노부나가군에게 패전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생각했던 것이 철포(鐵砲)부대의 새로운 이용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철포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다. 천문(天文)18년(1549) 장인인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을 대면했을 때 철포 500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어린 시절부터 철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사카이(界)와 오미(近江)國友의 대량생산지를 가지고 있어 다른 다이묘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다께다군단의 총포는 가신부담이었던 것에 비해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輕)에게 지급한 것을 보면 이 차이는 실로 큰 것이다.
- 나가시노(長篠)포위되다. -
천정(天正)3년 4월 가쓰요리가 움직였다. 미까와(三河)의 나가시노성을 공격한 것이다. 나가시노는 미까와의 산악지대에 있고 원래 도쿠가와씨의 세력하에 있었으나 원구(元龜)2년(1571)에 다께다령이 되고 천장원년(1573)에 다시 도쿠가와령이 되었다. 전년 6월 신겐이 사망한 곳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함락시켰던 가쓰요리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노부나가군을 얕잡아본 젊은 무사 가쓰요리는 노부나가의 덪에 걸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께다군중에서도 가쓰요리의 자신감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코사카 단죠(高坂單正)와 나이토 아키토요(內藤昌豊)가 진언을 했지만 승리에 취한 가쓰요리는 노신들의 진언을 무시했다.
또한 아버지 신겐의 유언도 사후 3년간 영지를 벗어나지 말라 하였으나,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가신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이 싫었다. 그러하였기에 전황이 유리한 때의 진중론은 통하지 않았다. 천정3년 4월11일 가쓰요리는 나가시노성을 포위공격하고 5월6일 二蓮木,牛久保공격후 이에야쓰가 있는 요시다(吉田)성을 공격했다. 한편, 노부나가는 5월13일에 대 다께다전에 급히 출진해 筒井順慶와 細川藤孝등에게 철포를 공출시키고 출진, 5월18일에는 나가시노성 서쪽의 지다라(志多羅)에 포진하고 極樂寺산에 본진을 배치했다. 그 수는 3만, 도착한 노부나가는 기마대에 대비해 마방책을 설치했다. 한편, 가쓰요리는 오다-도쿠가와 군이 접근하자 19일 밤 나가시노성의 포위공격을 풀고 일부를 토비노즈(鳶ノ菓)산에 배치하고 주력은 칸사가와(寒狹川)을 넘어 시다라가하라(設樂ケ原)북쪽의 淸井壓부근에 본진을 설정했다. 총 병사수는 1만5000명, 여기서도 다케다군 내부에서는 결전 회피론이 있었다. 馬場美濃守, 內藤修理, 山縣三郞兵衛등이 간곡히 가쓰요리에게 전투를 피할 것을 진언하지만 노부나가를 이기려는 생각만으로 가득찬 가쓰요리는 아도베 오오이노스케(跡部大炊助)의 주전론을 택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 괴 멸 -
5월20일 밤 오다-도쿠가와의 별동대 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金森長近들이 토비노즈(鳶ノ菓)산 (다케다군의 후방교란)으로 향하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5월21일 오전6시 다께다군단과 노부나가군은 蓮子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고지에 위치한 다께다군은 그 유명한 기마부대로 돌진해 내려가 노부나가군을 분쇄할 작전이었다. 한편,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각각 3중의 마방책을 蓮子川부근에 나란히 설치하고 3천정의 총포대를 5개로 나누고 마방책의 후면에는 1열로 배치시켰다. 사람간의 간격은 총포를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거리인 1.8m로 정했다.노부나가의 작전은 「적의 기마대가 들어오면 1町의 거리까지 와도 총포를 발사하지 않고 가깝게 다가오면 총포 천장으로 연속사격하고 1단씩 교대로 발사하라, 적이 더욱 강하게 밀고 오면 조금 물러나고 적을 끌여 들여 사격하라」라고 말한 것과 같이 3천정도의 철포를 천정씩 3단으로 준비해 총포의 장막을 친 작전이었다. 오다-도쿠가와군은 좌익의 佐久間信盛와 우익의 오쿠보(大久保)부대를 다께다군을 꾀어내기 위해 책(柵)밖으로 나왔다.
이것을 본 다께다군의 선봉 야마가타 아키카게(山縣昌景)가 3천여기로 산을 내려왔다. 전투의 불이 당겨진 것이다. 산을 내려온 야마가타가 본 것은 높다란 마방책과 엄청난 수의 철포부대였다. 책에 놀란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철포 3천정이 불을 뿜고 야마가타의 기마대도 하나씩 쓰러져 갔다. 당황한 야마가타는 마방책의 우측으로 돌격을 시도하지만 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에게 밀리고 말았다. 이 야마가타의 선봉대가 나가시노전투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번대 다께다 노부스미(武田信兼), 3번대 오바타 노부사다(小幡信貞), 4번대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晴)등의 이름난 다께다의 명장들이 이름도 없는 아시가루(足輕)의 총포에 쓰러져 갔다. 오후2시경, 노부나가의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瀧川一益을 1번대로 한 노부나가군과 맹위를 떨친 도쿠가와 배하의 미까와 무사단이 차례차례 다께다군단을 쳐부수었다. 이윽고 가쯔요리 본진도 무너지고 따르는 기는 6기정도 였다. 이로써 다께다군단은 불과 8시간만에 괴멸되었던 것이다.
- 무형(無形) -
나가시노 전투에 있어 승리의 이유는 무엇일까? 전략적으로는 마지막까지도 가쓰요리를 자만에 빠트려 반정도의 병력으로 무리한 결전을 감행하게 한 것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는 마방책을 사용한 철포의 활용이 컸다. 총포의 집중사용이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총포의 집중사용은 그 이전에도 볼 수 있다. (雜賀무리나 根來무리)하지만 마방책과의 절묘한 사용은 역사상 처음 시험해 본 곳이다. 전국(戰國)최강의 돌파력을 가진 다께다 기마대와 전투를 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기마대의 돌파력을 어떻게 무력화 시키는 것 인가였다. 말은 장애물이 있으면 놀라서 서버린다. 이 성질을 이용해 실전에 교묘히 응용한 작전, 이것이 마방책이었다. 돌파력이 없어져 버리면 총포로 쓰러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하나, 노부나가군의 승리를 찾아 보면 「형태가 없는」오다-도쿠가와군이 형태를 가진 다께다군을 무찌른 것이다. 다케다군은 기마돌진(백병전)이라는 필승의 패턴을 가지고 있던 것에 반해 노부나가의 신전법은 적이 예측하지 못하게 해 상황에 따른 전술의 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 다께다군의 패인이었다. 이에 반해 오다-도쿠가와군의 무형전법은 노부나가의 신전법에 적용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전투는 아군의 약점을 강하게 바꾸기 위한 전투였다. 기습의 오케하자마, 대군을 이용했던 백병전의 아네가와가 모두 그렇다. 그리고 이 최고의 걸작이 나가시노 전투에 집약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Ⅲ.결 론
5.봉건제적 무질서에서 국가적 통일로...
(1)재통일(reunification)
나라 전체가 다이묘들의 지배하에 완전히 나위어져 있었지만, 국가의 재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들도 바로 다이묘 들이었다 그들은 효과적인 지방체제를 창출했으며 농촌지역을 천황정부나 바쿠후 체제가 지배했던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통제 하였다. 국가통일의 과업은 16세기 중엽 출현했던 유력한 다이묘가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성취,했던 것은 결코 아니며 비교적 미천한 가문태생의 세사람-오다노부나가시(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農長秀吉).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역할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1560년대 전국을 무대로 활약했던 화려한 인물은 아니었다. 16세기 후반 세명의 위대한 통일 수행자들 가운데 그 최초의 인물은 오다 노부가나(織田信長;1543~1582)였다.아마도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이 가신들이나 그와 대립하는 적들에게 봉토를 수여하거나 인정해 줌으로써 획득한 지지를 바탕으로 군사적 승리를 굳혀 나가는 그의 용의주도함일 것이다 토지의 수여에 있어서 노부가나의 주홍색 인장[朱印]으로 찍은 소인은 그가 토지보유자들을 그들의 적들로 보호할 것이라는 하나의 보증서 였다. 마지막 쇼군이 죽은 후에는 노부가나의 인장이 일본내 토지권에 대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보증서 였을 것이다 따라서, 군사적 통일을 향한 최초의 단계는 지방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확장해 나가는 하나의 봉건정책의 연장이었다. 오다 노부가나(織田信長)는 그의 한 가신에 의해 너무나 일찍 뜻하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러나 국가통일의 추진력은 그의 유능한 부관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農長秀吉;1536~1598)의 지도하에 계속 되었다. 히데요시는 일본의 유력한 모든 다이요 들로부터 복종의 서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비할 바 없는 권력을 소유한 군사상의 최고주군이 되었다. 일본내의 모든 토지는 그가 직접 지배하는 영지의 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그이 인장으로 다름 다이묘에게 인정해 주었던 토지의 일부였다. 그러나 군사상의 통일이 즉각적으로 안정된 정치체제의 확립을 가져오지 못했다.
일본에 있어서 정치적 통일과정의 최후의 과업은 세 사람의 위대한 통일 수행자 가운데 마지막 인물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에게 남겨졌다.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에 대항할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1600년, 중부 혼슈의 산악 지역에서 벌어진 운명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와 그이 동맹자들이 반대세력을 패배시켰으며, 이로 말미암아 나라의 정치적 통일을 향한 길이 분명히 열리게 되었다.
(2)에도 바쿠후(江戶慕府)
세키가라하전투 이후에 나타났던 새로운 정치체제는 봉건적 원료로써 조립되고 봉건적 시멘트로 발라졌다. 새로운 바쿠후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이에야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군사상의 국가통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자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대처해야만 했다. 모든 다이묘들은 그들이 보유한 영지규모나 신분상의 혈통이 어떠하였든지간에 쇼군의 직접적인 가신으로 취급되었다. 16세기 봉건영주의 가신들처럼, 그들은 개인전 충성의 성약을 행함으로 쇼군에 결속되었다. 하나의 집단으로는 다이묘들은 공직에 취임할때에는 쇼군에게 그들의 충성을 맹세했고, 어떤 상속자가 다이묘의 지위를 계승할 때에도 역시 쇼군에게 충성할것임을 피로써 표시하였다.
에도바쿠후(江戶慕府) 체제는 위로부터의 체계적인 봉건적 관행들을 다이묘들에게 부과함으로써 이들을 지배해나가려는 의로도 형성되었다. 16세기의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바쿠후는 나라 전체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권을 이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러한 봉건적 형식들의 상당수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쇼군은 봉건 대영주로서보다는 오히려 공적인 책임을 지닌 지역의 지배자로서 더욱 간주되었다. 이에야스와 그이 후계자들이 받들었던 유교주의 정치사상의 영향 아래에, 천황이 쇼군에게 체제의 평화를 유지하고(失政)을 방지하는 권한을 위임했다는 이론이 발전하였다. 이 권력위임론에 따라 쇼군은 다시 다이묘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고 다이묘은 쇼군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영지를 지배하였다. 이 권력 위임론은 일본에서 정치권력이 어떻게 발달했느냐에 대한 역사적 기술로서는 부확정확 것일지 모르나, 일본이 실제적으로 통치했던 방식에 관한 기술로는 매우 정확한 것이다. 17세기 동안에 일본은 봉건적 형식들의 외관 아래에 점차로 지방분권적 관료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3)관료제 성장
지방 다이묘 통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제도룰 형성함에 있어서, 바쿠후 당국은 결코 형식상으로 완전한 통치권에 관련된 모든 권한들을 행사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바쿠후는 서유럽 봉건후기의 군주체제들과는 달리 결코 국가적인 조세제도를 강요하지 않았고, 용병이나 징집을 통해 군대를 창설하지도 않았으며, 나아가 법률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민사에 관련된 분쟁들을 판결하는 권리는 토지의 소유자가 다이묘든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바쿠후의 가신이든지간에 토지보유자가 정상적으로 갖고 있었으며, 일상적 업무에 있어서도 지방의 행정은 바쿠후와 다이묘에 의해 나뉘어 분담 되었다.
국가가 상당히 많은 자치적 혹은 반(半)자치적인 정치단위로 분할됨에 따라 관료제적 기구들의 급증을 가져왔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이 이마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통치했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바쿠후는 1만7천명 이상의 민간인관리들과 군인관리들로 구성된 행정상의 위계조직을 지녔고, 다이묘들도 역시 이와 유사한 자신들이 행정참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이 무사는 열정적이고 용맹스러우면서도 흔히 겉치레를 중시했던 자기 조상들과는 달리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 자기를 조절하고 절제하며 열심히 일하는 17세기의 무사는 고도로 통제된 관료제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마음이 평정을 구하는 존재였지, 늘 전쟁만 대비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무사는 전투에서 자기 주군을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여전히 배우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희박하였다. 주군에 대한 복종은 종종 무사의 사회적 역할과 같은 공적 봉사라는 말로 정의되었다. 17세기말의 한 작가에 따르면, 무사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사회적으로 그 지위가 우월했는데, 그것이 무사가 전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결한 삶을 살며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세계에 평화를 장려하고 가져왔기”때문 이었다. 이 평화를 사랑하는 이상은 확실히 이전 시대의 군사소설들 가운데서의 무사 주인공들로부터 나오는 아득한 외침에 불과했고 이들이 일반 사람들에게서 축하받는 이유는 타인에게 모범을 보였던 도덕적 본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과시한 대담함과 활력 그리고 군사적 무용 때문이었다.
(4)사회구조의 응결
무사계급의 관료화는 이들을 합법적인 특권계급으로 전환시켰다. 바쿠후는 처음 백년 동안 사회를 법과 관습에 의해 구별하고 분명하게 정해진 각 신분집단으로 나누려고 시도했다.
1600년 이전에 시작되었던 사회구조의 고착화는 평화가 정착되고 계층이동에 대한 기회가 점차 쇠퇴함으로써 더욱 가속화 되었다. 17세기 초기에 이미 확고하게 확립된 계급의 분리는 바쿠후와 개별적인 다이묘들의 법률에 의해 강화되었다. 무사계급만이 성(姓)을 지녔고, 또 계급의 주요한 상징인 두 개의 칼을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또한, 바쿠후는 각계급에 적절한 의복의 모양, 집의 규모, 소비급관까지 각 계층들 사이에 서로 차별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17세기중엽에 이르러 유교로부터 빌려온 사회적 효용이론에 따라 신분제적 사회를 정당화 하였다. 유가의 사회관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은 4계급, 즉 관리(士).농민(農).장인(工).상인(商)으로 나뉘어졌다. 각 계급은 사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의 유용성에 따라 우선권이 주어 졌다. 대체로 이러한 불평등 주위에 입각한 사회도덕론은 거의 도전받지 않았다. 확실히 무사가문은 상인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상속인으로 삼을 수 있었고, 혹은 가난한 무사가 장인이나 수공업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봉급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화계급들 사이의 사회이동은 매우 드물었고 또 공인 되지도 않았다.
토쿠가와체제의 평정은 1630년대와 1640년대에 걸쳐 바쿠후가 채택한 쇄국정책에 의해 더 장기간 지속 되었다. 토쿠가와가문의 지도자들은 스페인의 필리핀침입에 대해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유럽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외국무역상들의 활동을 심히 축소 시킴으로써 외국의 정복에 대비했다. 입국이 허용된 외국인은 단지 네덜란드와 중국의 상인들이었고, 내국인들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해외무역과 탐험에 대한 일본인들의 노력은 16세기에 시험적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끝나고 말았다. 역설적으로, 일본은 비록 해양국가이기는 했지만 바다를 외부세계에 대항하기 위한 장벽으로 사용했지, 결코 외부와의 접촉을 위한 문호로써 사용하지는 않았다.
(5)봉건적 형식들의 폐지
일본만이 특수하게 지녔던 후기 봉건제의 잔재가 마지막으로 붕괴되는 현상은 약동적이고 침략적이었으며, 이미 산업화가 이루어진 서구의 강요로 초래되었다. 19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영국 그리고 미국인들이 동아시아 각국들과 무역을 개설하는 데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을 깨드리기 위해 간헐적인 시도들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1853년과 1854년에 페리(perry)제독이 일본에 도착하기까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페리의 굳은 의지는 일본으로 하여금 커다란 국가적 위기를 야기시킨 외부세계와의 상업 및 정상적인 외교 관계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요구 하였다
결국, 1870년대 초반에 정부는 국가의 힘을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잔존해 있던 봉건적 제도들을 폐지하기 시작하였다. 신분제적 구조의 옛 제도들은 천황의 모든 종속자들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제거되었다. 농민들에게 토지소유의 권리가 주어졌고, 이전의 무사들도 스스로 선택하여 어떠한 작업에나 종사할 수 있었다. 옛날의 행정체제도 역시 분해되었다. 다이묘들은 점차적으로 영지의 자치권을 빼앗겼고. 1871년에 이르러서는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통치하는 지사제(知事制)로 대체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사계급의 특별한 지위가 침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무사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된 봉급이나 소득을 계획적으로 빼앗겼으며, 1873년에 이르러 국민 개병제가 확립됨으로 특별히 전사라고하는 특권계급의 존재를 정당화할 이유가 마침내 사라졌다. 무사만이 두 개의 검을 착용할수 있었던 이전의 관행을 폐지한 법령이 1876년에 공포됨으로써 봉건체제의 마지막 자취에 종지부을 찍게 되었다.
일본에서 봉건적 특권들이 쉽게 제거되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부분적으로 새로운 정부가 정치적 무질서를 통제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찰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경찰의 창설은 다이묘들과 가신들에게 재정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들의 1년 봉급은 현금지불이나 혹은 정부에서 발행한 채권으로 대체되었다. 무사계급출신의 많은 구성원들은 이러한 재원을 수도에서 사업을 빌리거나 아니면 정부에서 주도한 산업화정책에 참여하는 자본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왜 그토록 저항받지 않았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봉건제의 잔존형식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렸던 데에 있을 것이다. 무사들이 다이묘을 따라 전투를 수행한 이래로 거의 2세기 반 이상이 지났고, 무사들에게 늘 준비태세를 유지시키기 위해 처음 생겨났던 사회적. 정치적 관례들도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결국 강건한 봉건체제가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일시에 쓰러진 것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토쿠가와 바후쿠에 의해 이미 화석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봉건체제가 새로운 천황정부에 대해 저항의지를 그토록 적게 나타났던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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