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關전쟁, 薩英전쟁 - 마지막 洋夷.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같이 외세와의 대립은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일본의 개항과정은 미국의 포함외교로 인한 무혈개항이었고, 이후에도 본격적인 일본 막부 정부와 외국과의 충돌 없이 유신을 맞았다.
다만 일본 막번 체제 하 각 번들의 독자적인 대립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이 시모노세키(下關) 전쟁(혹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이라고도 한다.)(주68)과 사츠에이(薩英) 전쟁이다.
이 둘도 외세와의 대립이라고 해야 할까 싶을 정도이긴 하나 일본과 외세와의 대립은 이 사건들이 거의 유일하고, 또 조선과 일본의 균형도 맞춰야 하는 이상 이 두 사건을 다루기로 하겠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을 다루는 데는 몇 가지 주의점이 있다. 하나는 이 사건들이 개항 이후에 벌어졌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개항 이후 막말이라고 불리는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두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면 일본의 개항까지 이어지나, 이는 후술하겠기에 여기서는 간단히 이 두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과 사건의 경과, 그리고 결과와 의미만 다루기로 하겠다.
후술하겠지만 안세이(安政) 5년(1854), 일본은 미국에 개항, 미일화친조약을 맺었고 이어서 안세이 9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곧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았다.
이를 안세이 시기 5개국과 맺은 조약이라 하여 안세이 5개국 조약이라고 한다. 내용은 포함외교가 다 그렇겠지만, 가나가와(神奈川:정확히는 요코하마橫賓), 니가타, 효고(兵庫), 나가사키, 하코다테(箱館)의 5개항을 개항하고, 최혜국 대우 조건과 외국인의 치외법권과 협정관세를 인정하며, 산업보호조항 없이 일거에 자유무역을 실시한다는 불평등조약이였다.
그나마 막부는 거류지 밖에서의 외국인 활동제한을 강조하였고, 국내시장에서 외국인의 직접적인 경제침략은 막을 수 있었다. 또 요코하마에 몰려온 상인들로 인해 상품경제는 더욱 발전하고 일본의 민족자본의 자립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천하를 호령하던 막부가 겨우 배 4척을 이끌고 온(주69) 페리 제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개항하게 된 것이었고, 이는 세계를 정복한 몽고의 침공도 막아냈다는 일본인의 자부심에 큰 상처였다.
또 외국과의 첫 근대적인 조약 같은 큰일을 형식적이나마 조정의 승인 없이 막부가 임의로 처리했다는 것 역시 큰 정치적 논란거리였다. 최소한 형식적이지만 정신적인 국가 원수이기도한 천황을 무시했다는 일이었다.
게다가 굴욕적인 조약 내용과 그 졸속처리 과정에서 막부의 무능과 무력을 여지없이 드러내, 마침내 지방 번들 사이에서는 막부에 반대하고 예전처럼 천황 중심의 정부를 세우자는 존왕론(尊王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존왕론의 대표주자는 쵸슈, 사쓰마, 미토번이었다. 하지만 미토번은 막부의 종친이며, 번내 양이 강경론자들(주70)과 번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인해 점점 처지게 되었고, 이후 쵸슈와 사쓰마가 존왕론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쓰에이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나마무기(生麦)사건이었다. 이전부터 사쓰마계 낭인들에 의한 영국인 암살이나 영국 공관 방화 사건이 있긴 했으나, 분큐(文久) 2년(1862) 8월 21일, 당시 번주 자리는 은퇴하였으나 아직도 정계에서 큰 발언력을 가지고 여전히 활동하고 있던 전대 사쓰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교토에서 천황의 막부 인사개혁 명령을 에도의 막부에 전달하고 교토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 행렬이 요코하마 교외의 나마무기를 지날 때, 말을 타고 있던 영국 상인 일행 4명과 맞닥뜨렸다. 행렬의 선두에서 길옆으로 비켜나고 말에서 내릴 것을 호령했으나, 영국 상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노한 무사들은 무례를 꾸짖고 칼을 뽑아 영국 상인 리처드슨을 죽이고 일행인 클라크와 마샬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여성인 마가렛 보로딜은 그 참상을 보고 졸도했다. 이것이 나마무기 사건이다.(주71)
영국인이 백주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칼에 맞아 비참하게 죽자, 요코하마의 외국인들은 요코하마에 정박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해병대를 동원하여 히사미쓰를 체포하려 하였다.
당시 영국의 주일 공사 대리 닐는 우선 외국인들을 진정시키고 본국에 통보했다. 분큐 3년(1863) 5월, 영국정부의 명령으로 닐는 정부 당국이자 책임자인 막부에 대해서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사과와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
일단 막부는 요구대로 10만 파운드를 지급했으나 영국정부는 6월 27일 요코하마에서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영국함대를 가고시마 만에 파견, 당사자인 사쓰마번에 대해서는 범인을 영국 사관 앞에서 처형할 것(주72)과 배상금 2만 5천 파운드를 요구했다. 사쓰마번은 영국 측을 비난하며 회답을 연기해 교섭의 장기화를 노렸다.(주73) 7월 2일 사쓰마번이 시간을 버는 것을 간파한 영국함대는 사쓰마번을 압박하고자 가고시마 만에 정박한 사쓰마번의 기선 3척을 나포하고, 무력시위로 정박한 류큐(琉球)의 상선들을 격침시키고 사쓰마번의 근대공장인 집성관(集成館)을 포격하자, 이에 사쓰마번 포대의 80문이 포격을 시작했다. 영국 함대는 함포 100문을 동원해 포대와 가고시마 시가지에 반격을 시작했다.
사쓰마번의 대포는 구식이라 사정거리가 짧았으나 영국군은 당시 폭풍이 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사격을 위해 사쓰마번 포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영국군은 포대를 침묵시키고 가고시마 시가지에 포격을 했으나 바람을 탄 포탄이 영국군 기함 유리아라스 호에 집중돼 함장 존스링 대령과 부함장 윌모트 소령이 전사했다
. 포격전은 3일간 지속된 후, 영국 함대는 탄약과 식량 보급을 위해 7월 4일 요코하마로 회항했다. 영국군은 함대손실 대파 1, 중파 2과 유리아라스 호 함장 존스링 대령 이하 사상자 63명이 났고,(주74) 사쓰마번은 전사 1, 부상 7을 냈으나 모든 포대가 파괴되었고 가고시마 시가지의 10%가 불에 타 버렸다.
그리고 사쓰마번 근대공장인 집성관이 파괴되고 나포된 기선 3척도 침몰해, 공업생산능력을 잃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막부는 사쓰마번에 2만 5천파운드에 해당하는 6만 300량을 빌려주어 지급하게 했고, 7월 11월 사쓰마번과 영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사쓰마번에 양이의 무모함과 서양 근대 무기의 위력, 특히 영국의 힘을 알게 해 주었고, 영국은 사쓰마번이 결코 만만한 지방정부가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또 영국은 막부가 조정의 허락 없이 조약을 받을 경우 사단이 생기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조정과 직접 교섭해 조약의 칙허를 받아야 양이 정책을 버리고 개항 정책을 취할 수 있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사쓰마번을 지원해 막부를 뒤엎게 할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의 힘을 알게 된 영국과 사쓰마번은 보기 드물게 서로 손을 잡게 된다. 영국은 사쓰마번의 군함 구입을 중개하고 서양 무기를 판매하는 등 사쓰마번과 협력하게 된다.
한편, 이런 영국의 움직임을 안 프랑스는 막부를 지원해 영국을 방해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막부에 서양무기를 판매, 지원하는 한편(주75) 막부의 개혁정책에 조언을 가했다.
막부 역시 프랑스식으로 군제를 갖추는 등 프랑스와 강하게 밀착했고, 이후 일본에서는 막부와 쵸슈, 사쓰마번이 대립하고 그 뒤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암투를 벌였다.
사쓰에이 전쟁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것에 반하여, 시모노세키 전쟁은 치밀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선술한대로 막부의 개항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나, 몇 가지 직접적인 요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당시 막부의 가장 큰 문제는 조정과의 조약 칙허 문제였다.
코메이(孝名:1831~1866) 천황은 막부와는 친밀했으나 당연하겠지만 뼛속까지 양이주의자였다.(주76) 더욱이 교토에는 天誅組(주77)가 친막부인사에 대한 암살을 자행하고,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쵸슈번이 코메이 천황과 조약칙허 문제로 대립하던 다카츠카사(鷹司)를 관백에 취임시키는 등 교토 정계를 주도하며, 존왕양이파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아네가코지 긴토모(姉小寺公知)를 조정 요직에 앉혀 조정을 장악하는 등의 양이 분위기가 강해지자, 분큐 2년(1862)년 10월에 개국정책을 진행하던 막부에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양이를 실시하라는 破約洋夷의 칙명을 내렸다.
막부는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지만 우선 칙명을 받고, 교토 정계에서 날뛰는 존왕양이파를 누르기 위해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다음해 3월 교토로 上洛했다. 230여년만의 상락이었다.
하지만 교토에서도 조정과의 교섭은 신통치 않았고, 조정은 막부에 대해 오히려 5월 10일자를 기해 양이를 실행하라고 명했다. 이 이에모치의 상락은 그동안 막부에 눌려 숨죽이며 살던 조정 권력의 부활을 증명했고, 이후 교토 정계가 나라를 움직이게 되었다.
이 조정의 양이실행 칙명과 장군의 상락,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선포된 막부의 양이실행 포고로 힘을 얻은 쵸슈번은, 말 그대로 5월 10일 쵸슈번 군함을 동원해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가는 미국 상선 펜블로그 호를 포격하고, 이후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프랑스 군함 킨샨 호, 네덜란드 군함 메두사 호를 포격했다.
그러나 6월 1일 미국군함 와이오밍 호가 시모노세키를 습격해 반격하는 쵸슈군 군함 세척을 침몰시키고 시모노세키 시가지에 포격을 가했으며, 5일에는 프랑스 군함 두척이 시모노세키 포대에 상륙해 포대를 파괴했다.
이는 훗날 시모노세키 전쟁의 배경이 된다.
이런 안팎에서 벌어지는 쵸슈번 주도의 강경 양이 정책에 대해, 막부와 제번들은 불만을 가졌고, 분큐 3년(1863) 8월 18일 아이즈(會津), 사쓰마번 등은 교토를 습격해 쵸슈번과 산조 사네토미 등의 존왕양이파 공경 7명을 몰아내는 8.18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겐지(元治) 원년 6월 4일. 존왕양이 강경파가 교토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에 막부측 인사를 습격, 암살하며 그 틈을 타 천황의 신변을 손에 넣고 쵸슈번으로 옮긴 뒤 막부에 대해 朝敵을 선포해 토벌령을 내려 막부를 타도하게 하려는 쿠데타 음모(주78)를 꾸민 것을 교토수호대 휘하 치안유지 조직인 新選組가 알고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池田屋)에 모여 있는 존왕양이파를 습격해 9명을 사살하고 23명을 체포하였다
. 이 사건을 이케다야 사건이라고 하고, 후술하겠지만 이후 이어진 하마구리고몬(御蛤門)의 변(킨몬[禁門]의 변)과 조적 규정으로 인한 제1차 쵸슈정벌, 이후 쵸슈벌의 굴복과 보수파 집권. 다시 쵸슈내 존왕파와 보수파간의 내전 등으로 다시 쵸슈번이 제대로 존왕전선에 나서는 것이 다음해인 게이오(慶應) 원년(1865)이기에, 이 이케다야 사건을 “유신을 1년 늦춘 사건”이라고 한다.
이렇게 교토에서 존왕양이 공경들이 쫓겨나고, 존왕양이 동지들이 일망타진 당하자 쵸슈번의 존왕양이 강경파는 번병 3000명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 궁전(御所)을 둘러싸고 사쓰마, 아이즈, 쿠와나(桑名)번군, 막부군 등과 싸웠다. 특히 하마구리고몬 일대가 최 격전지였기에 이 사건을 하마구리고몬의 변이라고 부른다
. 하루 동안의 이 전투에서 쵸슈군은 참패해, 쵸슈군 지휘관들은 대개 전사하거나 자결했고, 교토의 쵸슈번 야시키는 폐쇄되었으며, 교토에서 쵸슈의 세력은 더 이상 발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전화는 교토시에 옮겨 붙어 교토시를 폐허로 만들고(주79) 이재민을 들끓게 하였다. 그리고 전투가 감히 천황이 있는 궁전 바로 문밖에서 벌어졌고, 특히 쵸슈번의 유탄이 궁전 마당에 떨어져 작렬해, 폭발에 놀란 훗날 메이지 천황이 되는 무쓰히토 황태자가 기절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격노한 코메이 천황은 7월 23일 쵸슈번을 조적으로 선포하고 토벌령을 내린다.
이에 막부에서는 쥬고쿠(中國),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21개 번에 오랜만에 동원령을 내려 15만 대군을 준비하였다. 이때, 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났다.
겐지 원년(1864) 6월 19일, 영국공사 얼코크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상의해 쵸슈번 포대 공격계획에 대한 각서를 작성해, 각국은 이에 서명했다.
그리고 7월 우선 막부에 제출했던 해협봉쇄의 해제 등에 대해서 정리한 파리 협정을 막부가 파기했기 때문에, 4개국은 공격을 결정하고 시모노세키로 연합함대를 파견했다. 한편 하마구리고몬의 변 후, 영국에 유학하고 있던 쵸슈번의 이토 슌스케(伊藤俊輔 후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분타(井上聞多 후에 이노우에 카오루)가 귀국했다.
그들은 작년 쵸슈번의 외국선박 포격사건의 보복을 위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함대가 쵸슈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것이다. 그들은 이 공격을 막기 위해 영국공사 얼코크와 번주에게 손을 써 보았지만 이루지 못하였고, 겐지 원년(1864) 8월 5일, 함선 17척, 함포 288문, 병력 5000여가 동원된 연합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했다
. 그때 쵸슈번은 함선 없이, 마에다(前田) 포대에 20문, 단노우라(壇ノ浦) 포대에 14문 등 합쳐서 100문 정도고, 배치된 병력도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특히 포의 위력과 사정거리 성능에서 압도한 연합군 함대는 반나절 만에 포대를 침묵시키고, 이어서 다음날에는 육전대 2천명을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했다. 마침내 8일 정오에 전쟁은 연합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화의교섭을 위해 쵸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신사쿠는 연합군이 요구한 배당금에 대해, “양이는 막부로부터의 명령이니까 그쪽에 가서 청구하라”(주80)라고 뻗대었고, 영국이 요구한 히코시마(彦島) 조차에 대해서는 일본의 신대부터의 역사를 죽 늘어놓아 외국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조정으로부터는 조적으로 선포되어 토벌령이 내려진 상태고, 막부는 이미 15만 대군을 준비하고 있는데다, 재치로 넘기긴 했으나 배상금을 막부가 내는 이상 막부에 신세를 진 꼴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몸으로 양이의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후 쵸슈에서는 양이론이 자취를 감추고, 이후 개국론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영국 역시, 영국에 유학생이 많고 젊고 패기있는 점이 매력적이었으며 또 사쓰마의 경우처럼 막부가 있는 한 개항 정책에 걸림돌이 되기에 쵸슈를 적극 지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살펴보았다. 이는 전국적인 대외항쟁은 아니지만 일본의 몇 개 안되는 외세와의 항쟁이었다. 사츠에이 전쟁은 우연한 계기로 일어났고, 시모노세키 전쟁은 개항 이후 일본의 정세 흐름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졌다. 둘 다 주요 상대는 영국이었고, 한편 영국은 이기긴 했으나 상대에 매력을 느끼고 자신들의 정책을 위해 두 번을 지원하여 프랑스가 밀어주는 막부와 대결하게 하였다.
병인, 신미양요와 사츠에이, 시모노세키 전쟁을 살펴보면 둘 다 외세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두 전쟁을 계기로 최고 통수기관인 삼군부의 복설과 2단계 수도권 방위 계획, 군 내 개혁 등의 병권 장악의 계기로 삼고 오히려 그 기반을 단단히 다져나갔지만, 일본의 두 전쟁은 이를 계기로 전쟁에서 패한 두 번은 영국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우는데 비해 큰 상관이 없는 막부가 오히려 배상금만 물게 되고 그 권위가 추락하는 등 점점 입지가 약해져 갔다.
병인, 신미양요에서 프랑스와 미군은 결국 강화도에서 철수하였고, 이로 인해 대원군의 양이 정책에 정당성만 부여, 대원군은 쇄국 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은 두 번이 패배하여 양이의 무모함과 서양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두 번다 양이를 버리고 개국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은 병인, 신미양요 이후 아예 조선에서 손을 떼게 되지만, 영국은 전쟁에 이기고도 두 번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매력을 느끼고 적극 지원하여, 차후 막부를 뒤엎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데 큰 힘을 보태게 된다.
또 두 번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메이지 신정부에서는 기존 막부의 전통적인 우방인 네덜란드나 프랑스 대신 영국을 주요 우방으로 삼게 되어 정치, 사회, 문화, 군사 등 여러 면에서 영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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