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식민지 시기 동남아시아

구름위 2013. 2. 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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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야(Malaya)의 근대화는 영국의 경제적 목적에 따른 말레이 식민통치 원칙, Divide and Rule (분할 통치)를 통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필요에 따라 영국의 말레이 식민정부는 대영제국 동남아 식민지역으로부터 대량의 노동자들을 말레야로 이민시켰고, 식민지의 경제구조를 인종적, 계층적으로 분업시켰다. 인종, 사회 계층에 따라 분리된 식민지 노동인구는 다시인종적, 언어적으로 분리된 식민지 교육제도를 통해 재생산될 수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 경제이민정책은 말레이 사회를 새로운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변모시켰을 뿐만 아니라, 탈식민지시대 말레이 근대화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정치 문화적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점을 가지고 말레이 국가 형성과정을 살펴보겠다.

 

 

 

2. 국가형성의 식민사적 배경

 

 1896년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형성된 말레야(Malaya)는 말레이 반도 연방과 싱가포르를 포함한 지역을 일컫는다. 19세기 동남 아시아 식민화 과정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 갈등과 경쟁을 심화하고 있던 중, 영국은 1824년 화란과 맺은 조약을 통해 말레이 반도를 공식적인 영국령으로 만들었다.(Simone & Feraru, 1995, p 32-59)

 

 말레야가 식민국가로 형성되기 이전인 1819년부터 싱가포르는 스템포드 레플경(Sir Stamford Raffles)에 의해 자유무역항으로 개발되어 이미 영국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세기 초 싱가포르가동남아 중국인들의 상업활동 거점으로 번성하자, 중국인들 이외에도 인도인들과 수마트라나 인근 인도네시아 섬들로부터 온 말레이인들 또한 싱가포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부터 싱가포르는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다민족 다문화 지역으로 번성하여 1858년 중국인은 싱가포르 인구의 5분의 4를 차지하게 되었다.(Simone & Feraru, 1995, p 55)

 

 영국이 말레이 반도를 식민국으로 공식 선포하면서 말레이 사람들은 그들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갖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 말레이 반도에는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부미푸트라(Bumiputeras: son of the soil)로 불리는 말레이 토착민들이 13세기에 전파된 회교의 영향권에서 여러 술탄들(Sultans)이 지배하는 영토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식민국 말레야에 대한 영국의 주관심은 경제적 이윤에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는 실용노선을 택했다. 즉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 식민국가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말레이 회교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영국의 말레이 식민 통치구조는 정치적으로 복잡했다. 경제적으로 일찍 개발된 페낭(Penang), 말라카(Malacca), 싱가포르(Singapore)은 직접통치를 했고, 말레이 연방국(The Federated Malay States)은 간접통치를 했다. 그리고 말레이 반도 북쪽의 다른 지역은 자유 방임적 입장에서 감독하고 있었다.

 

 말레야에서의 영국의 식민 경제정책은 천연고무생산과 주석광산개발을 통해 식민지 수출 무역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식민경제개발을 위해 19세기말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은 말레야에 중국인과 인도인들을 많이 이주시키는 노동자이민정책을 폈다. 결과적으로 과거 인종 문화적으로 동질적이었던 전통 말레이 사회는 이질적인 다민족 다문화 식민사회로 급격히 변모되었다. 근 130년의 식민 기간(1824-1957) 동안에 중국인과 인도인 이민자의 인구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해말레야의 독립당시에는 전체인구의 거의 50%에 달하게 되었다.(Simone & Feraru, 1995, p 32-59) 영국 식민 정부의 경제정책에 따른 급격한 인종적 다양화와 문화적 분리화는 식민지의 사회 구성에 뿐만 아니라 독립 후의 사회 구성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말레이지아와 싱가포르의 분리를 가져왔다.

 

 영국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식민지경제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분할 통치 원칙을 말레이 식민정책 제반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경제위주의 영국의 말레이 식민통치는 말레이 토착민, 중국인, 인도인으로 구분되는 세 개의 민족 분할 지역사회가 유지되도록 했고 민족구분에 따라 차별적 직업구조가 형성되었다. 말레이 사회 안의 귀족 계층 출신은 정부의 하위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고, 중국계 이민근로자들 중 많은 수가 도시에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말레이 평민은 전통적인 농업과 수산업에, 그 밖의 다른 아시아 이민 노동자들 대부분은 광업에 종사하였다.

 

 영국의 말레이 식민정부는 다민족국가로 변모한 말레이 식민지 경제 운영의 성공여부가 사회 내에 민족적 분규와 갈등 없이 사회질서와 문화적 평정을 유지하는 데 달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식민기간 중 말레이 사회는 말레이, 중국, 인도계로 구분되는 세 개의 민족 지역거주지역으로분할 통치되었고, 세 개의 다른 언어, 종교 관습, 학교교육, 사회조직이 각기 별도로 운영 유지되었다.1)

 

 

 

3. 영국의 말레이 식민 교육정책

 

 영국은 경제, 문화적으로 말레이, 중국, 인도계의 세 개의 민족으로 구분된 말레이 사회구조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복수 민족학교교육제도를 지원하였다.

 

 영국이 식민지 제도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전에 말레야에는 회교경전을 배우는 쿠란학교(Quran schools)가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쿠란학교는 말레이 전통 무속신앙의 영향아래 이슬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말레이 전통 지배계층 자제들은 학교에 다니는 대신 집에서 개인교수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말레이 고유 문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말레이 귀족들은 아랍어 작문 또한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문해율은 말레이 지배층에서도 그리 높지 않았다.대신 전문적으로 훈련된 대필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말레이 사회에 지식인, 학자층을 형성하기에는 수적으로 부족했고, 여러 가지 지역적 전통 관습에 묶여있어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2)

 

 영국의 말레이 식민지 근대화 과정은 전통적인 말레이 지배계층의 자제들을 식민지 행정 하급관리직에 등용하기 위해 차별적으로 제공한 영어학교 교육정책을 통해서 드러난다. 반면 말레이평민들은 전통적인 농업과 수공업에 계속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 이들이 다닐 수 있는 초급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이원적 학교교육은 영국이 말레이 평민들의 생활에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말레이 전통사회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는 한편, 영국식 교육을 받은 말레이 지배 계층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식민통치를 해나갔음을 보여준다. 1918년 당시 교육 자문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조지 막스웰경(Sir George Maxwell)은 말레야에서 영국의 [교육]목적을 단지 어민과농부의 자식들이 그들의 아버지보다 나은 어민과 농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3) 라고 기술하고 있다.

 

 영국 식민정부는 말레이(Malay)와 타밀(Tamil)어 학교를 별도로 설립하여 말레이 토착민들과 인도 이민 노동자들에게 초등교육을 제공한 반면 중국계 이민자들을 위한 학교설립은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이 스스로 설립한 중국계 학교는 영국 식민정부의 지원 없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고, 중국의 민족주의 교육과 공산주의 교육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은 애초에 말레이 토착민 교육만을 지원하고자 한 영국 식민지 정부의 정책원칙을 더욱 확고히 하게 만들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말레이, 타밀, 중국어로 구분되는 복수 민족학교교육제도를 초등과 중등단계까지의 교육으로 규정하여 식민지 내 고등교육은 영어학교 교육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였다. 식민말기 영국이 말레야에 설립한 최초의 대학 역시 영어만을 사용하였다.

 

 이 같은 식민지 제도교육의 차별화 정책은 말레야에서 분리 통치 원칙에 근거한 영국의 식민지 근대화정책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복수 민족학교 교육제도에서 차별적구분은 일차적으로 언어사용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 사람들이 인종적, 문화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식민사회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진로는 바로 영어를 사용하는 학교교육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정부관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영어학교의 체계적인 발달은 1903년 말레이 연방 장학관으로 부임한 윌킨슨(R. J. Wilkinson)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제안을 바탕으로 1905년 영국의 사립학교를 모델로 한 The Malay College of Kuala Kangsa가 설립되었다. 말레이 이톤(the Malay Eton)이라고 불렸던 이 학교는 주로 말레이 지배계층의 자제들을 선발 교육하였지만, 실제 교육내용은 영국 본토의 엘리트양성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국이 말레야에서 마련한 식민 엘리트양성교육은 다분히 직업적이었다.4) 엄밀한 의미에서 말레야 안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학교는 인격형성을 위한 영국적 전통 교양교육과는 거리가 먼 실용적인 직업 교육을 하고 있었다. 1902년 식민지 내의 영어학교제도를 평가하기 위해 구성되었던 키너슬리(Kynnersley)위원회는 영어학교의 가장 중요한 교육기능은 학생들이 졸업 후 능률적인 사무원(Clerk)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일이라고 결론짓고 있다.5) 또한 식민국 학생들이 영어 학교에 입학한 동기 역시 영어교육이 보장하는 상업적 가치와 더불어 식민사회 내 경제적 신분상승을 하려는 실용적인 이해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1939년 H. J. Channon 교수가 쓴 회고록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말레야의 고등교육 이념은 전통적인 영국의 대학교육 이념과는 대조적이었다.6) 영국이 말레야에 설립한 영어 교육 기관은 뉴만이 자유주의 대학이념과 상반된 개념으로 표현하였던 mechanical, particular and external한 성격을 갖고 발달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말레야에는 영국 전통인 자유로운 심성을 닦는 전인교육적 이념 대신에, 기계적이고, 부분적인 기술과 외부의 상황에 순응하는 직업 기술 훈련이 근대교육의 목적으로 자리잡았고, 나아가 식민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증설된 영어교육기관들에 입학한 학생들 대부분은 중국계 인도계 학생들이었고, 말레이 특권계층의 자제는 소수에 불과했다.(Loh, 1975, p 24) 영어교육기관에 입학하는 중국계 학생수는 계속 증가하여 1938년 영어로 교육하는 초등 중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80%가 중국계였다.(Loh, 1975, p 51) 영국 식민정부는 제도적으로 일반 평민출신의 말레이 학생이 영어교육을 통해 사회계층이동, 신분상승할 가능성을 방지함으로써, 기존의 식민 사회경제구조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자 했다. 영국 식민정부는 차별적으로 말레이 학생들은 4년간 말레이어로 초등교육을 받은 이후에야 영어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한 반면, 중국계 인도계 학생들은 초등교육단계부터 영어로 교육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다.(Loh, 1975, p24)

 

 말레이 식민 통치기간 중 영국 식민정부는 말레이 식민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기관은 설립하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식민지 주민들은 재래 업종에 종사하는 대신 도시로 이주하여 현대적인 직업을 찾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국이 원래 의도했던 식민경제구조질서에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말레이 식민통치는 인도에서의 오랜 식민통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영국은 과잉 영어교육을 받은 식민지 국민들은 반식민정치적, 반란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인도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Ashby, 1966) 결과적으로 영국이 말레야에 최초의 대학설립을 위한 논의의 시작은 2차세계대전 후 1945년 12월, 말레야를 점차적으로 독립시킨다는 안건이 하원에서 거론되었을 때이다. 그러면 영국이 말레야에서 뒤늦게 설립한 대학은 어떤 목적과 이념을 갖고 있었으며, 말레이 근대화에 어떤 기여했는지를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4. 영국 식민정부의 대학 이념

 

 말레야에 대학을 세우려는 계획은 19세기 초 싱가포르에 최초로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고자 한 스템포드 레플 이후 오랜 시기동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레플은 싱가포르 주민들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레이 본토어로 행정, 사무직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행정관리들을 교육시키고, 식민지의 역사와 풍토, 자원 등에 관한 연구를 더욱 활성화한다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7) 이러한 레플의 교육비전이 일부 실현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말레야에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은 1905년 싱가포르에 설립된 의학교였다. 1912년 학교명을 킹 에드워드 7세 메디칼 스쿨(King Edward VII Medical School)로 하고 식민지 토착민과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916년 이 학교의 졸업장은 영국 의사협회에서 정식으로인정되어, 졸업생들은 대영제국 내 어디에서든지 의술을 펼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1921년학교명은 킹 에드워드 7세 메디칼 컬리지(The King Edward VII College of Medicine)로 바뀌었다.(Turnbull, 1977, p 120) 1929년에는 레플이 싱가포르를 발견한 지 100 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레플 컬리지(Raffles College)가 설립되었다. 레플 컬리지 설립 이후 더 이상의 고등교육 보급 확산은 없었는데 이는 영국은 인도에서와 같이 말레야에 고학력 실업자가 생기는 것을 미리부터 우려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말레야에 설립했던 중등교육 후속단계 학교들은 대부분 사범교육이나 기술 농업교육을 하고 있었다.8) 따라서 1949년 말레야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말레야의 고등교육기관은 싱가포르에 레플 컬리지와 킹 에드워드 메디칼 컬리지(The King Edward VII School of Medicine)뿐이었다. 이 둘은 뒷날 1949년 설립되는 말레야 최초의 대학 University of Malaya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레플 컬리와 의학교 졸업생들은 점차로 대영제국의 공식적인 학위인정을 원하게 되었고, 나아가 말레이 지역에 대학설립 요구가 생겨났다. 그러자 영국 식민정부는 1939년 윌리암 맥린경(Sir William McLean)을 위장으로 한 고등교육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맥린 고등교육 위원회는 레플 컬리지와 킹 에드워드 메디칼 컬리지를 병합한 새로운 유니버시티 컬리지(university college) 설립을 건의하였다. 위원회는 새로운 유니버시티 컬리지가 이전의 킹 에드워드 의학교와 마찬가지로 의학 전공생들에게 계속 졸업장을 수여하지만, 문학과 이학을 전공한 학생들에 대한 졸업장 수여는 영국에서 임명된 시험관이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는 그 당시 레플 컬리지의 교육수준이 아직 만족할 만한 대학교육 수준에 못미쳤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Committee on Malay Education, 1951, p134)

 

 그 당시 영국의 말레야 대학 설립 계획은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이어 일본군이 말레야를 점령함에 따라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 초부터 대영 제국 내 식민지 대학발달 상황과 문제점들을 검토하는 노력이 있었고, 영국 내 대학들이 식민지 대학 발전에 어떠한 도움을 줄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말레야에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영국 식민정부가 아니라 영국 내 대학들이었다. 특히 차논(H. J. Channon)교수는 1939년 말레야를 방문한 이후 식민지 고등교육 정책이 상황에 따라 임시변통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장기간에 걸친식민지 대학발달계획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Carr-Saunders ,1961, p 29)

 

 고등교육영역에서 대학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보편적 가치 기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 편협한 실리적 이해가 우선될 때 대학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과거 이기적, 제국주의적 입장과 다르다. 우리가 교육적 가치를 진실로 신봉하고, 식민지 국민들의 성숙을 도우려면, 우선 식민지 대학들이 우리 나라[영국]의 대학제도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Channon, 1941, p 300)

 

 Channon 교수의 주장을 반영하여 1939년 맥린 위원회는 강한 영국적 학문전통을 대영 제국 내 식민지 대학들에 전수하고, 식민지 대학들 간의 교류를 위한 대학 위원회(the Inter-University Council for Higher Education in the Colonies)를 활성화할 것을 건의했었다.9)

 

 말레야가 일본군으로부터 해방되고 난 이후 1948년 영국은 알렉산더 카-손더스 경(Sir Alexander Carr-Saunders)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고등교육위원회를 임명하였다. 당시 런던 대학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총장이었던 카-손더스의 고등교육 위원회는 말레이 대학의 설립 운영, 목적을 결정하는데 근본적으로 영국의 시민대학(civic university) 모델을 이식할 것을 제안하였다. 카-손더스 경은 당시 대학에 대한 영국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Committee on Malay Education, 1951, p11)

 

 대학의 기능은 학생들이 고급 전문직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데 있다. 사회 공공자금으로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에 특별한 봉사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는 고도의 전문기술을 습득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전문기술 습득만으로 대학교육의 기능을 설명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의 목적은 또한 관심의 영역을 폭 넓히고, 감각과 인지능력을 개발하며, 동시에 정서 함양도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대학교육은 직업 준비인 동시에 자유로운 교육이 되어야 하며, 전문지식 습득 훈련인 동시에 교양 수련이어야 한다. 대학교육을 이야기할 때 전문 직업교육과 전인적 교양교육 사이에 우위를 따질 수는 없다.

 

 카-손더스 경의 이 같은 건의는 영국내 시민 대학 중에서도 런던대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9년과 1948년 의회에 제출된 말레야의 대학교육에 대한 보고서들은 맥린 고등교육 위원회와 카-손더스 고등교육 위원회 모두 영국적 맥락에서 국가와 대학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논의했음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말레야에 신설할 대학(University of Malaya)을 식민정부 감독 하에 두어야 할지, 혹은 재정지원은 정부가 하되 독립적인 대학자치 기구를 두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는 대목은 지극히 영국적이다. 당시 영국의 경우 대학들이 교육부 감독을 받지 않고 있으며, 정부는 대학 재정 보조금을 전적으로 UGC(University Grants Committee:대학보조금위원회) 의 관할 하에 맡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UGC 위원들의 대다수는 대학내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나 UGC는 대학들의 개별적 행정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이러한 제도적 완충 장치를 통해서 대학의 자주적인 발달과 학문적 자유가 최선으로 보장될 수 있다는 신념은 곧 대학교육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영국적인 전통으로 굳혀졌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말레야에는 기독교나 이슬람의 대학전통이나 유교 교육기관과 같은제도화된 학문적 전통이 없었다. 따라서 말레야 대학설립 당시, 대학의 자율권이나 학문의 자유 같은 유럽전통에서 온 대학 이념이 갈등 없이 그대로 수용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실상 말레야에서 대학교육이란 식민정부 관리직 채용에 대비한 직업훈련을 의미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대학설립 배경이 고급 식민관리의 양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영국은 말레야를 점진적으로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가지고 식민정부의 행정직책에 서서히 본토인 지도자들을 임명하려고 했다.

 

 

 

5. 최초의 대학설립: The University of Malaya

 

 영국 식민정부는 영국대학의 이념을 모델로 말레야 최초의 대학을 구상하였기에 식민 대학의 자치구조 및 교수채용, 교육과정, 시험, 학위수여에 이르기까지 대학설립에 관한 모든 논의와 실제 행정 절차는 영국 런던대학교의 관할, 감독 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초기 말레야 대학은 싱가포르에 있었지만 싱가포르와 말레이 연방의 필요에 동시에 부응하면서발전했다.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가나, 서인도제도 등지에 설립된 대영제국 내 식민지 대학들 처음에는 런던대학교의 부속된 컬리지로 개교하였으나, 말레야 대학은 설립 직후부터 학위수여가 가능한 독립된 대학으로서 인정되었다.(Committee on Malay Education, 1951)

 

 1948년 카-손더스 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1949년 10월 8일 말레야 대학(The University of Malaya)이 개교하였다. 총 세 개의 학과에 645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는 레플 컬리지에서 온 문학부 학생 168명, 이학부 학생 82명, 그리고 킹 에드워드 의학교에서 온 의학부 학생 395명을 합한 것이다. 말레야 대학의 규모는 점차 늘어나 1950년에 교육학과, 1955년에는 공학과, 1957년 법학과, 1960년 농학과가 시작하였다.(Committee on Malay Education, 1951) 식민 대학 설립 이후 말레야의 교육수요는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1950년 사범학교가 싱가포르에 설립되었고, 1958년에는 늘어나는 기술 직업교육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싱가포르 폴리테크닉이 설립되었다. 반면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중국인들은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계 학생들이 중국어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1956년 싱가포르에 난양 대학(Nanyang University)을 설립하였다. 이 지역 중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최초의 대학이었던 난양 대학은 비교적 비용이 덜 드는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학과를 개설하고, 미국식 학점제를 도입하였으며 중국어로 교육을 하였다.(Committee on Malay Education, 1951)

 

 말레이 대학 설립 후 대학교육과정 개발에 있어서도 당시 카-손더스가 총장이었던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모델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49년 카-손더스 고등교육 위원회가 말레야 대학 설립에 대해 제출한 보고서는 새로 설립될 말레야 대학교육 과정에서 정치학, 법학, 사회학과 결합된 경제학을 가장 중요한 학과로 지정하고, 당시 LSE에 개설되었던 사회사업학 과정도 말레야 대학교육에 도입하였다. 이렇게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 위주로 편성된 말레야 대학의 문학부 교육과정은 곧 말레야 대학 교수들 간에 이견과 충돌을 일으켰다. 일 예로 당시 문과대 학장인 실콕(T. H. Silcock) 교수와 역사학 전공 교수였던 파킨슨(C.N. Parkinson)교수는 심한 논쟁과 대립을 하였다. 실콕 교수는 카-손더스가 말레이 대학 설립당시 건의했던 대로 경제학부 교육과정에 경제사 강의를 포함시켰으나 역사 전공인 파킨슨 교수는 경제학부 내에서 역사강의를 하는 것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결국 실콕 교수의 제안은 철회되었고, 경제학과에서 영국경제사강의는 폐강되었다.(Lee & Yong, 1996, p 88-89)또한 철학은 영문과 내 한 과목으로서 강의되었는데, 1954/55년도 학기부터는 독립된 학과로 분리되었다. 문학부내에는 중국학, 말레이학, 인도학과가 함께 개설되어 120년전 싱가포르를 아시아 지역 언어, 문화,문명을 연구하는 중심지로 삼으려던 레플의 교육비전이 실현될 수 있었다. 이학부에는 과거 레플 컬리지에서부터 있었던 물리학, 화학, 수학과와 새로 신설된 식물학과 동물학과가 있었다. 레플 컬리지에 있었던 영어과, 경제학과, 사학과, 지리학과는 그대로 말레야 대학으로 옮겨왔다. 의학과는 말레야 대학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법학과 더불어 말레이 대학에서 계속 우세하였다.(Lee & Yong,1996, p 88-89)

 

 

 

6. 대학교수와 대학교육의 지식체계 형성

 

 말레야 대학 교수직은 주로 식민지지역에 있었던 외국인들로 채용되었는데, 대부분이 영국인이거나 유럽, 혹은 대영제국의 다른 식민지령에서 온 백인들이었다. 말레야 대학 교수들은 공식적으로 영국 식민관료와 같은 자격으로 채용되었고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초창기 말레야 대학 교수들은 전원이 외국인이었고 이들은 거주하는 동안에도 말레이 지역사회와 완전히 구별, 격리된국외인으로서 생활하였다.(Ashton & Stockwell, 1996)

 

 말레이 설립당시부터 말레야가 독립할 때까지 10년간 교수진은 58명에서 195명으로 늘어났고 학생수 또한 645명에서 1,615명으로 증가하였다. 1958년 학생들의 민족구성비율은 중국계 63%, 말레이계 11%, 인도계 14%, 실론계 7%, 유라시안계 2%, 그 외 나머지 3% 로 집계되었다.(Carr-Saunders ,1961, p 61) 이와 같이 말레야 대학에서 중국계 학생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은 말레이 사회 내 영어로 교육받고 사회 각계 주요 전문직에 진출할 수 있는 신진 중국인 엘리트들이 말레이 사회 내에서 수적으로 가장 우세했음을 말해준다.

 

 

 

7. 결어

 

 전후 말레야의 정치적 독립이 확실히 거론되기 이전까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이 식민국 주민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차별적 분리교육과정 속에서 영어교육은 식민지 사회에서 엘리트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확실한 자격증으로 일찍부터 인식되어왔다. 영어교육의 현실적 실용가치는 한편 말레이 사회내부에서부터 대학교육을 원하는 강력한 요구를 감소시켰다고 본다. 즉 말레야에서는 사회경제적 상승을 위해 식민 본토인들 스스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다. 식민지 말기에 런던대학을 공식적인 모델로 하여 설립된 말레야 대학에서 외국인 교수들은 영국의 지식전통을 말레야 대학에 그대로 이식하였지만, 실제로 영국의 자유주의대학이념이 식민지 대학사회 내에서 구현될 수는 없었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말레야 대학 외국인 교수들간에 학과교육 과정에 대한 의견충돌과 대립을 앞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말레이 대학교육에 기본 틀이 된 영국적 지식 패러다임을 놓고 영국과 말레야 사이에 갈등과 대립은 없었다.말레이 대학교육이 영어로만 이루어진데 대해서도 당시 식민지 내에서는 이의가 없었다. 이 점에서 영국이 고수해온 분리통치(divide and rule) 원칙이 말레이 식민 근대화 교육정책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말레야는 1957년 말레이지아 연방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말레이지아가 본격적으로 탈식민,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1965년 싱가포르가 분리 독립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독립 후에도 새로운말레이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들과 과거 식민지 시대 행정직 관료들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말레이 사회 안에서의 이민족들간의 긴장과 불화합은 1965년 중국계 정치지도세력이 싱가포르를 독립시킨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

 

 1967년 말레이지아는 영어 대신 말레이어(Bahasa Malaysia)를 국가 공용어로 선포하고, 말레이 본토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가통일을 시도하지만, 경제적으로 우세한 중국계 말레이인들과 말레이 본토인들 사이에 누적된 갈등은 1969년 5월 민족분쟁(ethnic riots)으로 발전하게 된다.10) 민족분쟁의 결과, 말레이지아 독립정부는 부미푸트라(bumiputeras)로 불리는 말레이 본토인들에게 공식적인 특권을 부여할 것을 선포한다. 소위 긍정적차별(positive discrimination) 이 라고 일컫는 이 정책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다. 긍정적차별정책은 1970년 이후 계속 말레이지아 탈식민 근대화의 근간이 되어오고 있다.

 

 과거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영국의 분리통치원칙에 따라 민족적으로, 계급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말레이 본토인들이다. 그러나 말레이지아의 탈식민 근대화가 반대로 이들 본토인 부미푸트라(bumiputeras)에게 모든 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차별정책(positive discrimination policy)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닉하다. 영국의 식민 근대화 정책의 결과는 현재 역설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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