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중국의 식인

구름위 2013. 2. 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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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인터넷에 보면 반중 선동을 위해 중국의 식인이 고질적인 문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건 정말 악의적 모략이죠.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서 사람먹는게 일상이며 민도가 낮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나 무식하요' 라고 하며 얼굴에 똥칠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가끔 미친놈이 나온다 해서 한국에는 살인자들이 버글거리는게 문화라고 할 수 있나요? 강간 사건이 난다고 해서 한국 여자들은 죄다 강간범에게 당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또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해도 이것이 정말로 사실 그 자체를 기록한건지 아니면 관용적 수사를 표현한건지, 혹은 상대방에 대한 미움으로 악의적인 기록을 한 것인지도 판단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공자가 해를 즐겨 먹었는데 그의 아끼는 제자 자로가 해로 담겨진 이후로는 해를 먹지 않았다라고 하는 기록을 두고, 젓갈을 의미하는 해(醢)를 마치 사람 고기로 만든 것만으로 말하여 공자가 인육을 즐겼다고 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며 악의적 왜곡이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해라는 것은 단순히 젓갈을 의미할 뿐입니다. 당육전 15권에는 해의 종류로 녹해, 토해, 양해, 어해가 있으며 순서대로 사슴고기, 토끼고기, 양고기, 물고기 이며, 그 담는 방법은 고기와 누룩을 섞어 발효시켜 만들며, 제사지낼 때, 연회때 음식에 이 해를 넣어 국물의 맛을 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애시당초 해에 사람고기는 있지도 않으며 해 자체도 젓갈로 음식에 넣어 맛을 내는 조미료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물론 따로 먹어도 되는거고요. 공자가 해를 즐겼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젓갈 음식을 좋아했다는거지 사람 잡아서 먹기를 좋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중국의 형벌은 '잔혹한 표본'을 보여 죄를 범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형태가 흔해, 적에 대한 본보기로 죽은 자로를 젓갈로 만들었고, 그 소식을 들은 공자가 젓갈 음식 자체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석이지요. 어떤 사람이 개 잡는 꼴을 보고 고기 음식을 먹지 못했다고 하면 세상 모든 고기는 개고기입니까? 아니잖아요.

그 외에 중국 사서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에 하나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보통 전쟁중에 포위된 성 안에서 농성하다가, 가뭄이나 재난 등으로 인하여 먹을 거리가 사라졌을 때 그 참상을 전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사실 정말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이라 할 만큼 처참하기도 하고 그런 사례가 없는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잔혹하다는 의미를 쓰기 위해서는 그만한 사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중국의 식인이 일상화된 것이라면 참상을 전할 때 이런말을 쓸까요? 동네 점빵에서도 사람 고기를 사고 판다면서요? 그런데 이까짓걸 기록할리가 있나요) 비슷한 예로 백만대군 같은게 있습니다. 정말 백만명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죠.

그리고 상대에 대한 원한을 표현할 때 '그놈의 고기를 씹어 먹고 싶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참 많이도 나오죠. 허나 이것도 상대에 대한 적의로 바라봐야 하지 정말 고기를 즐겨서 그놈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해석한다면 희안한 상황이 됩니다. '저 새끼 죽여버린다' 라는 말을 잘 쓰는 한반도에는 살인범들이 가득하나요? 


하지만!


정말로 식인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사례는 보통 극단적인 샘플이 존재하기 떄문에 나온 말이기도 하니까요. 예를들면 399년 강남의 동진에 손은 이라는 해적이 있었습니다. 이놈은 주로 동남해안을 털고 다녔는데, 그가 털고 나닐 때 그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애나 어른을 가리지 않고 죽였고, 해당 지역의 현령을 잡으면 그를 죽여 젓갈로 만들어 현령의 처자에게 먹이고는 즐거워 했다는군요. 이 젓갈을 먹기 주저하면 사지를 찢어 죽였답니다. 그리고 그가 지나는 곳 마다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마을을 몽땅 제거한 다음 사람들을 몰아다가 회계 지방으로 집합시켰는데 이 행군에서 버티지 못하면 물 속에 빠뜨려 죽인 다음 '신선당에 먼저 오름을 축하한다, 뒤에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 라고 희롱했다고 하는군요 <자치통감>. 그는 도교(오두미도)를 신봉하고 있었다네요.
<깔삼하게 사람 잡아먹는 해적놈으로 보이게 분장하신 주윤발 성님>

그리고 <구당서>에 보면 주찬이라는 놈이 등장합니다. 수 양제때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다가 털린 다음 수나라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주찬이라는 도적놈이 등장하는데 부하면 20만이라고 하니 중국식 허풍을 빼더라도 상당한 규모라고 짐작할 수 있지요. 문제는 이렇게 집단이 커지니까 털어버릴 양식도 별로 없고 먹여 살려야 할 놈들은 많고, 그냥두면 난리도 아니겠고 하니 자기 도적들에게 '음식 가운데 맛있기로 인육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다른 지역에 사람이 있기만 하면 양식 걱정은 필요없다' 라고 하고는 일단 관할 지역에 있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모두 잡아 삶아 자기 도적들에게 나눠 먹입니다. 거기서 끝낸게 아니라 정말로 그의 말대로 그의 세력이 미치는 곳 성에서는 어리고 약한 남녀를 아예 세금으로 받아 군량에 보태 버렸답니다.


안록산의 난 때 이야기도 있네요. 안록산이 장순과 허원 등을 수양에서 포위 공격했을 떄의 일인데 포위 공격이 오래되니 성 안에 먹을게 떨어졌습니다, 먹을게 없어져 서로 자식을 바꾸어 먹고 뼈를 패서 땔감으로 썼는데 이렇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 변란이 일어날까 싶던 장순은, '모두들 한 마음으로 죽을힘을 다해 성을 지키면서도 충의가 꺽이지 않는데 나 스스로 살을 베어 장졸들에게 먹이지 못했다. 어찌 이 부인 하나를 아껴 위급함을 앉아서 보겠는가?" 라면서 지 애첩을 죽여 삶아 나누어 줍니다. 모두들 먹지 못하며 울고 있자니 장순이 억지로 먹였고, 이 의기(?)에 감동한 부장 허원은 자기 노복을 죽여 병사들에게 먹였다는군요. 그러다가 성 안의 부녀자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었답니다. 그렇게 잡아먹힌 사람이 2~3만명은 되었으나 인심이 끝내 변하지 않았다고 자랑질까지 합니다. 신당서에는 성에 남은 사람이 400뿐이었다네요.


황소의 난때 사건도 한 번 볼까요? 황소의 난으로 황소군이 장안까지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헌데 그 뒤에 후퇴한 관군이 전열을 정비해 황소를 장안에 포위하게 되었죠. 당연히 식량은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여 식인이 자행되기 시작했는데... 포위된 황소군에 사람 고기를 판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 바로 관군이었습니다. 관군들은 주변 산 속등에 도망가 산채를 짓고 숨어사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황소군들에게 고깃값을 받고 팔았던거였죠. 덕분에 관군 중에서는 돈 좀 만진 사람까지 있었다네요. 황소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때 지구전을 벌였는데 문제는 군수 물자가 지구전을 벌이기에 부족했죠, 그러자 이들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절구에 넣고 뼈째 찧어 식량으로 썼습니다. 거기다 아예 용마채라고 사람을 식량으로 빻아 보급하는 방앗간 산채까지 마련해 뒀다네요. 오래 보관하는 것은 소금에 절여 두기도 하고 말이죠.


902년에는 중국 전체에 큰 눈이 내려 봉상 지방의 성에는 먹을 것이 떨어져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더랍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사람을 잡아 먹었고, 나중에는 이게 시장까지 형성해서 사람고기 한근은 1백전, 개고기는 5백전에 팔렸다고 합니다. 사람 고기가 팔린것도 팔린거지만 개고기보다 더 쌌다는거죠.


909년에 유수광이라는 자가 그의 형 유수문을 공격하는 일이 생겼는데 형의 부하 장수들이 항복하지 않자 포위 공격을 시작했더랬죠. 그러자 성중에는 먹을 것이 다해, 사람들이 땅을 파 그 흙을 삶아 먹었고, 군인들은 사람을 잡아 먹었는데 유수문의 부하 여곤은 남녀 간운데 쇠약한 사람을 골라 누룩을 먹여 사육한 다음, 살이 좀 오르면 이를 삶아 군대의 양식으로 공급했는데 이를 재살무라고 불렀다 하는군요. 


963년에 송의 병마도감 이처운은 호남을 정벌할 때 포로들 가운데 살찐 사람 수십명을 부하들에게 명하여 나눠 먹게 했고, 좀 건강한 사람들은 얼굴에 먹물을 들여 먼저 낭주로 보냈답니다. 그러니까 사람 잡아먹는 송군의 무지막지함을 알려 낭주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였겠는데 이 이처운이 송 태종의 황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황후의 아버지가 사람 잡아먹는데 일조를 했다는 말이죠, 그 의도가 뭐였건 간에 말입니다. 근데 송 태조의 황후의 근친인 왕계훈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도 민간의 아이들을 사다가 조금 부리는 척 하다 바로 죽여서 삶아 먹고는 그 뼈를 관에 넣어 밖에 가져다 버렸답니다. 덕분에 그 문 앞에는 여승 및 관 파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는데 태종이 즉위한 다음 고발을 받고 낙양 저자에서 참수를 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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