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식민지시기 베트남

구름위 2013. 2. 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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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베트남에서는 두 개의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하나는 현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떠이 썬군(西山軍)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 딘(嘉定), 즉 사이공 주변과 이서의 메콩 델타에 근거한 응웬 푹 아인(阮福映) 세력이었다. 그 이전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년간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북부는 찐(鄭)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고 남쪽 절반은 응웬(阮)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다. 1771년 응웬 씨(氏) 치하의 떠이 썬에서 반란이 일어나 응웬 씨 지배를 종결시켰고 이 반란군에 의해 북부의 찐 씨 세력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떠이 썬(西山) 왕조(1788-1802)가 수립되어 있었고 남부에서는, 응웬 왕가의 한 생존자 응웬 푹 아인(후에 자 롱 제(嘉隆帝), 1802-1820)이 왕위에 올라 1788년에 가까스로 남부에 세력거점을 마련한 상태였다.

 

 프랑스인들이 사이공 땅을 밟은 것은 응웬 푹 아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1777년 응웬 왕가의 왕과 왕세자가 모두 떠이 썬 군에게 살해당한 후 응웬 푹 아인이 왕위를 이었다. 그 후 줄곧 떠이썬 군에 쫓겨다니면서 남부베트남을 전전하고 심지어 샴에까지도 망명을 해야 했던 응웬 푹 아인은 1782년 프랑스의 외방선교회(外邦宣敎會) 소속 삐노 드 베엔느 신부를 만났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프랑스 신부가 제안했던 것은 프랑스 본국과의 제휴를 통해 지원을 이끌어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응웬 푹 아인은 당시 네 살이었던 자신의 장남을 딸려 삐노 신부를 프랑스에 파견했고 이에 의해 응웬 푹 아인 측과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 조정과는 한 조약이 체결된다. 조약의 중요한 내용은, 프랑스의 원조 대가로 베트남은 남부와 중부에 있는 두 개의 섬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몇 개의 주요 항구를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 측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개입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조야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본국 정부가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자 삐노 신부는 돌아오는 도중 폰디쉐리에서 자력으로 자금을 동원하고 인력을 모아 베트남에 돌아왔다.

 

 응웬 왕가의 계승자 응웬 푹 아인 측에서 보자면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영내에서 시작된 떠이 썬반란 세력의 진압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때 참여한 프랑스인 지원자들은 응웬 푹 아인으로 하여금 떠이 썬 군(軍)에 승리하고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현재의 베트남 전토를 한 개의 지배 영역으로 아우르는 왕조(阮朝. 1802-1945)를 수립할 수 있게 하는 데 공헌했다. 이들 중 다수는 1802년 이후 베트남을 떠났으나 필립 바니에 또는 장 밥띠스트 셰노 같은 이는 베트남에 남아베트남인과 결혼하고 응웬 조의 관리로 활동했다. 물론 자 롱 제 시기 선교사들의 활동도 보장되었다. 비록 개인적인 자격이었기는 했지만 이렇듯 베트남의 지배집단과 프랑스인들과의 접촉은 우호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859년에 다시 사이공으로 들어온 프랑스군에 의해 응웬 조(阮朝)의 베트남 지배는 정지되었다. 프랑스인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으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제2대 황제 민 망 제(明命帝, 1820-1821) 시기부터 시작된 기독교 박해다.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국에서 유럽세력의 압력이 증대되고 그 압력이 베트남으로까지 미치리라고 인식하고 있던 베트남 조정 측에서는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그들의 입국을 금지했다. 그러다가 1833-1835 사이 남부에서 발생한 반란에 프랑스인 마르샹 신부를 포함한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참여함으로써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베트남 조정의 외국 선교사 박해가 특별히 프랑스인을 겨냥한 것은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당시 주도적 선교단체였던 외방선교회를 통해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선교사들 중 프랑스인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인의 희생이 많았을 뿐이지 응웬 조 조정이 특별히 프랑스라든가 프랑스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반대로 응웬 조는 프랑스와 줄곧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자롱 제(嘉隆帝)는 그의 지배 말기 장 밥띠스뜨 셰노를 이 목적으로 프랑스에 파견한 바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 가혹했던 민 망 제(明命帝)도 1840년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외교관계의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하지만 두 경우 공히 프랑스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하여 성공을 보지 못했고 각 사절이 귀국했을 때는 자신들을 파견한 베트남 황제들이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정책의 연속성이유지될 수 없었다. 민 망 제 사후 티에우 찌 제(紹治帝, 1841-1847) 치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태도도 훨씬 완화되고 프랑스와의 연계에 대한 희망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베트남 지배자들의 머릿속에 존재했던 것은 우호적인 프랑스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였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기에 프랑스는 주로 유럽에서의 전역(戰役)에 골몰해 있었고 1820년대부터는 나폴레옹 이후 위축된 국력과 복고왕정으로의 회귀, 이어지는 7월혁명(1830)과 루이 필립의 등장, 그리고 이 시대를 특징짓는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시작된 유산자-무산자의 대립 등이 날카로워지는 정치상황 때문에 해외경영에는 관심을 돌릴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트남 지배자들로 하여금 적대적 프랑스인상을 형성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1847년 프랑스 선교사 처리 문제로 베트남을 방문한 프랑스 군함의 다낭 (Da Nang) 포격이었다. 이 포격은 당시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함대가 대치하고 있던 긴장감 속에서 프랑스 해군의 오해에서 비롯된 우발적 사건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베트남 조야에 미친 영향은 컸다. 즉 이 사건은 유럽인 중에서 베트남인이 가장 신뢰감을 갖고 있던 프랑스에 대한 실망이었으므로 티에우 찌 제(紹治帝)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프랑스뿐만 아니라 어떠한 서양세력과의 협상도 불가함을 천명하고 쇄국에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쇄국은 그의 계승자 뜨 득 제(嗣德帝, 1848-1883)에 의해서도 지속되었다. 이 쇄국주의자 뜨 득 제가 왕위에 오르던 1848년 프랑스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시작되었고 이후 실시된 투표에서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4년 뒤 1852년에 그는 황제로 등극했으며 그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런 정책 변화 이면에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산업자본가들의 욕구나 그 동안지속된 선교사들의 종교전파에 대한 열정, 군인들의 모험주의, 그리고 야만사회를 계몽시켜야 한다는 19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의 문화적 사명감 등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바로 이 변화된 대외정책, 즉 적극적 대외팽창정책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교롭게도 개시된 지 얼마 안 되는 베트남의 쇄국, 즉 베트남인들 사이에 적대적 프랑스인관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적극적이었고 베트남은 단호했다.

 

 우리는 프랑스인들에 대하여 전식민지시대 베트남인들이 갖고 있던 두 가지 면, 즉 협조와 대결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면모를 식민지 시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협조와 대결이라는 상반된 가치는 상이한 사회집단들이 갖고 있는 입장의 차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한 사회집단이나 개인에서도 이런 두 면모가 공존도 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흔히 전통시대의 마지막 세대 저항운동가라고 일컬어지는 판 보이 쩌우(潘佩珠, 1860-1940)는 초기 강력한 반식민지 운동가로부터 프랑스와의 협조를 추구하는 입장으로 바뀌며, 호찌민(胡志明, 1890-1910)은 그 반대로 초기 프랑스의 온정적 협조주의에 기대를 갖고 있다가 대결로 선회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이를 가능케 한 것은 프랑스와 접촉을 갖게 된 이래 형성된 베트남인들의 사고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런 이중적 사고는 베트남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경험한 프랑스인들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 모험가들이나 헌신적인 선교사들, 그리고 식민지 시대 이후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지도자들이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와의 협조에 기대하게 했다면 19세기 중반의 해군사관이나 자본가들, 특히 종교적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던 선교사들이란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대결의식을 북돋우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수시로 바뀌는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라든지 그와 맞물려 있던 지적 경향성, 그에 따라 수시로 강·온 사이를 왕복하던 식민지배 성격이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협조와 대결이란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2. 점령

 

 프랑스는 베트남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가치뿐만 아니라 중국시장과 연결되는 안정된 발판으로서의 지리적 이점에 착목했다. 이미 영국이 싱가포르, 페낭, 말래카를 연결하는 해협식민지를 건설하여 인도와 중국을 잇는 안정된 중간 기점을 마련한 상태였고 버어마와 태국은 영국의 영향하에,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그리고 필리핀은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뒤늦게 다시 아시아의 식민지 경영에 참여한 프랑스에게 남은 땅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뿐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은 중국으로의 진출을 고려할 때 해안에 면한 적지였을 뿐 아니라 육로를 통해서는 중국의 광동과 광서에, 북부의 홍하를 따라서는 운남에, 남부의 메콩을 따라서는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중국으로 통하는 루트의 기점이었다.

 

 프랑스는 선교의 자유 보장, 베트남의 수도 후에(Hue)에 통상대표부를 둘 것 등을 요구했고 융웬 조(阮朝)가 이를 거절하자 1858년 수도 후에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의 군사항구 다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이 원정대에는 15척의 전함과 알제리인을 포함하는 1,500명의 프랑스군에다가, 대부분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850명의 스페인군이 스페인 선교사 박해에 대한 보복을 명목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달에 걸친 공격이 실패하자 프랑스 측은 다낭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베트남에 일단 거점을 만들 것을 결정했다. 그리곤 곧 병력을 이동하여 1859년 남부 사이공지역으로 상륙했으며, 이후 남부베트남의 6개의 성(省) 중 동부 세 개의 성, 비엔 호아(邊和), 자 딘(嘉定), 딘 뜨엉(定祥)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인정과 기독교 포교의 자유, 다낭을 포함하는 북중부 지역 세 개 항구 개항, 베트남 남쪽에 있는 뿔로 꼰도르 섬 할양 등을 후에 조정으로부터 약속 받았다. 이후 프랑스는 1867년까지 남부 베트남 서부의 3개성, 빈 롱(永隆), 안 장(安江), 하 띠엔(河僊)까지도 점령함으로써 남부베트남 전체를 직접 지배하에 두게 된다.

 

 프랑스가 남부베트남을 먼저 공략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부의 쌀을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가 남부를 장악하고 쌀의 공급을 통제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의외로 큰 것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 통일왕조가 형성되면서 메콩 유역에서 생산되는 남부의 쌀은 전체 베트남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계속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남부에서 쌀값이 불안정하면 그 이북 전역의 쌀값이 뛰어오르는 현상은 19세기 초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가 남부를 장악했다는 것은 베트남 전체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쌀을 통제함으로써 중앙 조정 측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랑스군이 남부로 들어왔을 때 조정 측에서 남부의 방위에 국력을 집중했다면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좌절되었거나, 적어도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 측으로서는 불행하게도 북부 지역에서 중앙조정의 프랑스에 대한 적극대응을 방해하는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기독교도와 연계된 따 반 풍(謝文奉)이 응웬 조(阮朝)의 타도를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 때문에 조정 측은 대 프랑스 작전에 몰두하지 못했다.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북부가 반란 세력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남부에서의 상황은 프랑스 측과 협상의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1862년 동부 3성이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에서 협상대표를 남부로 파견할 때도 뜨 득 제(嗣德帝)는 영토를 할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전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사절을 프랑스로 보내 3성의 반환을 교섭했다. 프랑스 측 상공자본가들과 해군의 방해로 이 교섭은 결국 좌절되었지만 나폴레옹 3세가 뜨 득 제 사절들의 설득으로 동부 3성의 반환을 거의 결정했을 만큼 반환 교섭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베트남 측은 이 시기 내란의 위기를 맞아 우호적인 프랑스인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것이다.

 

 프랑스 측은, 남부에서의 점령지 확대와 1867년 이후 전 남부 지배에서 정부측과 남부 거주민을동시에 이용하였다. 이미 1862년의 조약으로 프랑스의 동부 3성 지배는 기정사실화 되어버렸고 이 조약은 뜨 득 제(嗣德帝)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조인된 형태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조정의 결정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항을 지도하는 베트남인 측으로서는 이것이 저항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였으며 딜레마였다. 말하자면 저항군은 쉽게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는 반역자로 규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남부에서 저항군을 지도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쯔엉 딘(張定)이 추종자들에게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우리는 당시 저항군 지도자들이나 조정 측이 갖고 있던 답답한 심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황제는 비록 우리를 반도(叛徒)라고 부르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우리의 충성심을 찬양할 것임에 틀림없다. 승리의 날이 왔을 때 그는 우리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여러 가지로 보상까지 해줄 것이다.(유인선, 『베트남史』(민음사, 1984), p.243에서 인용) 실제 조정 측은 직, 간접적으로 남부의 저항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저항군 측도 조정 측의 공식적인 명령과 실제 의도 등을 헤아려가며 눈치껏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으로서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반도로 규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잇점이었다. 베트남 조정 측의 권위를 빌어 프랑스 측은 스스로를 반도 진압군으로 위치 지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당시 조정 측과 프랑스의 관계란 지난 세기 떠이 선 반란군의 진압을 위한 응웬 푹 아인(阮福映) 집단과 프랑스인의 결합과 유사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많은 남부베트남인들로 하여금 별 고민 없이 프랑스에 대해 협력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 측이 남부지배에서 이용했던 층은 따로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들어올 때까지 남부베트남에서 극도로 소외 받던, 이를테면 예견된 협력자들로서, 기독교도와 이주 중국인이었다. 이들은 민 망 제(明命帝) 시기부터 시작된 반 기독교 정책과 중국인 탄압정책의 희생자들이었다. 중국인들은 일체의 해외무역과 관련된 직업에서 배제되고, 그들의 동향조직인 방(幇)이 붕괴될 처지에 있었으며, 치발(?髮) 등의 외향까지 바꾸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런 기독교도들이나 중국인들에게 프랑스군은 구원자와 같았을 것이다.

 

 이들이 기존 응웬 조(阮朝) 지배 하에서 이미 만들어진, 예견된 친불세력이었다면, 프랑스 지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친불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새로운 지주 계층이었다. 1870년대까지 계속된 저항운동의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기존에 남부베트남에서 자생하고 있던 지주계층이 저항에의 참여 결과로 다수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파산한 지주들의 토지는 몰수와 불하의 과정을 통해서 협력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외에 토지 등록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무등록 토지나, 개간 산업으로 획득한 토지 등을 불하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새로운 대토지 소유 지주층이 창출되었다. 이 새로운 지주층은 프랑스 지배의 시작과 더불어 등장한 계층이며 그래서 중앙의 베트남 조정보다는 프랑스 식민정부에 더 강한 친밀성을 가졌다. 이리하여 신지주층은 남부사회의 농업분야에서, 중국인은 상업과 유통, 또는 금융 분야에서, 그리고 기독교는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상적 매개체로서 프랑스의 남부베트남 지배를 지탱하는 중요한 세 가지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3. 식민지 형성과 지배

 

 남부 베트남에는 프랑스 식민지 코친차이나가 성립되었고 총독이 파견되었다. 곧이어 이 코친차이나 식민청은 나머지 지역으로 세력확대를 꾀하였다. 베트남의 요청으로 출동한 중국군과의 전쟁(청불전쟁, 1884-1885)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일축하고 베트남 전역에 대한 프랑스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체가 완전히 주권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전반까지 자 딘(嘉定), 혹 남끼(南圻)라고 불려지던 남부 베트남은 코친차이나라는 이름으로 직접 식민지가 되었지만, 중부는 안남(安南)이라 하여 황실이 그대로 존속하는 보호국이었다. 나머지 북부는 통킹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비록 프랑스인 관리의 통제를 받았지만 형식적으로 황제는 북부에까지 각 성의 관리자를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프랑스의 입장에서 식민지란 남부베트남, 즉 코친차이나만을 이름이었다.

 

 1887년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만들어졌다. 이는 코친차이나 식민지와 안남(安南), 캄보디아, 라오스 등 3개의 보호국, 북부의 하노이, 하이퐁, 중부의 다낭 등 직할 식민도시와 중국의 광주(廣州) 조차지를 포괄하는 연맹체였으며 이 해부터 하노이에는 인도차이나를 관할하는 총독이두어졌다.

 

 통상 총독의 임기는 4년이었지만 왕정, 공화정이 교차하고 공화정 하에서도 사회당을 포함하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정권 교체, 또는 정치 역학 관계의 변화 등 본국 사정의 변화에 따라 총독이 수시로 바뀌었다. 통킹과 안남(安南)을 총괄하기 위해 1886년에 일시 두었던 주차총감(駐箚總監)과 이후의 임시총독들을 포함할 때 1886년부터 1926년 사이 무려 52명의 인도차이나 지배자가 임명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프랑스의 베트남지배정책이 얼마나 일관성 없게 추진되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에서 보이는 몇 가지 특징적 정책을 가려낼 수 있다. 남부베트남을 장악한 프랑스 해군이 생각했던 지배방식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이나 네덜란드가해왔던 대로 현지인 지배층을 될 수 있는 대로 온존시키는 간접지배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이 남부가 유교의 세례를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들이 성(省), 부(府), 현(縣) 단위까지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각 성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포정(布政)이나 안찰(按察), 부의 지부(知府), 그리고 현령(縣令) 등은 모두 효(孝)와 더불어 충(忠)을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외우고 다니던 과거(科擧) 합격자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현지 지배층을그대로 온전시켜 협력자로 전환하겠다는 프랑스 측의 기대라는 것이 얼마나 실현성이 없는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진입과 더불어 이들은 저항운동을 주도하지만 저항 실패 후에는 거의가 중부지역으로철수해 버리든지 자신들의 직책을 떠나 버렸다. 이들 관료들이 아니더라도 남부에서의 유교이념확산은 프랑스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19세기 전반 베트남은 현 단위까지의 학교 설립, 빈번한 과거제도의 실시 등을 통해 적극적인 유교화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유교 이념은 급속히 향촌사회로 전파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남부만 보자면 1840년대 동안에만 해도 등록된 성인 남자의 1% 가량이 향시를 통해 거인(擧人)이라든지 수재(秀才)로 선발되었다. 프랑스 측은 촌(村), 사(社)를 관할하는 베트남의 말단 행정단위 총(總)을 프랑스의 꼬뮨과 유사한 존재로 생각하고 총(總) 단위의 자율적 지배를 구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 사회에서 총장(總長)이란 실무 집행자일 뿐이었다. 실질적인 향촌의 결정권은 향촌 회의체로서 마을의 원로, 유력자, 재산가, 전직 관료 혹은 과거합격자 등 향촌사회에서는 가장 유교적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향직(鄕職)들에게 있었다. 이 현실도 프랑스의 초기 구상을 좌절시킨 요인이었다.

 

 현지인 지배층과의 협조를 포기한 프랑스 측은 남부를 약 20여 개의 지역으로 분할하여 현지업무검열관(Inspector of Native Affair)이란 직책을 갖는 사관들에 의해 통제하였다. 이렇게 해서 간접지배 정책은 파기되고 직접지배로 선회했다. 네덜란드나 영국 등의 식민지에서는 1-2명의 유럽인 관리들이 있었으면 충분했을 업무를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2-3명이 필요했고 식민지 예산의 60% 이상이 인건비로 지출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직접지배와 무관하지 않다. 즉 프랑스의 베트남지배는 고비용체제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업무수행에서 이들이 갖고 있던 한계란 명확했다. 특히 언어의 문제는 거의 절망적인 장벽이었다. 현 단위의 전임 관료들은 철수해 버리고 향촌 사회는 향직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은 당분간 기독교도들을 포함한 자발적 협력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지배에서 프랑스인들이 우선 착수한 작업은 베트남 관습법의 해체와 한자의 폐지였다. 프랑스 법체제가 도입되었고 모든 공식문서에서는 17세기 이후 프랑스인 신부 Alexandre Rhodes가 선교사들의 베트남어 습득과 성경 번역의 목적으로 만든 알파벳화된 베트남어 표기체제 꾸옥 응으(國語)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한자를 사용하던 베트남 지배층으로부터 문자에 대한 독점권을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한자를 매개로 한 유교적 관념의 영향으로부터 베트남인을 차단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으니 국어의 보급과 함께 향촌사회 유가계층의 영향력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프랑스인들로서는 국어를 통해서 현지어를 훨씬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베트남 협조자에게는 국어의 사용이란 자국민의 문자습득률을 향상시키고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교육 매체로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국어에 대한 초반의 저항은 물론 있었지만 초등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의 설립 확대와 1865년부터 발행된 『자 딘 보(報)』 등의 신문을 통해서 이 국어의 보급은 확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식민정부에 의해서 소개된 국어가 20세기에 들어서는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도근대화의 방편으로 사용이 장려되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인들이 국어를 받아들이고 이를 민족주의 운동이나 근대화와 연계시키게 된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한자가 갖는 봉건적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이 근대화의 한 방편으로 인식된 것이고, 둘째는 프랑스가 간헐적으로 시도하던 프랑스어 공용화 정책에 반대한 민족주의자들의 대안이 바로 국어의 사용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들어오면서 남부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변화는 메콩 델타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 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식민화 이후 코친차이나에서 경작지는 6배가 증가했다. 이미 19세기부터 남부는 응웬 조(阮朝) 조정에 의해 둔전(屯田) 설치, 운하의 건설, 개간의 장려, 토지사유제와 대토지 소유의 보장 등의 제정책을 통해 적어도 베트남의 인구를 부양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개발이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프랑스가 기도했던 것은 이 기름지고 미개발지가 무진장 널려 있는 지역을 개발하여 쌀을 수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작지는 급속히 확대되어서 1881년 60만 헥타의 가경작지는 1894년 100만 헥타로 증가하며, 1881년엔 약 2만4천 톤 해외로 수출되던 쌀이 1894년엔 5만4천 톤으로 늘어나면서 베트남은 주요 쌀 수출국으로 부상하였다.

 

 쌀 경작지의 확대와 수출의 증대는 베트남 내에서 몇 가지의 변화를 초래했다. 대토지소유자의 등장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새로운 대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전통시대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남베트남에는 소작인층이 광범하게 존재했다. 하지만 토지는 많고 인구는 적은 남부의 상황에서 지주소작관계란 관념적으로 생각하듯 첨예한 모순은 아니었다. 저명한 남부출신 공산주의 지도자인 쩐 반 저우(Tran Van Giau) 조차도 최근 인정했듯이 프랑스 지배 이전 남부는 소작인이 지주에 대한 것보다 지주가 소작인에 대해 더 아쉬울게 많았던 사회였던 것이다. 남부에서 소작인은 지주가 싫으면 떠나 아무 데나 정착해서도 먹고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식민지 설립과 더불어 농민통제나 토지관리 방식이 정교해짐에 따라 이전과 같이 자유로운 이동이 힘들어지면서 소작인들은 지주에 더 의존적이게 되었고 자연 그들의 부담도 늘어났다. 쌀 수출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중국인들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어서 1870년대까지 남부에서는 정미업을 포함하여 미곡유통망은 거의 중국인들에게 장악된 형편이었다. 1920년대 코친차이나 조세수입의 1/10은 이들 중국인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식민지의 재정수입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인두세나 토지세, 관세 등으로부터의 수입이 있었으나 본국으로부터 독립된 인도차이나 연방 예산제도 체제하에서 프랑스 측은 재정 적자의 위협에 시달렸다. 안정된 재정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 식민당국이 실시한 것은 아편, 소금, 술의 전매였다. 1932년 연방예산의 26%가 이 세 품목의 전매수입으로 채워졌는데, 수입의 확보를 위해 정부는 촌락 단위로 일정 이상의 술 소비량까지 할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쌀 이외에 고무, 커피, 차, 생사 등의 수출도 이루어졌다. 특히 남부에서의 고무재배 산업은 프랑스의 자본과 기술력이 베트남의 산업구조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예이다. 하지만 북부나 중부로부터 고용노동자란 명목으로 끌려와 고무농장에서 저임금, 학대, 말라리아 감염 등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베트남인 노동자들의 참상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 기간 줄곧 존속하던 비극적 단면이기도 했다.

 

 

 

4. 저항

 

 프랑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10세기 독립 왕조 성립 이후 중국 방면의 송, 원, 명, 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캄보디아, 참파, 샴 등 외국으로부터의 침입을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자력으로 격퇴시킨 역사를 갖고 있던 베트남이란 나라를 식민화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불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코친차이나 획득 과정에 대한 기록을 남긴 빨루 드 라 바리에르(Pallu de la Barriere)에 의하면 1858년 다낭 공격 이후 1861년까지 희생된 프랑스군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부지역에서의 대불항쟁은 18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고 1880년대부터는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광범한 저항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껀 브엉(Can Vuong, 勤王)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당시 프랑스인들이 감시하고 있던 황궁을 빠져나간 함 응이(咸宜帝, 1884-1888)의 호소에 호응해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직관료, 학자 등 문신(文紳)들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반 프랑스 정서에 반 기독교 운동의 성격까지 띠어서 운동참가자들에 의한 기독교도 살해, 그리고 그에 대응한 기독교도들의 복수 등이 이어지면서 베트남 민족내의 갈등의 골을 심화시킨 면도 있었다. 1888년 황제는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해외로 유배당하고 프랑스는 명목상의 황제(동 카인 제, 同慶帝)를 앉힘으로써 이 운동은 구심점을 잃어버리지만 문신(文紳)들에 의한 반불운동은 190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다.

 

 유학자들에 의한 무력항쟁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던 시점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변화는 반불투쟁과 독립을 위해 내적인 변화를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의 확산이었다. 이런 주장에 바탕한 운동은 전통적 유가계층 출신이면서도 서구의 정치사상이나 중국, 일본에서 보이는 정치적 변화에 자극을 받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변법운동이라든가 그 뒤를 이은 신해혁명의 성공, 일본의 명치유신의 결과와 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등에 의해 자극 받은 이 운동의 핵심은 내적변화와 교육, 무력의 증강, 그리고 혁명에 의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새 시대의 대표적 인물은 판 보이 쩌우(潘佩珠, 1867-1940)와 판 쭈 찐(潘周楨, 1871-1926)이었다. 판 보이 쩌우는 입헌주의자로서 중국의 양계초(梁啓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며 일본의 개혁과 그 성공을 인상깊게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베트남 대불항쟁사에서 유명한 동유운동(東遊運動)은 그가 1906년부터 1908년 사이에만도 약 300여 명의 베트남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게 한 것을 이름이다. 하지만 판 보이 쩌우의 활동은 단순한 교육운동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힘에 의한 프랑스 타도까지를 추구했던 그는 1908년부터 무장봉기를 시도했고 1912년에는 월남광복회(越南光復會)를 조직하여 자체적인 군대까지도 조직하여 일본, 광동, 방콕으로 이어지는 해외 혁명 기지를 건설하고는 외부로부터의 베트남 진공이란 계획까지도 시도했다. 하지만 1914년 그가 광동(廣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광복회(光復會) 조직은 와해되었다. 판 쭈 찐(潘周楨)은 판 보이 쩌우와는 달리 정치적으로는 좀더 급진적인 공화제를 추구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좀 더 온건한 노선을 선택했던 인물로서 그의 성향은 협조, 혹은 협조에 대한 기대에 가까웠다. 그의 영향으로 하노이에는 동경의숙(東京義塾)이라는 사립학교가 문을 열고 여기에서는 국어사용, 신사조의 소개, 과학교육 등이 강조되고 각종 강연회와 출판물을 통한 애국사상 전파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물론 이런 운동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측의 양해하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어서 이들의 활동이 점차 과격해짐에 따라 1908년엔 의숙이 폐지되고 판쭈 찐 그룹의 개혁운동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형태와 추구하는 바는 달랐지만 이 두 인물에 의해 대표되는 두 갈래의 반불운동은 베트남의 전통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도된 운동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나타나는 일종의 계몽운동은 협조의 계열이다. 북부의 응웬 반 빈(Nguyen Van Vinh), 중부의 팜 꾸인(Pham Quynh), 남부의 부이 꽝 찌에우(Bui Quang Chieu) 등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근대화, 계몽운동, 서구사상의 소개 등의 활동을 벌였던 인물들로서 프랑스와의 협조를 통해 베트남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일견 이들의 주장은 친불적 행동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베트남 대중에게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한 굵은 줄기로 주목받고 있다. 왜냐하면 전세대의 믿음, 특히 판 보이 쩌우(潘佩珠) 류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중국에서의 혁명이나 일본의 근대화 같은 것들이 이미 허구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이후에 곧 반혁명기로 진입해 있던 상태였고 일본의 침략적 성향에 대해서는 판 보이 쩌우 조차도 회의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동남아시아 제국과 조선의 경우를 본다면 프랑스가 아니라 어떤 세력이라도 베트남에 개입할 것이었다. 식민화 되지 않는다면 그 대안은 중국의 경우같이 외세에 줄곧 시달리면서 내분을 겪던가 타이랜드의 경우처럼 전제 왕조가 계속 유지돼야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줄곧 협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사이공으로부터 북부 하노이를 거쳐 중국까지 잇는 철도를 건설했고 교육, 의료, 통신, 전력 등 기반 시설을 확충하면서 베트남 근대화에 공헌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극동학원의 설립을 통해 베트남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굴, 그리고 무자비하게 베트남화 되어가고 있었던 소수민족 보호와 연구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문명의 사명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1909년부터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도 협조(association)라고 하는 새로운 식민지 경영 개념이 등장하고 또 이를 공식적인 식민지배 이념으로 채택한 바 있다. 1911년에 총독으로 부임한 사회주의자 알베르 싸로(Albert Sarraut)는 철저한 협조주의의 신봉자로서 1914년까지의 첫 재임기간과 그 이후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두 번째의 재임기간 중 베트남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의 기본적인 방침은 더 많은 현지인들을 식민지 경영에 참여시키고 그들을 착취 대상이 아닌 동반의 관계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의료 등의 사회복지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라든가 유학이나 해외 취업 등에 의해서 외국 문물을 접할 기회를 더 갖게 된 것도 이 시대의 한 모습이었다. 동원이란 측면이 강하기는 했지만 세계 제1차대전 기간 수만의 베트남인들이 유럽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도 베트남인들의 인식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어느 식민지에서고 그랬듯이 교육과 해외문물 접촉기회 확대에는 민족의식을 갖는 젊은 층의 양산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1920년대는 베트남의 반불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전기로 주목받는 시대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지배하에서 성장한 지식인,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이 반불운동의 전면에 부상하며 그들의 역량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무력적 혁명운동으로 모아졌다.

 

 1925년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는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가 호찌민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927년에는 중국국민당을 모방한 베트남국민당이 혁명조직으로 출범했다. 국민당은 1930년 프랑스 병영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헌신적인 애국주의자들이었을 뿐이었다. 몇몇의 모험적인 봉기에 대응한 프랑스의 적극적인 진압으로 조직은 와해되었고 투쟁의 주도권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던 공산주의 계열로 넘어갔다. 이해 공산주의 세력은 호찌민의 지도하에 베트남공산당으로 통일되었다.

 

 노선의 결정에서 여러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농민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 한 특색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1930년대 있었던 응예 안(Nghe An), 하 띤(Ha Tinh) 지역의 소비에트 운동은 농민의 역할이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들 혁명운동에 대한 프랑스 측의 대응은 단호했고 그에 대한 상승작용으로 베트남 혁명운동 역시 점차 과격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1930년대에 다시 프랑스인들과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우호적 관계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 우호적 관계란 당시 베트남의 대불항쟁을 주도하던 공산주의 계열과 식민정권사이에서 형성된 것이라 더욱 우리들의 흥미를 끈다. 1936년 프랑스에서는 인민전선이 승리하고 이 정권에 의한 관용조치가 식민지에서 행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은 다시 프랑스의 호의를 기대하는 교육, 진정, 호소 등으로 바뀌었고 식민당국은 이전 시기에 프랑스 정부에 의해서 수감되었던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석방함으로써 프랑스가 베트남에게 독립을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확산되었다.

 

 적대적 관계로의 회귀는 유럽의 정세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1939년 독일과 소련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의 여론은 공산세력에 적대적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베트남의 혁명운동도 다시 퇴조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여건은 뜻밖에도 과거 그들의 선배 독립운동가들이 기대하던 일본의 역할로부터 왔다. 1940년 일본이 베트남으로 진입하자 프랑스 식민정부는 무력(無力) 상태에 빠졌다. 베트남 공산당으로 하여금 지주, 상공인을 포함한 광범한 계층과 연합하게 한 계기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였다. 그들에게 프랑스 식민지배라고 하는 내적인 투쟁 대상 외에 일본이라고 하는 외적 투쟁대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 식민주의 및 일본의 파시스트들과의 투쟁을 표방하는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越盟)이 1941년 창설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독립은 싱겁게 찾아왔다.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종결시켰고 프랑스 지배하에서 명목상 유지되었던 제제(帝制)를 입헌군주제 형태로 부활시켜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대전의 말기 베트남 주둔 일본군이 무력해지면서 베트민의 활동은 활발해졌다. 이해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 올 무렵 베트민은 전국적인 봉기를 단행했다. 이해 8월중 베트남 전국이 베트민의 통제하로 들어갔고 응웬 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제(保大帝, 1825-1945)는 퇴위했다. 프랑스, 일본의 지배와 왕정의 폐지를 동시에 달성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이를 혁명(8월혁명)이라고 부른다. 이해 9월 호찌민을 수반으로 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들 혁명과 독립이란 일본의 양해나 방조 속에서 이루어진 베트남인들끼리의 정치적 막간극에 불과했다. 독립이 선언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으로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으로는 영국 군대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진주했다. 두 세력은 이듬해 물러났지만 영국의 뒤를 이어 프랑스가 다시 남부에 들어왔고 1946년 베트남 민주공화국 측과 프랑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북베트남 측에게 패배한 후 베트남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네덜란드가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을 통치한 기간은 40년에 불과하며, 이 마지막 40년 동안에도 대다수 지역은 네덜란드인들의 영향권 밖에 놓여 있었다.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이 가속화되어 네덜란드 정부가 그 지배영역을 외방도서와 내지로 확대하기 시작한 1870년대 이전에 네덜란드가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자바와 외방도서의 일부 항구도시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인도네시아 군도에는 크고 작은 200여 개의 정치체계들이 독립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은 식민통치 말기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경계를 갖게 되었으며, 인도네시아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때는 그보다도 뒤인 1920년대였다. 그 이전 네덜란드 식민지는, 18세기 이전에는 자바처럼 섬 또는 도시나 지역의 이름으로 불렸고,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호칭되었다. 이 글에서 네덜란드가 통치한 지역을 편의상 인도네시아로 부르겠지만, 현대 인도네시아의 영토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식민통치란 개념에 대해서도 분석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포르투갈이 말라까해협(말레야 반도와 수마트라섬을 나누는 해협)으로부터 말루꾸제도에 이르는 항로를 장악하여 향로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던 16세기 초반 이후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 전개된 식민통치의 유형과 성격은 진출국에 따라 그리고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포르투갈은 향로 생산과 무역 독점에만 집중하였지, 인도네시아나 그 일부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에는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럽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던 정향(clove)과 육두구(nutmeg)의 생산지였던 떠러나떼섬, 띠도르섬, 반다제도, 암본을 장악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9년 지금의 자까르따에 해당하는 자까뜨라(또는 순다껄라빠)에 바타비아라고 명명한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된 네덜란드의 식민주의는 시기에 따라 크게 2-3가지 유형의 통치방식을 보이며 전개된다. 1799년까지 자바지역을 지배한 것은 국가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동인도회사(VOC)라고 하는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국가의 기능을 상당정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기는 엄연히 이윤 추구의 극대화를 통하여 주주와 회사원에게 복무하는 것이었다.

 

재정난과 부패로 동인도회사가 파산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를 직할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1942년까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서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지만, 1870년대까지 직접적인 식민통치 하에 놓인 지역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바를 중심으로 한 극히 일부지역에 불과하였고, 전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통치권은 그 때부터 20세기 초반사이에 확대되었다. 또한 이 기간 중 네덜란드가 식민지를 통치한 구체적인 방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 데, 강제경작기, 자유주의기, 윤리정책기, 공황기로 나뉜다. 이 변화를 유형화하면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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