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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남조 황실사

구름위 2013. 1. 2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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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의 혁혁한 성공에 가려 숨겨진 부분이지만 그는 시기심 많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빈한한 가문에 태어나 집안을 일으켜세운 것은 누군들 탓할 일이 아니지만, 그가 한때 섬겼던 동진 왕조의 황족을 잔학하게 대한 것은 자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정권을 빼앗아도 요령껏 해야 뒤탈이 적은 것이다. 문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권력에도 문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정권을 지탱하는 지주인 것이다. 특정 권력이 어떤 성격의 문화를 유지하느냐는 전적으로 황제의 책임이다. 키우는 자식도, 등용하는 관료도 권력문화에 따라 좋게도 되고 나쁜 사람도 되는 법이다. 황자와 황친(皇親)을 저질 인간으로 키우고 3류 관료를 기용한 것이 그런 참화를 불렀다면 창업자인 유유도 그 점에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고래로 망나니 임금이 어느 왕조인들 없었겠는가만 남조의 송·제 두 왕조에서처럼 많았던 적은 없었다. 이 두 황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그저 재미로 흘려버리기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진한 슬픔이 배어 있다. 필자가 이들 황릉을 찾았던 이유는 능묘 앞의 석조물을 통해 그 시대 꽃피었던 예술의 위대성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능묘 속에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묻혀 있고, 그들이 저지른 행위들을 그 옆에 앉아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조 4왕조 가운데 그 도가 심했던 송·제 두 왕조의 황가 사람들(皇族)이 저지른 추태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송나라는 황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잔으로 편안한 날이 없다 끝났다. 특히 후기에 들어 그 정도는 더욱 심해갔다. 최후에는 황실 중 남은 사람이 몇 없게 되었다. 유송 왕조가 남제 창업주 소도성(蕭道成)에 의해 탈취되려할 때 생명의 위험을 느낀 송 순제(順帝·劉準)는 “후세에 두번 다시 천자의 가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절규했다. 이 말 속에 유송 황가의 비극이 요약되어 있다. 유유가 증손인 순제의 이 한맺힌 소리를 지하에서 들었다면 20여년에 걸쳐 애써 이룬 정권탈취가 그와 그의 가문에 무엇을 갖다 주었는가를 되씹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어떤 자는 ‘멀리 건강성을 바라보니(遙望建康城), 작은 강이 거꾸로 흘러 휘감고 있도다(小江逆流?) 앞을 보니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前見子殺父) 뒤돌아보니 동생이 형을 죽이고 있네(後見弟殺兄)’라고 풍자했다. 유송은 여덟 임금 60년만에 멸망하지만, 그 황가의 무덤은 그렇게 화려했다. 나라는 망해가도 능묘 꾸미기에 끝까지 힘을 쏟은 결과다. 소도성이 유송으로부터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해 창업한 제 왕조도 엉터리 군주로 이어졌다. 

그러다 겨우 7대 24년만에 단명왕조로 끝났다. 송·제 80∼90년 동안 이렇게 어리석고 어둡고 미친 듯 포악한 임금들이 연이어 나왔던 것이다. 창업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고 뒤를 이은 사람은 반드시 패덕(敗德)하니 이런 까닭으로 한 왕조가 일어났다 돌아볼 새도 없이 갑자기 뒤집혀 망한 꼴이다. 이제 아래에서 약간의 이야기를 추려 보려 한다. 

유송 2대 소제(少帝·義符)는 유유의 큰아들이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고 음악에도 이해가 깊었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온당치 못한 행위가 많았다. 궁성의 원림(園林)인 화림원(華林園)에 가게를 열고 친히 술을 팔았다. 또 도랑을 파고 흙을 쌓아 제방을 만들어 놓고 좌우 시종들과 더불어 소리를 지르며 배를 끌어올리는 일을 즐거워하였다. 

5대 전폐제(前廢帝·子業)는 어려서 마음이 좁고 성질이 급하여 동궁이었을 때 매번 아버지 효무제(孝武帝·駿)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가 죽자 슬퍼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즉위하면서 옥새(玉璽)와 인수(印綬)를 받을 때는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아버지의 능묘(景寧陵)를 파헤치려 했다. 태사(太史)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었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능 위에 똥을 뿌리고, 아버지를 코주부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대신 아버지의 총애를 홀로 받은 은귀비(殷貴妃)의 묘를 파헤쳐 버렸다. 또한 어머니인 태후가 병이 위독하여 그를 부르자, 그는 “병든 사람 사이에는 귀신이 있으니 내 어찌 그곳에 갈 수 있으랴?”라고 했다. 그 말은 전해 들은 태후는 기가 차서 시종에게 “칼로 내 배를 갈라 버려라. 어떻게 저런 놈이 내 배에서 나왔단 말인가!”하고는 통곡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기행을 일삼은 남조의 황제들 

또 숙부 세 사람(建安王 休仁, 湘東王 彧, 山陽王 休祐)을 특히 미워하여 전각 안에 가두고는 때리고 채찍질하였다. 그들이 그의 황위를 탈취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그로부터 황위를 빼앗은 상동왕(6대 明帝가 됨)을 특히 구박하였다. 그를 발가벗긴 후 몸은 땅 속에 파묻어 두고 입만 내어 나무 구유통에 있는 잡탕밥을 먹도록 시키고는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숙부 건안왕의 생모인 양태비(楊太妃)에게는 여러 가지 추악한 모양의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고서야 황제위를 길게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7대 후폐제(後廢帝·昱)는 명제의 큰아들인데 이 자의 기행도 전폐제와 난형난제였다. 그는 어려서 옻칠한 장대에 기어오르기를 좋아하였는데 밥 먹는 시간에만 내려왔다. 성장한 후에는 희노(喜怒)에 절도가 없어 좌우에 뜻에 맞지 않는 자가 보이면 직접 마구 두들겨 패버렸다. 즉위한 후 안으로는 태후, 밖으로는 대신들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되자 매우 안달하더니 즉위 3년 후부터 두서너 명을 데리고 궁성 밖 10리, 혹은 20리까지 나가버렸다. 

시장바닥에 들어가 서로 헐뜯고 욕지거리하는 것을 보면 즐거워하면서 자기도 거기에 참여하였다. 즉위 4년 후에는 궁성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저녁에 나가면 새벽에 돌아오고, 새벽에 나가면 저물어야 돌아왔다. 종자들은 모두 쇠창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구 죽이니 길에 있던 남녀는 물론, 개·말·소·나귀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건강성에서는 대낮에도 문을 닫아걸었고, 길에는 행인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짧은 바지를 입고 의관을 갖추지 않았으며 흰 몽둥이 수십개와 칼·끌·톱 등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머리 때리기, 음부 치기, 가슴 가르기 등의 방법으로 주살을 일삼았다. 

그런 짓을 하루에도 수십차례 하였는데 시체에서 피가 흐른 연후에야 기뻐하면서 그쳤다. 좌우 사람들 가운데 그 광경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자가 있으면 곧 그를 바로 세워놓고 창으로 찔렀다. 조폭이 따로 없었다. 황제조폭! 이 시대의 가감 없는 현실이다.궁전 안에 나귀 수십 마리를 길렀고 자기가 타는 말은 어상(御床) 옆에서 사육했다. 출행시 혼인이나 장례 행렬을 만나면 수레 끄는 무리와 어울려 술마시고 즐거워했다. 손초(孫超)라는 자가 입에서 마늘 냄새를 풍기자 그 배를 갈라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확인했다. 

심발(沈勃)에게 보화가 많다는 말을 듣고는 그 집을 찾아가 그를 위협하면서 칼을 휘둘렀다. 심발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손으로 후폐제의 따귀를 치면서 “너의 죄는 걸(桀)·주(紂)를 넘는다!”고 욕을 퍼붓다 결국 맞아 죽었다. 천성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여 하루라도 일이 없으면 낙을 잃고 비통해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 목숨만은 끔찍하게 생각하여 안팎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저녁에 잘 때는 다음 아침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그의 근심대로 깊이 잠든 사이 그가 한때 총애했다 버린 양옥부(楊玉夫)라는 여인의 천우도(千牛刀)에 찔려 그 다음날 아침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후폐제는 출입할 때 무개(無蓋) 수레를 타고 혼자 마구 달렸기 때문에 종자들이 수행은커녕 그저 한곳에서 대오를 가지런히 하고 쳐다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무개 스포츠카를 타고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젊은이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스스로의 행동을 한번 돌아볼 일이다. 그는 사원에서 키우는 개를 훔쳐 잡아먹는 등 시정잡배들도 좀처럼 하지 않는 짓을 거침없이 하고 다녔다. 절간에서 왜 개를 키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어찌 일국의 황제라고 할 수 있겠으며 그 나라인들 제대로 관리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나라는 망해도 그들의 지위에는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국망의 위기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궁중정변으로 황제를 폐립하려는 군대가 궁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객과 바둑을 두면서 “그들 나름대로 뜻이 있었겠지”라고 했다. 그것은 나라 일이 아니라 황실의 가사(家事)일 뿐이니 남의 일에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不問外事)는 입장을 취한 것이 남조 귀족층이었다. 

귀족들은 촌놈 황제들이 “소인(小人·寒門)을 아끼고 사대부를 멀리한다”고 불평이었다. 서로 자기들끼리 해먹는 소위 ‘끼리정치’판을 형성하면서 서로를 매도하였다. 이것은 관료의 분열만이 아니라 국론의 분열이다. 북방에서는 오호십육국이라는 혼란된 시대를 극복하고 일사불란하게 화북의 모든 역량을 통일시켜가고 있었는데 남조는 장강의 자연적인 방어만을 믿고 상하가 모두 이 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황실의 비천함과 존귀한 귀족문화의 괴리 

문제는 황실들이 그 열등감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하였다는 데 있었다. 제나라 창업자 소도성은 송말 어느 귀족에게 보낸 서찰에서 스스로를 ‘하관상인’(下官常人)으로 자처했고,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조(遺詔)에서도 “내 본래 포의소족(布衣素族)으로 황제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며 귀족에 대한 열등감을 토로했다. 과도한 열등감은 기행을 낳고, 자기과시에 골몰하게 만든 것이다. 능묘 앞에 거대한 석조물이 등장하게 된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필자의 주장에 무게를 싣기 위해서는 다시 이들의 작태를 잠시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제나라 황제 중 압권은 역시 3대 폐제 울림왕(鬱林王·昭業)과 6대 동혼후(東昏侯·寶卷)였다. 울림왕은 무제의 손자이고 문혜태자(文惠太子)의 아들이다. 문혜태자가 일찍 죽자 그는 황태손으로 책립되었다. 이 자는 속마음과 행동이 불일치한 것으로 유명했다. 아버지가 죽자 울부짖는 모습이 마치 숨이 끊어질 듯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오열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실로 돌아가서는 바로 웃고 즐거워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셨다. 그는 돈을 좋아했다. 임금이 되면 작위를 주겠다며 소인배들에게 미리 돈을 요구했다. 황제가 된 후 매번 돈을 볼 때마다 “내 예전에는 너를 그리워하면서도 제대로 얻지 못했는데, 오늘은 너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겠구나”라며 국고를 탕진해 버렸다. 

울림왕에게는 절제된 행동만을 강요하는 궁정생활은 따분할 뿐이었다. 그래서 할머니 예장왕비(豫章王妃)에게 “할머니! 불법에서는 복이 있으면 제왕의 집안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반대로 이것은 큰 죄네요. 시장 구석 천한 장사꾼만도 못해요”라고 했다. 무제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무제가 부리던 광대들을 불러 풍악을 울렸다. 또한 개와 말을 좋아하여 즉위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무제의 초완전(招婉殿)을 헐어 마굿간을 만들었다. 

말을 달리다 떨어져 얼굴과 이마에 가벼운 상처가 나자 병을 핑계로 여러 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평민의 복장으로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자주 아버지 능에 가서 소인배들과 갖가지 더러운 짓을 했다. 진흙을 던지고 뜀뛰기 내기를 하며 매를 날리고 개를 달리는 경주를 하기도 했다. 그 내기에 수십만냥의 상을 걸었다. 닭싸움을 좋아하여 좋은 싸움닭, 이름난 매와 빠른 개를 구하는 데 수천냥을 소비했다. 그리하여 무제가 모아 놓은 충실한 국고를 1년도 지나지 않아 거의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덕택으로 황태자가 된 제 폐제 동혼후는 명제의 둘째아들이다. 책과 학문은 멀리하고 놀기만 좋아했는데, 특히 밤에 쥐 잡기를 좋아해 아침까지 날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눌변이라 조정 대신과 만나는 것을 꺼렸다. 아버지 명제의 영구(靈柩)가 태극전(太極殿)에 있는 것이 싫어 빨리 장사지내고자 했다. 그 앞에서 응당 곡을 해야 할 때도 번번이 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피했다. 

밤낮으로 말타는 놀이를 하고,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고, 좌우의 수백인과 소리지르며 오랑캐 노래를 섞어 제멋대로 여러 음악을 연주하였다. 정사에 관심이 없어 행정부(臺閣)에서 상주한 서류를 받고는 아무 곳에나 던져버렸다. 환관이 그 종이에 어육(魚肉)을 싸서 집으로 가져갔는데, 알고 보니 행정부(五省)에서 올린 기밀문서였다. 

어떤 부인이 출산한다는 소식에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한 나머지 배를 갈라 확인하였다. 궁전의 여러 누각의 벽 위에 남녀의 외설스러운 형상을 그리면서 명제때 거두어들인 금은보화를 모두 가루내어 썼다. 그것도 부족하여 부호에게 금을 팔라고 하여 거두어들이고는 그 값을 치러주지 않았다. 굄목(幢)을 이빨로 들어올리는 경주를 좋아했는데,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다 이가 부러졌는데도 그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후원(後苑) 가운데 시장을 열고는 황제 자신이 궁인 등과 같이 구멍가게 장수를 하며 그의 비 반비(潘妃)는 시령(市令), 자신은 시리녹사(市吏錄事)라 칭했다. 이때 백성들은 ‘지존은 고기를 잡고 반비는 술을 판다’고 노래불렀다. 

송나라 황가의 종말을 살펴보자. 무제(劉裕)의 일곱 아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劉義季)만이 제 명에 죽어 후손이 있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비명에 죽어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효무제의 아들 28명 가운데에는 어려서 죽은 이가 열이고, 전폐제에게 살해된 이가 둘, 명제에게 살해된 이가 열여섯이다. 효무제가 이미 문제의 아들을 많이 죽여 후사를 끊어 놓았고, 명제도 효무제의 아들을 많이 죽여 효무제의 자손이 이미 하나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명제의 아들은 나라와 몸도 모두 망하게 되니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순제가 제위를 소도성에게 물려주고 해를 당한 뒤 송의 왕후(王侯)는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거되었다. 그러니 송 무제의 아홉 아들, 40여 손자, 60~70에 이르는 증손자 가운데 제 명에 죽지 못한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고, 세상에 후손을 남긴 이는 하나도 없었다. 

누구의 말처럼 황제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 비록 나라를 망하게 하더라도 몸은 오히려 온전할 수 있을 것인데 송·제의 황제들이란 작자들은 모두 남들을 괴롭히는 데 세상 가는 줄 몰랐다. 결국 그들이 남들에게 치른 만큼 종국에는 그대로 당하였으니 실로 ‘하늘이 멀리 있지 않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갑자기 흥성하여 황가가 되었을 때는 자손이 번창하여 황제나 왕이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한세상 복을 더없이 누렸지만, 그 몰락에 이르러서는 화염이 지나간 빈터처럼 일소되어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런 때를 맞고 나면 필부처럼 그저 가문이라도 후세에까지 보전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하늘 기운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시기심 많고 잔인한 송 무제 유유가 집안을 일으켜세우는 과정에서 동진의 황족들을 잔학하게 대한 탓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열린 피바람은 쉽게 그치지 않는 법이다. 효무제와 명제는 흉악하고 잔인하게 골육을 죽이면서도 오직 다 없애지 못할까 걱정할 뿐이었다. 이처럼 송나라 황실의 비극은 여러 황제들이 스스로 도륙한 것이지 다른 일족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었다는 데 그 비극의 처절함이 있다. 하늘은 마지막 마무리만은 다른 일족의 손을 빌리게 하였으니 ‘하늘은 준 것은 반드시 되갚아 주게 마련’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황제가 그러한데 황후를 비롯한 황실의 비빈과 후궁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청초(靑初)의 학자 조익(趙翼)은 “송 무제(劉裕)는 향리의 호족에서 일어나 속임수와 힘으로 천하를 얻다 보니 그 가정의 가르침에까지 미칠 겨를이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궁위(宮?)는 난잡하고 거기에 윤리가 있을 수 없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제대로 된 지적이다. 



남조 양문제 건릉의 석수.북조의 신수는 무덤 속에 묻혀 부장품으로 발견되지만 남조의 신수는 거대한 석조물로 능 밖에 서 있다. 
저질스러운 귀족문화와 함께 몰락해간 남조 

조천(趙?)은 유송 문제의 딸인 해염공주(海鹽公主)한테 장가들었는데 시흥왕(始興王·濬)이 궁액(宮掖)을 출입하면서 공주와 사통하였다. 조천이 그것을 알고는 공주에게 욕하고 때렸다. 일이 위로 문제에게 알려지자 문제는 조칙을 내려 이혼하도록 하고 공주를 낳은 장미인(蔣美人)을 죽였다. 효무제는 자주 어머니 노태후(路太后)의 방내에 머물렀다. 사람들 사이에는 추한 소문이 있었지만, 깊숙한 궁액의 일이란 원래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그 진위를 확실하게 가릴 수는 없다. 

그 많은 미녀들이 궁중에 그득한데 아무려면 그래도 모자간인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랴. 효무제는 또 남군왕(南郡王 ·義宣)의 여러 딸들과 음란하게 지냈다. 남군왕은 이에 분노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남군왕이 패한 후 효무제는 비밀스럽게 그의 딸을 취하여 궁중에 들여놓고 성을 은씨(殷氏)라 고치고는 숙의(淑儀)로 삼았다. 이런 사실을 누설했다 죽은 자가 많았다. 전폐제는 문제의 딸 신채공주(新蔡公主)를 귀빈(貴嬪)으로 삼았다. 궁중의 한 여종을 살해해 공주가 죽었다고 소문내고는 성을 사씨(謝氏)로 고친 후 데리고 살았다. 

전폐제의 누나인 산음공주(山陰公主)는 음자(淫恣)함이 도를 지나쳐 전폐제에게 “나(妾)는 폐하와 비록 남녀를 달리함이 있지만, 함께 선제(先帝)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폐하는 후궁이 수백명인데, 첩은 오직 부마 한사람뿐입니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라고 궁박하였다. 전폐제가 그를 위하여 젊은 미남자(面首) 30명을 좌우에 두게 하였다. 산음공주는 또 미남인 이부랑(吏部郞) 저연(?淵)에게 혹하여 그를 10여일 협박하였으나 저연이 목숨을 걸고 허락하지 않자 그만 두었다. 전폐제는 엉뚱하게 좌우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적인 건안왕(建安王·休仁)의 어머니인 양태비(楊太妃)를 범하도록 했다. 유도륭(劉道隆)이란 자는 전폐제의 환심을 얻으려고 양태비에게 갖은 추악한 짓을 다하였다. 

건안왕의 비인 은씨(殷氏)도 그 점에서는 빠지지 않았다. 그는 병이 들어 진찰하러 온 조상(祖 )이라는 의사의 용모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병치료는 제쳐두고 그와 더불어 간음했다. 일이 누설되자 곧 그에게 죽음을 내렸다. 명제는 궁 안에서 잔치를 하면서 부인네들을 발가벗긴 후 그것을 보며 웃고 즐기기를 좋아했다. 왕(王)황후 혼자 차마 볼 수 없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니, 명제는 화를 내면서 “너희 친정은 보잘 것 없는 한문(寒乞)이 아니더냐? 이제 함께 즐기자는데 어찌 보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힐책하였다. 왕황후가 “즐기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어찌 시어머니와 자매가 서로 모여앉아 아낙의 몸을 벗겨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친정에서는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니 명제가 크게 노하였다고 한다. 명제는 그의 비(妃) 진씨(陳氏)를 이도아(李道兒)에게 주었다가 다시 돌려받은 후 후폐제를 낳았다. 사람들은 모두 후폐제를 이씨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후폐제 스스로도 이장군(李將軍)이라고 칭함으로써 이씨의 혈통임을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명제는 평소 뚱뚱한 데다 만년에 병이 들어 안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도 별 볼 일이 없어지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동생들의 여자(姬人) 가운데 임신한 자가 있으면 궁에 들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그 어미를 살해하고는 육궁(六宮:후비가 거처하는 궁전) 중 총애하는 자들에게 주어 그 아이들을 키우게 하였다. 

제나라의 사정도 만만찮아 울림왕은 그 어머니 왕태후(王太后)를 위하여 그의 궁에 남자 30명을 두어 시중들도록 하였다. 이런 일들은 진실로 전대나 후대에 있을 수 없었던 일들이다. 
앞에서 소개한 것들은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남사’(南史) 등 정사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에 보이는 것들이다. 남조 송과 제나라 궁정 안의 풍기는 실로 이와 같았다. 이러니 귀족 사대부들이 황실과 혼인하는 것을 더럽고 위태롭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처럼 남조 송·제 황실 사람들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치의 저질 잔치판을 벌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문제는 당시 정치·사회 어느 부분에서도 그것을 제지할 만한 정치세력이나 제도적 장치나 윤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풍기가 생성된 이유는 황실은 황실대로, 귀족은 귀족대로 나라를 걱정하기는커녕 그저 순간적인 쾌락에 탐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때 선망했던 강남 땅! 제비들이 필자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는데…. 강남의 마을 어귀 혹은 논밭에 서 있는 거대한 기린·천록·벽사 등의 신수들과 석주, 석비 등은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람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남조 송·제 황족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기고 간 흔적들이다. 이 거대한 석조물은 주위의 평화로운 농촌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구의 말처럼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그것들이 남조 문화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된다는 것도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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