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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1904-05 (2)|

구름위 2013. 1. 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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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당시의 일본육군.

 

당시 일본육군은 40만명 가량의 규모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1894-5년간의 청일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고참병들이었습니다.

전투부대는 열두개의 사단과 제국 근위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각각의 사단의 주력은 보병여단이었는데, 여단은 두개 연대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연대는 세개 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각각의 사단에는 기병연대 (세개 대대) 와 포병연대 (각각 세개 중대로 이루어진 두개 대대로 구성), 600명 규모로 편성된 공병대대 (세개중대), 그리고 세개 반소대로 구성된 무선중대가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육군전체에 걸쳐 모두 17개 포병연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612문에서 680문 가량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현역 부대는 88,000명의 보병과 8,500명의 기병, 14,000명의 포병과 11,000명의 요새포병, 5,000명의 공병대와 10,000명의 수송부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동원이 실시되면 186,800명의 보병, 11,500명의 기병, 800문의 대포를 보유한 15,500명의 포병, 20문의 포를 보유한 13,000명의 요새포병, 9,000명의 공병대와 12,000명의 수송대로 불어났습니다. 여기에 300문 가량의 야포를 보유한 지역 의용군도 있었습니다.

 

사기와 효율성.

 

장교의 지도력과 병사들의 사기모두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추구하는 바와, 이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바에 대한 명쾌한 결론에 의해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 궁정관료들과 참모장교들은 인종적 편견에 근거하여 일본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만 외국 관전무관들 (심지어는 1903년에 일본을 방문한 쿠로파트킨을 포함한!) 은 일반적으로 일본육군이 현대적인 육군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는 견해에 찬성하는 편이었습니다.

 

국민의 교육은 메이지 천황시절 일본이 현대세계에 진입할때부터 중요시한 분야였으니, 사실 일본 징집병들은 그들의 상대인 러시아 병사들과 비교하여 교육수준이 훨씬 높았으며 이는 더욱 효과적인 군사훈련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병사들은 천황을 위한 군복무를 애국주의적 열정으로 대하도록 주입받았습니다. 비록 이러한 교리가 병사들을 설득하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아르투르 항을 둘러싼 전투에서 자살적인 돌격을 위해 참호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했던 일부 부대의 경우처럼) 육군 전체로 봤을때 군대정신이 뿌리를 꽉 내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관찰자들은 장교들에 의해 주관되는 야전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행정적인 고려와, 그들의 병사들이 보여주는 인내심 강한 복종에 대한 많은 예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궁정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긴 했지만, 이러한 일본의 권력구조는 아주 최근에야 재편성된 것이었습니다. 중앙의 여러 정치세력들은 상호간에 견제와 균형을 견지했으며, 젊은 황제를 비롯하여 그 어느누구도 차르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이 가진것과 같은 전제권력을 누릴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군사직의 임명또한 누군가의 총애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군문에 들어가는 것은 진지하게 선발된 자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장교들은 그들의 러시아인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 그들이 받은 교육과 활력, 그리고 자기 통제력의 측면에서 그들이 보유한 사회적 위상과 마찬가지로 월등했으며, 언제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장교단은 옛 세계를 뒤엎으려는 야망으로 가득찬 활기에 찬 젊은 사회였으며, 이러한 복무에 관한 이상이 지배계층의 타성에 의해 좌절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엄청난 수의 민족들과 다양한 사회계층을 다루어야 하는 업무에 진저리를 내고 있던 것과는 반대로, 일본은 전체적으로 통합되고 만족스러워하는 사회였습니다. 서구제국의 기준으로 볼때 일본의 징병제에 의한 복무강도는 엄격한 것이었으나 동시대의 일반 농민들의 삶 (혹은 많은 러시아 징집병들의 삶) 과 비교해서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 충분한 식사와 좋은 피복류의 공급, 그리고 고정적인 군료의 지불은 그때껏 그들이 누려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군율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매우 엄격했지만 이는 자기 통제를 강조하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산물이기도 했으며, 또한 계급간에 존재한 심연은 차르 군대의 그것보다 좁았습니다. 하루 근무를 마친 병사는 남은 시간에 오락과 목욕, 그리고 적당한 정도의 음주와 담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최대한 좋은 식사의 공급과 주둔중이거나 수송중에 허용되었던 기본적인 즐거움의 제공들과 같은 행정적인 노력은 작전중의 병사들에게 견딜만한 상황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만주에서 이러한 일본군의 노력은 러시아군에 비해 일반 중국인들에 대한 약탈과 폭력의 정도를 경감시킬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 정보망이 활동하는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강조해야만 할 사항이 있으니, 20세기 초반 일본군의 부상자와 포로에 대한 처우는 많은 서구 관찰자들과 귀환한 러시아 포로들의 증언에서 언급되는 바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930-40년대에 펼쳐질 야만적인 광경은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일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군사기술과 전술을 채택하긴 했지만, 일본은 러시아 만큼이나 자신들의 옛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그 한가지 예는 아르투르 항에 대한 공성전 기간동안에 벌어진, 러시아 장교에 의해 기록된 기괴한 사건입니다. 광신적인 몇몇 일본 장교들이 공성전 기간 보여진 자신들 군대의 추태에 불평을 터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듣고 황제께서 가라사대, 다른이를 욕하는 대신 그들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하다는 언급을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일단의 일본 장교들은 자신들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무사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서는 비소카야 언덕에 대한 이틀간의 돌격에 나섰습니다. 러시아 방어자들은 이러한 중세풍의 전사들의 돌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이러한 놀라운 광경은 많은 사상자와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일본 육군의 제복.

 

1886년식 정규제복 (현역병들.) .

 

1904년초에 만주지역에 상륙한 일본 제국육군 (大日本 帝國陸軍) 병사들은 다크블루빛의 천으로 만들어진 1886년식 정규 동계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복장은 세워진 옷깃이 달려있고 한줄의 단추가 달려 있엇는데, 일반 전열부대의 복장에는 노란색, 근위부대의 복장에는 스칼렛빛 파이핑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앞쪽에는 다섯개의 단추가 일렬로 달려 있었으며, 어깨의 계급장은 1887년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계급과 계급장 참조.) . 

 

 

 

 

바지 역시 다크블루빛이었으며 상의와 마찬가지로 솔기부분에 폭이 일인치 가량인 노란색, 혹은 스칼렛빛의 줄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바지단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고 흰 천으로 만들어진 각반 속으로 들어갔으며 외부의 단추로 고정되었습니다. 여기에 버클이 달린 가죽스트랩이 그 윗부분을, 다른 스트랩이 갈색의 징이 박힌 군화 아랫부분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각반을 고정했습니다.

 

군모.

 

이른바 "성냥갑" 모양의 M1886 군모는 검은 가죽챙과 고정끈이 붙어 있었으며 염색된 밴드와 정수리부분의 솔기부분에 군복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사단과 근위사단을 구분해주는 파이핑 장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사들이 모자밴드의 정면에 오각형 별모양을 한 모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흰 천으로 만들어진 모자커버가 모자의 정수리부분을 중심으로 씌여졌으며 면으로 만들어진 "차양" 형태의 햇빛가리개가 모자 뒷쪽의 단추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군모 안으로 말려올라진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군모 커버와 가리개는 후에 군복 전체가 카키색으로 변할 때 함께 카키색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후술.) .

 

오버코트.

 

전쟁 개전당시에 착용되고 있었던 M1886 오버코트는 큰 뼈 단추가 일렬로 달린, 안감이 따로 대여져 있지않은 다크블루빛 코트였으며, 그 뒤에는 모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후에 두번째 유형의 코트가 선을 보였는데, 앞의 코트와 다른 부분은 동일하지만, 내부에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안감이 대여져 있었습니다. 다른 1886년식 제복들처럼 이 오버코트 역시 전장에서 착용자를 너무 눈에띄게 만들었기에 대체품이 갖추어지는 대로 폐기되곤 했습니다 (아래의 동절기 제복부분 참조.) .

 

 

 

 

군화.

 

일본군 병사들은 징이 박혀있는 한쌍의 갈색 가죽군화를 신었는데 (다른 가죽제 장비들과는 달리) 군화는 광택이 나 있는 대신 기름으로 떡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무중에 신는 다른 군화로는 전통적인 tabi 가 있었는데, 이 신발은 가벼운 직물로 만들어졌으며 엄지발가락 부분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일본 병사들은 긴급시 밀짚을 말아 전통적인 짚신을 엮을 수 있었으며, 이런 신발들은 주둔중이나 행군중에 군화를 아끼기 위해 대신 착용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편안함을 위해 거친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구해 소지하기도 했습니다.) . 러시아군은 이러한 짚신을 신은 일본군들을 괴롭하기 위해 일본군 기지 근처에 작은 못을 뿌려놓기도 했습니다.

 

기병대 제복.

 

전쟁 발발즈음의 기병대는 초록빛의 칼라와 소매가 달린 이른바 "아틸라" 스타일로 재단된 다크블루빛의 튜닉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군복은 가슴 양 끝에 달린 다섯개의 단추로 고정되는 다섯개의 끈 장식이 있었으며, 그 중앙에 다섯개의 단추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끈 장식은 장교용은 검은색, 그 이하계급은 노란색이었습니다. 등 부분에는 양측에 한줄의 끈 장식이 옷의 진동둘레에서 허리를 따라 나 있었으며, 그 끝은 마찬가지로 끈을 땋아만든 세개의 고리로 마감되어 있었습니다. 군모는 밴드와 파이핑 장식이 녹색이었던 M1886 챙모자였습니다. 기병바지는 초록색 세로줄 장식이 나 있는 스칼렛빛 바지였으며, 여기에 강철 박차가 달린 검은 가죽제 승마화를 신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군복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차 훨씬 단조로운 카키색 군복으로 교체되어 갔습니다 (후술.) . 하지만 기병대 제복의 교체속도는 보병대보다 느렸으며, 심지어 몇몇 부대들은 종전시까지도 옛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장비로는 보병들의 그것보다 큰 갈색 가죽으로 만든 탄약집을 오른쪽 엉덩이 부분에 허리띠와 결속하여 사용했으며, 여기에 역시 매다는 방식의 수통을 소지했습니다. 다른 장비들은 안장에 달린 백에 보관했는데, 여기에 추가적인 수통을 넣기도 했습니다.

 

M1904 카키색 제복 (현역병.) .

 

1904년 이전에 사용된 하계군복은 흰 면으로 되어 있었으며, 착용자는 여기에 흰색 커버를 씌운 표준 군모를 썼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군복은 점차 일선에서 사라져갔지만, 여전히 일본국내의 훈련병들은 이를 착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카키색 M1904 하계군복으로의 교체가 진행되었지만, 옛 흰색 군복역시 일본 본토의 예비병들에 의해 계속 착용되었습니다.

 

1904년식 카키색 여름용 재킷은 다섯개의 놋쇠단추가 한줄로 달려 있었으며 다크블루빛 튜닉보다 전체적으로 기장이 짧았습니다. 안쪽에는 두개의 안주머니가 달려 있었으며, 여분의 주머니에는 병사들의 응급처치 키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몇몇 사진에 찍힌 일본 병사들은 그 외부에 거칠게 바느질된 주머니가 달린 군복을 입고 있는데, 이들 주머니는 아마도 개인적으로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군복은 어깨부분에 스트랩이 없었으며, 착용자의 계급은 오로지 모자 밴드의 색과 소매의 계급장으로만 식별 할 수 있었습니다. 솔기장식이 없는, 타이트하게 재단된 바지는 기존의 흰색 캔버스제 각반안으로 집어넣어져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 각반 역시 전체적인 군복색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종종 카키색으로 염색되곤 했습니다. 새로운 카키색 군모는 이전의 푸른색 군모보다 좀더 현대전에 걸맞는 것이었는데, 정수리 가장자리 부분은 머리밖으로 약간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이 군모에도 염색된 밴드가 있긴 했지만, 솔기부분의 파이핑 장식은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일본 국내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카키색 군복은 압록강 전투가 끝난 1904년 6월에야 만주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새 군복의 보급순서는 보병대가 가장 우선이었으며, 그 다음이 기병대과 포병대 순이었습니다. 몇몇 후방부대는 전쟁이 끝날때까지도 이 새 군복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쟁기간 동안에는 만주전역의 병사들이 우선적으로 카키색 군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습니다. 1904년 8월 13일자 신문에는 Feng-Wang Cheing 에 주둔한 일본군 병사들이 기존의 푸른 군복을 카키색 군복으로 바꾸는 과정을 묘사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광경이 모든 지역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많은 일본 병사들이 전쟁이 끝날때까지도 기존의 다크블루빛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습니다.

 

장비.

 

일본 병사의 군장무게는 대략 52파운드 가량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하네스는 앞에 두개, 뒤에 좀더 큰 하나, 모두 세개의 박스식 탄환집이 달린 갈색 가죽제 벨트였습니다. 앞쪽의 두 탄환집에는 각각 30발의 탄환이 들어갔으며, 뒤쪽에는 60발이 들어갔습니다. 병사들은 등에 갈색 가죽 스트랩으로 연결되고 목자 프레임이 들어있는, 털이 뽑히지 않은 생가죽으로 만들어진 배낭을 맸습니다. 이 배낭 (12인치X11인치X4와 1/2인치) 에는 3일분의 식사와 30발의 예비탄약, 두 쌍의 양말과 한벌의 내의가 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총기의 예비부품과 소제도구, 붕대, 군화 보호를 위한 그리스, 그리고 반짇고리와 빗, 가위와 같은 개인도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오버코트는 돌돌 말아서 배낭 주위에 둘러 보관했습니다. 여기에 5피트X5피트 2인치 크기의 1인분의 캔버스제 천막조각 (초기 일본육군은 붉은 담요천으로 만든 천막을 사용했습니다.) 이 코트위에 말려져 윗부분에 둘, 양 가장자리에 하나씩 달린 조절 가능한 가죽 스트랩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천막 조각들은 서로 버튼으로 연결되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네명에서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까지 다양한 모양으로 결합이 가능했습니다.

 

그 외에 한쌍의 예비군화가 배낭 양 측면에 묶여 있었으며, 금속제 취사용 통이 그 뒤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표면에 흑색이나 갈색 라커칠이 된 수통이 갈색 가죽끈에 묶여 왼쪽 어깨에 걸쳐져 있었는데, 위장을 위한 방편으로 캔버스제 카키색 커버가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기본장비는 8인치X10인치 크기의 카키색 캔버스제 차양인데, 평상시에는 오른쪽 엉덩이 부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몇몇 일본군 부대가 사용했던 유용한 장비는 먼지고글이었는데, 이것은 초창기의 자동차 선수들이 사용했던 고글과 상당히 닮은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건설장비는 병사들이 나누어서 휴대했는데, 중대당 67자루의 삽과 17자루의 곡괭이, 다섯자루의 손도끼와 다섯개의 접이식 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비들은 종류에 따라 배낭의 윗부분이나 왼팔 부분에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장비를 왼쪽에 결속하기 되면, 예비군화는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방식으로 장비되곤 했습니다.

 

일본군 소화기들.

 

일본군의 주력소총은 1897년에 도입된 구경 6.5mm 탄환 5발들입 탄창을 사용하는 아리사카 30식 소총이었습니다. 좀더 구식인 M1887 8mm 무라타 소총 또한 몇몇 후방부대와 예비부대, 그리고 대부분의 해군 상륙부대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기병대는 M1889 8mm 무라타 22식 기병총이나 좀더 나중에 나온 6.5mm 아리사카 30식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일본군 장교들은 자신들의 보조무기를 자비로 구입해야만 했기에 전쟁기간 동안 다양한 무기들이 장교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일본 본국에서 생산된 권총과 리볼버들은 일반적으로 서구 모델들보다 비쌌습니다. 이에 국산 권총을 좀더 싸게 구입하기 위해 장교들간에 일종의 조합이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표준적인 일본산 리볼버는 9mm 탄을 사용하는 1893년형 26식 이었으나, 20년 이상된 스미스&웨슨제 수입품들도 여전히 사용되었습니다.

 

기병도는 표준적인 군도보다 길었으며, 그 칼날은 마상에서 보병을 공격하기 좋게 33인치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병도는 영관급 장교용, 위관급 장교용, 준사관용, 하사관과 병사용 이렇게 네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장교의 칼집멜빵은 가죽보다는 주로 은도금된 체인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장교 제복.

 

표준적인 일본 장교의 제복은 병사들의 제복과 쉽게 구분 가능한 외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의는 거의 검은색으로 보이는 흑청색 천으로 만들어진 훗사르 스타일의 "아틸라" 재킷이었습니다. 이 M1886 제복은 각진 옷깃이 달려 있었으며 앞부분과 가장자리에는 검은 양털끈으로 된 장식이 달려 있었고 가슴부분은 단추로 고정되는 다섯줄의 끈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계급은 팔뚝에 달린 "매듭" 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계급과 계급장 참조.) . 바지는 솔기를 따라 붉은 줄이 나 있는 다크블루빛 물건이었는데, 위관 장교들의 줄은 좁았으며 영관급 장교들은 좀더 넓었고, 장성급의 바지에는 두개의 넓은 줄이 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기에 계절을 막론하고 검은 가죽으로 된 높은 군화를 신었습니다.

 

 

 

 

전쟁기간동안 보급된 1904년형 카키색 장교복에도 뻣뻣한 옷깃이 달려 있었는데, 이 상의는 아홉개의 가리어진 단추에 의해 잠겼으며 일반적으로 왼쪽 가슴에만 주머니가 달려 있었습니다. 계급표시는 M1893 하복과 마찬가지로 소매부분에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장교들은 여기에 카키색 바지와 카키색 군모를 착용했습니다.

 

여러 사진들에서 알 수 있는 일본 장교들 복장의 특징은 이들이 여러가지 규정복장을 혼합하여 입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장교들은 카키색 M1904 튜닉밑에 푸른색 M1900 바지를 입기도 했고, 흰색 M1900 튜닉과 M1893, 카키색 M1904 군복과 심지어 흰색 끈장식이 달린 흰색 M1874식 튜닉을 착용한 모습이 한 사진에 찍히기도 했습니다.

 

 

 

 

다크블루빛 혹은 카키색이었던 장교모는 병사들의 군모와 외양은 흡사했지만, 더 낳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계급은 채색된 밴드 주위의 검은 띠로 식별될 수 있었습니다. 검은 띠 두줄이 달린 군모는 위관장교 용이었으며 세줄은 영관장교용, 네줄은 장성용이었습니다.

 

동계 복장.

 

다크블루빛의 M1886 동복은 오래지않아 비실용적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군복은 그 착용자로 하여금, 특히 진흙창이나 눈밭과 같은 상황에서 눈에 잘 띄는 목표물로 만들곤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푸른 동복위에 카키색 하복을 걸쳐입는 방안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는 상의와 바지의 솔기를 뜯어서 일종의 카키색 오버올을 만들어 입는 방식으로 행해졌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개조품은 사이즈가 너무 빡빡했으며, 실제로 앞부분을 모두 가리지 못하고 끈이나 단추로 느슨하게 연결된 재킷을 입은 병사들을 담은 사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병사들은 대충 만들어진 포대로 만든 오버올을 그들의 다크블루 제복위에 덧입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짙은 회색빛 내의를 제복위에 입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임시변통의 복장들은 일본육군이 새로운 카키색 겨울코트를 지급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벌어진 일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병사들에게 있어 은닉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주 심각한 고민거리였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 외의 겨울복장 구입방법으로는 현지조달의 방법이 있었는데 1904년 10월경, Sha Ho 강을 따라 배치된 일본군을 위해 20만벌의 겨울 복장이 북중국에서 구입되어 전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보급체계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일본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겨울 장비를 더 잘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겨울 장비에는 양가죽, 혹은 염소가죽으로 된 소매없는 조끼가 있었는데, 이 조끼는 튜닉과 오버코트 사이에 껴 입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포병대를 비롯한) 몇몇 부대는 이 조끼를 오버코트 대신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조끼는 겨울 환경에서 작업하는 병사들에게 보온효과는 보장해주면서도, 기존의 오버코트보다 더 큰 활동의 자유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 M1886 복장의 일부인 큰 모자가 달린 다크블루빛의 울로 만들어진 소매없는 망토가 있었습니다. 이 옷은 환절기의 경계임무 등에 쓰였지만, 역시나 눈에 너무 잘 띄는것이 단점이었습니다.

 

한편 신형 방한코트가 1904/5년간의 겨울동안에 전선이 다소 안정되는 틈을 타 만주에 보급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 코트는 카키색 담요천으로 만들어졌으며 털이나 가죽제 옷깃이 달려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 코트 줄 많은 수가 일본의 민간인들이 헌납한 진짜 담요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국가의 호소가 효과가 있어서, 도쿄 한곳에서만 적어도 20만개 이상의 담요가 군에 헌납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공된 재료들은 국가가 병사들의 보온대책을 세우는데 필요한 예산을 아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역시 민간인들에 의해 수집된 쥐가죽으로 만들어진 분리식 귀가리개가 공급되었습니다. 많은 양의 귀가리개를 군에 제공할 수 있었던 이러한 호소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토의 쥐에 의해 매개되는 전염병을 줄여 주었으며, 기묘하게도 국민들은 이러한 기부로 인해 더 나은 위생환경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외국인 관찰자들에 의해 가장 자주 지적되었던 사항 중 하나는 1904/5년간의 겨울동안에 일본병사들이 두개의 담요를 가지고 있는동안 대부분의 러시아 병사들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일본 병사들이 언제나 좋은 보급을 받고 있었음을 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서 노획한 러시아 제 5시베리아 라이플연대의 코트를 기꺼이 착용한 병사의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 기록은 그들의 빈번한 공격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을 막론하고 부족했던 겨울 장비는 좋은 장갑이나 벙어리 장갑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장갑은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졌지만, 만주의 혹한을 막는데에는 적당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병사들은 한두켤레의 이랑지워 짠 울 양말을 신었으며 그위에 울이나 캔버스제 각반을 착용했습니다. 몇몇 병사들은 동상을 막기위해 울로 만들어진 "콧등가죽" 을 양말 위에 덧신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의 군화는 겨울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 뻣뻣하고 타이트한 가죽 신발을 신는 것은 징모되기 전까지 그런 것을 전혀 신어보지 못한 농촌 출신 병사들에게 특히 고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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