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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잔악해진 이유

구름위 2013. 1. 2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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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메이지유신...

아직 교통도 통신도 발달하지 않은 먼 옛날 사람들의 세계관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협소했다. 요임금 치세에 한 농부가 그렇게 노래했다던가? 내게 임금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그 말 그대로였다. 태평성대여서가 아니었다. 단지 중앙권력이 충분히 향촌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만큰 강력하지 못했고, 따라서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마을 단위에서 처리하다 보니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 너머에 대해서는 그만큼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일본이 그런 사회였다. 아직 천황이 쿄토에 머물고 있었다지만 천황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쇼군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에도에 쇼군이라는 높은 사람이 살고 있다더라 하는 정도였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기 어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대통령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당시 일본 사람들의 쇼군에 대한 인식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을 직접 지배하는 번주이고 다이묘였다. 아니 그 이전에 오래도록 폐쇄된 환경에서 함께 살아온 향촌사회였다.

당시 일본사람들에게 있어 향촌사회란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장차 죽어갈 그들의 고향이었다. 더불어 태어나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살아 온 친구이고 친척이며 이웃인 사람들이었다. 세금이야 영주에게 내더라도 모든 일은 그러한 마을 안에서 해결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오래도록 지켜 온 전통에 따라 마을 사람 스스로에 의해 처리되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마을 바깥은 별세계의 이야기였고, 오로지 마을 안, 그리고 자기 집안만이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였다.

이러한 증거는 일본의 전승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우연히 마을을 방문한 여행자에 대한 공포나 경계심 혹은 적개심 같은 것이었다. 여행자가 어쨌다더라, 여행자를 어쨌다더라, 여행자가 마을 사람을 어떻게 했다거나, 마을 사람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했다거나, 그런 것들이 팔만 개의 신을 만들고, 텐구를 만들고, 오니를 만들고, 팔백 비구니를 만들었다. 결국은 외부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그런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본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너희는 산아래 마을 사람이거나 강가 마을 사람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강제로 부여되었다. 새로이 들어선 메이지 정부에 의해 새로운 통일 국가 일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아직 봉건적인 폐쇄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들을 새로운 일본의 국민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당연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왜 학교에 가느냐는 것이었다. 왜 군대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뭔데 나라가 멋대로 나서서 땅값을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천황이 뭐라고 감히 남의 마을 일에 함부로 끼어드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은 어느 나라나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통과의례나 다름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짧은 시간 안에 근대화를 이루어야 했기에 더욱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었고 반발 역시 압축적으로 일어났다.

문제는 이러한 일반 일본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일본 국민에게 일본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하는 신 앞에 복종하고 봉사하는 신민을 만들어 버렸다. 일본이라고 하는 보편타당한 가치 아래 시민으로서의 일본인을 만드는 것이 아닌 천황을 중심에 놓은 메이지 정부 앞에 오로지 복종하고 충성하는 신민으로서의 수직적인 질서만을 주입했다.

원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지사들 자체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천황을 만세일계로서 팔굉일우를 다스릴 절대적인 존재로 전제하여, 모든 일본인을 그러한 천황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국학의 사상이었는데, 이것이 존왕양이가 되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천황이든 일본이든 생경하기만 한 일본사람들이다 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천황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니까 쇼군이 바뀌었나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현인신으로서 신성이 강조된 천황에 대해 배부르게 먹게 해달라고, 자식 병 낳게 해달라고 절에 가서 신사에 가서 빌듯 비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결국 천황을 받아들인다는 자체가 메이지 정부에 의해 일본 사람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메이지 유신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근대적인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하면서 일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고 따르도록 하기보다는, 절대적인 신성으로서의 천황과 그 천황을 받드는 메이지 정부에 일방적으로 복종할 것만 강요한 때문이었다. 통일된 일본, 더 나아가 일본 바깥의 세계로 눈을 돌리기보다는 오로지 천황만을 보고 천황의 명령만을 쫓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길들여진 짐승에 가까운 맹목적인 존재를 만들어낸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일본인이라 하면 엄정한 규율과 철저한 복종으로 정의되지 않던가. 흔히 전체주의라 하지만 일본인의 그것은 전체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전체주의는 한 사회 전체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자는 것이고, 일본의 경우는 단지 주어진 명령에 충실하자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규율과 복종은 이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백인이 아닌 민족으로서 유일하게 근대적인 제국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내전 당시 미국과 영국을 비롯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백군을 지원하겠다며 연해주로 파병했다가, 전투는 뒷전이고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는데 골몰하느라 전체 전력의 1할을 성병으로 잃는 어두운 부분도 있었다. - 이때의 경험이 종군위안소 설치를 결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 다시 말해 명령이 주어지면 잘 따르는데, 명령에서 벗어난 일탈적인 상화에서는 말 그대로 우리를 벗어난 짐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난폭해지며 쉽게 잔인해지는, 그런 주제에 또다른 권력에 대해서는 금방 순응해 버리는.

이와 비슷한 예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저 유명한 관동대지진이다. 당시 큰 지진이 있고 혼란이 극에 달하자 일본인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와 선동에 휩쓸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을 무참히 학살하게 된다. 아톰으로 유명한 테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한 낙서를 두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 증거라며 선동하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더라고 증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광기였다. 이 역시 그들을 묶어두고 있던 규율과 명령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진 상태였다.

누구보다 규율을 잘 따르면서도, 또 규율로부터 벗어나고 나면 광기와도 같은 일탈을 보이고야 마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가능한 것은 결국 메이지 정부가 강요한 천황의 명령을 받드는 신민으로서의 일본인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울타리 바깥의, 나나 우리가 아닌 다른 인간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명령하는 존재와 그 명령을 받드는 자신이라고 하는 수직적인 관계만을 강요함으로써 명령이 사라졌을 때 그 주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난징 대학살과 동남아 전선에서의 식인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명령에 의해 더 이상 주위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라면, 후자는 지휘체계가 붕괴됨으로써 더 이상 따라야 할 명령이 사라진 상태라고나 할까?

당시 일본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이제 갓 시골에서 기초적인 교육만 받은 상태에서 징집된 병력들이었다. 워낙 도시 출신의 병사들에 대해 불신하고 있던 일본군이라 많이 배우지 못한 대신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농촌 출신 병사들을 선호했고, 당연히 그들에게는 도시의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과는 달리 마을 울타리를 넘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복종만을 학습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주어지지 않은 병사들에게 명령이 사라진다는, 아니면 그들의 본능을 해방시켜도 된다고 하는 명령이란 어떤 의미이겠는가. 그것은 결국 그들을 규제할 어떠한 장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 때문이었다. 심지어 수백 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무관조차 너무 참혹해 고개를 돌려버리는 끔찍한 행위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수십만을 마치 장난하듯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포로나 심지어 전우조차 죽여 그 고기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그러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그나마 제어하고 있던 규율과 명령조차 제거한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같은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독일과 일본을 구분짓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독일인은 철저한 규율 아래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엄격하게 잘 교육된 병사들에 의해, 엄정한 규율과 엄격한 질서 아래,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고한 믿음에 따라 모든 학살이든 약탈이든 파괴든 모든 범죄가 저질러졌다. 반면 일본은 그러한 교육도 규율도 질서도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규제하던 모든 장치들이 제거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말하자면 독일은 이성을 갖춘 기계로서 그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면, 일본은 이성이 배제된 채 원초적인 본능과 욕망만이 남은 상태에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범죄들을 저질렀던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그리 잔인하고 난폭하던 인간들이, 전투에 있어서는 차라리 죽기 위해 싸우는 듯 자살공격가지 서슴지 않던 그 용맹한 병사와 장교들이, 정작 항복을 하고 포로가 되고 나서는 길들여진 개가 되어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는 거다. 묻지도 않은 기밀까지 술술 알아서 불고, 같은 포로에 대한 통제와 감시까지 스스로 맡아 처리한다. 오죽하면 일본군 포로들에 가장 잔혹했던 것이 같은 일본인 포로라고 할까?

결국 같은 맥락이다. 싸우는 동안에는 상급자가 명령권자였다면, 포로가 된 뒤에는 포로로 잡은 적군이 명령권자다. 상대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이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명령을 내리는가를 파악하고 알아서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이라 할지라도 일단 명령을 내리는 위치라 판단되면 지금까지 자신의 상관에게 그러했듯 철저히 복종하고 따르는 것이다. 오로지 명령을 받들고 따르는 것에만 익숙한 근대 일본인의 극적인 단면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철학의 부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받드는 자의 수직적인 질서만을 강조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없다. 전쟁을 하면서도 나라가 무언지, 민족이 무언지, 전쟁이란 무엇이고, 군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나라고 하는 존재는 과연 무엇을 위한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명령만을 받들 것을 교육받은 채 전장으로 내몰렸기에, 명령을 받는 동안에는 길들여진 개가 되었다가 명령이 사라지면 본능만이 남은 흉폭한 야수가 되어 버리는 이중적인 모습이 가능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본이라고 철학이 없지는 않았다. 아시아에서 누구보다 먼저 근대철학이 수입한 것이 바로 일본인이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배우는 철학용어라는 것들 대부분이 그때 일본인이 근대 서양철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조어들 아니던가. 그러나 그렇게 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일본은 철저히 그것을 일본 근대화를 이루는 도구로서 받아들였다. 이성과 합리, 보편성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천황과 국가의 명령을 받드는 신민으로서의 일본인을 만드는 도구로서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이 정상적인 근대적 인간일 리 없다.

물론 그것은 태평양 전쟁 당시나 이전만의 일은 아니다. 지금의 당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마 언론을 통해서도 가끔 보았을 것이다. 노숙자를 공격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고, 동급생을 왕따시켜 자살로 내몰고, 그러면서도 정작 죽인 자신들을 반성하기보다는 죽은 사람을 더 탓하고 비난하는 엽기적인 범죄들을. 고도성장기 메이지 일본이 그러했듯 오로지 물질적인 성장만을 강조하여 제대로 자기 이외의 더 넓은 세계와 인간들에 대해 가르치지 않은 탓이다. 군국주의 일본의 수뇌부가 전혀 제거되지 않은 채, 군국주의 일본 시절 그러했듯 오로지 물질만을 쫓는 그런 인간으로 만든 탓이다. 군국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현대 일본에서 과거의 군국주의를 미화하며 전쟁을 찬양하는 어처구니 없는 젊은 녀석들이 나올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때문일 것이고.

문제는 이것이 비단일본만의 경우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당장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 왔었다. 그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교육을 받아 왔었고, 그런 이들이 다시 사회 각계에 남아 지도적인 위치에서 이 사회를 이끌어 왔다. 차라리 미군정 아래에서 미국에 의해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바꾼 경험이 있는 일본의 경우가 나으면 차라리 나았지, 그때 그 사람들과 그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우리가 더 나을 리는 없는 것이다.

당장 학교에 가 보더라도 그렇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사는 세계가 어디이고 인간이란 무엇이며 규범이란 도덕이란 윤리란 무엇인가 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고민들은 가르치지 않는다. 민주시민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유와 평등과 인권과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시민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가르치지 않은다.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교육 뿐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교육 뿐이다. 위와 아래는 가르치되 전후와 좌우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교육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다. 잘 살면 된다. 힘이 있으면 된다. 성공하면 된다. 위와 아래는 있는데 앞뒤도 좌우도 없다. 오로지 위만 바라볼 뿐 아래는 아예 돌아보려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 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인정도 없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잘 살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정당화된다. 아니 오히려 법이나 도덕, 윤리를 말하면 이상주의자라며 비웃고 조롱한다. 법과 도덕 윤리를 우습게 여기며 돈과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능력이 있다 동경하고 존경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그래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자신도 유색인종인 주제에, 심지어 미국사회에서는 훨씬 지위가 높은 흑인을 차별하는 모습이나, 같은 아시아인인 주제에 아시아를 멸시하며 유럽을 동경하는 모습이나 전혀 어색하지 않다. 국민소득 2만불이 되어서도 더 성장해야 한다며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경멸하고 멸시하며 온갖 모욕을 주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고 보면 외국인을 대하는 모습들은 지나칠 정도로 일관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일본이 그러했듯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듯.

사실 요즘 같아서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어느 일빠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일 주위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의 행동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닮자 일본을 닮자 그러더니 시간을 거슬러 가장 안 좋은 모습만 그대로 닮아 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했던 그것을 도리어 동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고 보면 어쩔 수 없달까.

인문학의 위기란 단순히 학계의 위기만이 아니다. 이 사회, 이 나라 전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가치를 심어주지 못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가치를 쫓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그 나라는 결국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맹자는 이익을 말하기보다는 오로지 인의가 있을 뿐이라 한 것이리라. 인의가 - 즉 올바른 가치가 갖추어지지 못한 나라는 한때 흥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스스로 썩어 무너질 뿐일 터이니.

1868년 보신 전쟁이 끝나고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까지 고작 77년. 그나마 태평양 전쟁 이후 소련과 공산주의를 경계한 미국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이라 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철학없는 혁명은 한 세기도 채 가지 못하고 멸망의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나, 그것을 닮아가면서도 부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한국이나, 도대체 어떻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