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러일전쟁(1)

구름위 2013. 1. 2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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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러일전쟁은 극동지역을 무대로 벌어진 두 강대국 간의 패권투쟁이었습니다. 옛부터 러시아는 태평양과 통하는 동방으로의 확장 정책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진행된 중국제국의 쇠약화는 러시아로 하여금 기존의 동쪽 변방을 넘어서 그 이상의 영토 -만주등의 북 중국 지역과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 의 획득을 시도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은 19세기 후반에서야 200년간의 고립에서 벗어난 일본제국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의 산업과 군사분야에서의 놀라운 발전은 야심차고 공격적인 분위기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대륙이 야심찬 강대국들의 먹이감으로 전락하게 만든 청 왕조의 쇠약화는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1인자 자리를 차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1894-5년간의 청일전쟁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중국은 이제 서구식으로 무장하고 조직된 일본군에게 패배했습니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보함으로서 그곳에 일종의 괴뢰 정부를 세우는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군기지인 아르투르 (=여순) 항을 포함하는 만주의 요동반도를 넘겨받기로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서구 강대국들이 특히 후자의 사항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으니, 특히 러시아는 일본이 이렇게 얻은 바들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친러파들의 쿠데타에 의해 세력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일본은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해야만 했으며, 러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을 대신 차지할 수 있습니다. 명백한 전략적인 위협과 이러한 의심할 나위없는 굴욕들은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으며, 1897년부터 양국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그후 7년동안 철도를 건설하면서, 비록 원칙적으로는 중국 영토였던 만주의 하얼빈에 새로운 사령부를 설치하고 이 지역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아르투르 항구는 -태평양과 접한 블라디보스토크와는 달리- 부동항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의 난과 이어 벌어진 하얼빈 지역에 대한 위협때문에 러시아 역시 만주지역에 10만명의 병력을 전개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이 지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보전을 벌였으며, 마침내 일본은 1902년에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는 등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영국을 통해 군함을 구입하고 해군을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러시아는 독일제국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바다였습니다. 1904년이 되자 일본은 자신들이 복수를 감행하기에 충분이 강해졌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한 승리로 표현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전체로 보았을 때 이러한 함대작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지상전이 훨씬 높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1905년 2-3월간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봉천전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입니다. 러일전쟁은 기술적으로 그다지 격차가 없었던 주요 군사 강대국 사이에 터진 20세기의 첫 충돌이었으며, 보어진쟁 (1899-1902) 등과 같은 최근의 충돌에서 막 베일이 벗겨진 최신 무기와 기술들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많은 관전장교들이 이러한 신무기들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모든 나라의 군대가 이러한 교훈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이 전쟁에서 이미 겪은 이러한 점들을 불과 십년후에 터진 유럽 대전쟁의 서막에서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다시 배워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연대표.

 

비록 이 책은 러일전쟁에서 육군에 주안점을 맞추었지만, 주요 해전들 역시 결정적인 전투들이었습니다. 이 해전들은 이 연대표에서 이텔릭체로 쓰여져 있습니다.

 

1904년.

 

2월 8-9일: 일본 해군이 아르투르 항을 공격했습니다. - 일본해군의 구축함들이 아르투르 항내에 정박중이던 일곱대의 전함과 여섯척의 순양함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함대에 대해 야간기습공격을 가했으며, 이에 두척의 전함과 한척의 순양함이 뇌격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항구를 봉쇄하려는 일본해군의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들은 2월 말부터 3월, 4월까지 이어졌습니다.
2월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2월 12일: 일본군이 조선의 제물포에 상륙했습니다. : 선봉을 맡은 3천명 규모의 12사단과 뒤이은 2사단과 근위사단으로 이루어진 일본육군 제 1군 (사령관 타메토코 쿠로키) 이 3월 28일에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A.N.쿠로파트킨의 지휘를 받는 러시아 수비대가 배치된 압록강 지역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4월 13일: S.O.마카로프 제독의 죽음. - 러시아는 기뢰에 의해 가장 정력적인 해군지휘관을 잃었으며, 또한 이는 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4월 25일-5월 2일: 압록강 전투. - 일본군은 야간 도강을 위해 비밀히 이동식 다리를 가설하는 한편으론 성공적이지 못한 도강시도를 함으로서 러시아군의 화력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야음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진격과 정찰이 뒤따랐는데, 러시아군은 자신들의 위치를 은폐하는데 실패하였기에 우세한 화력지원을 받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상자는 일본군 1,000명, 러시아군 3,000명 가량이었으며, 러시아군은 이 외에도 여덟자루의 기관총과 11자루의 야포를 상실했습니다. 일본군의 승리는 국제금융위운회의 창설을 촉진하는 한편, 러시아군으로 하여금 요동반도에서 조선전선으로의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5월 5일: 일본육군 제 2군 (사령관 오쿠) 이 요동반도에 상륙했습니다.
5월 25-6일" 요동반도 병목지역의 러시아 수비군에 대한 일본군 (제 2군, - 1,3,4 사단) 의 성공적인 공격인 남산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트레탸코프 Tretyakov 대령의 수비군들은 탄약공급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방어에 매달렸지만, 포크 Fok 장군에 의한 성급한 후퇴명령으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1,100명 가량, 일본군의 손실은 750명 가량이었습니다.

 

6월 초: 일본육군 제 3군 (지휘관 마레스케 노기 - 제 9, 11사단) 이 다롄 Dalny 을 접수하고 아르투르 항을 고립시키기 위해 진격함. -  일본군의 전략적 목표는 여전히 남만주 철도의, 요양에 위치한 러시아 기지였습니다.
6월 14-5일: Te-Li-Ssu 전투 - 요양과 아르투르 항 가운데에 위치한 오쿠의 일본육군 제 2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불안했던 공격시도. 오쿠군 (3,4,5사단) 은 북쪽으로 공격을 가해 쉬타켈베르크 Shtakelberg 장군의 제 1 시베리아 군단을 패배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전사자 477명, 부상자 2,240명에 754명의 포로와 16문의 대포였으며, 일본군의 손실은 전사자 217명에 부상자 946명이었습니다.
6월 말: 일본육군 제 1군 (지휘관 구로기) 와 제 4군 (지휘관 노즈) 이 요양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결국 쿠로파트킨 장군은 전략적인 Motien 지역의 통로를 포기했습니다.

 

7월 3-17일: 러시아군이 Motien 통로를 재획득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7월 22일: 일본군 사령관인 야전원수 오야마와 그의 유능한  참모장 고다마가 제 2군과 합류했습니다.
7월 26일: 아르투르 항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이 제 3군 (지휘관 노기, 1,9,11사단) 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A.M.스테셀 장군과 C.N.스미르노프 장군 사이의 상호 불화와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45,000의 수비대는 터널과 콘크리트 요새, 철조망 구조물과 다수의 포대를 건설했습니다.
7월 31일: 켈레르 Keller 장군이 요양을 양해 남동쪽으로 접근중이던 일본육군 제 1군에 대항한 전개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준비는 느리고 알아차리기 뻔했습니다. 일본군 12사단 (사령관 이노우에) 과의 전투에서 두배 가까운 러시아군은 퇴각을 강요당했으며, 켈레르 장군 자신은 약 6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8월 10일: 황해전투 - 여섯척의 전함과 세척의 순양함, 그리고 14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비트게프트 Vitgeft 제독의 함대는 아르투르 항을 떠나 도고제독의 네척의 전함과 11척의 순양함, 그리고 46척의 소형함으로 구성된 함대와 대치했습니다. 대파된 기함에 타고있던 비트게프트가 전사하자 그의 부관은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두척의 순양함과 한척의 구축함이었으며 여기에 한척의 전함과 두척의 순양함과 세척의 구축함이 중립항에 억류되었지만 이에 반해 일본해군의 손실은 오직 어뢰정 한척뿐이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아르투르 항에서 여전히 봉쇄상태에 빠졌으며, 육상지원을 위해 많은 함포를 함정에서 떼어내기도 했습니다.
8월 9-24일: 노기장군은 자신이 10년전 중국인들에게서 손쉽게 탈취한 바 있었던 아르투르 항에 대한 첫번째 돌격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 공격에서 일본군은 최소한 16,00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자연히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노기는 장기적인 공성전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월 26일-9월 3일: 요양전투 - 오야마 휘하의 제 2, 4군, 즉 33개의 기병대대와 170문의 야포를 포함한 도합 128,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158,000명의 병력과 148개 기병대대, 그리고 609문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던 쿠로파트킨의 1, 3, 4, 5, 10, 17 시베리아 군단을 공격했습니다. 양군은 폭염과 폭우를 무릅쓰고 험한 지형을 따라 나 있는, 정면이 25마일 가량이고 폭이 18마일 가량인 전선에서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싸웠습니다. 전쟁은 이제 막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사상자 수를 근거로 (러시아군은 3,600명 전사에 14,300명 부상, 일본군은 5,540명 전사에 18,600명 전사) 승리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쿠로파트킨은 북쪽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군의 지휘계통과 통신계통이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더 나쁜것은 일부 러시아 부대가 전투 중 명령도 없이 퇴각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0월 7-17일: Sha Ho 전투. 쿠로파트킨은 남쪽을 향한 공격을 시도했으며, 오야마는 이에 반격으로 맞섰는데 양측은 그들의 희망을 좌익 공격에 두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피해 (러시아군 약 11,000명 전사, 30,400명 부상, 일본군 4,000명 전사, 16,500명 부상) 를 입고 게다가 아르투르 항의 구원을 위한 진격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승리를 주장했습니다. 지치고 장비와 인력부족에 지친 양쪽 군대는 이제 만주에서 겨울을 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25-31일: 아르투르 항에 대한 6일간의 무의미한 공격에서 일본군은 4,800명의 전사자를 냄.

 

 

 

 

11월 27일-12월 6일: 아르투르 항 전역에 원기왕성한 제 7사단과 새로운 중포들과 함께 온 고마다 장군은 결국 제 203고지를 탈취하였으며, 그 후 항구를 내려다보는 비소카야 언덕의 점령에 성공했는데 이 전투에서 14,000명의 일본군과 5,000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했습니다. 이제 항구내의 러시아 군함들은 하나씩 격침되거나 대파당했습니다.

 

12월 18-31일: 아르투르 항의 네 군대 전략지점이 추가로 점령당했으며, 마침내 스테셀 장군은 아르투르 항의 수비대를 위해 항복교섭을 시작했습니다.

 

1905년.

 

1월 2일: 결국 아르투르 항의 수비대가 항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수비대의 군율의 붕괴와 특히 장교들의 의무에 대한 태만은 외국 관전장교들을 충격에 몰아넣었습니다. 아르투르의 항복은 노기의 일본육군 제 3군을 북방으로 이동하게 해 주었으며, 이들은 이 지역의 제 1,3,4 군을 보충했습니다. 여기서 야전원수 오야마는 이제 쿠로파트킨의 지휘를 받는 제 1 (지휘관 리네비치), 제 2 (지휘관 그리펜베르크), 제 3 (지휘관 카울바르스) 만주군과, 미쉬첸코 장군의 코사크 군단과 대치했습니다.

1월 내내: 양쪽은 기병대를 출격시켜 적 후방의 보급로와 통신선을 교란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1월 25-29일: San-de-pu 전투. 그리펜베르크 장군의 제 2 만주군은 노기의 제 3군이 전선에 합류하기 전에 겨울동안의 Hun 강 전선을 돌파하여 남동쪽인 요양 방향으로 진격, 일본육군 제 2군을 포위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혹한속에서 부실한 준비속에 이루어진 공격은 러시아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안겼습니다. 그리펜베르크 장군은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한 후, 자신의 상관인 쿠로파트킨을 비난했습니다.
1월-2월: "1905년 혁명" -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심각한 불안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군부대에 의해 죽었으며, 이에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의 제국 행정관이 암살당했습니다. 일본 정보당국은 핀란드와 발트지방, 그리고 코카서스 지방의 반체제 세력들에게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2월 19일-3월 10일: 봉천회전 - 역사를 통해 이제껏 있었던 전투 중 가장 다양한 부대들이 참전한 전투였을 겁니다. 춘계작전을 위해 쿠로파트킨은 제 1, 2, 3 만주군 (각각 리네비치, 카울바르스, 빌데를링의 지휘) 을 지휘했는데, 여기에는 275,000명의 보병과 16,000명의 기병, 그리고 1,439문의 야포와 56정의 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오야마는 압록강군 (지휘관 가와무라), 제 1군 (쿠로키), 제 2군 (오즈), 제 3군 (노기), 제 4군 (노즈) 휘하의 200,000명의 보병과 7,350명의 기병, 924문의 대포 (아르투르 항에서 가져온 11문의 중박격포를 포함한) , 그리고 174정의 기관총으로 맞섰습니다. 오야마는 북쪽으로 전진하면서 2월 24일에 시작될 쿠로파트킨의 작전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압록강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려 러시아군의 주의를 동쪽에 묶어놓으면서 제 3군으로 하여금 서쪽 측면의 후방에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동시에 제 1, 2, 4군을 동원하여 전선의 중앙부와 서쪽 부분에 집중공격을 가했습니다. 언제나처럼 형편없는 정보망과 부하 장군들의 무능력에 고통받고 있던 쿠로파트킨은 2월 27일에 이르러서 오야마의 의도가 확실해질 때까지 자신의 예비대를 동쪽 측면에 배치했습니다. 쿠로파트킨은 후방의 병참고가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파괴명령을 내렸으며, 게다가 처음 얼마간은 침투한 일본군의 군세를 과대평가하기까지 함으로써 일선 부대의 불안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몇몇 러시아군 부대는 고주망태에 빠지고 군율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3월 2일, 이제는 이미 강화된 일본군의 서쪽 연결망에 대처하기 위해 중앙부의 군세를 이동시키려는 그의 의도는 지긋지긋한 날씨때문에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는 봉천의 기지를 포기하는 것이 이제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결국 3월 7일에 전술적 퇴각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후퇴는 일본군의 돌격때문에 3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무질서한 후퇴 상태로 악화되었습니다. 완전히 사기가 떨어진 쿠로파트킨의 군대는 거의 200마일을 후퇴하면서 수송장비와 보급품의 태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역시 탈진상태였기에 러시아군은 완전히 와해되는 것만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양측모두 사상자가 30%에 달했습니다. 러시아군은 4만명의 전사자, 혹은 포로와 49,000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일본군은 16,000명의 전사자와 60,000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3월 20일: 미국이 평화회담을 제안했습니다.

 

 

 

 

5월 27-28일: 쓰시마 해전 - 전쟁의 결정적인 해전. 도고 제독의 빠르지만, 좀더 가벼운 무장을 한 일본 함대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러시아 제 2,3 태평양 함대가 일본과 한국 사이의 해협에서 격돌했습니다. 발트해를 떠나 북해, 수에즈 운하, 혹은 희망봉, 그리고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거치는 일곱달간의 악몽과도 같은 항해기간동안 잘 훈련되지 못한 러시아 승무원들은 병에 걸리거나 반항적이게 되었으며, 그들의 패배주의적인 장교들 역시 완전히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주된 손실은 다섯척의 전함과 네척의 순양함, 그리고 다섯척의 구축함이 침몰한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세척의 전함과 다섯척의 순양함, 그리고 두척의 구축함이 나포되거나 중립항에 억류되어야만 했습니다. 약 4,800명의 러시아 해군장병들이 죽었으며 7,000명이 사로잡히고 1,800명이 억류되었습니다. 일본해군의 손실은 세척의 어뢰정과 110의 전사자, 그리고 590명의 부상자였습니다.

 

러시아는 여전히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봉천과 쓰시마에서의 쌍둥이 재앙은 러시아의 전쟁 속행의지를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역시 그동안 누적된 엄청난 사상자와 제정적자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6월 10일-12일: 일본과 러시아가 미국의 중재제안을 받아들입니다.
6월 14일-25일: 흑해함대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합니다. 순양전함 포템킨호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수천명의 동조자들이 오데사에서 사살되고 포템킨호는 루마니아의 항구로 망명을 떠납니다.

 

7월 7일-8월 8일: 일본이 사할린 섬을 점유하기 시작합니다.
8월 9일: 평화협정이 포츠머스와 뉴햄프셔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주관하에 시작됩니다.

 

9월 5일: 이른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남부 사할린과 요동반도를 획득하고 조선에서의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양국모두 대중의 이 협정에 대한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차르 체제가 받은 굴욕은 차후 러시아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군사적 혁명.

 

사실 이 전쟁에서 진정으로 처음 도입된 신기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신 정비된 기술의 사용 규모야 말로 진정한 혁신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40년동안 후장식 연발소총과 전신장치, 관측기구의 보급과 군대와 보급품 수송을 위한 철도의 확장, 그리고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던 기관총의 사용은 확장일로에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오직 진기함의 대상이었던 이러한 무기들은 이제 전장에서 점점 더 흔한것이 되어갔습니다.

 

기관총.

 

러일전쟁에서 양측은 전장에 현대적인 기관총을 대규모로 투입했습니다. 일찍이 미국 남북전쟁 동안에 벌어졌던 피터스버그 공성전에서 열두자루의 개틀링 기관총이 선을 보인 바 있었으며, 이러한 초기 기관총들은 그후 30년동안 이어진 식민지 전쟁을 통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러일전쟁은 이른바 "2세대 기관총" 이 등장한 첫번째 전쟁이었습니다. 이전처럼 수동식 회전방식이 아닌, 수냉식, 혹은 공냉식 자동발사 방식의 기관총들은 전장을 지배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차대전때 그토록 흔했던, 부대의 50% 이상의 인원이 대량학살당하는 장면의 전조는 이미 러일전쟁에서 기관총에 의해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참상은 부분적으로 견고하게 수비되는 러시아 기관총 진지를 향한 일본군의 자살적인 돌격방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은 기관총이 예전처럼 완전한 방어무기로만이 아닌, 공격무기로서 보병지원에 일조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는데, 이 사실은 독일군 관전무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대다수의 외국인 관전무관들은 전투의 결과를 기술적인 요소나 다른 전문적인 분야에서 찾기보다는 전통적인 사기에서 찾았습니다. 예를들어 그들은 전쟁의 결과를 장군들의 능력에서 찾기 보다는 일본군의 맹목적인 용기와 그에 대비되는 러시아군의 방어적인 자세에서 찾았습니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공격정신" 에 대한 과대평가와 기관총과 같은 신무기나 방어전술에 대한 홀대는 1914-5년 사이에 대가를 치루게 될 터이지요. 전투에서의 승리 요소로서 기병대에 매겨진 과도하게 높은 비중또한 비판받아 마땅한 점일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자신의 군대에 배치된 기관총의 수를 1898년의 12자루에서 1901년경에는 40 자루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현대화된 유럽 기준에서 보자면 보잘것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어쨋든 전쟁이 진행될수록 더욱 많은 기관총이 일선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사용한 7.62mm 맥심 기관총은 영국의 빅커스-맥심 사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1905년 이전까지는 오직 교환용 총신만이 툴라 병기창에서 생산되었으며, 그 해가 되어서야 그들의 특징적인 청동제 냉각수통이 달린 완제품 기관총을 생산해 낼 수 있었습니다. 맥심 기관총은 포병중대당 여섯자루에서 일곱자루가 배치되었는데, 대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받침대에 실려 있었으며 총수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달려 있었고 탄약통은 뒷부분에 얹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완전무장 상태의 기관총팀은 종종 일본군 포병대와 저격수의 쉬운 목표가 되곤 했는데, 이러한 점은 압록강 전투에서 명백해졌습니다. (목격되는 바에 의하면 전쟁 후반부터는 좀더 높이가 낮은 바퀴달린 받침대가 사용되었다고는 하나, 양 세계대전때 쓰인 유명한 소코로프식 받침대는 M1910년형 맥심 기관총이 등장할 때까지도 표준장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기관총은 아르투르 항과 같이 완전히 엄폐된 방어지형에서 운용될 때 그 효과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탄띠식 급탄방식의 수냉식 맥심기관총 외에도 러시아는 전쟁전에 200정 가량의 덴마크제 매드슨 Madsen 탄창방식 공냉식 경기관총 (M1902 혹은 M1903 이라고 불린) 을 기병용 장비로서 구매한 바 있었습니다. 이중 일부가 만주 전선에 투입되었으리라 생각되긴 하지만, 실제로 실전에서 사용이 목격된 바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보여준 기관총의 중요성은 1914년까지 네개의 보병대대당 여덟자루의 맥심기관총과, 네개 기병연대당 여덟자루의 매드슨 기관총을 배치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인들 역시 전쟁 즈음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기관총을 일선부대에 장비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를 늘릴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일본군들은 압록강 전투에서 몇대의 러시아군 맥심기관총을 노획한 후, 그 옛 주인들을 상대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군은 1900년에 있었던 의화단의 난 때 프랑스제 호치키스 M1897 기관총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얼마 뒤 이 기관총의 생산 라이센스를 취득한 후, 도쿄의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몇달 후 전쟁이 터졌을 때 각각의 일본군 사단은 24대의 기관총 (기관총은 사단장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 이 무기의 유용성이 확인되면서 많은 일본군 장교들이 기관총의 사용규모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기간동안 양국의 두 주력 기관총에 대한 비교는 일본군의 선택에 손을 들어 주었으며, 러시아군 병사들은 적군의 기관총이 자신들의 맥심 기관총에 대해 몇가지 이점이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수냉식보다는 주로 공냉식으로 작동되는 호치키스 기관총은 맥심 기관총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웠기에 전투중에 새로운 지점으로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이러한 점은 공격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 바퀴가 달린 거치대에 얹혀진 맥심기관총은 특히 거친 지형에서 인력으로 움직이기 힘들었으며, 또한 더욱 발견되기 쉬운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맥심 기관총의 캔버스제 탄띠가 습한 기후에서 변형을 일으켜 잦은 재밍 현상을 유발한다고 불평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점은 견고한 금속제 탄띠를 사용하던 호치키스 기관총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실 호치키스 기관총도 사용탄이 8mm탄에서 6.5mm탄으로 바뀌면서 많은 기계고장을 일으켰습니다. 한 일본군 보고서는 이 때문에 평균 300발마다 재밍이 일어난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사실 실전에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기관총에 관한 가장 중요한 혁신은, 일본군의 공격에 있어서의 기관총 운용방식이었는데 이들은 돌격하는 보병들의 머리위로 기관총을 발사하여 이들을 지원한 후 새로운 사격지점으로 재빨리 이동하곤 했습니다. 독일군 관전무관인 폰 베크만 대위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봉천전투 중이던 1905년 3월 1에 벌어진 전투에서 한 일본군 사단에 소속된 12자루에서 18자루가량의 기관총 모두가 러시아군 방어거점을 향한 공격에 투입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평상시 러시아군의 사격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기관총 사격이 느슨해질때마나 맹사격을 퍼붓곤 했다. 일본군 보병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기관총의 엄호하에 러시아군의 사격이 끊어지는 틈을 노려 적진을 향해 조금씩 접근해 나갔다."

 

봉천전투에서와 같이 Fan 강 도하작전 때에도, 일본군은 강을 건너고 러시아군의 참호까지 40야드 떨어진 가파른 언덕으로 돌진하는 과정동안 1,800야드 떨어진 곳에서 발사되는 기관총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 2사단에 배치된 기관총을 지휘한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은 회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기관총을 좋은 사격위치로 이동시킨 후, 1,200야드의 사정거리를 두고 보병들의 머리위로 사격을 함으로서 그들의 공격을 지원했다... 우리는 곧 적군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각각의 기관총은 약 한시간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1,500발 가량의 총알을 발사했다."

 

통신.

 

양측 모두 전쟁기간 동안 전화를 이용한 통신체계를 운용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모든 보병연대와 포병대에 네대의 전화기와 6킬로미터 (3과 3/4마일) 가량의 전선을 할당했습니다. 전선에 배치된 일본군 부대들도 전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구리선이 이것들을 연결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일본 육군의 훈령에 따르면, 세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지휘관과 전화연결이 되어야 했으며, 이들 지휘관들 역시 자신의 상급 지휘관과 전화연결이 되어야 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자국의 과학자 포포프 Popov 가 개발한 라디오을 야전통신 목적으로 1900년경부터 테스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라디오는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제로 야전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두 곳의 라디오 회사가 I.A.레온티에프 대위의 지휘하에 세워졌으나, 이곳에서 생산된 12대의 라디오 세트와 네 세트분의 교체장비가 전선에 도착한 것은 1905년 5월이 되어서였습니다.

 

참호전.

 

아르투르 항에 설치된 참호들과 각종 방어시설들은 십년 후 프랑스의 서부전선에서 등장할 전쟁방식의 서곡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군 방어거점의 수준은 고르지 않았으나, 그 중 우수한 곳들은 콘크리트로 방호되어 있었으며 그 중 몇몇은 280mm에 달하는 중포사격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가시철조망 (이런것이 없을 때에는 그냥 평범한 철조망) 역시 방어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에 무더기로 설치된 "소 울타리" 형태의 나무토막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철조망이 러일전쟁때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기철조망은 러일전쟁때 첫 선을 보였습니다. 일본군들은 이러한 장애물과 마딱뜨린 후, 처음에는 절연처리가 된 손잡이가 달린 절단기로 대응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대나무 끝부분에 화약을 가득채운 형태의 원시적인 "폭약통" 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대응책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파편과 총탄을 막기위한 금속 방탄복을 입은 지원자들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야간공격은 드문일이 아니었기에, 특히 러시아군은 대량의 서치라이트와 "별 폭탄" 이라고 불린 조명로켓을 사용했습니다. 지뢰역시 공격을 막기위해 설치되었으며, 이들은 종종 전기격발장치로 연결되어 12피트 깊이의 지하에 매설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늑대 아가리" 라고 불린 좀더 원시적인 형태의 가시박힌 함정 역시 대량으로설치되었는데, 은폐된 이러한 구덩이의 바닥과 벽에는 날카로운 각목이 박혀 있었습니다.

 

비록 러시아군은 아르투르 항으로 진격할때 좋은 은폐물이 될수있을 큰 키의 작물들 (옥수수겠죠, 아마..;) 을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일본군들은 이 잘 건설되고 단단히 준비된 요새를 향한 정면돌격에서 엄청난 희생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아르투르 항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만의 참호선을 건설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본군들이 참호건설에서 보여준 노력과 헌신은 러시아군의 그것을 능가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들은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대피소가 연결된 공성용 참호를 건설했는데, 공격조는 공격전에 이 대피소에서 공격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은 탄약통이나 포탄속에 폭팔물을 채운 뒤, 점화방식으로 폭발시키는 원시적인 형태의 수류탄을 포함한 다양한 돌격무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대나무단으로 보호받는 목제 박격포 (이것들의 원형은 16-7세기의 일본인들이 성을 공격하기 위한 인화물질을 투척하는데 사용한 "목제 대포" 였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의 보고서는 일본군이 사용한 "백두 whitehead" 의 사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수류탄 투척기에 의해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발사되곤 했습니다.

 

관측기구.

 

양측 모두 관측기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이 전쟁은 항공기가 그 역할을 빼앗기 전에 관측 분야에서 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원래 극동지역의 러시아군은 단 하나의 항공대대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는 전쟁동안 세개 대대로 늘어났으며 군 사령부 직속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군의 기구운용은 때때로 병참분야의 문제에 기인한 수소가스 공급 지연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를들면 Sha-ho 전투에서 기구부대는 수소가스가 부족하여 열차 수송칸에 하릴없이 적재되어 있기만 했습니다. 1904년 10월 28일, 아르투르 항에 라프로프 중위가 관측기구를 띄우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장비들을 실은 배는 나포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대담한 라프로프는 자신이 아르투르 항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를 동원하여 즉석에서 기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나니, 그는 이 기구를 채우기에 충분한 수소를 어떤 노력을 해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 역시 관측기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기구가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러시아군과는 달리 일본군에는 기구 전문병과가 없었으며, 대신 포병장교와 병사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일본군과 러시아군 측에서 일한 중국인들.

 

일본군과 러시아군 모두 만주인들 사이에서 보조인력을 뽑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양측 고위관계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으며, 사실 이들 보조병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Hung-hu-tze ("Chunchuns", khunhuzy) 는 중국인 비적떼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이들은 수백년동안 여행자들이나 농부들을 공격했으며 심지어는 기회가 닿는대로 만주지역의 마을들을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러일전쟁의 양측 모두 이러한 비적떼에 의해 긴 병참선과 통신선상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 일본인들은 소규모의 비정규병을 조직하여 길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러시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이에 아오키 대령과 총원 71명의 일본인 간부들을 근간으로 한 여섯개의 "특무부대" 가 1904년 1월에 북경에서 편성되었습니다. 부대원들은 "우호적인" 중국인 비적들 중에서 충원되거나 혹은 -중국군 사령관인 위안스카이의 동의를 얻은 후에는- 위안스카이 휘하 기병대의 지원자들을 충원받기도 했습니다. 중국군의 간부들 역시 이 Chunchu 부대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오래지 않아 주로 요양에 위치한 러시아군 기지를 상대로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러시아군 사령부는 이러한 공격들을 단지 만주지역의 무질서 탓으로 돌렸으며, 일본군이 이들을 조직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적" 중 몇몇은 후대의 이른바 "군벌" 시대에 중요한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장쭤린은 1928년에 죽기 전까지 십년이 넘도록 만주와 북중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습니다. 그는 러일전쟁때 개척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군벌기간 동안 일본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ChunChun 부대들은 1904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에 이르는 기간동안 러시아군의 탄약과 기타 수송품 보급소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러시아군을 성가시게 했지만, 남만주 지역의 철도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이곳에 배치된 잘 무장된 러시아 수비대에 가로막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러시아군 역시 철도와 수송선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처럼 비공식적인 중국인 보조부대를 두고 있었습니다. 한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소령은 전후의 회상록에서 자신이 탄 기차앞의 철도를 가로지르는 한 무리의 무장한 중국인들을 보고 놀라서 동료장교에게 그들을 가리켰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료장교는 "'그들'은 우리편" 이라면서 걱정 놓으라고 안심시켰습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냐는 질문에 그 동료장교는 "왜냐면 저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진 않잖나"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들 중국인 보조병들은 러시아 군복을 공급받지는 못했지만, 개머리판에 "러시아 제국정부의 재산임" 이라는 각인이 새겨진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임시변통으로 그 지역에서 충원된 것으로 보이는, 말을 탄 소규모의 중국인 보조병들이 일부 러시아 기병대에 배속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보조기병들은 전투보다는 전령과 정찰부대로서 운용되곤 했습니다. 비록 중국인으로 보이는 부대가 러시아 장교들 앞을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러시아 고위사령부가 이들의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1904년 당시의 러시아 육군.

 

1904년 당시의 러시아 육군 (Russkaya imperatorskaya armiya) 은 평상시에도 백만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동원시에는 350만명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육군에는 근위병과 척탄병들, 그리고 일부 코사크 부대와 같이 잘 훈련된 부대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명백히 질이 떨어지는 얼마간의 예비군들과 2선급 부대들 역시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전쟁노력에 있어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러시아는 사실상 이 전쟁에서 비록 수는 많지만 그 질은 낮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극동 군관구에 의존하여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정부는 정치적인 불안때문에 유럽 군관구에 소속된 더욱 믿을만한 부대들을 극동으로 보내기 꺼려했으며, 대신 이들 부대들을 주둔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투입했습니다.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높은 편제는 군단이었으며, 각각의 군단에는 두세개 가량의 보병사단과 하나의 기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사단은 역시 두개의 연대로 이루어진 두개의 보병여단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연대에는 네개의 대대가 있었습니다. 각각의 사단에는 여섯개나 여덟개 정도의 중대로 이루어진 하나의 포병여단이 배속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포병중대에는 여덟자루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극동 군관구의 러시아 연대들은 이러한 표준과는 사정이 사뭇 달라서, 각각 두세개 가량의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랬기에 극동 군관구의 연대의 총원은 표준정원의 3,100명에 못미치는 2,100명 가량이었습니다.

 

사기와 효율성.

 

이미 1904년 당시의 러시아 군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수장으로 있는 로마노프 왕조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날때부터 신성한 권리를 가진 전제군주의 이름을 통해 권력이 창출되는 이 전제정치 국가에서, 지휘관의 자리는 전문적인 능력보다는 궁정에서의 암투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세기말의 러시아 사회는 활력에 찬 개혁가들의 것을 포함한 여러가지 주장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완고하고 보수적인 정부는 이러한 사람들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방어하던 권력층은 능력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거부했으며, 이는 필요한 개혁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장교단을 냉소적이고 출세 제일주의의 분위기와 태만, 그리고 비효율성으로 가득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장교의 역할은 여전히 실전에서 육체적인 용기의 표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전중에는 심각할 정도로 완고하게 중앙 집권하된 지휘체계와 군사 관료주의가 급한 결정사항들을 지연시켰으며, 전쟁수행에 필요한 바를 파악하기 위한 황급한 전문들이 통신망을 마비시켰습니다. (예를들어 게으른 참모부의 행동때문에 만주지역의 러시아군은 정확한 지도조차 없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시기심이나 자만심에 기인한 군율의 붕괴또한 종종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으며, 몇몇 고급 지휘관들은 국내 문제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협력하는데 계속하여 실패하곤 했습니다.

 

 

 

 

평민 계층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종교적인 감정에 기반을 둔 그들의 전통적인 애국주의적 가치를 수행하였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놀랄만한 인내심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육군에는 해군만큼 패배주의가 만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고향에 대한 애착과 차르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위상이 철저한 애국심으로 발전되지는 못했으며, 게다가 타락한 군대사회는 병사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기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던 장교들 -전투의 순간에서는 병사들과 분리되어 있었던- 은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병사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러시아 도시들에서 1905년에 터진 심각한 사회불안과, 이에 대한 잔혹한 진압과정을 고려할 때 전투에서 얻은 영웅적인 전공에 기인한 명성으로 장식된 몇몇 연대들마저 군율을 잃고 산산히 흩어져 상점을 약탈하거나 장교들을 적대시한 것은 놀랄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육군과 해군에서 공통적으로 만연한 문제점들이 다가 아니었으니, 육군 내부의 문제점, 예를들면 유럽 지역의 부대와 시베리아 지역 출신 부대간의 반목또한 실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징병을 피할 수 없던 이들은 기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에게 있어 징병은 개인적인 재앙으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농촌 사회에서 이러한 젊은이 (그리고 마필까지의) 들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은 마을 공동체에 있어 대재앙을 뜻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징모된 이들의 대다수는 실로 문맹이었기에 고급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장교로 출세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훈련과 군율의 확립은 초보적인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반복적이고 거친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작전도중 병사들의 기초적인 요구에 대한 고려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장교단의 병사들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러시아의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와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극동지역의 러시아군.

 

전쟁기간동안 투입된 러시아군의 주력은 전쟁이 터질 무렵부터 그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부대들이었습니다. 이 부대들은 바이칼 호 이동과 만주철도 수비임무를 포함하는 만주지역, 아무르강 지역,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Possiet 만 지역, 다롄 Dalny 과 아르투르 항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개전당시 동방에 배치되어 있던 러시아군은 모두 3,115명의 장교와 147,479명의 병사들, 그리고 266문의 대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경 수비대와 시베리아 민병부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합 32개의 동 시베리아 소총연대가 있었는데, 각각의 연대는 세개의 대대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연대는 39명의 장교와 1,906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네개의 정규 전열보병연대가 전역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 123, 124, 139, 140 연대는 네개 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들 네개연대는 모두 312명의 장교와 15,248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252명의 장교와 15,3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16개의 예비보병대대가 있었습니다. 니콜라이에브스크 Nikolaievsk 에 배치된 한개 대대와 한개 중대로 이루어진 요새 수비대는 20명의 장교와 1,186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국경 수비대의 보병대는 268명의 장교와 13,103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55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소총연대들.

 

1904년 경의 시베리아 소총연대들은 오직 세개 대대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유럽지역의 러시아군 전열보병 연대와 달랐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부대 규모가 변경되는 일이 드물었으며, 대대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700명 가량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연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참모장교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참모부는 대령밑의 부관과 비교적 적은수의 참모장교들, 그리고 참모부의 업무까지 도맡은 100여명의 잡다한 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각각의 연대는 "okhotniki" 라고 불린, 두 명의 장교와 140명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기마 정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전, 시베리아 지역의 가장 큰 군 편제는 두개 연대로 이루어진 여단이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몇개의 여단들이 임시변통으로 동 시베리아 소총사단으로 편성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05년 10월당시 모든 소총연대들은 네개 대대규모로 증강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연대에는 68명의 장교와 3,852명의 병사와 하사관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동 시베리아 소총부대들의 병사들의 질은 그다지 높지 못했습니다. 부대원들은 현역 복무를 마치고 재소집된 예비군들과, 유럽지역 러시아 출신의 이주민들, 그리고 여러 아시아 부족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시베리아 출신" 부대의 병사들 중 40% 가량이 폴란드 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시베리아 출신 동료들보다 만주의 극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들 시베리아 병사들이 전투에서 보여준 전투력을 높게 사며, 그들이 보여준 문제점을 훈련과 지도력의 부족에서 찾기도 합니다.

 

시베리아 포병대.

 

32개 중대로 이루어진 동 시베리아 포병대는 각각 네개씩 모여 (대대내에서 1-4번의 숫자로 불리면서) 여덟개의 대대를 구성했는데, 각각의 중대에는 여덟자루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술적인 필요에 의해 대대들은 때때로 두개 중대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나뉘어지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포병대대는 각각의 보병사단에 분할 배치되어 사단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전쟁이 터질 무렵의 동 시베리아 포병대는 7.62cm 구경의 Putilov M1902 속사포로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32개 중대 중 23개 중대가 전쟁전에 이 신형포를 보급받을 수 있었으며, 나머지 9개 중대는 전쟁을 거치면서 새 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철도 수비대.

 

국경 수비대는 러시아의 가장 외진 지역에서 치안경찰의 임무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국경순찰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경 수비대 대원들은 복무를 마친 퇴역병들을 대상으로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다른 부대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와 보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좀더 나은 보충병들을 모집할 수 있었으며 기실 전 러시아 부대들 중 가장 유능하고 잘 훈련된 부대들 중 하나였습니다. 극동지역의 군대유지에 필요한 만주지역에 가설된 철도의 중요성과 그 공격에 대한 취약함 때문에 국경수비대는 철도의 보호임무에 투입되어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때때로 철길을 따라 후퇴하는 다른 부대들을 엄호하는 힘든 임무를 맡으면서 보여준 용감함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1904년 2월 당시, 각각 250명으로 이루어진 55개 보병 중대가 있었으며 같은수의 기병중대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부분 산포로 무장한 여섯개의 포병중대까지 포함하여 이들의 수는 모두 13,750명에 달했습니다. 전쟁을 거치면서 이들은 18,000명으로 이루어진 72개 중대로까지 증강되었습니다.

 

시베리아 민병대역시 같은 수비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각각 12개 대대를 포함한 여덟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대대정원은 대략 1,000명 가량이었습니다.

 

기병대.

 

러일전쟁 전의 러시아군은 극동지역에 여섯개의 전열기병 대대와 36개의 코사크 기병대대를 배치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1904년 3월까지 207개 대대로 증강되었는데 이중 63%에 해당하는 부대가 코사크인 부대였으며, 나머지는 용기병들이거나 승마상태의 국경 수비대였습니다. 전쟁에 투입된 비 코사크인 기병대대는 기본적으로 세개 용기병 연대 -프리모르스키, 네진스키, 체르니코프 연대- 와 제 42, 48 국경수비대 승마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sotnias (대대규모) 라고 불린 여섯개의 코사크 국경 수비대는 국경 수비연대를 구성했으며, 전쟁기간 내내 만주군에서 활동했습니다.

 

코사크 부대들.

 

전통적으로 코사크인 부대들은 제국군대에 있어 필요한 정찰과 탐색임무를 맡았으며, 만주 전선에서도 이런 임무들을 잘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지만 이러한 기대는 다소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다른 육군 부대들처럼- 이들 역시 비 유럽지역 군관구 출신의 2선급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동방 코사크 병사들의 대부분은 돈 강과 오란베르그, 우랄, 시베리아, 트란스-바이칼, 아무르 강 지역, 그리고 우수리 강 지역의 "소지주들 (voisko)" 이었으며, 여기에 쿠반, 테렉, 다게스탄 지역에서 건너온 코카서스인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잘 훈련받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좋은 지도를 받지도 못했고 군율이 단단히 잡혀 있지도 않았기에 다른 러시아 부대들은 이들을 민병대보다 약간 나을 정도로 여겼습니다. 시베리아 코사크 병사들은 심지어 단순히 "말 안장에 앉은 보병" 이라고까지 혹평당했으며, 외국 관전무관들은 트란스-바이칼 코사크 병사들을 가리켜 "전혀 전쟁준비가 되지 않았다." 라고 평가하면서, 이들은 정찰이나 기타 전초임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까지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병사들은 1905년의 "혁명" 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이들 코사크인들을 차르의 통치도구로 보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코카서스 출신 병사들은 그들의 화려한 군복때문에 미움을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들을 일본군 후방을 목표로 한 대규모 공격에 투입하는 방식을 통해 좀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긴 했습니다. 이렇게 계획된 첫번째 공격이 1905년 1월, 미셴코 Mischenko 장군의 지휘하에, 대부분 코사크와 용기병대, 22문의 대포와 두자루의 기관총 반소대, 그리고 네가 마필수송 포병대로 이루어진 10,000명으로 이루어진 혼성군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5월에는 두개 코사크 부대와 여섯자루의 대포가 참가한 좀더 작은 규모의 출격이 있었습니다. 이들 공격들은 모두 후방의 수송로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들 공격으로 적군의 철로와 전신선에 다소간의 피해를 입힐수는 있었지만, 공격군의 규모를 생각할 때 이 정도의 전과는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기간동안 코사크 부대들은 통신선 보안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코사크 기병연대는 25명의 장교와 955명의 병사들, 그리고 1,014필의 군마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여섯개의 "sotnias", 즉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의 제복.

 

개전 당시의 러시아와 일본군 모두 이미 1880년대에 채택된 구식 복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다크그린 빛 M1881 군복과 일본군의 다크블루빛 M1886 군복 모두 구시대 군복을 특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이미 보어전쟁을 통해 현대식 소총의 위력에 적합한 "위장효과가 있는" 군복을 필요성을 깨달은 바 있었지만, 러일전쟁의 양측은 실전에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야 그러한 군복의 개발과 도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온 관전무관들이 이러한 변화를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나라들 -특히 프랑스- 은 1914년 8월까지도 그들의 알록달록한 군복을 완고하게 유지했습니다.

 

 

 

 

개전당시 대부분의 러시아 병사들은 1881년에 규정된 이후, 거의 23년간 유지된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동안 소수의 개량 버젼들이 선을 보이긴 했습니다. M1881 군복은 서방 유럽군대의 복장의 모방에서 벗어나, 이른바 군복의 "러시아화" 를 이룩하고 동시에 군복의 간략화를 추구하던 차르 알렉산데르 3세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도 병사들의 군복은 중앙으로부터 재료를 받아, 일선 부대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부대마다 군복의 세부사항과 질에있어 들쭉날쭉하곤 했습니다.

 

1881년형 정규 제복 (현역병) .

 

이 제복은 두 줄의 단추가 달려 있고, 그 중 오른쪽의 다섯개의 단추로 잠구는 방식의 긴 튜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군복의 색상은 거의 검정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녹색이었습니다. 이 군복은 외부에 아무런 주머니가 없었습니다. 칼라부분은 간신히 원형을 하고 있었으며, 소속부대를 알려주는 옷깃 장식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이 장식은 울 재질로 된 어깨 스트랩과 같은 색이었습니다. 오직 근위대만이 맞춤 군복을 지급받았으며 다른 부대들은 일반적으로 헐렁헐렁하게 재단된 군복을 입었습니다. 바지 (sharovari) 역시 마찬가지로 다크 그린빛의 울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바지의 모습은 "니커보커" 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으며, 끝단을 무릎 높이까지 올라오는 장화속으로 밀어넣는 방식으로 착용했습니다. 오직 근위연대만의 바지만이 솔기부분에 파이핑 장식이 나 있었습니다.

 

바지와 군화는 여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지만, 튜닉은 grimnasterka 라고 알려진 흰색의 느슨한 "셔츠 튜닉" 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러시아 농민들의 스모크를 본따 만든 이 복장은, 도입 초기에는 평시의 작업복으로 쓰였으나 오래지 않아 전투복으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grimnasterka 는 앞부분에 두개의 단추가 나 있었는데, 목과 가슴부분에 달린 이 단추들은 천에의해 외부에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깨부분에는 소속 연대를 보여주는 어깨 스트랩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상의의 뒤쪽 허리부분에는 병사가 착용하는 가죽 허리띠와, 단추방식으로 보조 고리를 통해 연결되는 천 재질의 스트랩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 grimnasterka 는 야전근무를 위해 흔히 카키색으로 염색되곤 했습니다.

 

 

 

 

군모.

 

표준적인 러시아 병사들의 모자는 furashka 라고 알려진 약모였는데, 이 약모는 챙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자는 다크그린 빛이었으며, 정수리 부분의 솔기와 머리테의 윗부분과 아랫쪽에 붉은색 파이핑이 쳐져 있었습니다. 네가지 각기다른 색으로 염색된 밴드는 색에 따라 착용자가 사단의 몇 연대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붉은색은 1연대, 푸른색은 2, 흰색은 3, 다크그린은 4연대.) 1904년 초반까지는 오직 시베리아 부대들의 모자에만 챙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후 전 장병들을 대상으로 챙이 달린 모자로 교체하자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완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밴드위의 정수리 정면에는 주석으로 만들어진 후  오랜지색, 흑색, 또는 백색으로 칠해진  로마노프 가문을 상징하는 타원형 모장이 달려 있었었으며 밴드 위에는 병사의 소속 연대 번호가 스텐실 방식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연대번호가 찍히지 않은 새로운 모자가 도입되었지만, 여기에도 모장은 여전히 붙어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약모는 곧 원래의 각잡힌 형태를 잃어버리고 노동자들이 쓰는 납작한 노동모의 형태로 변형되곤 했습니다.

 

 

 

 

비록 몇몇 고참병들에 의해 좀더 넓은 챙이 달린 옛 군모가 착용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챙이 달린 군모조차 직사광선을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여름에는 이 표준적인 군모 뒤에 흰 천이 부착되곤 했는데 실제로는 (군복의 다른 부분들처럼) 다양한 농도의 카키색으로 염색되곤 했습니다. 물자 부족때문에 몇몇 병사들은 모자대신 천조각을 베레모처럼 머리에 두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차양" 형태의 목가리개가 달린 모자또한 몇몇 자료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1881년형 오버코트.

 

표준적인 러시아군의 오버코트 (shinel) 는 흑갈색 혹은 회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으며, 보풀이 나 있는 거칠고 무거운 울 -프리즈 모양과 비슷하다고 묘사된- 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 코트에는 한줄의 단추가 달려 있었며, 그 끝자락은 무릎과 발목 사이까지 내려왔습니다. 여기에 소속 연대를 알려주는 옷깃 패치와 어깨 스트랩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혹한이 닥치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양모코트가 아주 "널널" 해서 옷을 몇겹 껴입기 딱 좋은 오버코트 밑에 받쳐 입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복장의 단점은 전투시에 상당히 거추장스럽다는 것이었으며, 쉽게 진흙투성이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옷자락을 고정시킬 고리와 갈고리 다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bashilik 라고 불린 큰 모자가 이 오버코트 뒤에 흔히 달려 있었으며, 이 큰 모자는 목을 감싸거나 어깨 스트랩 밑을 통과한 후 가슴위를 가로질러 고정될 수도 있었습니다.

 

군화.

 

기본적인 군화는 sapogi 라고 불린,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한쌍의 무릎 높이 장화였는데, 병사들은 장화안에 양말대신 발싸개를 착용했습니다. 군화는 가벼웠으며, 바닥에는 탄력있는 굽이 달려 있었으나 밑창에 징이 박혀있지 않았기에 곧잘 미끄러지곤 했습니다. 최초로 이 장화를 목격한 관전무관들은 이 러시아군의 군화가 진흙창을 진군하는데 있어 완벽하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군화는 방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많은 병사들이 쩔뚝거리면서 행군을 마치곤 했습니다. 또 다른 보고에서는 추수를 마치고 남은 수수대가 병사들의 밑창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새로 보급된 새로운 군화조차 그 질이 매우 낮았으며, 일반적으로 20마일 가량의 강행군 후에는 쉽게 망그러진다고 불평되곤 했습니다. 한마디로 병사들은 러시아 체제의 취약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1904-5년간의 겨울동안 좀더 실용적인 펠트제 군화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1904년 12월 당시 여전히 30만개의 군화가 부족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정찰부대원들이 자신들의 정규 군화를 포기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질이 낮은 군화조차 수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기에, 많은 병사들이 중국인들이 신는 울이나 가죽제 각반이 달린 신발을 신었습니다. 이러한 신발의 겨울버젼인 uly 는 다른 방한재를 집어넣기 알맞도록 넉넉한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장비.

 

1881년의 명령 제 111호에 의해 러시아 병사들은 방수처리가 된 캔버스천으로 만들어진 잡낭과 두개의 탄약 파우치가 달린 가죽 벨트를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금속 테가 둘러진 목제 수통과 구리제 컵, 그리고 말뚝과 망치가 포함된 천막의 일부분 또한 할당받았습니다. 병사들의 개인장비는 두벌의 내의와 두짝의 발싸개, 수건, 각각 한쌍씩의 장갑과 벙어리장갑, 총기청소도구와 반짇고리, 한쌍의 예비 군화였으며 이것들은 모두 잡낭안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반합은 여전히 6파운드 (2.5킬로그램) 의 마른빵과 50그람의 소금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84발씩의 탄약을 소지했는데, 30발씩은 벨트에 달린 파우치에, 나머지 24발은 주머니에 보관했습니다. 이러한 군장의 무게는 66파운드 정도였으며, 전반적으로 병사들의 엉덩이 부분으로 무게를 분배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병사들은 2쿼트 분량을 담을 수 있는 양동이 모양의 식사용 주석통을 소지했는데, 이것은 주석도금된 구리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오버코트를 편자모양으로 말아, 그 끝이 주석통을 가리는 모양으로 하여 어깨를 가로질러 둘렀는데, 이는 행군도중 주석통이 딸깍딸깍 소리를 내는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된 기본적인 M1881형 장비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10년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먼저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빵주머니가 1889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1892년에는 끝부분이 원형모습을 한 탄약집이 M1891년형 모신나강 소총의 사용과 함께 도입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총검집이 도입되었지만, 질도 나빴으며 실제로 쓰인 예도 드물었습니다. 1893년에 다시 총검집이 선을 보였지만 여전히 질이 나빴으며, 결국 포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상사는 상당부분, 총을 착검한 상태로 휴대하는 러시아군의 습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899년부터 신형 알루미늄제 수통과 주석통을 대신한 알루미늄재 통이 도입되었지만, 전쟁기간 동안 목제수통과 주석제 통 역시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1893년의 명령 제 51호에 따라 러시아 병사들은 때때로 탄띠를 어깨나 허리에 두르기도 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에 찍힌 탄띠는 다섯 부분으로 분할되어 갈색 가죽 스트랩에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전쟁물자가 부족했기에 병사들은 포로의 장비를 빼앗거나, 죽은 적의 장비를 빼앗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 러시아인 목격자는 격전중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전사자들의 장비를 챙기려는 전우를 간신히 말린 경험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 의 장비 줄 러시아 병사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손목시계였습니다. 

 

러시아군의 소화기들.

 

1904년 당시 러시아군의 표준화기는 7.62mm 구경의 탄환이 다섯발 들어있는 탄창을 사용하고, 사거리가 1마일을 넘었던 볼트액션식 모신-나강 소총이었습니다. 또한 모신-나강 소총의 짧은 기병대용 모델이 코사크 부대를 포함한 전 기병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날붙이" 무기에 대한 러시아군의 끈질긴 강조는 단면이 십자가 모양인 총검으로 나타났는데, 갈색으로 칠해진 이 총검은 일반적으로 항상 총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표준적인 보조무기는 1895년형 나강 리볼버였는데, 실린더에 7.62mm 권총탄 일곱발이 들어가는 이 총은 장교들에게는 더블액션 버젼이, 그 외의 계급에는 싱글액션 버젼이 지급되었습니다. (고위 사령부는 병사들에게 더블액션식 권총이 지급되면 탄환의 낭비가 심해질 것이라고 불신했습니다.) 몇몇 2선급 부대들은 스미스&웨슨 44구경 리볼버를 쓰기도 했는데, 이 권총은 비록 외관은 어색했지만 성능만큼은 믿을만했습니다 (이 권총은 1873/5년형 스미스&웨슨 권총의 힌지 프레임이 달린 싱글액션 방식의 "러시아 버젼" 이었습니다.) . 많은 장교들은 자신들의 소화기를 개인적으로 구입했습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무기는 초기 세미오토 방식 군총이었던 7.63mm 탄을 사용하는 마우저 M1896년형 권총과 7.65mm 탄을 사용하는 FN/브로닝 권총이었습니다.

 

1881년부터 전 부분에서 진행되던 군대의 이른바 "러시아화" 에 의해 전통적인 shashka 스타일의 군도가 선을 보였습니다. 샤쉬카는 장교용, 용기병용, 코사크 장교용, 코사크 병사용에 따라 세부사항에 있어 조금씩 달랐으며, 포병대는 용기병들이 쓴 형태를 사용했습니다. 샤쉬카는 사용자의 키에 따라 몇가지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으니, 71cm, 74cm, 76cm, 81cm 길이의 버젼이 있었습니다.

 

장교 제복.

 

전쟁 발발당시 러시아군의 하계 장교복은 높은 깃이 달리고 도금된 두 줄의 단추가 달린 kitel 이라고 알려진 흰색 튜닉이었습니다. 뻣뻣한 견장 -pogoni- 는 부착된 금줄과 금속별로 착용자의 계급을 알려 주었습니다. 야전에서 장교들은 그들의 부하들이 입은 grimnasterka 를 곧잘 입곤 했는데, 물론 장교들이 입은 것은 비록 외양은 같아도 천의 질은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흰색을 고집한 장교들도 있긴 했지만, 많은 장교들이 자신들의 grimnasterka 를 부하들의 것과 같은 카키색으로 염색했습니다. kitel 역시 종종 카키색으로 염색되곤 했지만, 이러한 관행은 나이든 고위 장교들의 불평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외에 많은 장교들이 정규 제복보다 더 편한 맞춤 제복을 입기도 했습니다.

 

 

 

 

장교들은 여기에 솔기부분에 붉은 파이핑 장식이 달려있는 다크그린빛의 M1881 바지를 입었으며,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교용 검은색 군화를 신었습니다. 장교들의 정식 오버코트에는 두 줄의 도금된 단추가 달려 있었으며, 천은 전반적으로 "밝은 회청색" 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관찰자들은 이러한 코트의 색이 장교들을 부하들 사이에서 위험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만들며, 또한 저격수의 쉬운 타겟으로 만들어 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군모는 정면에 로마노프 가문의 모장이 달린 M1881 챙모자였습니다. 여름에는 전체적인 군복과 색상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카키색으로 염색된 흰 커버를 모자에 씌웠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모자전체가 카키색으로 염색되거나, 새로운 카키색 군모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장교들이 (그들의 적인 일본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챙모자에 천으로 된 "차양" 을 달기도 했습니다. 몇몇 장교들은 만주의 폭염을 피하기 위해 코르크로 만든 방서모를 재주껏 구해 쓰기도 했습니다.

 

비록 만주 지역에도 장교용 상점이 있긴 했지만, 장교들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모든 추가적인 군복과 장비들까지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이들 추가적인 군복에는 방한복과 가죽 안감을 댄 장화, 체온유지용 내의 기타 등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 (훗날 프랑스인들에 의해 "toujours" 라고 알려진) "lujurka" 라고 알려진 짧은 오버코트도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 막바지에 찍힌, 어깨에 견장이 달린 검은 가죽재킷을 입은 몇몇 러시아 장교들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재킷은 1차대전 동안 러시아 장갑차량 승무원들이 입었던 스웨덴식 kurtka 와 비슷한 모양입니다. 이 재킷은 19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군복이 되었기에, 사진의 주인공들은 이 재킷을 개인적으로 구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러시아 장교들은 이러한 추가 장비들을 갖출 여유가 있었지만, 일부 초급장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들 초급장교들은 좀더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좀더 정규적인 장비들을 구입해야만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복장들은 이들이 저격수의 목표가 될 확률을 줄여 주었습니다.

 

 

 

 

근무중의 러시아군 제복.

 

전쟁발발에 즈음하여 러시아군이 입은 군복은 그들이 마딱뜨릴 전장의 조건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천으로 만들어진 러시아군의 셔츠-튜닉은 평화시의 여름작업에는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조선과 만주의 환경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외부에 아무런 주머니가 없었습니다. 오버코트 역시 그들이 겪게 될 극동의 극한을 막기에는 불충분했으며,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군화역시 그 질이 좋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기존 장비의 부실함에 겹친 보급체계의 부족때문에 반년 후 저벅저벅 큰 발소리를 내며 행군하는 러시아군의 모습은 보기 드문것이 되었습니다.

 

전선에 도착한 병사가 처음으로 듣는 지시는, 만약 그의 머리가 참호 밖으로 보일 정도로 클 경우에 흰 커버가 씌여진 여름 군모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적군의 좋은 목표가 되었으며, 기실 일본군의 사격솜씨는 전반적으로 훌륭했습니다. 흰색 군모와 grimnasterka 셔츠-튜닉을 입은 보충부대가 전장에 도착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염색하라는 명령을 받곤 했는데 이 일은 주로 그 지역의 중국인들이나 조선인들의 몫이었습니다. 한 병사는 중국인들이 새로 도착한 병사들의 군복을 밤새워 염색하는 광경을 묘사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날 잠에서 깬 병사들은 그들의 군복이 거의 노란색에서 다크그린에 이르는 다양한 톤의 카키색으로 염색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군복의 색은 병사들에 의해 흔히 "재수없는 노란색" 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한 미국 관전장교는 1904년 6월경에  전선에 도착한 러시아 병사들이 노란색에서 밝은 초록색에 이르는 다양한 색으로 염색된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여기에 첨언하기를, 그 중 가장 효과적인 색은 미 육군의 "올리브 드랍" 빛 군복보다 좀더 엷은 색조인, 초록빛이 도는 회색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이 보충병들은 행군도중 자신들의 군복을 스스로 염색하라는 명령을 들었을 수도 있겠으며, 군복이 입기전에 이미 염색된 상태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쨋든 grimnasterka 의 색을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쿠로파트킨 장군이 언급했던 다음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자신의 흰색 셔츠를 가능한 한 세탁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더러워지고 적의 주목을 덜 받게 될 것이다..."

 

러시아군은 1904년에 Hai-cheng 에서 후퇴할 때까지도 겨울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의 온도는 화씨 112도에 이르렀기에 얼마간의 수레가 부대의 오버코트와 잡낭을 운반하기 위해 할당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행군도중 폭염으로 쓰러졌습니다.

 

동절기 군복.

 

동계 군복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따른 효과또한 다양했습니다. 러시아 육군은 1904년 가을에 있었던 요양 전투이후에 뒤이은 퇴각과정에서 병사들의 오버코트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군수장비들을 잃어벼렸습니다. 곧이어 혹한이 닥쳐오자 러시아군은 방한을 위한 임시변통으로 입수가능한 옷가지를 닥치는대로 걸쳤습니다. 다행히 쿠로파트킨 장군은 필요하다면 군복에 관한 규율위반정도는 적당히 눈감아줄 정도의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러시아군 전역에서 얼마간 색다른 복장을 갖춘 병사들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12월 중반까지는 육군 전체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겨울 코트와 양털제, 혹은 가죽제 군모와 펠트제 군화를 갖출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병사들에게는 1881년형 표준 오버코트 외에도 양가죽 안감을 댄 두껍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polushbok 이라고 알려진 오버코트 역시 지급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장교들과 병사들은 각자 능력껏 구한 비표준적인 lulup 이라 알려진 양가죽 코트를 소지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한편 전쟁이 중반을 지나면서 몇가지 다양한 모습의 동계 코트가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공장에서 제작된 이 코트들은 물론 그리 엄격한 복장규율을 지켜 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병사들은 중국인들의 누비 코트와 바지, 그리고 그들의 신발을 빼앗아 입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방한을 위해 담요천으로 만든 내의와 엄지와 검지가 분리된 울 재질의 벙어리 장갑이 전쟁기간동안 공급되기도 했습니다.

 

전쟁 전, 대부분의 러시아군의 표준적 겨울용 군모는 검은 양털이나 양가죽으로 만들어지고 정면에 쌍두독수리 모장이 달린 shapka 라고 불린 원형모자였습니다. 반면 투르케스탄 군관구는 겨울에도 챙달린 모자를 착용했으며, 시베리아 군관구의 병사들은 털이 복슬복슬한 papaha 라고 불린 검은 양가죽 모자를 착용했습니다. 전쟁동안 후자의 모자가 표준적인 동절기 군모가 되었으며 대중적으로는 "Manchqhurka" 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식 papaha 의 한가지 단점은 귀 부분의 방한을 위해 모자를 눌러쓰면 모자가 시야까지 가리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러시아 연대들은 하계작전기간 동안에 그들의 동복을 후방의 병참고에 보관했으며, 10월이 되면 하얼빈에 저장된 이들 동계복장들을 병사들에게 재지급하기 위해 장교들이 각 연대에 파견되었습니다. 일부 연대는 봄이 될 무렵에 입고있는 동복이 다 닳아버려서 교체품을 필요로 하기도 했으며, 때때로 임시변통으로 각자 구입한 중국인들의 코트를 입기도 했습니다. 회색 솜을 넣고 누벼 만든 이러한 코트는 색상에 있어 일반적인 중국인들 복장과 다를바가 없었으니, 대체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한편 9월에 전장에 도착한 보충부대 병사들은 이미 머리에 동절기용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 지역에서붙 동쪽으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철도를 따라 설치된 카잔과 첼랴빈스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Biaknor 의 병참고에서 동계 복장을 지급받았습니다. Biaknor 에 도착한 병사들은 그들의 장교들에게 복장검사를 받은 후, 그때까지도 갖추지 못한 동계장비를 즉시 지급받았습니다.

 

기병대 제복.

 

동방 혹은 "스텝" 지역의 코사크 병사들이 착용했던 하절기용 군모는 검은 가죽챙이 달린 천으로 된 챙모자였습니다. 돈과 오란베르크, 그리고 세미레첸스크 출신의 코사크들은 모자에 흰 커버를 씌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솔기장식이 달린 회청색 승마바지 (lampasi) 위에 흰 셔츠-튜닉을 입었습니다. 높고 부드러운 군화는 평상시에는 박차없이 착용되었습니다. 다른 육군부대와 마찬가지로 코사크들 역시 전쟁기간 동안 grimnasterka 와 그들의 챙모자를 다양한 톤의 카키색으로 염색했습니다. 동계복장은 일반적으로 chekmen 이라고 불린 코사크인들의 특징적인 프록코트였습니다. 돈강 출신의 병사들은 다크블루, 아스트라칸과 우랄출신의 코사크 병사들은 다크그린으로 염색된 코트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위에 표준적인 기병대용 오버코트를 입었습니다. 군모는 키가 높고 짧은 털이 나 있는 모자였는데 정수리 부분의 천의 색으로 착용자의 출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약모의 밴드, 군모의 정수리, 어깨 스트랩과 바지 솔기장식의 색에 따른 구분:
돈과 시베리아 출신: 스칼렛.
우랄과 세미첸스크: 진홍색.
오란베르크: 밝은 푸른색.
아스트라칸과 트란스-바이칼,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출신: 노란색.

 

 

 

 

두 코카서스 부족 출신의 코사크병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cherkeska 라고 불린 카프탄 스타일의 코트를 입었으며, 그 안에는 beshmet 이라고 불린 긴 내의를 입었습니다. 코트의 가슴부분에는 탄환폴더 장식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cherkeska 의 어깨 스트랩의 색 역시 지역마다 달랐으니, 쿠반 코사크들은 스칼렛, 데렉 코사크들의 것은 밝은 푸른빛이었습니다. 정면의 단추로 고정되는 beshmet 역시 착용자의 출신에 따라 색이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헐렁헐렁한 바지에는 역시 출신지역에 따른 넓은 끈장식이 달려 있었으며, 그 끝은 코사크식 장화안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코카서스 출신의 코사크 포병대원들은 도금된 금속뱃지가 달리고 가장자리가 붉은색 선으로 마감된 검은 beshmet 을 입었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이러한 규정복장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복장들이 코사크 병사들에 의해 착용되었습니다 (플레이트 D 참조) . 그들은 전통적으로 스스로의 장비와 무장을 갖출 의무를 지고 있었기에, 그 복장들의 세부사항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1891년형 용기병용 기병총으로 무장했으며, 여기에 비 코카서스 출신 병사들은 M1881형 "코사크식" 세이버 (샤쉬카) 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1881년부터 코사크병을 제외한 모든 기병대는 용기병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들의 군모는 "dragoonska" 라고 알려진 작은 원형 양털모자였으며, 장수리 부분은 소속연대에 따라 다른 색으로 염색된 뻣뻣한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중 단추가 달린 다크그린빛 튜닉을 입었습니다. 그후 1897년에 새로운 규정에 의해 튜닉의 단추는 그대로 더블단추 방식이지만 그 수는 열두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회청빛을 띤 기병바지의 끝단은 검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장화속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용기병들은 다양한 형태의 papaha 를 착용했습니다.

 

아르투르 항 의용병.

 

이 민병대원들은 그들이 구할 수 있었던 잡다한 복장을 착용했습니다. 그들 중 적지않은 수가 전쟁전에 경찰이었거나 기타 다른 제복을 입는 직업에 종사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제복을 그대로 입고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형편이 되는대로 민간복을 입고 싸우거나 간혹 어쩌다가 군복을 구해 입기도 했습니다. 몇몇 사진에서는 이들 의용병중 일부가 납작한 흰색 챙모자를 쓰고 있기도 합니다. 공식적인 러시아 민병대 (오폴체니) 의 복장은 정규 육군병사의 복장과는 구분되는 것이었으며, 자신들만의 기장과 계급장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병사들은 차르를 상징하는 문자가 새겨진 성 게오르그 십자가 모장을 착용했으며, 무슬림 병사들은 이 대신 팔각형 모양의 모장을 부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