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구름위 2013. 2. 20. 16:03
728x90

 

장작림 폭사 4개월뒤인 1928년 10월 여순의 관동군 사령부 입구에 군용차량에 멈추고 어깨에 중좌 견장을 단 젊은 장교가 내립니다. 그가 바로 군내에서 소위 "천재 전략가"라 불리우던 이시하라 간지였습니다. 봉천군벌의 수장 장작림을 폭사시킨 황고둔사건의 주동자 고모토 다이사쿠대좌가 그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되자 그 대신으로 관동군 작전과장으로 부임한 것이었죠.

이 양반이 문제의 인물 이시하라 간지(1889~1949) "일본 최고의 전략가"라고 불리었는데 당시 일본군에서 이런 말은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군사전략이 아니라 음모와 책략의 달인(바꾸어 말해서 잔머리의 대가)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여 비슷한 류의 인물이 바로 츠지 마사노부이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이 이시하라 간지라는 양반은 "곧 인류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여기에 대비해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만몽을 장악해야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던 위인이었습니다. 여기다 그의 사고는 히틀러에 비견될만큼 4차원이었는데 "이것은 결코 일본의 권익을 위한 침략이 아니다.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3국의 민족이 공존하는 아시아의 이상국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왕도낙토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 "침략으로 어떻게 공존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지껏 그렇게 해본적이 없을뿐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이시하라는 이런 자신의 뇌내망상을 머리속에만 두지 않고 동경의 참모본부에 여러차례 건의합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군부에서는 "방법이 너무 성급하다.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 악화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반대하죠. 이것은 근본적으로 만주 침략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급증으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인간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의 뇌속은 오로지 일본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선민사상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나중에 이 4차원 또라이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인간들에 의해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로 미화됩니다.(만화 "지팡구"에서도 뭔가 개념인으로 묘사되죠.)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사고를 친 고모토에 대해 천황이 분노하고 다나카 내각이 총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면서도 막상 군부에서는 그를 대신해 보낸 사람이 바로 이런 양반이었던 것이죠. 고모토의 행위는 명백한 명령불복에 테러사주, 직권남용으로 원칙대로라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일이었으나 "애국이 지나쳐"운운하며 단지 예비역으로 편입하는 것으로 끝내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이사로 낙하산으로 내려옵니다.

여기에다 29년 5월에는 이타다키 세이치로 대좌가 관동군 참모로, 31년 8월에는 혼조 시게루 중장이 새로운 관동군 사령관으로 여순으로 옵니다. 만주침략의 음모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죠. 혼조 시게루는 부임직전 정부에는 비밀로 한채, 군내 강경파와 군원로들과 몰래 협의하여 유사시 관동군이 움직이면 조선군도 즉각 개입하여 병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고 3만엔의 비자금까지 지원받습니다.

왜 이들은 만주를 노리고 있었는가. 만주사변의 원인에 대해 흔히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번째로, 27년이래 일본내 불경기와 세계공황으로 경제가 악화되고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군내 불만분자들과 군산복합체들이 손을 잡아 침략전쟁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 둘째로 장학량정권의 반일운동과 일본으로부터 자립을 꾀하기 위해 일본이 소유한 남만주철도(만철) 부근에 별도의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 관동군을 결정적으로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의 만주 지배에 대한 야욕은 뿌리깊은 것이었으며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1880년에 이미 러시아의 남하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열강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식민지로서 경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철도부설권을 획득함으로서 그들은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지를 통칭하여 "관동주(關東州)"라고 부르며 관동대도독부를 설치하였고 1919년에 관동청으로 개칭하면서 여기에 주둔한 부대를 "관동군"이라 부르게 되었죠.

열차위에서 경비중인 관동군의 모습.

 

당초 관동군의 임무는 관동주와 일본이 경영하는 남만주철도(장춘↔여순, 봉천)의 경비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관동군이 바로 이 첨병의 역할을 맡게 되었죠. 남만주를 사실상 반식민지화한 일본은 이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1만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시베리아와 북만주로 세력을 확대하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또한 1920년대 동북 3성을 통치하며 "왕노릇"을 하던 장작림의 스폰서 역할을 했고, 막대한 돈을 만주와 봉천군벌에게 투자하여 만주의 외국인 투자금의 70%이상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사변 직전 관동군의 편제 및 배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관동군 사령부(여순)

제2사단 사령부(요양)

- 제3보병여단(장춘) : 제4보병연대(장춘), 제29보병연대(봉천)

- 제15보병여단(요양) : 16보병연대(요양), 제30보병연대(여순)

- 사단직속 : 제2야전포병연대(해성), 제2기병연대(궁장령)

독립수비대(봉천), 제2공병대대(봉천), 1개 중포병대대(여순)

총병력 : 1개 사단(2개 여단, 6개 연대), 1개 독립수비대(6개 대대), 1개 중포병대대, 10,400명

여순의 옛 관동군 사령부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라는군요...-.-

 

보시다시피 관동군은 남만주를 관통하는 만철의 보호를 명분으로 주요 도시와 전략 요충지를 죄다 장악함으로서 동북은 사실상 일본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실정이었으며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동북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색이 일본이 운영하는 만철, 위의 빨간색이 소련의 중동철도. 여기에다 만주 곳곳에 일본자본으로 건설한 지선들이 관통하고 철도 주변에는 일본군이 1km당 15명단위로 배치되어 있었으니 만주는 일본의 반식민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진출처 :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p87)

더욱이 이들은 고작 철도경비대에 불과하면서도 국방의 최전선에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근거없는 엘리트 의식에 빠져 독단적 행동에다 하극상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할 기회만 노립니다. 군 상층부는 이 망상환자들의 전횡을 강력하게 처벌하여 기강을 잡는 것이 정상임에도 자신들의 위신 실추와 정부의 간섭으로 군의 독립성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되려 질질 끌려다니는 추태를 보입니다. 그렇다보니 더욱 간이 배밖으로 나와 중앙의 지시를 마음껏 생까고 만주에서 황고둔사건을 비롯해 만보산사건, 나카무라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고를 치며 결국 일본 전체를 파멸의 나락으로 끌고 나가게 되죠.

 

한편, 이런 관동군의 책략에 대해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1929년 6월 4일 황고둔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장학량은 장작상을 비롯한 구파의 도움을 받아 한달후인 7월 3일 동3성 보안총사령관에 등극함으로서 장작림의 뒤를 이어 부자세습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신년을 앞둔 12월 29일 남경정부에 복종을 선언하는 이른바 "동북역치"을 선언함으로서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중국 전체가 하나의 깃발아래 통일됩니다.
장학량에 대해 중국은 물론 국내의 많은 서적들에서는 그의 역치(말그대로 깃발을 바꾼다, 즉 진영을 갈아탄다라는 중국식 표현)에 대해 아버지를 비열하게 죽인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과 민족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이로 인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과정을 생략한채 단편적으로 미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비록 입으로는 중앙으로의 복속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왕국에서 중앙정부의 어떤 간섭이나 개입도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당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들중에 공산당원이 섞여 있다"라며 철저하게 단속했으며 심지어 이를 위해 관동군의 지원까지 요청합니다. 역치 선언 이후에도 그의 반국민당 정책은 변화가 없었으며 국민당의 활동에 대해 감시합니다. 또한 남경정부의 관료들이나 중앙군은 단 한명도 산해관 이북으로 진입할 수 없었고 세금을 중앙으로 송금하라는 요구도 거부합니다.

장학량의 동북군. 전적으로 일본의 원조에 의존하여 육성된 군대였기에 고위 지휘관들중에는 일본과 내통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의 역치는 반일이나 민족애국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역치를 선언할때까지 장개석과 일본을 놓고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지를 지속적으로 저울질합니다.
사실 장학량은 관동군의 음모로 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반일로 돌아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동북정권은 철저하게 일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정부는 장학량에 대해 노골적으로 "장개석과 손을 잡지 말라"고 협박하고 있었으며 얼마전에도 일본군은 제남사건을 일으켜 장개석의 북벌군을 공격하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놓고 일본을 자극할 수 없는 입장이었죠. 그렇다고 만주내에서 반일감정이 극도로 격앙된 상황에서 친일을 고수하겠다고 나선다면 자신의 정권 자체가 위험해 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학량의 입장은 말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죠. 따라서 그는 "국민혁명군과 싸우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내놓지만 뒤로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자기의 안전을 보장받고 이익이 되는가를 치밀하고 신중하게 계산하는 것이었죠.
만주 침략을 꿈꾸던 다나카수상은 당초에는 장학량에 대해 괴뢰정권으로 만들 생각으로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라고 지속적으로 협박합니다. 그러나 점차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되자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일본의 태도 변화를 확인한 장학량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동북역치를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중앙에 복종하지만 동3성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라면서 동북역치의 실체에 대해 스스로 인정합니다. 즉,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며 자기 통치기반과 체제유지가 최우선이었던 것이죠. 중앙으로의 복속을 선언했다고 실제로 달라진 것은 청천백일기를 내걸었다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군축문제로 풍옥상, 이종인 등 신군벌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고 내전상황에 직면한 장개석으로서는 장학량에게 어떤 간섭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왕국내에서 반일시위나 일본의 이권을 위협하고 주권회복이나 자주권을 찾으려는 그 어떤 행동도 엄격히 금합니다. 장학량은 단지 전형적인 군벌 독재자일뿐 일부에서 주장하듯 특별히 반일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민간과 학생들의 배일운동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탄압하죠. 그런 그가 나중에 장개석보고 친일운운한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며 단지 동북을 빼앗긴 상황에서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철저한 야심가였던 장학량은 권력을 잡자말자 자기 권력 지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대하는데 혈안이 됩니다. 역치 선언직후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양우정을 전격 숙청한데 이어, 29년 7월에는 "중동로사건"을 일으킵니다.

청말,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면서 북만주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하는 중동철도(동청철도라고도 함)를 건설합니다. 이 중동철도는 중소국경의 만주리부터 하얼빈을 거쳐 동쪽의 연해주 접경도시인 동녕 수분하까지 총 1500km에 달했으며 이후 장춘, 봉천, 대련까지 확대해 지선을 포함해 총연장 2400km에 달합니다. 이 철도에 대해 장학량은 일방적으로 철도 권리 회수를 선언했다가 소련군의 대규모 침략을 받게 됩니다. 9월 19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전개된 양측의 전쟁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동북군은 일방적으로 아작났으며 만주리에서 동북군 제17여단은 단 한명만 빼고 여단장 이하 7천명 전원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함으로서 사실상 백기를 들게 됩니다.

 

이런 참패에도 불구하고 장학량은 자기 휘하의 최정예부대는 출동시키지 않고 무장과 훈련이 빈약한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성방군(지방군)만 싸우도록 함으로서 이들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킵니다. 여기다 장개석의 중앙군 지원 제의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단지 무기와 자금만 받겠다고 대답합니다. 중동로사건은 장작상, 탕옥린 등 구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학량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임에도 패전의 원인을 구파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은 탓으로 돌립니다. 이렇게 양우정의 숙청과 구파들에 대한 세력 약화를 통해 장학량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죠.(뭔가 하는 짓이 북쪽 김씨일가와 비슷한듯..) 그러나 이런 독단에 대해 당연히 내부 불만과 갈등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고 만주사변이 발발했을때 동북에 남아있던 많은 지휘관들과 관료들이 장학량에게 등을 돌리고 일본에 협조하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한편, 중원에서는 신군벌들간의 갈등이 결국 내전으로 번져 이른바 "중원대전"이 발발합니다. 29년 2월 광서군벌 이종인의 반란을 시작으로, 30년 3월에는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을 비롯해 신구군벌들과 국민당내 불만세력들이 죄다 뭉쳐 일대 반장개석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쌍방 100만이상이 동원된 군벌시대 최대의 내전에서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장개석과 반장개석 진영 모두 동북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장학량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장학량은 당초에는 중립을 지키며 상황을 관망하다가 점차 전황이 장개석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30년 9월 18일 관내 출병을 결정하고 자신의 직계군을 중심으로 약 7만의 병력이 산해관을 넘어 북평-천진으로 진격합니다. 이것은 반장세력에게는 결정타였죠. 따라서 11월 중원대전은 장개석-장학량 연합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중원대전당시의 상황. 붉은색이 장개석과 장학량의 공격이고 검은색이 반장세력의 공격입니다. 중원대전은 군벌시대 최대의 격전이었고 사실 숫적으로는 장개석의 중앙군이 월등히 불리했지만, 중앙군은 장개석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지휘된 반면 반장측은 이합집산으로 뭉친 잡동사니군대다보니 서로 제대로 협조도 되지 않아 각개플레이를 하고 점령지를 놓고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초반에는 반장측이 우세했지만 곧 장개석측이 우세해져 산동 제남에서 결정타를 먹였고 장학량이 개입함으로서 승패는 결정납니다. 서북군의 거두 풍옥상은 몰락하고 그의 세력지는 그의 휘하에 있던 군소군벌들이 독립했지만(손연중, 송철원, 한복구 등) 나머지들은 세력은 약화되었어도 여전히 상당한 군사력을 여전히 보유한채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주사변 직전에는 왕정위와 광서, 광동군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양광사변"이 발발했고 장개석은 하야하죠. 만주사변당시 남경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채 소극적으로 국제연맹에 호소한 것도 실상 공산당 토벌보다는 이런 이유가 컸습니다.

 

이런 장학량의 출병은 말로는 장개석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 그의 속셈은 바로 중원 진출의 야심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창 중원대전으로 쌍방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던 5월 17일 비밀회의에서 "지금의 전란은 우리가 관내로 세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라고 단언하였고 출병할때도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원대전의 승리로 장학량은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이라는 장개석 다음의 지위를 차지한데다 동북3성외에 열하성과 하북성, 산동성, 찰합이성, 수원성까지 망라하는 광대한 지역을 단숨에 차지합니다.

이때 그의 기분은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같았겠지만 곧 그 댓가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곧 염석산을 비롯한 여러 화북군벌들의 반격에 직면하게 된 그는 산동성과 찰합이성, 수원성에서 물러나야 했고 하북성에서도 북평-천진지역만 간신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장학량은 애써 차지한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만주에서 병력을 추가로 빼내어 최대 15만명까지 늘립니다. 전해의 대소전쟁의 패전에다, 야심에 눈먼 장학량으로 인해 만주는 군사적으로 공백지가 됩니다. 더욱이 장학량은 자신의 왕국에 장개석이 간섭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응함으로서 중앙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됩니다. 국가보다 오로지 군벌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만주사변 직전의 중국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관동군의 이시하라 간지가 만주를 통째로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죠.

이시하라 간지는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서 중일 양측의 갈등을 유발합니다. 관내진출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장학량으로서는 관동군과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고 무조건 저자세로 나갑니다. 동북정부위원회 주석 겸 동북변방군사령관으로서 장학량을 대신해 동북3성을 맡고 있던 구파의 우두머리 장작상이 북평의 장학량에게 전보를 쳐 "관동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출병중인 병력을 돌려 동북으로 돌아올 것"을 거듭 건의하였고 나카무라 사건당시 중국측 대표였던 고유균(나중에 남경정부의 외교부장이 됨)도 관동군이 뭔가를 꾸미고 있음을 경고하였으나 장학량은 묵살합니다. 오히려 8월 6일에는 동북군에게 "일본이 어떤 트집을 잡더라도 반항해서는 안된다"라고 지시합니다.

초토화된 평양 화교거리. 만보산 사건(수로이용문제로 중국측과 재만조선인들간의 충돌이 중일양국의 문제로 비화됨)으로 흥분한 조선인들이 조선내 화교들을 무차별로 공격합니다. 이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중한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이용해 만주에 개입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죠.

※ 참고로, 흔히 알려져 있는 장개석의 "부저항지시"는 만주사변직후가 아니라 만보산사건과 나카무라사건과 관련해 7월과 8월 두차례 보내진 것입니다. 전문에서 장개석이 "일본의 도발에 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초공전과 양광사변 등 정치적 내환으로 일본의 도발에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과, 애초에 장개석과 관계없이 장학량은 내부적으로 부저항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장학량에게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이시하라 간지, 이타다키 세이치로는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와 함께 만철 폭파사건을 조작한후 이를 빌미로 관동군을 출동시켜 동북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남만주 전역을 단숨에 장악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만주에 남아있는 동북군의 숫자가 15만에 달하여 1만에 불과한 관동군을 압도하지만, 일단 장학량이 부재중인데다 숫자만 많을뿐 오합지졸이기에 손쉽게 제압이 가능할 것이며 또한 소련이나 서구열강들 역시 나카무라사건에서 볼때 개입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심지어 본국정부가 관동군의 행동을 저지한다면 본국의 세력을 선동해 쿠테타까지 불사할 생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왕 일 저지를 것 갈데까지 가보자는 것이었죠.

그리하여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이른바 "유조호"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관동군의 만주침략의 신호였죠.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봉천시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유조호. 시골틱한 촌가 몇채가 있을뿐인 이곳에는 여순과 장춘, 봉천을 연결하는 만철이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특급열차가 통과하고 있을때 정체불명의 폭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열차는 파괴되거나 탈선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제 갈길을 갑니다.

철도의 주변에는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 폭발 직후 이들은 무전기로 봉천의 일본군 특무기관과 제2대대 본부에 "북대영의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라고 보고합니다. 그 시간 특무기관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혼조 사령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사령관 대리를 사칭하고는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북대영을, 봉천에 주둔중인 제2사단 제29연대에게는 봉천성내에 주둔한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이 소위 "유조호사건"이며 관동군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의 신호탄이었습니다.

※ 흔히 "유조구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기입니다. 당시 일본측 종군기자가 "호"를 "구"로 착각하고(일본어로는 발음이 동일함) 확인도 하지 않고 급하게 본국에 전문을 발송하면서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우리나라 신문에는 무려 75km 함포를 단 우주전함 윤영하함이란 것도 있죠...

유조호를 통과하는 만철. 오른쪽의 파편쪼가리가 바로 일본이 주장하는 중국측 테러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폭탄에 의해 파괴된 선로는 고작 79cm에 불과했습니다. 어차피 짜고치는 고스톱에 괜히 밑천 많이 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집사람 표현을 빌리자면 이 떼떼모치같은 인간들...

관동군에 의해 제시된 소위 "물증들"이랍니다... 어디서 재활용품을 수거해 온 듯한....

 

당초 관동군 사령부의 결행일자는 9월 28일로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국의 육군 중앙부와 외무성에서 이를 감지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하면서 자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들이 원칙적으로 만주침략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참모본부의 일부 강경파와 혼조사령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시하라는 하루라도 빨리 뭔가 일을 내고 싶어서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상황인지라 이 명령을 멋대로 묵살한채 자기와 쿵짝이 맞는 이타다키와 몇몇 관동군 참모, 대대장, 중대장급의 간부들과 몰래 짝짜꿍을 하고 날짜를 되려 10일 당기기로 합니다.

이 인간들의 영웅심리와 조급증이 오죽했나하면 혼조사령관과 참모장 등 관동군의 고위장교들과도 미리 의논하지 않고 멋대로 저질러 사건 당일날 혼조 역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는 고사하고 되려 공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으니 밑의 혈기왕성한 후배들이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실제로 그 본인이 몇년후에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는데, 육본 전쟁지도과장으로 있던 이시하라는(당시 소장) 36년 관동군의 수원성 침공을 노리는 후배장교들의 폭주를 설득하러 갔다가 "저희는 선배님한테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뿐입니다."라며 비웃음만 당하고 돌아옵니다.

당일날 이시하라의 명령에 따라 실제 폭파를 지휘한 것은 공병장교인 가와모토 스에모리중위였으며 그는 6명의 부하를 이끌고 철로 순찰대의 복장을 한채 철로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이곳은 동북군 북대영의 병영이 위치한 곳에서 동남쪽으로 겨우 800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뻔한 술책이었죠. 같은 시각, 제2대대 제3중대 105명의 병사가 완전무장한채 중대장 가와시마 다다시(川島正)대위의 인솔하에 북대영 북측에 대기합니다. 그리고 폭탄이 터지고 공격명령이 내려지자 즉각 동북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는 완전한 기습이었고 잠에 빠져 있던 동북군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건 발발 40분후인 밤 11시. 여순의 관동군사령부에 "북대영의 중국군이 철도를 폭파했고 아군이 반격하여 중국군 3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라는 보고가 올라갑니다. 한참 잘 자다가 급히 깨어난 혼조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이시하라의 보고를 받고 즉시 "모든 부대는 전선으로 출동하여 만철을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사령부와 여순에 주둔한 보병 제30연대와 함께 열차에 탑승하여 봉천으로 향합니다. 또한 19일 오전 8시 30분에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대장에게 병력 증파를 요청합니다. 이미 자기들끼리 사전 협약이 맺어 있던 조선군은 이 요청을 받자말자 육군 중앙부의 승인도 없이 멋대로 제39혼성여단(약 4천명)과 2개 비행중대를 급파하고 추가 증원준비까지 합니다.

19일 봉천외곽을 경비하는 북대영의 동북군을 공격중인 관동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봉천 함락후 성문을 통과중인 관동군.

19일 오전, 관동군 제2사단이 요양에서 봉천으로 증원되었고 제29연대와 함께 봉천시 외곽을 포위하여 봉천성을 방어하는 동북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만 하루동안의 전투끝에 동북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봉천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 봉천 전역이 점령되었고 관동군 사령부도 여순에서 봉천으로 옮깁니다. 또한 장춘에 대해서도 독립수비대 산하 2개 보병대대가 1개 포병연대의 지원하에 장춘을 공격해 20일 오전 7시 점령합니다. 21일에는 혼성여단이 길림성으로 진격합니다. 길림성 대리주석이었던 희흡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선언하고 길림군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이렇듯 유조호사건직후 2~3일만에 광대한 남만주 전역을 일방적으로 장악한 것만 봐도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관동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오히려 이런 기습적인 관동군의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린 것은 본국 내각과 육본이었습니다. 사건 다음날인 19일 와카스키수상은 내각을 긴급 소집하여 "일단 사태 확대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라고 결의하였고 관동군의 북만주 진격과 조선군의 월경에 대해서도 복귀할 것을 명령하지만 조선군은 이를 묵살하고 제39혼성여단과 2개 비행단을 파견합니다. 본국은 격론을 거친 뒤에야 결국 9월 23일 관동군의 모든 행동에 대해 사후 승인을 재가합니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결코 만주침략의 의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과정에서 국제연맹과 영, 미의 개입,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이죠. 또한 중국 남경정부와의 관계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군내에서 관동군의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는데다, 내각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다보니 내각으로서는 관동군의 독주를 저지할 수단이 없었기에 사후 승인은 하되 행동범위를 제한함으로서 소극적이나 견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외무성은 "이것은 중국측의 도발에 의해 만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일뿐 영토적 욕심은 없다"고 주장하여 국제연맹은 물론 중국과 장학량을 기만하죠.

어차피 만주 자체는 장작림 시대이래 일본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수출입의 40%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는 본토와의 무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 금융, 철도, 산업 대부분도 일본의 것이었죠. 군사적으로도 만철을 중심으로 주요 지역은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은 아이 손 비트는 것보다 손쉬울 수 밖에 없었으며 39년 무솔리니의 알바니아침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 일부 서적에서 장학량이 자립을 꾀하기 위해 만철에 대항하는 "배일철도" 건설을 추진했다는 주장도, 사실은 장학량이 심각한 자금 부족에다 차관 획득에도 실패하여 어디까지나 구상단계였을뿐 실제로 사업이 착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관동군과 일본측 만주 언론들이 장학량의 반일정책을 과장함으로서 본국에 대해 자신들의 만주 침략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허위 날조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동북군을 총지휘하는 장학량은 뭘 하고 있었던가.

당시 동북군은 정규군만 30만명에 달했으며 봉천성에 4만 5천, 길림성에 5만5천, 흑룡강성에 2만5천, 열하성에 1만 5천이 요소요소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장학량이 직접 지휘하는 직계군 중심의 최정예부대가 북경-천진 등 하북성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15만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18만명의 비정규군도 있었습니다. 숫적으로는 관동군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죠. 여기다 해군력은 중국내 최강이었으며 대부분 구식의 복엽기이기는 했으나 약 300여기의 공군기도 보유하고 있었고 봉천의 병기공장은 동아시아 최대규모였습니다.

관동군에게 기습당했다고는 해도 쌍방의 병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만약 장학량이 마음먹고 전군을 돌려서 적극적으로 반격했다면 관동군을 격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중원대전이래 어렵게 차지한 북평-천진일대의 관내의 신지반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승냥이처럼 기회만 노리는 화북군벌들(염석산, 송철원, 한복구, 석우삼 등)에게 후방을 위협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관내출병 자체가 구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자신의 독단으로 강행된 것이라 자신의 위신 문제이기도 했죠. 여기다 관동군과의 무력충돌이 확대되어 일본이 병력을 증원한다면 자칫 자신의 모든 기반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합니다.

무엇보다 장학량은 관동군의 목적을 오판하였습니다. 일본은 제남사건을 비롯해 이전에도 여러차례 중국에 대한 출병이나 무력 도발이 있었지만 세계 열강들의 간섭으로 인해 결국 외교협상을 통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고 영토를 점령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도 마찬가지로 관동군의 상투적인 도발사건정도로 여겼을뿐 전면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무력 충돌은 피하면서 관동군의 요구사항을 적당히 떡고물 몇개 던져주면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최대 오판이었죠.

그는 이전의 이미 여러차례 경고를 받았음에도 당장 북평을 장악하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묵살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하북성을 포기하고서라도 동북으로 돌아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총력을 기울여 맞섰다면 만주사변의 향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채 관동군의 야심을 과소평가한 것이 그가 애국자가 아닌 한낱 군벌이라는 한계였습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상대의 속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점에서 장학량은 바바롯사작전 초기 스탈린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건당일날 북경시내 병원에서 입원중이던 장학량은 보고를 받자 긴급회의를 소집한후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되며,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남경정부에 대해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요구해달라.

3. 여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측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당초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동북군 일부 부대들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하였음에도 정작 수장이 이런 소극적인 지시를 내리자 곧 전의를 상실하였고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거나 일본군에게 투항합니다. 또한 길림성 주석 대리 희흡을 비롯해 장경혜, 원금개, 장해붕 등 장학량과 갈등을 빚고 있던 구파의 고위장성들(동북군의 주축을 구성하고 있던)이 죄다 배신때리고 친일로 돌아서서 독립을 선언하고 친일괴뢰정권 수립에 앞장섭니다. 장작상과 만복린은 열하를 거쳐 북평으로 도주하죠. 그만큼 장학량 정권이 취약했다는 것이죠. 이 사실만 봐도 장학량이 본인은 싸울 의지가 있었는데 장개석의 부저항지시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는 주장은 어이없는 왜곡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장학량의 부저항정책에 대해 영국 공산 램프슨과 그의 외국인 고문들은 현명한 선택이라며 칭찬했지만(지들이야 내 일이 아니니...), 남경정부의 외교대표였던 고유균은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학량의 국제연맹 제소 건의에 대해 "별로 실효성이 없을 것"라고 대답합니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그들대로 발등에 불떨어진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국민당내 주도권을 놓고 광동군벌이자 국민당 원로인 호한민과 대립하게 된 장개석은 그를 연금시키자 이종인, 백숭희의 주도로 임삼, 왕정위, 손과, 당생지등 서로 손을 잡고 31년 5월 27일 또 한번 광서, 광동성을 기반으로 반장선언을 합니다. 이것이 "제1차 양광사변"이죠. 이들은 5만명의 병력으로 장개석의 세력권인 호남성을 침공합니다. 중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중원대전이 끝난지 반년만에 다시 내전에 휩쌓인 것이죠. 당시 강서성에서 모택동의 공산군을 한창 유리하게 토벌하고 있던 장개석은 이때문에 병력을 돌려야 했고 이 과정에서 공산군의 추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습니다.(대신 제19로군이 반격해 공산군에게 한방 먹이기는 했지만) 바로 이 직후에 만주사변이 발발합니다.

관동군이 만주를 전면 침공하여 3일만에 남만주 전체를 장악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개석은 광주의 왕정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나라를 생각하여 내전을 중지하고 단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주일대사 강화본은 일본정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관동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장학량의 건의대로 국제연맹에 일본의 만주침략을 제소합니다. 군사적으로는 중앙군을 하북으로 북상시켜 일본의 남하에 대비하고 광동정부와 공산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킵니다.

그러나 왕정위는 장개석이 하야해야만 화해도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제의를 거부합니다. 왕정위는 부저항으로 만주를 내준 장학량에게 "30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싸우지 않고 물러난 무능함을 책임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자살하라"고 격한 논조의 선언문을 발표하지만 정작 본인은 외교부장 진우인을 몰래 보내서 "광동정부를 원조해주면 만주점령을 묵인하겠다"라고 일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치사하고 비열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해 남경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거부합니다.

유조호사건 5일뒤인 9월 23일 북평에서 열하성 금주로 돌아온 장학량은 일단 관동군과 협상을 추진했으나 그의 부저항 선언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남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관동군은 그의 예상과 달리 협상을 거부하고 북만주까지 세력을 뻗힙니다. 10월 15일 장해붕의 괴뢰군이 흑룡강성으로 진격하고 뒤이어 하타모토의 제16연대가 1개 포병대대와 1개 공병중대의 지원을 받아 치치하얼로 진군합니다. 당시 흑룡강성장인 만복린이 싸우지도 않고 튀어버린지라 장학량은 흑하 경비사령관인 마점산을 성장 대리로 임명하고 치치하얼의 수비를 명령합니다. 양측은 눈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흑룡강군은 하타모토군을 격퇴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합니다. 마점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1만 3천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증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10월 18일 관동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다음날 치치하얼이 함락되고 마점산의 잔존부대는 중소국경의 산악지대로 쫓겨가 계속 저항운동을 펼치다가 만주국이 건국되자 투항합니다.

이 아저씨가 바로 마점산(1885~1950)이랍니다. 장작림처럼 만주땅을 휘젓던 마적출신에서 오준승(장작림 죽을때 함께 저승간 사람)의 부하가 된후 출세가도를 달려 연대장과 여단장을 거쳐 만주사변당시에는 만복린을 대신해 흑룡강성장이 됩니다. 한때 만주국에 투항하지만 다시 소련으로 탈출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항일투쟁을 계속 합니다. 그나마 만주사변당시 관동군에게 맞서 제대로 저항이라도 한 유일한 인물이죠... 관동군에게는 "동양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었다네요. 키 작은게 닮았나...--a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고유균의 예상대로 국제연맹은 일본의 행동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대신 단지 리튼을 단장으로 현지를 조사하는 조사단 파견과 양국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상투적인 권고만 늘어놓았습니다. 중국은 영, 미의 개입에 크게 기대했음에도 이들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것은 거부하였죠. 따라서 일본정부나 관동군으로서는 더이상 남 눈치볼 필요도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리튼조사단...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제서야 장학량은 관내에 주둔중인 병력 일부를 금주로 북상시키고 만주에서 후퇴해온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남경정부 역시 12월 25일 장학량에게 금주침공에 적극 저항할 것을 명령하죠. 금주에 집결한 병력은 5만에 달하였고 장학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라고 지시합니다. 따라서 관동군도 여지껏처럼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2사단 외에 본국에서 증원된 제20사단을 동원해 금주공격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양측이 충돌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장학량의 동북군이 금주에서 북평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는 관동군으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바로 염석산을 비롯한 화북군벌들이 이 기회를 악용해 북평으로 쳐들어와 장학량의 뒷치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중국인으로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돕기보다 도리어 자기 세력을 확대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던 것이 당시 중국 군벌들의 실체였습니다. 따라서 32년 1월 3일 금주는 제20사단 휘하 제40여단에 의해 거의 무혈점령되다시피합니다.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항일투쟁의 거점이었던 하얼빈 역시 관동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아 2월 5일 함락됨으로서 만주 전체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2월 28일 동북3성과 열하성 일부를 포함하는 만주국의 건국이 선포됩니다.

마땅한 지도가 없어서 그냥 손으로 직접 그려 보았습니다. 주요 도시와 관동군의 진격로를 대충 그려보았습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날짜가 관동군에게 함락된 일자입니다. 워낙 솜씨가 없어서리....--;;;

12월 15일, 왕정위로부터 하야를 강요받은 장개석은 모든 직책에서 사임합니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하야였죠. 그 날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서 "나라가 위험에 빠졌는데 이 사람들은 그 책임을 떠맡을 용기도, 나라를 구할 계획도 없이 단지 분란을 일으키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라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어쨌든 그의 하야로 광주정부는 남경정부에 다시 복속되어 양광사변은 흐지부지 해결됩니다.(애초에 뭐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그러나 그를 대신해 행정원장이 된 손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능함만 보인후 왕정위로 교체되었고 곧 장개석도 군사위원장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합니다.

그 직후 관동군의 폭주에 이어 이번에는 연초부터 일본 해군이 폭주를 합니다. 제1차 상해사변의 발발이었죠.

 

남만주를 석권한 관동군은 여세를 몰아 북만주마저 단숨에 장악하지만,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으로서는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과거 청일전쟁당시처럼 열강들이 일본을 견제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략에 상투적인 비난만 했을뿐, 실질적으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 영, 프는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기까지 하였고, 스탈린이 철권통치를 시작한 소련 역시 중동로사건때의 그 강경한 모습과는 달리 일본이 소련을 선제공격하지 않는한 중일 양국의 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분명히 합니다. 북만주에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만주국 건국후 일본에게 중동철도를 비롯한 이권들을 죄다 팔아버리고 손을 떼버립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그 무엇보다 최우선이 되는 국제기구의 무기력함은 국제연맹만이 아니라 현재의 유엔 역시 전혀 다르지 않죠.

32년 1월 17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이사회 회의에서도 중국대표의 비난에 대해 일본측은 "겨우 1만5천명에 불과한 군대로 그 광대한 만주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관동군은 결코 영토적 야심이 없으며 단지 비적을 토벌하고 철도 운영을 정상화하려는 것뿐이다."라고 응수하였고 열강들은 일본측 입장을 지지하거나 묵인합니다. 이런 태도가 일본측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었죠.

그러나 장학량은 일본 시대하라 외상과의 회담에서 "일본군은 단지 철도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을뿐 곧 철병할 것"이라는 말만 믿고 부저항 지시를 했으나, 관동군은 그 약속을 깨고 장학량의 임시정부가 있는 금주까지 공격해 32년 1월 3일 거의 무저항으로 간단하게 장악함으로서 열하성까지 세력을 뻗힙니다. 장개석이 장학량에게 "일본군이 지속 남하할 경우 전력으로 금주를 방어하라"고 명령하였음에도 화북군벌들에게 배후를 위협받고 있던 장학량으로서는 일본군과의 승산없는 싸움보다는 자신의 남은 병력과 지반이라도 유지하는 쪽을 택하고 스스로 산해관 이남으로 철수합니다.

※ 당시 남경정부내에서도 금주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과 결전을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군사위원회 참모장인 주배덕은 당시 왕정위와 광서, 광동군벌들의 반란에다, 화북이 중앙으로부터 반독립된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에서 현실적으로 중앙군이 장학량군을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존심만 내세워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고집할 것인가, 일본과 협상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인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남경정부측은 국내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장학량이 사생결단으로 싸워주기를 원했으나 장학량은 그 명령을 결국 묵살합니다.

관동군은 처음에는 만주에 대해 군정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참모장 미야케소장은 이시하라, 이타다키등과 짝짜꿍하여 본국 정부와는 아무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아예 만주를 중국으로 분리독립시킬 음모를 꾸밉니다. 이를 위해 만주사변 당시 동3성 행정장관이었던 장경혜를 비롯해 원금개, 장해붕, 희흡 등 친일파들을 포섭하여 만주국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천진의 영국조계에서 할일없이 뒹굴거리던 "마지막 황제" 부의를 꼬드겨 11월 13일 여순으로 오게합니다. 여기에 대해 당시 와카스키수상과 시대하라 외상은 "내 힘으로는 군을 통제할 수 없다"라고 통탄해 했다고 하지만, 일본의 만주침략의 야욕은 결코 몇몇 관동군 장교들의 독단적 행동이 아니라 오랜기간 추진되어 온 일관된 정책이었습니다. 단지, 그 시기와 수단, 방법에서 이견이 있었을 뿐이죠. 그의 "통탄"은 평화가 깨져서가 아니라, 멋모르고 책임도 못질 짓을 하고 있는 풋내기들의 폭주에 대한 것이었죠.

장경혜(1871~1956) : 장작림이 마적시절부터 최측근이었던 인물로 장작상과 함께 동북군내 구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으나 장작림과의 오랜 의리로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 장작림 폭사후 정권을 장악한 장학량이 구파를 푸대접하자 불화가 깊어졌고 만주사변이 터지자 장학량을 배신하고 친일로 돌아섭니다. 관동군에 의해 흑룡강성장이 되었다가 만주국 건국후 부의밑에서 총리가 되지만 부의와 마찬가지로 허수아비에 불과하여 "두부총리"라고 불립니다. 일본 패망후 부의와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중공으로 송환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하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편, 일본의 침략에 반발하여 중국 전국 곳곳에서 반일시위와 일본물품 불매운동이 벌어져 대일 수출입은 일시적으로 90%이상 격감합니다. 여기다 32년 1월 3일 복건성 복주 일본총영사관 경찰관사에 방화미수사건에다 일본인 소학교 기숙사에서 일본인 교사 부부가 살해되는 일이 발생함으로서 만주에 이어 화남에서도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닫습니다.

그러나 만주에서처럼 일본이 무력침공을 감행할 것을 우려한 복건성정부가 사과하고 반일운동 중지를 약속했는데, 문제는 이 사건이 사실은 대만군 사령부의 정보장교가 중국인 부랑자에게 돈을 주고 사주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는 복주시에서 각종 방화, 암살 사건을 저지르고 이를 명분으로 대만군을 출병시켜 복건성을 침략할 계획이었습니다. 대만군 사령부의 승인도 없이 일개 대위가 독단으로 저지른 것이었으나 그 방법에서 바로 같은 달 상해에서 일어난 일본 승려 살해 사건과 유사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일본화상사건", 1월 18일 상해에 있는 일본인 사찰인 묘법사의 승려가 백주 대낮에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일설에는 단지 부상당했을뿐인데 살해되었다고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허위소문을 퍼뜨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흥분한 일본 거류민들은 항일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중국계 공장인 삼우실업사에 불을 질렀고 중국측 경찰과 충돌해 순경 2명과 일본인 1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또한 격렬한 반중시위를 벌이고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고 거리의 기물과 차량을 파괴합니다.

이 사건 역시 상해총영사관소속 무관 다나카 류기치 소좌와 몇몇 위관급 장교가 짜고 꾸민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알려지게 되지만, 전세계의 이목이 만주로 집중되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관동군의 이타다키 대좌가 다나카에게 막대한 뒷돈과 함께 "사고 한번 크게 터뜨려 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아프리카 듣보잡 국가도 아니고 일개 대좌, 소좌따위가 국가와 군대를 좌지우지하던 것이 바로 당시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상해는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이자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열강들은 상해에 각각 치외법권의 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막대한 이권도 걸려있었죠. 투자금액에서 가장 큰 나라는 영국(5억 3천 4백만원)이었고 다음이 일본(3억8천만원), 미국(1억6천3백만원), 프랑스(1억3백만원) 순이었습니다. 수출입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이점이 바로 만주와는 다른 점이었죠. 만주에서는 일본과 소련을 제외하고는 열강들로서는 이렇다할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시큰둥했지만 상해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전혀 얘기가 다른 것이었죠. 관동군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당장 만주국 건설을 강행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비난과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전에 각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상해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중국군도 상해방어에 집중하느라 만주국 건설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합니다.

1930년대 상해의 모습입니다. 동시기 파리나 뉴욕과 다를바없어 보일 정도로 발달해 있는 대도시였죠.

 

상해주재 일본 영사관은 "일본화상사건"과 양측의 충돌을 명분으로 중국측을 의도적으로 압박하면서 병력을 증원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은 3개 파견함대를 중국에 배치하여, 제1파견함대는 화중, 제2파견함대는 화남, 제3파견함대는 화북에 배치되어 중국의 연안과 주요 항로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해군은 상해와 양자강 일대에 배치된 제1파견함대를 강화하고 항공모함 호쇼, 카가등을 비롯해 제1수뢰전대와 육전대까지 증파합니다.

일본측이 군함을 동원해 상해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오송-상해간 항로를 통제하여 중국국적 선박을 강제로 억류하자 중국측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3차 초공전당시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강력한 일격을 먹였던 제19로군은 남경-상해 철도 경비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남경정부의 명령에 따라 상해로 이동합니다.

제19로군은 중앙군에서도 장개석 직계는 아니고 방계군에 속하는 부대였으나, 손문시절 광동정부산하의 월군(월=복건성) 제1사단 제4연대에서 시작하여 이후 장개석의 북벌전쟁에서 광동군벌 이제심의 제4군으로 편성됩니다. 주로 광동, 광서, 복건성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북벌전쟁에서도 "철군"이라 불릴만큼 용맹하게 싸웁니다. 중원대전이후 초공전에 투입되었다가 상해의 상황이 악화되자 상해방어를 위해 배치된 것이죠.

일본이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고 조계내 병력을 증원하자, 제19로군 3개사단(제60사, 제61사, 제78사)도 군장 대리인 채정해의 명령에 따라 공동조계밖 중국측 방어지역에 병력을 전개하고 철도를 따라 참호를 파고 토치카를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채정해(1892~1968) : 최종계급은 이급상장. 광동출신으로 북벌전쟁부터 초공전, 중일전쟁 등 수많은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해전투에서 패배후 복건성으로 이동하여 초공전에 다시 투입되지만 이에 반발하고 국공합작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이른바 "복건사변") 그러나 장개석의 지휘하에 압도적인 중앙군의 공격으로 단숨에 패퇴하고 해외로 튀었다가 35년에 다시 귀국합니다. 정상적으로는 총살감이었지만 장개석은 그의 영향력을 고려해 실권이 없는 명예직을 맡깁니다. 따라서 국공내전 말기 공산측으로 전향하였고 한국전쟁때는 항미원조위원회 상무위원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혁때 홍위병애들한테 구박받고 비참한 말로를....

이에 대해 일본 파견함대 사령관인 시오자와소장은 제19로군에게 1월 28일 오전까지 방어시설 철거 및 병력을 철수할 것을 통첩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관동군이 정한 각본대로 행할 뿐인 일본측은 1월 28일 일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밤 11시 30분, 공동조계 북쪽 경계도로 북사천로에서 제19로군에 대해 20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해사변", 중국에서는 "1.28항전"이라고 부르는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양측 병력은 19로군 3만3천명에 대해 일본해군은 육전대 6천명이 군함 30척, 항공기 40대, 수십대의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육전대는 숫적으로는 열세했으나 화력과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오자와소장은 기자들 앞에서 "우리가 공격하면 4시간이내 전투는 끝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제19로군은 철저항전을 외치며 채정해의 지휘아래 풍부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화력의 열세를 커버하며 치열한 방어전을 펼칩니다. 전투는 상해중심가 북쪽의 갑북일대로 확대되었고 일본 항공모함 호쇼와 카가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북정거장을 폭격하고 함포로 지원하였지만 육전대는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만 냅니다.

일본 최초 항공모함 "호쇼"

 

또한, 상해에서 일본군이 전면공격을 시작하자 남경정부는 철저항전을 결의하고 중앙군을 투입합니다. 상해는 수도인 남경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군의 상해공격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1월 29일 장개석 직계군인 고축동의 제2사단 7천명이 상해로 이동하여 상해경비사령부와 병기창, 상해비행장에 주둔하고 제19로군을 지원하죠. 또한 2월 14일에는 장치중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5로군 2개사단(제87사, 제88사)도 항주에서 상해로 이동하여 중국군은 총 5만명이상으로 증가합니다.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곧 정계로 복귀한 장개석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남경의 주요 정부기관을 임시로 낙양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합니다.

상해시내를 방어하는 제19로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측은 "중국측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여 자위상 부득이한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육전대를 증파하고 또 시오자와소장을 해임하는 한편 노무라중장을 사령관으로 제3함대를 급파합니다. 2월 2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펼치지만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합니다. 노무라는 육전대와 해군만으로는 도저히 중국군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일날 본국에 육군의 증원을 요청합니다.

진격중인 일본군의 89식 중전차. 일본이 제식화에 성공한 최초의 中전차지만 흔히 "깡통"으로 알려져 있죠.... 상해사변 당시 독립전차 제 2 중대에는 89식 전차 5량, 르노NC전차 10대가 배치되어 공격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러나 투입 수량이 적고 화력과 속도가 느린데다 고장이 잦아서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최초"라는 것외에는 이렇다할 특징도 장점도 없는 물건이지만 이 놈은 그렇다쳐도 그 뒤에 나온 물건들 역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

이쪽은 중국군 제19군이 사용했던 2.5톤짜리 콩알장갑차. 나름 수륙양용도 되었다는군요.

일본군에 대항하는 중국군 박격포병.

 

해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 내각은 2월 9일 제9사단과 제24혼성여단을 증파하였고 이들은 16일날 오송에 상륙합니다. 그러나 20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세번째 공격 역시 참담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만주에서 장학량의 동북군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던 일본으로서는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죠. 일본 육군은 제11사단과 제14사단을 다시 증파하면서 시라카와대장을 사령관으로 "상해파견군"을 창설합니다. 2월 29일 상해파견군이 양자강구에 상륙하고 일부 병력은 중국군 후방으로 진출합니다. 기 작전중인 제9사단등과 함께 3월 1일부터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이 네번째 공격으로 일본군은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5로군의 배후를 포위함으로서 일개월이상 잘 버티고 있던 중국군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져 20km나 후퇴합니다. 제19로군을 비롯해 중국군은 이미 그동안의 피해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으며 한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남경정부는 일본군의 2개사단 증원 정보를 사전에 파악했음에도 더이상의 병력을 증원하거나 방어선을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상해시내로 공격중인 일본군.

 

 

이에 대해 다나카 소좌가 청나라 숙친왕의 딸이라는 여인을 이용해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허위정보를 퍼뜨림으로서 중국군의 철수를 유도케 했다, 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너무 드라마틱한 얘기인지라 신빙성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동안중국군이 매우 용맹하게 싸우기는 했으나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에다 이미 한계에 직면한 상태에서(제19로군과 제5로군의 각 사단들은 절반이상의 손실을 입음) 일본군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여 배후가 위협받고 삼면에서 포위공격당하는 이상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피아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그때까지 버틴 것도 기적에 가까울만큼 중국군이 용전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남경정부의 쌍두수장이었던 장개석과 왕정위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하자 장기전에 대비되어 있지 않은 중국군으로서는 일본과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더욱이 일본이 어디까지 전쟁을 확대할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상해에 죄다 투입했다가 방어선이 돌파당해 남경정권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따라서 채정해의 병력 추가 증원 요청을 거부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섭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공산군이었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공산군은 말로는 "항일"을 외치면서도 정작 거국일치적인 모습을 보이기보다 강서성에서 공산군 포위에 동원했던 병력중 4개사단을 장강유역으로 이동시키자 모택동은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정부군을 공격하고 강서성의 소비에트지구를 확대하여 31년 11월 27일 강서성 서금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합니다. 이는 명백히 "이중적"인 행태이죠.

따라서 하응흠이 강서성의 병력을 추가로 상해로 증원하려고 하자 강서성 주석이었던 웅식휘는 "일본을 상대로 한두개 사단을 더 보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오히려 그 전에 공산군에 대한 방어선이 무너질 것"라고 반대하였죠. 이것이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라는 외적을 앞에 두고도 말로만 "항일"운운할뿐 서로 협조하기는 커녕 되려 이를 악용하는 것이 당시 지방군벌들이나 공산군의 태도였고, 어차피 서로간의 타협과 양립이 불가능한 이상 장개석이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선안내후외양"정책을 고집한 것은 솔직히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양측의 싸움으로 당장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된 열강들 역시 사태 확대를 반대하며 양자의 중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결국 3월 3일 양측은 일단 정전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현지 일본군은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중국군을 계속 공격하여 갑북 전역을 점령하는 등 국지적인 충돌은 계속 이어집니다. 3월 14일 영국공사 람프손의 중재로 영,미,프,이의 합석하에 양측은 쌍방이 먼저 병력을 철수할 것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일본의 목적은 상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로부터 시야를 돌리기 위함이었고 따라서 막대한 배상금이나 영토를 할양하라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은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합니다. 그러나 당시 반일감정으로 격앙된 중국인들로서는 어쨌든 일본이 사죄해도 부족할 판에 타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굴욕"으로 비추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비난의 시선은 당연히 죄다 장개석, 왕정위한테 향합니다.

그보다 문제는 상해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동안 결국 관동군의 의도대로 만주에서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입니다. 3월 1일 동북3성을 주관하는 동북행정위원회가 입헌공화제의 만주국 건국을 선포합니다. 수도는 신경(구 봉천)으로 하고 집정에 부의가, 총리는 정효서가(나중에 장경혜로 교체) 임명됩니다. 영토는 동북3성에다 아직 장학량측이 장악하고 있는 열하성까지 일방적으로 포함시키죠.(이를 핑계로 몇달후 관동군은 열하사변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모여서 만주국 건국을 선포하는 친일관료들과 관동군...

 

인구는 약 3천만명에 달했고 이중에 일본인이 59만명정도였습니다. 국방, 치안은 물론 철도, 항만, 수로 등 모든 군사 행정에 대해 관동군이 담당하며 그 경비를 만주국이 지불하는 협약을 체결함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남경정부는 즉각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하죠.

그러나 당장은 관동군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같았지만 결국 국제연맹이 리튼조사단의 보고서를 근거로 만주국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함으로서 일본은 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스스로 고립과 수라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는 그토록 국제 고립과 비난을 두려워했던 일본정부로서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된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내에서도 극우장교들이 5.15쿠테타를 일으켜 어떻게든 군을 통제하려는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을 암살합니다. 그로서 더이상 식견있는 정치가는 없어졌고 일본은 완전히 통제불능이 되어 태평양전쟁까지 파멸의 길을 향해 달리게 되죠.

이누카이 츠요시(1855~1932) : 만주국 건국후 만주에서 관동군의 세력을 축소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발한 군부에 의해 수상관저에서 어처구니없이 살해됩니다. 여기다 35년에는 갈수록 요구가 늘어나는 군부의 예산(35년 당시 총예산의 46.1%)을 축소하려고 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성장관이 암살되자 더이상 목숨걸고 군부를 걸고 넘어질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근 한달간의 전투에서 양측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

당시 동아일보 5월 13일자 기사를 본다면, 일본 육군 중앙은 공식적으로 만주사변에서 관동군은 전사 498명, 부상 998명에 대해 상해사변에서는 전사 634명, 부상 1,791명으로 발표합니다. 중국군에 대해서는 의용군까지 포함해 약 10만명이 투입되어 최소 2만 5천명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죠.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시키고 전과는 확대시킨 상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상해전역 초반에 이미 만주사변에서 입은 피해를 훨씬 능가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측은 일본군이 5천여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자신들은 13천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중간정도로 봐야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참고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만주사변 희생자는 1만7천명에 달하는데 이는 만주사변만이 아니라 이후의 상해사변, 열하사변 등 중일전쟁 발발전까지 모든 희생자를 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해사변을 놓고 장세노의 "중국현대사 1911~1949"에서는 "제19로군만 분투했을뿐 남경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반면,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 레이황은 장개석이 매우 적극적으로 상해에서 항일전을 주도한 것처럼 기술하여 서로 완전히 상반된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말한다면 장개석은 적극적인 면도, 소극적인 면도 다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상해사변을 강건너 불구경하지 않고 휘하 직계군을 상해로 투입하였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제19로군을 최대한 지원하였습니다. 제2사단과 제5로군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태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여 추가 증원을 거부하고 반일 시위도 탄압한 것도 어쨌든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그가 단기서처럼 "친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현실과 그가 처한 딜레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타협을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장개석을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비굴함"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죠. 사실 왕정위의 광동정권에 대해서도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우세함을 이용해 단숨에 진압해 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님에도 왕정위의 요구대로 국가 주석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스스로 내놓고 두번째 하야를 선택함으로서 내전을 피하였습니다. 이는 20년대 북양군벌들이 북경을 놓고 치열하게 벌인 전쟁과정에서 이기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서 중국에게 득이 되기보다 해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남경정권은 그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곧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합니다. 왕정위나 이종인 등 광서, 광동군벌들이 어차피 장개석의 하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을리도 없죠. 그럼에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런 행위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일본 관동군의 오판을 불러옴으로서 직간접적으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유발시킨데다, 일본에 대한 대응전략에서도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죠.

 

 

32년 4월 29일 상해 공동조계내의 홍구공원에서는 일본 상해파견군의 "전승행사"가 열립니다. 행사장에는 상해에 거주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모여 삼엄한 경계속에서 거행되는 축하식을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위에는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중장, 제9사단 우에다중장, 시게미츠 주중공사, 무라이 상해총영사 등 상해사변을 일으키고 지휘했던 수괴들이 죄다 모여서 욱일승천기앞에서 도열해 있었습니다.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청년이 단상위로 폭탄을 던졌고 그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츠 전면에서 터집니다. 이것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던진 한발의 폭탄으로 시라카와대장과 카와바다 상해거류민단장이 즉사했고 노무라중장과 우에다중장을 비롯해 단상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의사. 스스로도 자폭할 생각이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당초에는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우리가 주도한 일"이라고 대외적으로 공포합니다.

 

윤봉길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결국 12월 19일 25살의 나이로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개석의 말대로 "100만 중국군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단 한명의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할만큼 유례없는 사건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침체되어 가던 한국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는 장개석의 최측근이자 CC단의 지도자였던 진과부의 도움으로 장개석을 직접 대면하였고 장개석은 즉석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과 황포군관학교 낙양분교에 매회 100명씩의 한인 장교를 교육시켜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청천, 이범석은 교관으로 임명됩니다. 물론 중국의 지원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로 지속되지는 않았고 곧 흐지부지되었으나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던 장개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후 임시정부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이런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고 IRA나 이슬람의 "자살폭탄"과 다를바가 무엇인가, 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억지로, 윤봉길은 많은 인파가 붐비는 시장통에서 자살 폭탄을 떠뜨리지도 않았으며 이로 인해 대중적인 공포심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의미가 다른 것이죠.

영화 "테이큰"에서 인신매매범에게 딸을 납치당한 리암 니슨은 딸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 딸을 구해냅니다. 그가 법대로 경찰에게 의존하지 않았다고, 또 인신매매범을 구타하거나 고문하는 등의 불법을 자행했다고 과연 누가 이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할테니까요. 법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내 자신은 스스로 지킬 수 밖에 없죠. 일본의 침략과 이를 묵인한 국제사회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지 않고 힘없는 자들이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득이한 행동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매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홍구공원사건 일주일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상해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서 일단 일본과의 전면전 위기는 피할 수 있었으나, 31년 9월 18일 만주사변과 뒤이은 상해사변, 그리고 동북3성의 분리와 만주국의 건설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그 어느때보다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비난의 화살은 죄다 장개석-왕정위정권에게 향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치욕이 정부의 소극적인 부저항정책과 굴욕적인 대일타협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남경에서는 대일 선전포고와 전면항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격렬하게 벌였습니다. 협상 수석 대표인 곽태기가 물컵으로 싸다구를 당하고 외교부 건물이 공격을 받았으며 이를 진압하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대로 저항한번 못해봤던 장학량의 동북군과 달리 제5로군과 제19로군이 분전했던 상해전투는 중국에게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으나 중국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속전속결로 승리할 것을 예상했던 일본군으로서는 러일전쟁당시 여순공방전이래 유례없는 고전이었습니다. 반면, 청일전쟁이래 일본에 대해 막연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중국군도 힘을 집중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1931년 11월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개석은 "우리가 단결할 수 있다면 비록 열개의 일본이 있어도 우리를 동요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당원들부터 앞장서 단결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아마 중국 5천년 역사이래 가장 불리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북벌에는 성공했으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장미빛 미래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한치 앞조차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있어야 했고 그 군사력을 갖출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일본의 침략에 맞서면서 또 분열된 정치상황을 타계하면서 나중을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전략적인 딜레마였죠.

비록 중원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왕정위를 비롯한 당내 분파주의자들에 의해 장개석의 지위는 여전히 취약했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력은 전체 중국군의 1/10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대외정책을 좌우하고 있던 왕정위는 노골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며 일본에 대한 제재나 강경노선이 일본을 자극하여 더 큰 침략을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남경정부의 통치권이 닿는 지역은 광대한 중국전역에서도 화중, 화남 동쪽의 몇몇성에 불과했고 이조차도 33년 10월에 있었던 복건사변(복건정부와 제19로군이 "항일반장"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을 건설한 사건)이나 36년 9월의 제2차 양광사변처럼 군벌이 다스리는 지방정부들은 언제라도 중앙에 적대적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사천이나 운남은 물론 화북은 사실상 군벌들의 반독립된 왕국이나 다름없었죠. 여기다 강서성을 비롯해 호남, 호북, 안휘, 복건 등 곳곳에서 공산반군이 이른바 "소비에트지구"라 부르는 알박기를 하면서 정부군과 충돌하였습니다.

정치적 혼란만큼이나 경제적으로도 외세에 예속되어 있었고 국가 재정은 심각한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세입은 세출의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20년대 이래 중국의 공업이 화북과 화남의 동남연안가를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의 초기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대부분 방직공장같은 경공업이었고 중공업은 전무했습니다. 여기다 세계공황에다 30년대초 황화강과 양자강의 범람, 가뭄, 홍수 등 계속되는 대규모 자연재해는 농촌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전국이 기근과 기아로 허덕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관동군은 다음 단계로 열하성을 침공합니다.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만주 각지에서는 구 동북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2년 9월만 해도 만주 전역에는 약 22만에 달하는 항일게릴라들이 있었고 도처에서 일본군과 접전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저항을 계속합니다. 관동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을 명분으로 병력을 대폭 증강합니다.

한편, 금주를 버리고 잔존병력을 거느리고 관내로 후퇴한 장학량은 아직 자신의 세력권인 하북성과 열하성을 기반으로 재기를 노립니다. 그러나 만주를 상실한 상황에서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자신의 지위 또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와의 갈등 또한 악화되었는데 왕정위가 장학량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고 하자 "나도 하야하고 싶지만 많은 부하들과 북중국의 치안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다. 당신도 함께 물러난다면 나도 물러나겠다"라고 응수합니다.

열하성은 장학량의 부하인 탕옥린이 주석으로 있었는데 관동군은 그를 매수하는데 실패하자 무력으로 열하성을 침공하기로 결정합니다. 관동군 스파이가 조양사라는 절에서 비적에 의해 살해된 이른바 "조양사원사건"이 일어나자 관동군은 이를 장학량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32년 8월 22일 제8사단을 열하성으로 출병시켜 탕옥린휘하 동북군을 격파합니다. 또한 12월에는 제6사단을 추가 파병하죠.

탕옥린(1871~1937) : 장작상, 장경혜 등과 함께 소시적부터 장작림과 함께 만주를 누비며 마적질을 했던 멤버중 하나입니다. 장작림휘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장학량이 동북역치을 선언한후 열하성 주석으로 임명됩니다. 열하사변에서 패퇴한후 도주했다가 풍옥상등과 손을 잡고 항일동맹군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제29군 군장 송철원 휘하에 잠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활약을 하지는 못한채 37년 5월 천진에서 병사합니다.

당시 강서성에서 모택동을 상대로 4번째 초공작전을 친히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열하성을 사수할 것을 지시하고 중앙군 6개사단을 파견하겠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파견된 것은 4개 사단이었고 이중에는 장개석 직계 3개사단(제2사단, 제25사단, 제83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장학량 역시 휘하 동북군을 증원하고 의용군까지 합해 열하성에는 20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한채 쌍방은 대치합니다.

만리장성의 요충지인 산해관과 진황도에는 의화단의 난이래 각각 1개 중대 100명과 5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다 천진의 조계지에도 이른바 "천진군"이라 불리는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니 전략적으로 중국이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있죠. 33년 1월 1일 산해관 남문밖에 있는 일본헌병소에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한 일이 발생했고 관동군은 즉각 "중국군의 도발"이라며 산해관 인근에 주둔한 중국군을 공격합니다.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진황도에서 구축함의 함포사격에다 19문의 야포, 7대의 항공기, 수대의 전차의 지원까지 받은 일본군은 중국군을 제압하고 1월 3일 산해관 전역과 인근 임유현의 현성까지 점령합니다.

"천하제일문"이라 적혀 있는 현재의 산해관. 중국 역사에서 만주에서 중원을 침공하는 외적을 막는 최대의 요충지였죠. 명말 산해관에 주둔하고 있던 오삼계는 조국을 배반하고 청에게 붙음으로서 청군은 이자성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중원을 장악할 수 있었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산해관사건 당시 일본군의 공격

관동군은 산해관에서의 충돌을 빌미로 열하성 금주 부근에 있던 동북군 제16여단과 제19여단을 폭격하고 1월 10일에는 산해관 북쪽 13km에 있는 관내와 열하를 연결하는 장학량군의 병참선인 "구문"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상황이 점점 확대되자 2월 10일 북평에 있던 장학량은 장개석의 처남이자 남경정부에서도 가장 반일로 이름난 재정부장 송자문과 함께 열하성의 성도 승덕으로 사령부를 이동시키고 모든 수단을 다해 열하성을 사수할 것을 선언합니다. 관동군 역시 이번 기회에 열하성 전체를 장악할 생각으로 "열하성은 만주국의 영토"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후 제6사단, 제8사단, 혼성 제14여단, 기병 제4여단 등에다 장경혜가 지휘하는 구 동북군출신으로 구성된 만주괴뢰군까지 동원하죠.

10만이 넘는 일만 연합군은 3방향에서 중국군을 공격하여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폭격으로 무장이 형편없는 동북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합니다. 2월 24일 개로를 수비하던 최흥무는 관동군과 내통하여 싸우지도 항복했고 조양의 수비군도 싸우기도 전에 태반이 도주합니다. 3월 2일에는 능원이 함락되었고 이를 구원하려던 우광린의 제130사단은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괴멸되고 우광린도 전사합니다. 다음날 탕옥린은 자신의 사재를 차량에 실고 북평으로 도주하였고 4일 아침 승덕마저 간단하게 함락됨으로서 열하성 전역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장학량은 병력을 장성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일본군의 남하에 대항하였으나 3월 10일 북평 북쪽의 관문인 고북구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북평을 비롯한 화북전역이 위협받게 됩니다. 3월 26일에는 열하성과 하북성 사이의 만리장성 전역이 일본군에 의해 장악됩니다. 이 과정에서 동북군과 함께 장성을 방어하던 장개석 직계군 역시 큰 피해를 입습니다.

열하사변에서 장학량과 동북군의 무능함은 또한번 증명되었는데, 장개석은 제4차 초공을 중지하고 즉시 보정으로 올라와 군정부장 하응흠에게 모든 지휘권을 맡깁니다. 3월 12일 장개석과 독대한 장학량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하야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게 되죠. 이로서 그는 사실상 독자적인 군벌로서는 몰락한 셈이었죠. 그의 동북군은 해체된후 4개군으로 재편되어 하응흠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당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에서 중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던 고유균은 열하전투에서 중국군이 최대한 선전하여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고유균은 국제연맹 규약 제16조 "전쟁에 호소한 연맹국은 다른 모든 연맹국에 대해 선전포고한 것으로 간주하고 통상, 금융 등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를 통한 대일 제재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이 중국이 일본과 단교하지 않은 이상 제16조의 발동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자 고유균은 본국에 일본과의 단교를 건의합니다. 그러나 동북군은 무기력하게 연패를 당한데다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왕정위는 어차피 열강들이 중국문제에 무관심한데다 일본과 단교할 경우 일본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이상 상황만 더 악화되어 최악의 경우 북평, 천진까지 속수무책으로 함락될 수 있다는 이유로 단교를 반대함으로서 일본에 대한 제재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영, 미, 프 등 열강들은 만주사변때만 해도 그다지 무관심한 입장이었으나,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과 일본이 당초의 철병 약속과 달리 되려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며 침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리튼조사단의 보고서를 근거로 32년 2월 24일 국제연맹은 42대 1로 만주국 불승인 및 일본군의 철수를 결의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가볍게 생까고 도리어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죠. 그럼에도 국제연맹은 일본에 대해 직접적인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하며 무력함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장성이북을 일단 점령한 이상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말 것을 관동군에게 지시했음에도 기왕 칼을 빼들은 관동군은 이를 묵살하고 3월 27일 관동군 사령관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관동군 작전명령 제491호"를 발동시켜 4월 11일부터 장성이남으로 전장을 확대합니다. 중국측도 하응흠이 중앙군을 중심으로 약 5만의 병력을 북평, 천진에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합니다. 또한 송철원의 제29군도 가세하였고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합니다.

관동군은 5월 7일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여 중국군을 도처에서 격파하고 북평, 천진 북쪽 50km선까지 진출합니다. 결국 5월 25일 중국은 일본에 정전을 요청하였고 5월 31일 천진 외항인 당고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하는 양국(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일본)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고협정은 중국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장성이북으로 철수하되, 장성이북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만주국의 존재 또한 명문화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기다 산해관을 비롯한 장성의 주요 요충지에 일본군의 주둔을 인정하였습니다. 중국측은 적어도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오랜 상징성을 내세워 일본군의 철수와 중국으로의 반환을 필사적으로 요구했음에도 관동군에 의해 일언지하 거부됩니다. 더욱이 장성에서 북평 이북은 비무장지대화되어 중국군은 철수해야 했습니다.

열하사변 당시 양측의 상황도. 제대로 된 지도가 없어서 어설픈 그림솜씨에다 악필로 직접 그려봤습니다. 그래도 대충 이해는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중국으로서는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후 또한번의 치욕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완전한 참패였고 외교적으로도 패배한 셈이었죠. 아무리 저항해도 힘이 없다면 이길 수 없음을 또한번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또한 만주와 열하를 빼앗긴데다 북평, 천진 이북의 주권을 상실하고 무방비상태가 됨으로서 화북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연운16주를 요나라에게 빼앗겼던 북송시절의 재현이 된 격이었습니다.

열하사변에서 동북군은 그야말로 무기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장학량의 지휘는 매우 졸렬했으며 탕옥린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도주하거나 일본과 내통하였고 병사들은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습니다. 여기다 많은 동북군 출신들이 일본의 괴뢰군이 되어 옛 전우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몇년뒤 그들이 섬서성에서 공산군과의 싸움에 동원되었을때 "일본과 싸우겠다"며 반발했지만 막상 싸울 기회가 있었을때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큰 희생을 내며 용전한 것은 중앙군과 송철원의 제29군이었습니다. 송철원은 이른바 "대도대"라는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군 포병진지로 돌격시켜 점령함으로서 "항일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장개석의 이른바 "일면 저항 일면 외교"는 그가 만주사변이래 서안사변직전까지 고수했던 전략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어쨌든 협상을 하건 저항을 하건 그럴 힘이 있을때의 얘기였죠. 그로서는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일본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군이 그만한 역량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음에도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재야에서 "항일"을 외쳐도 단지 감정적인 외침일뿐 현실적인 힘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었죠. 장개석은 그 어느때보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경제개발과 군사력 정비가 절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일주일전쟁에서 참패를 당한후 연방군 재건계획을 추진했던 레빌. 그는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번다"라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서 결국 피아간의 격차를 뒤집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치욕적인 연패와 후퇴를 계속 용납해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레빌의 고뇌가 바로 당시 장개석이 처한 입장이었죠

'역사 ,세계사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10대 발명가   (0) 2013.03.21
독일군의 역사   (0) 2013.03.10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0) 2013.02.16
식민지 시기 동남아시아  (0) 2013.02.07
식민지시기 베트남  (0) 201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