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루이14세의 대외전쟁과 카리스마

구름위 2013. 1. 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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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Louis 14)가 남긴 유산들(2)

 

(3) 네 차례의 국제 전쟁

 

(가) 플랑드르 전쟁(1667 ~ 68)과 네덜란드전쟁(1672~ 78)

 

베르사유 궁전루이 14세는 재위기간 중 플랑드르전쟁(1667~ 68). 네덜란드전쟁(1672 ~ 78),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1689 ~ 97), 그리고 스페인계승전쟁(1701~ 13) 이라고 부르는 4차례의 국제전을 일으켰다.

 

전쟁의 시작에서 강화조약의 체결까지, 그 기간을 전부 합하면 32년 간, 그가 친정(親政)을 한  54년의 2/3를 전쟁으로 보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오랜 기간 전쟁의 소용돌이로 왕실과 국민들 모두를 피로하게 만들었을까?

 

첫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콜베르식 중상주의의 추진, 둘째로 루이 14세의 개인적인 영광추구, 셋째는 국제적인 고립에서의 살아 남기 위한 방법 등으로 요약 설명되고 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절대우위에 있었던 무역에서, 한정된 다량의 화폐(銀貨)를 얻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힘의 우위(優位)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영토확장이야 말로 군주(君主)로서의 권위와 영광을 얻는 가장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프랑스 동쪽인 오스트리아와 남쪽인 스페인에서는 양 합스부르크家가 버티고 있었고, 서북쪽 도버해협 건너 영국은 스튜어트왕조가 의회와의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와 덴마크, 스웨덴은 신교 국가들이었다.

 

프랑스는 이들로부터 포위 당한 상태에 있었고, 이런위기감이 전쟁으로 이어 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 나라들의 군사력은 보잘 것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패자(覇者)로서 군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강국이라면 단연 영국. 그래서 루이 14세는 고종제(姑從弟)인 영국왕 찰스 2세와 도버 협약을 체결하여(1670) 국제적으로 고립을 면하고, 나아가서는 주변을 통합, 유럽에서의 왕 중의 왕이라는 부푼 꿈을 키우고자했다. 이런 것들이 전쟁을 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못지 않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이미 리슐리외 때부터 싹트기 시작해서 마자랭을 거쳐 루이 14세 때 권리회복 사상과 연계된 자연국경 설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프랑스를 방어해 주는 자연적인 지형, 남쪽의 험준한 알프스와 피레네 두 산맥, 그 사이에 있는 지중해, 서쪽은 대서양이라는 넓은 바다, 동북 쪽으로는 라인 강의 물 줄기, 이런 자연 울타리가 프랑스의 영역이고, 이곳에는 어떤 외국 세력이 들어와서도 안되고, 들어와 있는 것과는 싸워서 몰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전쟁의 당위성을 뒤 바침 하는 또 다른 명분이었다.

 

이런 일련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군사력의 증강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1666년 7만 2천의 병력이 1678년에는 28만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영국의 제임스 2세가 3만의 상비군 육성을 서둘다가 의회로부터 냉대를 받은 것에 비교하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다.

 

이런 루이 14세의 야망(野望)은 플랑드로 전쟁을 유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의 집요한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네덜란드와 직접 전쟁, 이른바 네덜란드전쟁(Dutch Wars)을 유발 시켰다. 네덜란드가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데 대한 개인적 적개심과, 라인 강까지 국경을 넓히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 국민들은 고질적인 계층간 분열을 종식시키고, 오라녜(Oranje)家의 빌렘 3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 생명 줄이나 다름 없는 제방을 허물어 홍수작전을 전개하는 등 필사의 저항을 하였고, 한편 프랑스의 팽창을 두려워 한 브란덴부르크 및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양 합스부르크왕가와도 손을 잡고 영국과도 화해하여 프랑스를 포위하였으며,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루이 14세는 더 이상 네덜란드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네이메겐화약(Treaties of Nijmegen)을 체결(1678), 약간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콜베르식 중상주의는 실패했다.

 

(나) 팔츠계승전쟁(Pfalzischer Erbfolgekrieg / 1689~ 1697)

 

알사스의 북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하이델베르크는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와 마리오 란차(Lanza, Mario)의 이 영화 주제 음악을 통하여 대학과 맥주와 낭만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중세 이래 독일의 유력한 선제후(選帝侯) 팔츠가의 성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종교개혁 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거점도시의 하나로서 30년 전쟁 때는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다.

 

사방을 적으로 만든 루이 14세가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가에서 남자 후계자가 없어지자 그의 제수(弟嫂 / 오를레앙공의 妃)가 팔츠가의 출신임을 이유로 그 영토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이에른, 작센 선제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아우크스동맹을 결성(1686)하고 루이 14세에 대항하였다.

 

결국 루이 14세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기로 하고, 팔츠령을 침입하여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는데,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 War of the Leagueof Augsburg) 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철저한 파괴로 팔츠령 내는 물론, 전장 터가 된 여타 독일과 네덜란드도 그 폐해(弊害)가 극심하였다.

 

팔츠가의 왕비가 영국 왕실 출신이 였으나, 프랑스와의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관계로 용단을 내리지 못했던 영국의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뒤를 이어면서 영국이 참가하였고(1689), 사보이도 합세하였다.

 

이 전쟁에서 부분적으로는 루이 14세의 영광을 더해주는 승리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전쟁이었다. 1697년 스웨덴의 중재(仲裁)로 헤이그 근처에 있는 도시 라이스바이크에서 독일을 비롯한 전쟁 당사국과 각각의 라이스바이크 조약을 체결하였는데(Treaty of Rijswijk),

 

영국에 대해서는 윌리엄 3세의 영국 왕위 계승을 승인하였고, 네이메겐조약 이후 획득한 영토는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할 것, 독일에 대해서는 라인강 우안으로부터 철병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루이 14세의 패배였고, 영국왕 윌리엄 3세의 승리였다.

 

(다) 스페인 계승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 ~ 1714)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Carlos Ⅱ / 1665 ~ 1700)는 병약한데다가 후사(後嗣)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 앙주 공(公)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 이에 따라 필리프가 펠리페 5세(Felipe Ⅴ/ 1700 ~ 46)로서 에스파냐국왕으로 즉위하였다(1700)

 

루이 14세로서는 그의 모후 및 첫째 왕비가 스페인 왕녀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스페인의 왕위는 그의 가계에서 이어야 된다는 생각을늘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의 친가(親家)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家에서도 당연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여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무역, 특히 신대륙 무역 확보라는 관점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통합하여 유럽에서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세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역전되어 육, 해군 모두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의 동맹군에게 연전 연패를 당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공세에서 수세(守勢)로 입장이 바뀐 가운데, 1713년 영국 네덜란드와는 위트레흐트조약(Treaty of Utrecht)을, 1714년에는 영국의 중재로 오스트리아와는 라슈타트조약(Traite de Rastatt)을, 독일의 제후들과는 바덴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전쟁은 겨우 마무리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루이 14세의 베르사유궁전에는 짙은 먹구름이 서서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통합하지 않는 다는 전제 조건하에 펠리페 5세의 왕위계승권은 확보하였으나, 신대륙에서 허드슨만·아케디아등 식민지 일부와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령 지브롤터와 미노르크섬을 영국에게 할양하여야만 했다.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상업상의 특권을, 프로이센에게는 게르데른 및 스위스의 토지 일부를, 사보이에게는 시칠리아 지배를 승인하는 등, 영국이 가장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잃은 프랑스는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신대륙지배라는 꿈도 좌절되었고, 동시에 영국의 우위를 확정 지었다.

 

(4) 신과 태양과 국왕

 

루이 14세가 대외전쟁에서 영광과 치욕이라는 희비(喜悲)가 교차했다면, 국내에서는 그를 둘러싼 아부(阿附)경쟁이 도를 더하고 있었다. 절대권력자의 그늘에 기생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 세우고, 실제로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얻기 위해 아첨으로 얼룩진 군상(群像)들의 모습은 고금동서(古今東西)를 막론하고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원수(元帥)급의 장군 라 파이아트공(公)이라는 인물은 1688년 제 돈으로 국왕의 기마상(騎馬像)을 만들어 빅토리아 광장에 세웠는데, 청동(靑銅)제 바탕에 황금을 입힌 이 금동 기마상의 제막식 날 부하 1개 연대를 동원, 기마상 주위를 세 번씩이나 행진하였고, 매일 밤 그의 아들을 시켜 기마상 앞에 예배용 횃불을 밝히게했다.

 

대귀족 생 시몽은 그의 회상록에서 이를 빗대여 저열하고 거짓 된 이교적인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미 그 자신도 국왕에 대한 갖은 아첨으로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궁정 속의 방 하나를 얻어 거기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루이 14세의 애인으로 국왕과 가까웠던 멩트농부인이 생 시르 학원에 나가는 것을 알고는, 그를 통해서 국왕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예배당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는 허탕, 이렇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소인은 두 달 째나 아무리 애를 써도 국왕 폐하를 뵙지 못하였으므로, 차라리 이대로 죽을까 합니다......." 이런 애원 겸 협박조의 편지를 받은 멩트농부인은 후일 루이 14세와 결혼, 제2 왕비가 되었다.

 

대사교 보쉬에(Bossuet, Jacques BAnigne / 1627 ~1704)는 프랑스교회의 독립과 절대왕정을 변호하는 4개조로 된 왕권신수설을 발표하고, 국왕이야 말로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신이라고 말 했으며, 그 자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루이 14세가 임석한 미사에는 조신(朝臣)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이 성직자와 제단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고 모든 시선은 국왕에게 향하는 기막힌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었다. 국왕은 살아있는 신이였고 궁전은 그를 위한 신전(神殿)이였다.

 

루이 14세를 태양왕(Roi Soleil)이라고 부른다. 루이14세 자신이 위대한 군주를 태양에 비교했고 베르사유궁전 정원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세웠다. 카톨릭 국가에서 태양숭배라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다신교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이 시기 이미 유럽에서는 지동설이 식자들 간에는 일반화되는 추세에 있었고 사상의 발전도 하루가 달라지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보다 조금 전인 15 ~ 16 세기 르네상스 시기로서, 이때 크리스트의 이미지는 "인간으로 된 신", 태양은 크리스트교의 최고 권위의 상징적 존재, 국왕은 그들을 합한 신적 인간으로 광범하게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궁정에서 벌어지는 축제나연극에서도 국왕은 신인(神人)으로 표현되고, 그 축제나 연극은 국왕에 대한 예배(禮拜)나 다름 없었다.

 

대개의 구조물이 그러하듯 이 베르사유 궁전 건축에서도많은 사람들의 희생(犧牲)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 수년간 지속된 공사기간중, 동원된 노동자가 과로(過勞), 사고(事故), 질병(疾病) 등으로 매일 밤 짐차에시체로 가득 실려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5) 루이 14세의 애정 편력

 

왕비의 출산 증명,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에 속한다. 태어난 아이가 왕위 계승권을 가졌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에서 제임스 2세의 왕비 출산 때는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산실을 메운 가운데 왕자는 탄생했지만(1688) 왕자의 탄생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국교회 측에서는 이들 증인들이 카톨릭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하여 그 불길이 바로 명예혁명으로 이어졌다.

 

출산 증명을 하기 위해 왕비의 산실을 지키는 증인의 경우는 프랑스가 영국보다는 훨씬 심해서 많을 경우 200명, 혹은 그 이상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하며, 왕비의 출산 뿐만 아니라 화장하는 모습 등이 공개된 예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또 하나 재미 있는 현상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들사회에서는 결혼 증명이 필요할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결혼 증명의 유일한 수단은 입회인의 기억에 의존해야 되었기 때문에 입회인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신랑이 주례신부의 멱살을 잡는다든지, 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난투극을 벌리는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랑 신부의 성명, 주소, 양친의 주소 등을 교회에 등록케 하여 이런 폐단(?)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프랑스식 호적제도의 기원이되었다.

 

그래도 이런 것은 1부 1처제를 고수하는 기독교 사회에서볼 수 있는 현상이고, 이슬람 사회나 여타 1부 다처제의 사회에서는 이것 과는 또다른 모습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슬람 사회에서의 하렘, 오리엔트 여러 나라의 국왕침소 등은 이른바 금남(禁男)의 집이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 만 명이 살고 있는 궁중에서 사내 구실을 하는 것은 오직 군주 한 사람, 나머지는 비빈을 비롯한 궁녀들이거나 남자이면도 사내 구실을 할 수 없는 내시(환관)들...

 

그 많은 궁녀(宮女)들은 군주의 예비 신부 감이라고 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군주는 언제든지 이들 궁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있었기에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만약 궁녀가 수태(受胎)를 하고, 출산을 하게 된다면, 왕자(王子)나 왕녀(王女)의 신분이 되는데, 하룻 밤의 정사(情事)를 군주가 기억하지 못할 경우, 불륜(不倫)이라는 낙인(烙印)과 함께 산모와 영아는 목숨을 내 놓아야한다. 불륜이 아니였음에도 이런 일을 당한다면 이 얼마나 기막힐 노릇인가?

 

이래서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출산 증명 아닌 동침(同寢)증명이라는 별난 제도가 있었는데, 황제가 궁녀와 동침을 하면, 그 사실을 입직 내시가 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후일에 대처했다.

 

황제들 가운데는 드물기는 하지만 자녀가 150 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그 많은 사실들을 황제로서는 하나하나 기억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고, 환관(宦官)들의 많은 업무(?) 중에는 이런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이런 중국황실에는 많은 고려, 조선의 여자와 남자들이 궁녀와 내시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장을 따로 만들어 하기로 하자)

 

조선왕조의 경우, 궁녀가 성은(聖恩)을 입게 되면, 그 이튿날 아침에 성은을 입은 궁녀는 치마를 뒤 집어 쓰고, 이를 자랑 삼아 거닐면서 스스로 선전에 열중했다. 이는 성은 자체의 증명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4품인 숙원(淑媛)에서부터 정1품인 빈(嬪)의 반렬(班列)에 까지 오를 수 있는 품계(品階)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이다.

 

처첩(妻妾)이나 환관(宦官) 제도가 기독교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성(性)에 관해서는 모두가 초연(超然)한 도덕군자들이 였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보자.

 

그가 새벽에 일어날 때, 옷을 갈아 입을 때, 식사할 때, 잠자리에 들 때, 심지어 화장실을 다녀 올 때도 많은 사람들이 시중을 들었다. 이런 것이 시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儀式)으로서 행사까지 치렀다고한다. 그러나 이런 국왕의 기상(起床)에서부터 이어지는 일상생활에서 그의 시중을드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사람들은 일생 일대의 영광인 동시에 명예로 알았다.

 

루이 14세가 마자랭의 두 질녀, 오랑프 만시니와 마리 만시니와의 사랑은 결혼을 전제로 하였지만 모후와 마자랭의 반대로 이룰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앞서 하였고, 비록 정략 결혼이었지만 스페인 출신의 첫째 왕비 마리 테레즈는 정숙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1683년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부터 애인으로 삼았던 미모의 여인, 라 발리에르는 원래는 왕제(王弟)의 시녀였고, 오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몇 명의 자녀도 두었다. 그러나 그녀도 얼마 못가서 국왕으로부터 버림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다음으로 루이 14세는 라 발리에르가 낳은 아이를 맡아 키우던 몽테스팡 부인과 관계했다. 그녀는 루이 14세의 사랑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 보아잔이라는 여자 약제사에게 미약(媚藥) 제조를 부탁,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 여자 약제사가 만든 미약도 효과가 없었든지 그녀 역시 버림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러면 그때 만들었다는 미약이란 어떤 것일까? 전하는 이야기로는 월경수에 손톱과 진흙 그리고 썩은 포도를 썪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향(麝香)이라는 궁노루 배꼽을 미약으로 사용했던 조선의 비빈(妃嬪)들과 비교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1677년 네덜란드의 의사 루벤 후크는 확대경으로 남자의 정자(精子)를 발견, 생식에 관한 학설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학문의 진전도 이 때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시인의 미망인 프랑수아 도비뉴(Francoised'Aubigne)와 다시 관계를 맺었다. 프랑수아 도비뉴는 49세의 나이로 46세인 국왕과 1884년 결혼, 제 2왕비로서 여생을 보냈는데, 이가 바로 멩트농 부인이다. 그녀는 루이 14세의 종교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처럼 위세 당당하던 루이 14세도 나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가 빠지고 뺨은 홀쪽해 졌으며, 소화불량으로 안색이 나빠지고 피부에는 윤기가 사라졌다. 이런 육신의 그늘에 가려진 것은 사치와 허영과 낭비, 거기에 따르는 국민들의 고통을 유산으로 남기고 1715년 9월 1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수(壽) 77세, 재위기간 72년, 친정기간 54년, 제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천수를 누렸다.

 

국왕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하듯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국왕의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는 춤추고 노래하고 마시면서 그 동안의 고통을 한꺼번에 씻는 듯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기다리던 해방의 날을 과연 마지할 수 있었을까?

 

다음 왕위를 이은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曾孫)으로서 이때 나이 고작 다섯 살, 험난한 프랑스의 앞날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7년 전쟁 등이 유럽의 세력균형(Balanceof power)이라는 이름으로 그와 그의 프랑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에는 주로 귀족의 미망인들이 살롱이라는 걸 차려놓고 짙은 화장과 매혹적인 향수와 우아한 성장으로 건달(?)들을 불러 모았고, 런던에서는 커피 하우스라는게 등장하여,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그 숫자도 삽시간에 불어났다.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차만 마시고 춤만 추었을까? 불만을 토로하고 정치를 비판하고, 불평의 화살은 궁정으로 향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