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멋진 폴란드 기병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

구름위 2013. 1. 2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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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sarz (Hussar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Józef Brandt 作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는 1503년 폴란드 의회 세임(Sejm)에 의해 창설 된 폴란드 왕실 친위대였다.

후사르라는 단어는 헝가리어 후사르(huszár)에서 따온 말로

원래는 세르비아어로 도둑, 약탈자를 뜻하는 구사르(gusa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창설 이 후 일반 시민들도 징집 됨에 따라 그 규모가 커졌다.




Battle of Orsha, 1514年



후사르는 1514년 모스크바 대공국(Grand Principa of Moscow)과 벌인 오르샤 전투(Battle of Orsha)와

1531년 몰다비아(Moldavia)와 벌인 오베르틴 전투(Battle of Obertyn)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Stefan Batory (Reign 1576 ~ 1586)


폴란드 역사상 위대한 왕 중 한 명인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치세에

후사르는 빠른 기동력을 가진 중기병으로 대대적으로 개혁 되었다.

그는 보다 강도 높은 훈련, 편성을 통해 후사르를 정예화 하여 폴란드 기병의 중추로 만들었다.

일련의 개혁으로 경기병과 기사의 장점을 고루 지니게 된 윙드 후사르는

코드키에비츠, 주키에프스키 등 명장들의 지휘 아래 폴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Battle of Kircholm, 1605年




After the battle of Kircholm, January Suchodolsk 作




Battle of Kluszyn, 1610年




Polish hussar line at the Battle of Kluszyn




左 : Jan Karol Chodkiewicz / 右 : Stanislaw Zolkiewski



1577년 단치히(Danzig)시와 벌인 루비셰프 전투(Battle of Lubiszew)를 시작으로

윙드 후사르의 포텐이 더 퐝퐝 터졌다.

1588년 비치나(Byczyna), 1601년 코켄하우젠(Kokenhausen),

1605년 키르홀름(Kircholm), 1610년 쿠쉰(Kluszyn) 등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폴란드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키르홀름 전투(Battle of Kircholm)와 쿠쉰 전투(Battle of Kluszyn)가 있다.

키르홀름 전투는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Jan Karol Chodkiewicz)가 지휘하는 3천 5백명의 폴란드 군이

스웨덴 왕 칼 9세(Karl IX)가 지휘하는 1만 1천명의 스웨덴 군을 쳐부순 전투로

윙드 후사르 300명으로 스웨덴 보병 8200여명을 휘어잡아 단 20분만에 승리하였다.

이 전투로 스웨덴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칼 9세는 에스토니아 귀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폴란드의 대승은 전 유럽에 널리 퍼져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군주는 물론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까지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쿠쉰 전투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law Zolkiewski)가 지휘하는 7천명의 폴란드군이

무려 5배나 차이나는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 5천~4만명을 쳐부순 전투로

이 역시 5600명의 윙드 후사르의 활약이 돋보였던 승리였다.


이 밖에도 1620년 체초롱 전투(Battle of Cecora)에서

윙드 후사르 단 300명이 오스만 제국 기병 1만 5천여명을 퇴각시켰고

1621년 코침 전투(Battle of Chocim) 예니체리(Janissary) 부대를 격파하고

친위 기병대 시파히(Spahis)와 대등하게 싸우는 등 강력한 힘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윙드 후사르의 무패 신화는 100여년 동안 지속 되었다.




Gustav Adolf (Reign 1611 ~ 1632)




Stanisław Koniecpolski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윙드 후사르 무패 신화를 깰 사람이 등장 했으니 바로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였다.

그는 칼 9세의 아들로서 재상 악슨 옥슨쉐르나(Axel Oxenstierna)와 함께

약소국 스웨덴을 강대국 반열에 올린 명군이자 명장이였다.


리보니아(Livonia)에서 윙드 후사르의 위력을 경험한 그는 폴란드와 잠시 정전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와 군대 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8년 후 발호프 전투(Battle of Wallhof)에서 무적이라 불리는 윙드 후사르에게 사상 첫 패배를 가져다준다.

이 후 스타니스와브 코니에츠폴스키(Stanisław Koniecpolski)가 지휘하는 5천명의 윙드 후사르를 쳐부수고

디르샤우 전투(Battle of Dirschau)에서 승리하였으나 트츠치아나 전투(Battle of Trzciana)에서는

반대로 윙드 후사르에게 당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Poland-Lithuania Commonwealth) 최전성기 당시 영토




대홍수(Deluge) 시기 러시아, 스웨덴 등에게 점령 당한 영토



앞서 말했듯이 영원한건 없다. 동유럽 강국이였던 폴란드는 지리상으로

러시아-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스웨덴이라는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실정이다.

폴란드는 여러 차례 전쟁으로 국력을 짜장 소진했다.

결국 1568년 흐멜니츠키 봉기(Khmelnytsky Uprising)가 일어나고

1655년 스웨덴의 침공을 시작으로 대홍수라 불리는 폴란드에 흑역사가 드리웠다.


이 시기 윙드 후사르는 코사크(Cossack)를 상대로 한 주태 보디 전투(Battle of Zhovti Vody)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하는 등 여러가지로 안구에 습기 돋는 상황이였다.




John III Sobieski at the Battle of Vienna, Jerzy Siemiginowski-Eleuter 作




Sobieski at Vienna, Juliusz Kossak 作



어찌됐든 대홍수를 견뎌냈다. 하지만 폴란드는 강대국에서 밀려나고 인구 ⅓을 잃는 등

엄청난 여파와 함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서서히 몰락하던 폴란드의 위상을 드리워준 이가 있으니 바로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였다.

1674년 국왕으로선출 된 그는 온 기력을 다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폴란드를 수호하였다.

1683년 그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공통의 적으로 삼았다.


이 시기 그와 윙드 후사르가 이룩한 위대한 승리가 있었다. 바로 빈 전투(Battle of Vienna)다.

빈을 포위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가 이끄는 15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빈을 구원하였고 크리스트교 세계의 방파제(Antemurale Christianitatis) 칭호를 얻었다.

적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는 '레흐스탄의 사자(Lion of Lechistan)'라 불리며 경외 받았다.


외부적으론 위엄을 떨쳤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무정부상태로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1696년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한 이 후 폴란드는 가속도로 몰락했고

만방에 위엄을 떨치던 윙드 후사르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찰대식으로 변했으며 무장 역시 빈약해졌다.









윙드 후사르는 랜스(lance)라는 중세 시대 기사들의 무기로 무장했다.

5.5m나 되는 긴 랜스로 중간에 나무로 된 동그란걸 두고 속이 비게한 전나무로 만들었다고한다.

덕분에 중세 시대 랜스보단 가벼워졌지만 강도는 약해졌다.

그들은 적을 향해 돌격하고도 랜스가 부러지지 않으면 이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이는 적을 빡시게 타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였다.

2m~2.5m에 연방을 상징하는 홍백의 깃발을 달았는데 적을 혼란시키려는 의도였다.




Palasz




Estoc




Saber





팔라쉬(Palasz)는 서유럽에서 사용 되는 곧은 형태의 검으로 주로 중기병을 상대로 썼으나

이 후 사용빈도가 떨어져 에스토크(Estoc)를 대신 사용하였다.

이 검은 찌르기용으로 16세기 후반 들어서 1.3m~1.6m로 늘어났다한다.

세이버(Saber)는 윙드 후사르들이 가장 애용했던 검으로 후사르용 세이버가 탄생할 정도였다.

검의 길이는 82~87cm 정도라 한다.


검 외에도 피스톨(Pistol)이라는 권총을 한 두개씩 소지하였으며 방패도 사용하였으나 17세기 들어서 사라졌다.

비록 적은 수지만 활이나 화승총 등을 쓰는 후사르도 있었다고하며

귀족들은 전투용 망치나 도끼를 사용하기도 했고 지휘관은 철퇴를 지녔다고한다.









스테판 바토리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윙드 후사르는 그 전의 무거웠던 갑옷 대신

원거리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가슴판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외는 모두 경량화 하여 모든 기력을 앞으로 쏠리게하였다.

치장 또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범이나 표범의 가죽을 입었으나

진귀했기에 늑대나 시라소니 가죽으로 대신 하기도 했다.







윙드 후사르의 주 전술은 랜스 차지(Lance-Charge)이였다. 한마디로 돌격!

5.5m가 넘는 긴 랜스로 적을 붕괴시킨 후 검을 뽑아 싸우거나 때때로 피스톨 등을 사용하였다.




윙드 후사르는 날개로 유명한데 이 날개의 재료로 독수리 깃털이 선호 되었으나

여의치않으면 타조 깃털을 사용했다고한다.

왜 날개가 달려있는지 이를 설명하는 이론들이 있다.

타타르 인의 올가미를 사용한 공격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혹은 돌격시 날개에 달려있는 깃털들이 진동함에 따라 기묘한 소리를 내어 적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론이다.

허나 1970년대 리인액터들과 영화 제작자들

2001년 폴란드 역사가들의 실험 결과 이런 이론은 모두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아마 날개는 퍼레이드를 할 때 붙여놓고 전투 중에는 떼어냈을 것이라고 하기도한다.

날개를 달아줌으로 몸집을 더 크게 보이게 하여 심리적인 위압감을 주고

더불어 동물 가죽이나 랜스에 달린 홍백의 깃발들과 같은 적을 혼란 시키려는 수단이란 이론도 있어

여전히 논쟁이 계속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