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페인과 독일에서의 30년 전쟁

구름위 2013. 1. 2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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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

 

스페인 무적함대 복원도"해가 지지 않는 나라"이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치세의 영국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다.

 

세계도처에 식민지를가지고 있어서 어디를 가나 영국 깃발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다 3세기나 앞서 이미 이런 대명사로 통용되었던 나라가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무적함대 등으로 더 잘 알려진 스페인왕국이었다.

 

스페인에게 이런 영광의 대명사를 붙여준 것은 펠리페2세(Felipe II / 1527. 5 ~ 1598. 9),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Habsburg 家)의 혈통을 이은 그는 조상으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후 스페인을 일약 세계의 강국으로 이끌었는데,

 

아버지 카를 5세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데 반하여 그는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카를 5세가 네덜란드에 관심이 컸던 것에 반하여 그는 스페인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그의 화려한 절대왕정의 막이 올랐다.

 

합스부르크가의 위용에 걸맞게, 그는 스페인 왕(1556∼98)인 동시에, 아울러 포르투갈 왕(재위 1580∼98 / 펠리페 1세)을 겸했고, 다시 1554년영국 여왕 메리 1세와 정략으로 결혼하여 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종교적으로도 카톨릭으로 회귀시키고, 메리 여왕이 죽은 뒤에는 다시 프랑스 왕녀와 결혼하여(1559)프랑스 위그노전쟁에도 깊이 개입하는 등 당시 국제무대의 총아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베리아반도의 사정과 종교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은 이미 종교개혁 편(칼럼 43호 - 44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절대주의 시기 초반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그야말로 혜성처럼 사라진 두 나라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속사정을 좀 더 살펴보자.

 

스페인의 쇠퇴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첫째는 네덜란드가 독립(1581)하여 산업기반을 잃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영국과의 싸움에서 패배(1588)하여 무적함대의 위용이 사라지고 해상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카스티냐와 아라곤이라는 이질적인 두 나라가 정략결혼으로 통합은 되었지만 뿌리 깊은 문화적인 차이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고, 국내 산업의 부진,  지나친 이교도 박해와 이로 인한 인구의 감소, 일보다는 놀기를 좋하는 국민성 등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이 스페인에 머물러 산업자본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비성 물자를 구입하는 대금으로 지불되어 곧 바로 다른 지역(국가)으로 흘러 들어 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인도의 무굴제국이나 중국의 명나라에 까지 스페인 은화가 널리 유통될 정도였다. 그리고 카스티냐 주민에 비해서 아라곤은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얽히면서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고, 이교도에 대한 지나친 종교적 탄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산업 또한 부진하여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을 파견했을 때, 이미 재정상의 위기를 초래, 지불정지 명령을 내리자 이들 용병들은 약탈로 급료를 충당하기 위하여 당시 유럽의 최대도시 앙베르가 철저하게 약탈되고 파괴되기 까지 했었다.

 

인구감소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래도 종교적 이유를 첫째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구교 즉 카톨릭의 옹호자로서 무슬림 등 많은 이교도는 물론이고 신교도들 까지 가차없이 탄압하자, 비카톨릭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대거 외국으로 망명하여 스페인의 산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쇠퇴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적 취약성에 있었다. 인적 물적 자원, 즉 국민들의 근면성과 토지의 생산능력, 산업시설과 기술 등이 국가의 산업기반에 투입되지 못했고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貢物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신대륙으로부터 들여온 많은 재화들은 산업자본화 하여 확대재생산 되지 못하고, 왕실만 부자를 만들어 화려한 궁전도 세우고 외국 내정에 간섭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군대도 보냈을 뿐, 국민들은 가난했고, 그 가난은 부자였던 왕실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페인이라는 가난한 나라에서 국왕은 돈을 번 개인에 불과했다. 마치 달 동네에서 나는 부자는 되었으나 주위가 가난하다면 그부에 걸 맞는 생활을 유지하면서 이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스페인에서 생산되어 외국으로 수출하거나 국내 소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貢物은 이를 구입하는데 소비되었고 그 열매는 자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몫이 되었다.

 

이것은 세관의 수입, 국민들의 세금보다도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물량이 國富의 기본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스페인의 부실한 재정은 왕실이 무너지면 동시에 국가도 무너지는 도미노현상을 초래하여 17세기를 고비로 세계사의 전면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스페인은 그렇게 산업이 낙후된 나라였는가? 16세기 전반 더 정확히 말하면 1520년대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직물공업은 1550년대에는그 절정에 도달, 수도 톨레도에는 6천여개의 직물공장이 가동하고 있었고 품질 또한 우수하여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것이 인구의 감소와 때를 같이 하여 산업도 쇠퇴하였고 스페인도 쇠퇴하였다. 그러나 펠리폐 2세는 비록 신대륙으로 부터 공물에 의존한 번영이었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자리를 가장 먼저 차지 했고 그의 치하에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레타섬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가 그의 예술적 재능을 펼친 것도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가 나타난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Netherlands)

 

암스델담의 시가지. 네덜란드전국토의 13 %가 해발고도1 m 이하, 25 %가 해면보다 낮으며,

 

배수로·제방·풍차·양수장·수문 등의 전형적인 폴더(polder:네덜란드의 해안 간척지)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네덜란드는

 

 면적은 스위스와 비슷한 약 4만 2천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스위스의 2배 가까운 1천 5백만명,

 

스위스가 알프스의 산지에 위치하고 보수적이었다면 네덜란드는 북해 연안, 라인 강 하구삼각주에 해당하는 저 지대 해안에 자리잡고 있었고 매우 개방적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쪽으로 이동하면서 단연 활기를 띈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부대끼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해외에 발길을 돌리게 되었고,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하면서도 끈질기게 해외에 진출하여, 무장된 상선(上船)이 일본에 까지 왕래하고 그곳에 상관(商館)을 설치(1609)했다.

 

당시 일본의 에도(江戶) 막부는 천주교 전파가 물의를 일으키자, 서양인의 접근을 막았지만 나가사키의 히라도(平戶)에 데시마(出島)라는 인공 섬을 만들고,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밟고 들어오는 네덜란드 상선의 입국은 허용하였다. 이래서 일본에서는 1854년 개항 이전에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를 난학(蘭學)이라 한다.

 

일본을 왕래하다가 풍랑으로 제주도에 표착(漂着)된 벨트브레(1627)와 하멜(1653) 등도 모두 네덜란드 인들이다. 벨트브레 등 3명은 조선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영구히 돌아가지 못했고, 하멜 등 일행 36명은 1653년 8월 15일제주도에 표착, 근처의 어부들에게 구출되고,...여러가지 사정으로 조선의 전국을 유랑(억류)하다가 1666년 9월 5일, 작은 어선을 타고 탈출,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고국사람들을 만나 네덜란드로 돌아갔다(1668. 7)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쓴 책이 통칭 "하멜 표류기"라고부르는 네덜란드 선박 제주도 난파기(蘭船濟州道難破記/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Hollandois)와 그 부록으로 쓴 조선국기(朝鮮國記/Description du Royaume Coree)라는것이었고, 이것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되므로써, 은둔(隱遁)의 나라 조선이 서양에 소개된 첫 사례가 되었다.

 

네덜란드가 종교와 연계해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되기 까지 이야기는 역시 종교개혁 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지금도 마약(痲藥) 거래와 매매춘(賣買春)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이 나라의 개방성과그 실체적 역사배경을 잠깐 살펴 보기로 하자.

 

원래 네덜란드란 말은 홀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부프랑스의 일부가 해당되는 낮은(Nether) 땅(land), 혹은 바다보다 낮은 곳을 의미한다.

 

이곳은 일찍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 영국의 양모를 원료로 모직공업이 발달하고 많은 도시가 번영했다.

 

정치적으로도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들의 영향과 간섭으로 통일되어 있지 못하였고, 주권을 침해 당하는 사례가많았다.

 

이런 체험은 네덜란드의 각 지방과 도시에서 자주 독립(自主獨立)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자주 독립의 유지를 위해서는 주위의 다른 나라에 적당히 영합하거나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런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통째로 받게된 것은 15세기 말부터지만, 실상은 16세기 전반까지는 각 지방과 도시의 자치가 허용되고 있어서 착취에까지 이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등장한 후 사정이 달라졌다. 이래서 독립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홀란드를 중심으로 북부 7개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1581)

 

이래서 7개주가 합쳐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는데, 당시의 공화국(共和國)이란 군주국가에 반대되는 즉,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가 국민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지금과 같은 정체(政體)가 아니라 단지 "공공(公共)의 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공공의 이익이란 각기 다른 관습과 제도를 가진 7개의 나라(州)를 하나로 묶고, 공동의 이익을 도출한다는 것인데,...그렇다면 중요 현안을 놓고 한 날 한 시에 전국 일제히 국민투표라도 해서 종다수(從多數)로 공공의 이익을 결정했는가?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7개주 가운데 발언권이 가장 강한 홀란드주의 경우를 보면, 홀란드 주 안에는 다시 암스델담을 비롯한 18개의 자치도시가 균등하게 한표씩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밖의 소도시나 농촌은 이들 18개의 자치도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도시들은 자체적으로 의회(議會)를 구성하였으며, 다시 도시의 대표들이 주(州) 의회를 구성하고, 주의회에서는 1명씩을 파견하여 연방의회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연방의회에 참석자는 자기 주의 의사를 가감없이 전달하는 전령사와 같았다. 따라서 연방의회가 각주에 대해서 아무런 결정도 간섭도 할 수 없었다. 다시말하면, 정책결정의 주체는 상위조직인 연방의회가 아니라 하위조직인 지방의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대도시 중심의 정치체제는 대도시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뿐, 연방 전체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도시귀족들에 의해서 市長과 중요 관직이 독점되었고, 그들의 의사가 주의회에 반영되고 이것이 연방의회를 움직이는 체제 이런 것이 네덜란드의 연방공화국이었다.

 

그런데 도시 귀족이란 대체적으로 어업(漁業)과 해운(海運) 등 바다를 상대로 돈을 번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관심은 "상업(商業)과 해운(海運)의 자유"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를 간섭하는 어떤 중앙집권적인 권력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이런 것은 결국 무제한의 경쟁을 허용하고 그 경쟁을 통해서 공공의 이익을 도출하는 정치체제가 되었다.

 

암스델담의 유람선 선착장도시귀족들이 네덜란드연방의 중심세력이 였다면,

 

이와 병행되는 또 다른 중심세력으로 총독(Stadholder)이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총독은 제국주의 시절의 조선총독이나 속주에서 군림하던 고대로마의 총독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각주의 의회에 종속된 군사지휘관에 불과했다.

 

그런데 16세기 중엽, 오라녜家(Oranje : Orange家 라고도함) 출신 빌렘(Willem/1533 ~ 1584)이라는 자가 등장하여 총독이 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이 가문에서는 대대로 군사적 지도자 및 정치가를 배출하여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으로서 각주의 총독을 겸하게 되었다.

 

이를 즈음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군통솔권을 가진 오라녜가 출신 총독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고 급기야 외국에서는 이를 국가 원수(元首)로 간주하고 교섭상대로 연방총독을 지명하게 되었다. 그라나 총독이란 주의회로부터 위임받은 군사지휘권은 있었지만 각 주를 대표하는 외교권은 없었다. 그 외교권은 연방 7개주가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주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도시 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의회에 종속되어 있는 총독이 의회 위에 군림하고 국가원수로 대접받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래서 의회를 중심한 도시세력과 실질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총독 사이에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는데, 이런 것이 빌렘이 광신도의 칼을 맞고 암살(1584)된 후, 17세의 그의 어린 아들 마우리츠가 총독을 계승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가 도시공화국 연방이냐? 총독 1인 지배체제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를 시험하는 무대가 된 것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관한 문제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20년간 휴전하기로 양측이 합의(1609)한 시한이 임박하자,

 

도시 상인들에게 전쟁은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중심이 된 공화파에서는 계속 휴전을 주장하였고, 칼뱅파와 소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총독은 그가 거느린 군대가 전쟁을 해야만 그 권위를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전쟁 재개를 서둘렀다.

 

이런 양측의 대립은 군사력을 가진 총독 측에서 先手를 처, 반대파 지도자 4명을 체포하고, 각가지 죄목을 만들어 이들 중 우두머리(올덴바르네펠트)를 처형(1619. 5) 함으로서 총독의 승리로 일단 끝을 맺었다.

 

이로서 네덜란드는 총독에 의한 중앙집권을 실현, 삽시간에 국가의 성격을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제도로 연결되지는 못하였고, 다만 총독이 군사 외에 행정 및 외교의 권한을 장악하는 내면적인 개혁에 그쳤으나, 중앙집권의 경험이 없었던 나라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마우리츠의 뒤를 이어 그의 아우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독일의 30년 전쟁에 개입,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그의 아들 빌렘 2세(1626 ~ 1650) 때는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그의 장인이자 영국왕인 찰스 1세가 처형되었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영국의 혁명정부와 충돌, 국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위기에 처한 빌렘 2세는 국내에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이를 간섭하는 스페인과 영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천연두로 사망하였고(1650. 11) 그가 죽은 1주일 후에 태어난 빌렘 3세가 총독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르녜가에서 세습되던 총독은 당분간 공백기가 되었다.

 

이 기간 중 반대파에서는 세력을 회복하고, 각주는 빌렘 2세에게 빼앗겼던 권한을 모두 되 찾았다. 그리고 주에 따라서는 총독직이 폐지되고 군비 확장 계획도 취소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영국의 혁명정부(크롬웰 정권)에서 공공연히 네덜란드의 도시귀족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651년에 발표된 항해조례(Navigation Act)였는데, 그 내용은 영국의 貨物은 자국선박에 한정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이야 말로 바다를 생명 줄로 삼고 살아가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횡포였다.

 

네덜란드에서는 30세의 청년 얀 데 비트를 전쟁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과 전쟁을 일으킴에 영, 란 전쟁은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는 여러 가지면에서 전세가 매우 불리하였다.

 

전쟁을 책임지고 있었던 얀 덴 비트는 상대적으로 강세인 영국에 대해서 강화를 체결하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리한 영국의 강화조건을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는 오르녜가에서는 영구히 네덜란드 총독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조약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에 의해서 그는 타살되었고, 양국간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1665), 영국에서는 크롬웰의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며(1660),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입했다.

 

이에 네덜란드에서는 빌렘 2세의 유복자로 태어난 빌렘 3세를 총독으로 추대하고, 프랑스와 벅찬 싸움을 하였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독주하는 것을 싫어한 스페인과 독일 등의 지원을 받았고, 또 다른 영국 왕실 사정으로 빌렘3세는 영국 왕 제임스 2세의 왕녀 메리와 결혼하여 다시 영국의 지지도 얻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의 전횡이 심해지고 비국교도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자 영국의회에서는 빌헴 3세에게 영국왕위에 오를것을 권유하는 초대장(?)을 보내게 되었고 빌헴 3세는 고민 끝에 이를 수락, 영국으로 건너가 윌리엄 3세로, 그의 처 메리는 메리여왕으로 즉위하여 공동으로 영국왕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장인이자 메리여왕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제임스 2세는 영국에서 추방되었는데 이를 영국사에서는 명예혁명(1688)이라고 한다. 영국왕이 된 윌리엄 3세는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맹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이미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에 선두자리를 내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대략 이런 것이 초기 절대주의 시대에 나타난 유럽 각국의 사정들이다. 스페인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도 근대국가 진입에 실패하였으며, 네덜란드가 왕성한 해상활동으로 산업자본을 얻었음에도 역시 그 자리는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나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 최대의 영토와 인구를 가졌던 독일은 어떠했는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은 고사하고 수백 개의 작은 나라들로 더욱 분열되면서 절대왕정과는 인연이 멀어졌다.

 

다. 독일에서의 30년전쟁( The War of Thirty Years/ 三十年戰爭)

 

기독교세계의 최대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30년 전쟁(1618 ~48)은 4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구교 측 입장에서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 1기, 즉 전쟁의 발단은 독일의 남부 뵈멘(보헤미아)에서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1618) 황제 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반란의 주동자들은 철저히 보복을 당했다(1620)

 

제 2기는 이에 불안을 느낀 루터파의 신교국가인 덴마크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 받고 독일에 출정했으나(1625) 독일 황제군의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 밀려 뤼벡 조약을 맺고 소득 없이 전쟁에서 손을 뗐다(1629)

 

제 3기는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던 스웨덴의 국왕이 신교국가의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독일에 침입(1630), 일진 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스웨덴 국왕이 전사하고, 신교연합이 무너지면서 구교의 승리로 끝났다(1635)

 

제 4기는 구교국가이면서도 이해관계 때문에 배후에서 독일의 신교를 원조하고 있었던 프랑스가 스웨덴과 연합, 독일을 침입하자(1635) 독일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전쟁을 수행, 일진 일퇴를 반복하다가, 결국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 독일 내의 제후들이 참가하여 지루한 협상 끝에 휴전에 조인, 베스팔렌 조약(1648)으로 독일이 불리한 가운데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독일,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국토는 황폐 되었으며, 황제 권은 더욱 약하여 이 후 독일의 분열은 더욱 촉진 되었다. 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았고, 칼뱅 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확장하였다.

 

- 이런 내용을 좀더 상세하게 엮은 것이 아래 글이다.-

 

(1) 전쟁의 원인

 

30년 전쟁은 독일에서 신·구교간 종교적 갈등이 표출된 내전(內戰)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 각국이 종교를 빙자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 참전하면서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모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의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덩치만 컸을 뿐 내용상으로는 300 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군웅할거의 무대가 되었으며, 황제를 계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는 제국의 안위 보다는 자신들의 영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제후들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이런 가운데 루터가 던진 파문은,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로 독일 및 유럽 전체를 몰고 갔고, 급기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겨우 봉합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당시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서 독일 안에서 신·구교도 간 화해가 일단 성립되었으나, 신교측에서는 루터파만 참석했을 뿐 칼뱅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는 그 지배자의 영지(領地)에서 신봉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 선택은 오직 영주나 도시 당국자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일반인들은 지배자가 선택한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신교로 개종하면 성직은 박탈되고, 영지는 카톨릭 교회에 보류(保留)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것 또한 분쟁의 소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성립 되었지만, 百家爭鳴의 난세에서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체제가 50 여 년 간 겨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간의 눈치를 살피고,자가세력의 부식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측에서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종교재판과 금서목록의 작성을, 교황청의 직권으로 광범하게 실시하고, 로욜라의 예수회 같은 것을 앞세워 실지 回復을 위한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늦게 출발한 칼뱅파 역시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는 자신은 구교로 개종 하였으면서도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에 대해서는 신교측을 원조하였으며, 루터파를 신봉하고 있었던 덴마크와 스웨덴 역시 독일의 국내사정에 무관할 수는 없었다.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는 그의 늙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원조를 얻어 구교 측의 세력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제후나 성직자들의 개종, 결혼, 상속 등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협정을 적용해서 구교측의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런 황제와 구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측에서는 1609년 신교 연합(union)을 결성했고, 이에 맞서 구교측에서는 동맹(league)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 루터파, 칼뱅파로 3분되었던 독일은, 다시 신·구간의 연합과 동맹이라는 2대 세력으로 정리 되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할 만큼 사정은 더욱 복잡했다.

 

왜냐하면 제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타산적이었고, 루터파와 칼뱅파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으며, 신 구교측 모두가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충돌의 소지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타협으로 겨우 무마되다가 급기야 뵈멘(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 전쟁의 경과

 

프라하 구시가지의 광장과 틴 성당보헤미아(라.영 : Bohemia / 독: 뵈멘Bohmen / 현 체코)는 슬라브계 주민이 중심 세력권을 이루고독립되어 있었으나

 

독일의 식민정책에 따라 1198년 독일의 영방이 되었고,

 

1306년 에프르셰미슬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독일계 룩셈부르크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의 종교분쟁인 후스 전쟁(1419 ~ 1436)은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는 체코의 국민주의운동이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독일황제 루돌프 2세는 1609년 이곳 루터파의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구교도와 같은 권리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1617년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카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사정은 급변, 루돌프 2세가 만들었던 칙령, 즉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고 신교도를 탄압하고 구교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라하의 신교파 귀족 대표가 시민 1천명을 무장시켜 1618년 5월 23일 아침 왕성으로 몰려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귀족 대표는 2명의 국왕 고문과 서기 1명을 상대로 부당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대표들은 이들 세 사람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이들은 중상을 입었으나, 시민 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서 달아났다.

 

서전(緖戰)을 화려하게 장식한 뵈멘의 신교도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국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까지 진격하여 기세를 올렸다. 한편 1619년 황제가 죽고 그 뒤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잇게 되자, 뵈멘의 의회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5세에게는 칼뱅파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에 독일 신교측에서는 루터파가 이탈하였고, 그의 의부(義父)에 해당하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오히려 스페인과 같은 황실인 독일 황제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태도를 바꾸어 독일의 신교도 반란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5만의 황제군은 1620년 11월, 뵈멘에 침입, 프라하 근방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3만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하를 점령하였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은 구교측의 승리로 첫 막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신교도를 탄압하여, 반란의 지도자들은 잡히는 데로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자와 망명자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였고, 처형을 면한 자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뵈멘 영토의 3/4이 주인이 바뀌었고, 프라하 대학은 예수회교단으로 이관되었다. 또 하나 신교의 거점이자, 뵈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에 침입해서 여기에도 구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신교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은 구교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독일은 카톨릭의 땅으로 완전히 되돌아 갔을것이다. 그리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도 이루어져 다음 단계인 절대왕정에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완전한  패배에 이르자 이번에는 신교측의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찰스 왕자의 결혼을 주선했다가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 당한 국왕 제임스 1세가 평소에도 감정이 좋지 못했던 합스부르크가(家)에 반감을 가지고 신교파 국가들의 동맹을 계획하고 군사비의 제공을 약속하고 전쟁을 부추겼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30년 전쟁의 제 2 라운드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덴마크왕국,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1588∼1648)는, 그가 독일의 홀시타인의 영주라는 구실을 붙여서, 영국 및 네덜란드로 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 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황제군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Wenzel von Wallenstein / 1583. 9 ~1634. 2)과 틸리에게 패배하고, 양측은 뤼벡조약으로 화해 하였는데(1629), 덴마크왕은 홀시타인을 계속 영유하되 독일의 내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이렇게 덴마크와 화약(和約)을 맺자 오래간 만에 황제의 위광(威光)이 살아났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기 위해 다른 제후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復舊令을 발표하였다. 이 복구령은 "구교파의 제후들은 각자의 영내에서 신교도를 추방해도 좋다. 또 신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던 교회령은 구교측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서, 아우크스부르크화약 이전의 상태로 환원함을 의미한다.

 

복구령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각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루터파의 제후들은 큰 타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하였고, 칼뱅파가 탄압 당하는 것도 못마땅 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의 복구령이 단순한 카톨릭에 의한 제국의 재건(再建)이 아니고, 황제를 정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거(割據)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지키려는 구교파 제후들까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때 페르디난트 2세의 뜻대로 통일이 이루어 졌다면 독일은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뵈멘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까스로 잡을 번 했던 통일의 기회는 이번에도 제후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황제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면직(免職)을 요구했다. 이런 제후들의 요구를 황제가 순순히 받아들여 그는 면직되어 프라하로 돌아갔다.

 

이렇게 황제군을 승리로 이끈 발렌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뵈멘의 신교파 하급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일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그의 재산과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고국 뵈멘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몰수된 토지 등을 구입하여 다시 큰 돈을 모았으며, 덴마크왕의 침입이 있자, 용병을 구할 자금이 없는 황실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황제에게 "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면 제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치루곘습니다"라고 제안하자,...

 

다급한 상황에서 다른 여지가 없었던 황제는 이를 수락하였고, 발렌슈타인은 자기가 거느린 용병으로 전쟁을 치루면서 약탈로 더욱 재산을 모으고 군대도 10만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런 약탈 과정에서 많은 제후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도 점성술사로서 그의 성관에 머물 정도로 그의 세력은 대단했었다.

 

30년 전쟁의 제 3 라운드는 뤼벡 화의가 성립된 이듬해인 1630년 6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II / 1611∼32)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북방의 사자왕(Lion of the north)이라고도 불린 그가 인구 150만의 광막한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군비의 증강, 네덜란드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무기를 개량하고 자신이 솔선해서 새로운 무기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등으로 둘러 싸인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계획에 독일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 북상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덴마크가 패배한 직후 그는 직접 정예(精銳)를 이끌고 발트해 남안(南岸)에 위치한 포메른(Pommern)에 상륙,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 드린 후 30년 전쟁에 뛰어 들었다.

 

병사들은 성서를 휴대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두 번씩 예배를 드렸으며, 약탈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의 군대는 연전 연승, 갈수록 군대의 숫자도 불어났다. 틸리의 구교동맹 군이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고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고 시민 3만명이 학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의 신교파 제후들은 앞을 다투어 스웨덴 군에 가담했다.

 

1631년 여름 구스타브 아돌프의 정예군과 북부독일의 신교파 연합군은 라이프찌히 근처까지 남하해서 틸리의 황제군과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병대를 적절히 이용한 구스타브 군대는 승리를 이끌어 북부독일을 해방시켰고, 그의 군대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독일 황제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를 압박했고, 황제군의 장군 틸리를 전사케 했다.

 

다급해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2년 전에 그로부터 면직되어 프라하에서 제왕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로 은거 중인 발렌슈타인에게 사자를 세 번씩이나 보내어 그를 다시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전쟁의 균형은 구교측에 기울고, 구스타브의 군대는 지쳐 있었으며, 북부독일의 신교 연합군은 방자하였다. 양측이 뉘른베르크에서 맞 부닺치자, 구스타브는 발렌슈타인에게 화의를 요청, 그러나 이를 거절한 발렌슈타인은 신교파의 거점인 작센을 향해 진군했다.

 

이곳의 신교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뒤 따라간 구스타브군대는 1632년 11월 16일, 라이프찌히의 남서 쪽 뤼첸에서 격돌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시작된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는 왼쪽 팔과 등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국왕의 전사 소식은 스웨덴군을 분발시켜 해가 질 무렵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은 라이프찌히로 퇴각하였고, 황제군 전사자 6천, 스웨덴군4천, 총 1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전투는 끝났다. 스웨덴군이 구스타브의 시체를 찾아냈을 때는 병사들의 발에 짓밟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라이프찌히로 퇴각했던 발렌슈타인은 그 길로 프라하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제가 불렀으나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가 황제 자리를 찬탈하고자 하는 의혹이 있다고 의심한 황제는 다시 그를 파면시켰고, 결국 그는 프라하에서 암살되었다(1634) 이후 황제군의 주력은 스페인군으로 대체되었고 황제군과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을 공격했다.

 

1634년 9월, 스웨덴군의 최후의 거점인 늬르틀링겐(Nordlingen)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신교파가 이탈하기 시작하자, 작센 선제후는 황제측의 요구대로 1635년 프라하에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군의 지원으로 스웨덴군을 격파한 황제는 국내의 제후와 도시들에 대한 지배형식을 옛날 그것으로 환원시켜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이 프라하 조약에서는 신·구 양파 모두가 반발했다.

 

30년 전쟁의 제 4 라운드는 프랑스의 개입으로 막을 열었다. 프라하의 화의 직후인 1635년,  이번에는 막후에서 신교파를 지원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스페인에도  선전을 포고, 스웨덴과 연합전선을 폈다. 구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가 독일의 신교도를 돕기위해서 전쟁에 참가했다면, 종교 이전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군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아, 전쟁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가, 1637년 독일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가 카톨릭의 복귀와 독일통일의 꿈을 접은 체 사망하고, 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스페인의 쇠퇴, 그리고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모두가 평화를 외치자 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독일로서는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1641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50킬로미터나 상거(相距)한 베스트팔렌의 두 도시, 믠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독일 황제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상대로 각각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문제의 회의가 개막된 것은 1644년 봄, 참가자는 독일측에서 황제를 비롯한 66개의 영방 대표, 외국에서는 프랑스, 스웨덴,스페인, 네덜란드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대표들 수 백 명이 모여 협상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이 국제적 회의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의석배분에 따른 의전문제에서부터 의사 진행과 방법, 여기에 각국마다 다른사정과 이해관계가 얽히고,...회의는 지지부진한 가운데 술판이 벌어지고,...전투는계속되고, 전투의 상황에 따라 회의의 양상도 바뀐다.

 

1648년 봄, 30년 전쟁의 진원지 프라하가 스웨덴에게 점령되었고, 프랑스군은 독일 황제군과 스페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런 전세의 변화는 회의의 속도가 빨라져 그해 11월에 6년간 끌어오던 화의가 오스나브뤼크에서 조인되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3)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의 주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프랑스는 알자스 대부분과 메츠·베르 등을, 스웨덴은 서(西)포메라니아·브레멘 주교령(主敎領)등을, 브란덴부르크는 동(東)포메라니아를 얻고, 그 밖에 바이에른·작센 등도 약간의 영토를 획득하였고, 스위스·네덜란드는 독립을 승인 받았으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정식으로 승인되고, 칼뱅파에게도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으며, 독일의 제후(諸侯)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조약 체결권이 인정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신성로마제국에게는 사망증명서와 같은 것이었고, 제후들에게는 승리의 사령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용병들에 의한 약탈, 방화, 살육 등으로 국토는 황폐하였고,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도 이 전쟁의 소용도리에 휘말려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굶어 죽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것은 케플러 뿐만 아니었다. 당시 1천 6백만 독일 인구가 6백만명으로 줄었고, 국토의 4/5가 황폐화 되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는 지배자의 것일 뿐 여전히 일반에게는 지배자의 종교가 당연히 강요되었다.

 

더욱 분열된 독일에서 절대왕정에 합류한 것은 독일전체가 아니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의 영방국가 들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나폴레옹전쟁으로 다시 수모를 당한 독일에서는 급기야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이런 기운에 편승해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재상 비스마르크를 기용하여, 철혈정책으로군비를 강화하고,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1871년 1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군을격파하고 베사유 궁전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가짐으로서 대망의 통일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