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비잔틴 군대에 대해 정리

구름위 2013. 1. 2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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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군대에 대하여...!!

                    

서론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혹은 동로마 제국은 보통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395)부터 콘스탄티누스 11세(1453)의 치세까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제국을 의미한다. 1,000년에 걸친 오랜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롭지만, 제국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본다면 그 놀라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지리적 위치는 제국에게 번영과 함께 위기를 가져다준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흑해와 지중해, 나아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도시이며 비잔틴 제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주변국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계 무역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힘이 약화된다면, 콘스탄티노플 주위의 수많은 적들은 제국의 부를 노리는 야생동물들처럼 비잔틴 제국을 괴롭힐 것이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영토 때문에 제국은 항상 두 개 이상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으며 근처에서 위세를 떨치는 수많은 적들의 기세를 감당해 내야했다. 심지어 비잔틴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위기에 처했을 때나 이슬람의 군대에게 연패할 때조차도 제국은 쉽게 전력을 집중시키기 어려웠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산적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책을 사용하였다. ‘비잔틴’하면 연상되는 음침한 분위기의 음모와 외교적 술책, 배신과 매수가 이루어졌으며, 비잔틴은 주변의 강대한 적이 발호할 때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을 벌기도 하고, 때로는 적을 파멸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오랜 존속을 단지 외교적인 음모와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의 위대한 방어력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비잔틴 제국이 비록 일차적으로는 외교적 술책과 책략에 의존했더라도, 일단 군사력이 행사할 때가 되면 강력한 군대를 동원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국은 강력한 적들과 맞서 그들을 구축하기도 하고, 자주 군사력을 행사하여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기도 했으며 군사적 활동, 나아가 외교적인 영향력과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경이로운 장수에 효율적인 군사제도가 밑바탕이 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비잔틴 제국의 역사

 


 비록 이 글이 비잔틴의 군대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제국의 역사를 짚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봐도 좋겠지만, 본격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이 분리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395)이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과 함께 제국의 동쪽은 장남인 아르카디우스가, 서쪽은 유명한 닭대가리 황제 호노리우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훈족의 침입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흥기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뻗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의 치세로 잡을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희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앞세워 북아프리카를 공격하여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군대를 돌려 이탈리아에서 고트족을 몰아냈다. 일부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까지 세력을 펼쳤지만 지나친 확장 정책과 페스트의 엄습으로 인해 제국의 내적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나아가 고질적인 제국의 내부 분열은 제국의 역량을 갉아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리키우스 황제(582-602)의 치세에 제국은 페르시아에 대해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었지만, 이후 계속되는 분열로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등 총체적인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오스 황제(610-641)는 테마(군관구)제도를 시행하며-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최초로 테마를 구축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이 있다-내적 역량을 강화시켰고, 니네베의 격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내부 역량을 소모한 비잔틴 제국은 새로이 흥기한 이슬람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야르무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슬람의 공세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678년과 718년,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슬람 세력의 공세를 제지함으로써 다시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성상 분쟁으로 인한 내부적 분열을 극복한 비잔틴은 863년 Poson 전투에서 멜리테네 토후국의 에미르 우마르와 대군을 전멸시키며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고, 이슬람에 대한 공세는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963-969)와 요한네스 치미스케스(969-976)의 치세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다. 유럽 방면에서 불가르인에 대한 공세는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누스(976-1025)의 시대에 절정을 맞았으며 11세기 초에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권의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효율성을 위한 농민의 예속화와 장군-관료 사이의 분열은 제국의 군사적 근간을 무너트렸고, 그 결과는 1071년 만지케르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고유의 군사적 위대성은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비록 콤네누스 왕조의 황제들은 제국을 부활시켜 다시 강국으로 자리매김 했으나 군사적 근간이 무너진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제국은 사실상 치명타를 맞았으며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구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다시 제국의 위치를 재건했지만 이미 내적 역량이 소진된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1453년 영웅적인 투쟁을 끝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특성

 


 위의 역사 진행 과정에서 볼 수 있듯,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 한정된 물적, 인적 자원으로 그들보다 압도적인 동원력을 자랑하는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부분의 경우 두 개 이상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


 제국의 부유함은 항상 적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었기에 비잔틴 제국의 대전략은 대부분 방어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세적인 군사 전략도 적지 않았고, 이를 통해 큰 효과를 본 황제들도 많다. 그러나 전력의 분산과 수많은 적들, 그에 따른 막대한 전쟁 비용은 제국에게 수세적 역할을 강요하였다.


 결국 비잔틴은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으며 다행히 비잔틴 제국에게는 위대했던 로마 제국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발달된 군사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아엘리안(Aelian), 아리안(Arrian), 오나산드로스(Onasander), 아에네아스 탁티쿠스(Aeneas Tacticus)같은 고대 전략가들의 성과물을 연구해낸 결과로 비잔틴 제국은 우수한 군사적 지식을 끌어낼 수 있었으며, 육체적인 능력과 병력의 양, 때로는 심지어 질적 열세도 지적인 책략과 전술을 통해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성과물이 스트라테기콘, 탁티카와 같은 전술 서적이며, 비잔틴 제국은 이를 체계화하여 발전시켰다.


 특히 전술적인 부문에서 발달이 두드러졌고, 비잔틴 제국은 세련된 군사 운용을 익힐 수 있었다. 제국은 사실상 지중해 권에서는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제병합동을 실시한 국가였으며, 정규적인 군사 이론을 편찬한 국가였다. 비잔틴 제국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체계화시켜, 이 상황에 맞춰 알맞은 전술 사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결국 전황은 어떠한 범주의 상황으로 정의될 수 있었기에 비잔틴 제국의 군사 지휘관들은 그 범주에 맞는 대처법을 익히고 나면, 실전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라 추측했다. 물론 비잔틴의 병법은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역으로 격전 중의 순간적인 전황 변화를 전부 대처하기란 불가능했고 나아가 전략 전술이 탁상공론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의 관료들과 장군들의 해묵은 분쟁은 제국의 역량을 갉아먹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결코 이득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국의 세련된 전술과 잘 조직된 영토와 우수한 훈련과 편제, 군대 운용, 규율의 우세는 수많은 적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지켜 내었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잘 조직된 제국의 군대는 수적 우세하고 드높은 사기를 가진 적들과 싸워 격파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러한 특징은 비잔틴 군대의 우수성을 잘 말해주는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http://www.geocities.com/TimesSquare/Labyrinth/2398/bginfo/social/war.html


3. 비잔틴 군대의 편제와 병력

 



일반적으로 비잔틴 군대의 편제는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의 시대를 기초로 잡는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단위는 대대이다.


십인대-테카르키아이(dekarchiai)

 구성원 : 데카르코스(dekarchos-십인대장), 펜타르코스(pentarchos-오인대장), 테트라코스(tetrachos-사인대장), 오우라고스(ouraghos=file closer), 병사 6명.


날개-알라기온(allagion)

     지휘관-펜테콘타르카이(pentekontarchai)    

     정원은 64명.


대대-누메로스(numerus) 혹은 반돈(bandon),

     지휘관-대대장(tribune), 백작(komes). 후대로 가면 드룬가리오스(drungarios)

     부대 인원 : 보병의 경우 256, 기병 300.

                실제로는 일반적이면 200~400 사이에서 결정.


연대-모이라이(moirai) 혹은 드룬고이(dhoungoi)

     지휘관-모이라르카이(moirarchai),드룬가리(dhoungarii)

     부대 인원 : 평균치로는 대대 2개~5개

                 수치는 가변적이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2,000-3,000

사단-투르마이(turmai)나 메라이(merai)

     지휘관-Turmarch 혹은 공작

     부대 인원 : 모이라이 3개

                수치는 가변적이지만 6,000-7,000

군단-테마(theme) 

     지휘관-스트라테고스

     부대 인원-트루마이 2, 3개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경우 기병만 15,000에 달하지만 가장 작은 테마는 4,000명.

                      

후대로 가면서 테마의 병력은 줄어드는데 이는 니케포루스 포카스가 소아시아의 지주층 출신으로,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테마를 구성하는 자유농민이 몰락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치세에 황제는 지주를 견제하며 자유농민층을 지지하지만 결국 수도 귀족과 지방 장군들 사이의 갈등 와중에 자유농민층이 몰락하고, 테마 제도는 붕괴되고 만다.


7세기 말에 테마는 13개가 있었지만 10세기에 들어서는 더욱 늘어나며, 최전성기인 바실리우스 2세의 치세 하에서는 총 47개의 테마가 존재한다. 병력은 12만~15만 정도이다. 바실리우스 2세 당시 비잔틴 군대는 약 30만이나 되는데, 실제 비잔틴 제국에서 필요 없게 된 테마 병력을 감축하기 보다는 그대로 유지했으므로 실제 전투 병력은 이보다는 적을 것이다.


기록에 따른 동원 가능 병력. 기병으로 추측.

기록->

이븐 알 파키흐(Ibn al-Fakih)

902

코다마(khodama)- 930

아나톨리아

15,000

15,000

트라키아

10,000

6,000

칼디아

10,000

4,000

아르메니아

9,000

9,000

뷰켈라리온

8,000

8,000

옵시키온

6,000

6,000

파플라고니아

5,000

5,000

셀레우키아

-

5,000

마케도니아

5,000

-

트라키아

5,000

-

카파도키아

4,000

4,000

카르시아논

4,000

4,000

옵티마톤

4,000

4,000

합계

85,000

70,000


실제 동원할 수 있는 1급 기병의 수는 이보다 적어서 레오 6세에 따르면 하나의 테마는 최대한 정예 캐터프랙터 4,000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 밀리터리 발전사 - 비잔틴(600~1071) 이두선님 자료 (유일하게 허락 맡고 펌-_-;;...아니 하나 더 있던가;;)/ [Osprey] [Men-at-Arms 089] - Byzantine Armies 886-1118

 

                               4. 비잔틴 군대의 병종과 무장


 

비잔틴의 군대는 예전의 로마군의 특성을 이어받은바가 크다. 물론 보병 위주의 군대는 기병 위주로 전환되었고, 화살 공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여전히 주력은 중무장한 백병전 부대로 적에게 강력한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군대의 주력은 고대 로마의 군단병(Legion)에서 중무장한 캐터프랙터(Kataphractoi)로 전환되었다. 비록 보병의 중요성은 예전보다 감소했지만 제병 합동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지케르트 이전 제국 군대의 주력은 비잔틴 제국 출신의 시민과 귀족들로 구성된 부대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비록 용병의 수는 많더라도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테마 출신의 제국 군대는 황제를 지킨다는 긍지와 가족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쓸 수 있었으며, 우수한 군대를 양산해낼 수 있었다. 아래 소개할 병종들은 비잔틴 제국의 주요한 군대로, 제국은 이러한 병과를 적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여 효과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보 병


1) 스쿠타투스

 



비잔틴 제국은 고대 로마의 군단병을 계승하는 중보병 역시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쿠타투스로, 그 뜻은 큰 타원형 방패를 의미하는 스쿠토스, 즉 스쿠툼(scutum 고대 로마의 사각형 방패)에서 유래했다. 탁티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전체 중보병의 3/4는 스쿠타투스이고 나머지 1/4는 중무장 궁수들이다. 스쿠타투스들은 대부분 제국의 시민들이 복무했으며 강력한 밀집 대열을 짜고 적과 교전한다. 이들은 중세 시대에서 로마 군단병의 명실상부한 계승자로, 비록 군단병 같은 높은 사기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체계적인 훈련과 좋은 무기,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적과 싸울 수 있었다. 고대 로마 군단병은 사각 방패와 글라디우스(Gladius)로 단병접전을 벌였지만 스쿠타투스들은 스쿠툼이나 카이트 실드로 방어하며 콘탈리온 같은 장창이나 검으로 적과 싸운다.

2) 경보병-펠타스트(peltast)와 프실로스(psilos혹은 톡소타이 Toxotai)

 



 경보병인 톡소타이(프실로스)는 주로 궁수나 투창병들로 일반적으로는 스쿠타투스 뒤쪽에 대열을 짰다. 펠타스트들은 활보다는 투창과 창으로 무장했는데 스쿠타투스들보다는 경무장이며 9세기 이후에서야 나타난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펠타스트처럼 중보병과 경보병의 역할의 중간쯤 되는, 혹은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지케르트 이후 제국은 스쿠타투스를 양산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못했고, 대신 이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보이기는 해도, 경보병들은 이전부터 중요한 병사들이었다. 프실로스들은 주로 트레비존드 출신들로 그곳에서 무장하고 훈련받으며 소집되었다. 트레비존드 궁수들은 기병용보다 큰 합성궁을 쓰는 고도로 숙련된 궁수들이었지만, 주력부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보병과 중기병을 엄호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펠타스트의 경우 경보병과 중보병의 구분은 역할보다는 무장의 차이로 보이며, 이들도 중무장하면 언제든지 창을 들고 적을 저지할 수 있었다.



3)바랑기안 친위대

 




이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비잔틴 제국의 보병들로 황제를 보호하는 명예로운 용병들이다. 현대 서양인들에게도 익숙한 이들은 비잔틴 제국에서도 최정예 보병들이었다. 주로 노르웨이인, 덴마크인 같은 바이킹 출신과 앵글로-색슨족, 러시아인 같은 북구 인들이 복무했다. 이들은 황제의 친위대로 근무했으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을 견디지 못한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제대로 봉급을 받는 한 이들은 매우 충성스러운 군대였다. 그들이 거주했던 궁전이나 교회에는 룬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시초는 위대한 바실리우스 2세가 반란군들에 대항하여 키예프의 블라디미르에게 원조 받은 6,000명의 용병들이다. 바실리우스는 이들을 즉시 상설화했으며 황제들은 약삭빠른 그리스인들보다 이들이 훨씬 충성스럽다고 여겼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옛 로마 전통을 이어받은 강도 높은 훈련과 질 좋은 무기, 북구인 특유의 용맹성은 이들의 전투력을 드높여 주었지만, 1081년 두라초 전투에서 무모한 공격의 대가로 큰 타격을 입고 전멸한다. 이후 친위대는 예전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에는 용맹하게 싸웠다. 유명한 바이킹의 왕 하랄 하르드라다도 바랑기안 친위대 출신이었다. 물론, 이들의 충성스러운 이미지는 때로는 창작된 것일 수도 있으며, 이들이 황제에게 반항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반대로 이 북구인 출신 용병들이 황제에게 헌신하며 용맹을 발휘한 적도 많았다.



기 병


1)캐터프랙터(영어로는 Cataphracts, 라틴어로는Kataphraktoi)

 



비잔틴 제국의 기병들은 고대 로마의 레기온의 후손답게 중무장을 한 기병대를 바탕으로 강력한 충격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병, 특히 캐터프랙터에 대해 언급해둘 것은, 그 전술이 비단 충격 전술에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본디 캐터프랙터는 창기병과 궁기병, 양쪽 무장을 모두 갖추고 활약하는 병과였고, 이후 창기병과 궁기병이 분리된 뒤에도 두 병과가 함께 조합되어 작전을 펼친다.

캐터프랙터의 본래 형태는 로마 말기에 등장했던 중기병인 클리바나리(Clibanarii)이다. 용어상 혼선이 올 수 있기에 정리해 두자면, 본디 클리바나리는 “마갑이 없거나 앞쪽에만 입힌 기병”을 뜻하고, 캐터프랙터는 이란 고원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마갑을 입힌 기병”을 의미한다. 실제 사산조 페르시아에도 이런 분리가 적용되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반대로 캐터프랙터가 “마갑이 없는 기병”, 클리바노포로스가 “마갑이 있는 기병”을 의미한다.

군마의 경우도 비잔틴 정부는 아랍 종 군마를 교배시키고 전문적으로 훈련 시켰으며, 말이 부족할 때는 유목민들에게서 구입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캐터프랙터는 뛰어난 전술 수행 능력, 보병과 제병합동, 뛰어난 투지와 무장, 치밀한 훈련과 뛰어난 군마 같은 요인들을 통해 비잔틴 제국의 주력 병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수많은 전투에서 제국을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2)클리바노포로스

 

 

사실 비잔틴 제국의 유구한 역사 중에 클리바노포로스가 활약한 시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시기는 제국의 위세가 최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와 일치하며, 오래 전, 마갑을 입힌 캐터프랙터의 모습으로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클리바노포로스는 고대 로마 말기에도 존재했지만-그 때는 캐터프랙터로써-, 다시 나타난 것은 시간이 흐른 뒤,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재위 963-969)의 치세 하이다. 그 자신이 위대한 장군이기도 했던 니케포루스는 중앙군(타그마타 tagmata)에 마갑을 입힌 중장 기병을 편성했는데 이들이 클리바노포로스다.

클라바노포로스들은 쐐기꼴 대형을 이루에 전장에 나갔는데 첫 번째 열은 20명이고 다음 열은 24명, 28명 순으로 4명씩 등차수열로 증가했다. 마지막 열은(12열) 64명의 기병들이 대열을 짰다. 이로 추측할 수 있듯, 한 부대의 정원은 504명으로 이지만 실제로는 384명 부대가 더 많았다.(이 경우 10열로 짰다.) 맨 앞의 네 열을 검과 장창으로 무장했다. 또한 이들은 보병과 함께 작전을 펼치는데, 보병은 창기병보다는 경장으로 활로 무장했다. 만약 300명의 창기병이 있었다면 80명의 궁수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500명의 창기병이 있었다면 150명의 궁수들이 동행했을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속도로 적을 돌파하기 보다는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적에게 충격을 주어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리바노포로스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전통적인 비잔틴 군사 제도가 붕괴되고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3)경기병

 


비잔틴 제국의 경기병은 비잔틴 인들로 구성된 트라페지토스(Trapezitos)와 용병 궁기병으로 구분된다. 트리페지토스의 경우는 궁기병, 창, 혹은 투창 기병으로 활동 했지만, 후기로 가며 비잔틴의 궁수 전력이 약화되면서 궁기병은 외부 용병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제국은 바랑기안 친위대를 제외하고는 용병들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최소한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까지는 지나치게 용병에 의존하지 않았다.

때로는 노르만계 중기병들도 용병으로 참가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만지케르트 이후에 더더욱 두드러진다.


5. 타그마타

 


타그마타는 사실상 중앙군에 해당하는 정예 부대로, 네 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다.


스콜라에(scholae)는 도메스티코스(domestikos)의 지휘를 받았는데 다른 타그마타의 연대들도-드룬가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던 아리스모스와 비글라(Vigla)를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부대장으로는 토포테레테스(topoteretes)가 있었다. 마카일 3세의 치세(847-867)동안 스콜라에의 지휘관은 스트라테고스나 아나톨리콘 테마의 ‘장군’을 제외한 모든 부대보다 높은 지위를 지녔고 10세기에 들어 황제의 부재 시에는 이들이 최고 지휘권을 맡았다. 미래의 황제가 되는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도 1078년에 스콜라에의 지휘를 맡았는데, 그가 지휘했던 스콜라에는 예전의 그것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드(Alexiad)'에 따르면 프랑크인 용병이 그 연대에 포함되어 있었다.



 스콜라에에 다음가는 타그마타 연대는 익스쿠비티로 본디 레오 1세(457-474)의 치세에 만들어졌다. 이 때 이들은 코메스의 지휘를 받았는데 8세기에 들어서는 도메스티코스(domestikos)가 이들의 지휘권을 맡았다. 후자는 늦어도 899년 이후에는 서방 테마의 최고 지휘를 가지게 되었다. 연대의 숫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773년의 어떤 기록에 따르면 최소한 18개의 대대-아마도 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대대의 인원은 스트라테기콘이나 탁티카에서 언급한대로 300명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익스쿠비티의 지휘관은 스크리보네스(skribones)라 불리는 군의관들도 책임져야 했다.




 세 번째 타그마타는 두 가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리스모스와 비글라로, 후자가 더 쉽게 문헌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연대는 최소한 559년, 혹은 더 오래 전부터 존속했었던 것 같은데 어떤 가설에 따르면 이들의 기원은 아르카디우스(395-408) 황제가 창설한 코미테스 아르카디아키(Comites Arcadiaci)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연대와는 다르게, 이들은 드룬가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소속 대대는 코메테스의 지휘를 받았다. 비글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밤이면 황제의 막사를 수호하는 임무도 맡았다. 그들은 또한 전쟁 포로를 감독할 책무도 있었다.



이카나토이(Ikanatoi)는 네 개의 타그마타 연대 중 가장 늦게 창설된 것으로 9세기에 니케포루스 1세(802-811)가 창설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코마다의 알-가르미에는 이들이 타그마타의 목록에서 빠져있고 대신 Fidaratiyin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들은 포에데라티(Foederati)임이 확실한데, 스트라테기콘이 저술되었을 당시에는 엘리트 부대였으며, 9세기, 그리고 늦으면 899년까지도 이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명칭은 이후에 헤타에레이아(Hetaereia)로 교체된다.


실제 병력은 여러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한 타그마에 1,500명의 병력이 있어 총 6,000명이 되던지, 혹은 하나의 타그마에 6,000명의 병력이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전쟁에 나설 때 최소한 8,200명의 기병을 통솔하는데-실제로는 이보다 많아서 10,000-12,000으로 추산-이 중 1,000명의 근위대(헤타에리아 바실리케 Hataeria Basilike)를 제외하면 7,200명의 기병이 남는다. 타그마타의 기병에 용병을 추가했으리라 추측된다.


근위대는 아무래도 보병과 기병을 포함한 용병 부대로 추측된다. 이들은 원래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각 대,중,소 헤타에레이아로 각각 따로 지휘관이 있었다. 그러나 소 근위대는 바실리우스 1세(867-886)의 치세 동안에 폐지되었다. 근위대의 지휘관은 헤타에레이아크스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접두사를 붙이는 다른 관료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지녔다. 타그마타 연대로서 몇몇 근위대는 확실히 수도에 주둔하였다.


이외에 용병들은 모두 “근위대”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이는 카자흐나 파르가노이라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레부니움 전투에서는 쿠만족 용병이 40,000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 용병으로 등록되는 것은 많은 특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위는 돈으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대 근위대에 등록하려면 적어도 16파운드, 소 근위대에는 10 파운드의 금이 필요했다. 카자흐나 파르가노이가 되려면 황금 7파운드가 필요했다. 

 

-출처 [Men-at-Arms 089] - Byzantine Armies 886-1118

 

니케포로스 시대의 비잔티움 군대(963~1042)

제국은 한정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고, 여차하면 자기네들 머릿수에 비해 훨씬 많은 머릿수를 풀어 놓을 수 있는 적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고로, 군대의 효율성은 제국이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놓치면 안되는 문제였다. 10세기의 비잔티움 군대는 구대륙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잘 무장하며, 그래도 가장 제대로 봉급을 받는 군대였다. 나아가 비잔티움의 전술 이론은 어떤 국가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바가 아니었다. 제국의 야전 전술은 다양했으며 매우 효과적이었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전통적으로 기병들에게 의존했다. 초기에 보병의 질은 의심스러웠으며, 임무도 요새 수비나 산악 지대의 전투 같은 한정된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950년 이후로 비잔티움의 공세가 두드러지면서 잘 훈련된 강력한 중무장 보병, 그리고 더더욱 중무장한 충격기병이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비잔티움 군대는 개혁을 시작했고 경기병과 경보병 뿐만 아니라 중기병의 전술도 크게 발전했다. 이런 중무장과 경무장한 군대의 조합은 시각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군대의 개요

 

이 두 그림은 "기본적인" 진형을 보여준다. 경보병의 지원을 받는 스쿠타토이들이 중앙에 배치되며, 기병은 양익에 자리잡는다. 클리바노포로스들은 한 부대로 중앙으로 배치되거나 같은 숫자로 나뉘어 양익에 배치된다. 일반적인 예시는 아니지만 루스인 동맹이나 바랑기안(형니이이임)들은 2선에 자리잡는다.

 

 

다음 그림은 경기병들의 지원을 받는 중무장한 클리바노포로스들이 한 부대를 이룬 것이다.

 

 

스쿠타토스와 궁병

 

950년 경에 이르러 보병들은 고대에 이어 또다시 군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공세적인 기병 전술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보병들은 야전에서도 공세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병들을 위한 "기동 방어 요새"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군대는 적어도 기병보다 2배 이상의 보병을 거느렸다. 대다수의 보병들은 호전적인, 예를 들자면 아르메니아인들 같은 사람들에게서 모집되었다.

전술적으로, 이 부대는 타원형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궁병들을 엄호한다. 경보병이나 메나벨라토이(무거운 투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기병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투창을 던지거나 혹은 창을 들어 저항한다.)들이 옆에 배치된다.

 

 1개 천인대의 구성

 

400명의 스쿠타토이

300명의 궁병

200명의 투창병

100명의 메나벨라토이

 

 

 

 

타그마타의 카발라리오이

 

 

콘스탄티노플, 혹은 그 인근에 주둔하는 정예 중앙군인 타그마타는-여러 이견이 있지만- 약 6,000명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군인 테마 역시 부유한 계층들로부터 기병들을 제공하지만 그 무장 수준은 재산 정도에 따라 크게 달랐다. 900년을 전후하여 각 테마는 약 4,000명에서 15,000명의 기병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는 감소한다.(그러나 레오 6세에 따르면, 15,000명의 기병을 제공할 수 있었던 아나톨리콘 테마에서도 패배후 재집결 할 수 있는 정예 기병, 즉 "카타프락토이"의 숫자는 4,000명이었다고 한다) 1025년에는 총 47개의 테마가 있었다. 테마의 보병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최대한 24,000명까지 편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부분은 경보병이었다.(상당수는 공격전에 활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카타프락토이

 

마갑을 씌운 이 초중무장한 "클리바노포로이"들은 950년을 전후해 나타나는 정예 공격부대이다. 사람과 말 모두 갑옷을 입히고 군대의 전방, 혹은 측면에 배치되며 사다리꼴 전투 대형을 짠다. 그들은 창과 메이스로 무장한다. 궁기병들이 대열 후방의 중앙에 배치되어 엄호한다. 이들이 선사하는 강력한 일격은 적의 대열을 붕괴시킬 것이며, 경무장한 기병들 역시 이들에게 약점을 노출할 것이다.

 

 

프로쿠르사토레스

 

프로쿠르사토레스는 경기병으로, 소규모 전위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창으로 무장했거나, 혹은 활을 들었다.이들은 클리바노포로이들과 함께 행동하며, 아마도 그들이 돌격하기 전 스커미시 작전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바랑기안 가드

 

911년 첫 스칸디나비아 출신 바이킹들이 제국에 복무한 이래로 이들의 중요성은 점차 커져왔다. 바랑기안 친위대는 6,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988년 바실레이오스 2세 이후로 황제의 개인 경호원 임무도 맡았다. 명백하게도, 이들은 비잔티움 고유의 군대보다 훨씬 믿을만 하다고 평가받았다(!) 1100년대에 이르러 친위대는 바랑고이인들보다는 앵글로-덴마크인이나 앵글로-색슨인들로 구성되었다. 예컨대 후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해롤드 및 정복왕 윌리엄과 한판 겨루는 하랄 하르드라다 역시 바랑기안 친위대 출신이다.

 

 

기타 동맹군-루스인, 노르만인, 아랍인

 

테마가 쇠퇴하면서 비잔티움 군대의 숫자가 줄어들자, 제국은 용병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으며 1050년대에 이르러 그 숫자는 매우 많아졌다.

 

안타깝게도, 반드시 군대에 포함되었을 투르크계 페체네그인들의 그림은 없다.

 

루스인들은 스킨디나비아 바이킹들과 슬라브인들의 혼혈이다. 그들은 때에 따라 제국의 강력한 동맹군이기도, 혹은 적수이기도 했다.

 

 

비잔티움 국내의 군대가 반란 및 국고의 문제로 약화됨에 따라 서구 용병들이 중요해졌다. 빠르면 1030년대 이래로 노르만인들이 제국에 고용되었다. 이 "라틴콘"들은 강력한 충격기병으로 창을 들고 메이스는 들지 않았으며 속보 대신 빠른 속도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들은 클리바노포로이들과는 달랐음에도 제국이 통제만 제대로 하는한, 제국의 전술에는 그들 못지 않게 효과적이었다.

 

 

함단조 아랍인 용병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나, 거의 믿지 못할 녀석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출처

http://folk.uio.no/arnsteio/DBXin6mm/byzantium/

 

 


6. 테마

 

 

1. 칼라브리아 2.랑고바르디아 3.달마티아 4. 시르미니움 5. 디라키움 6. 불가리아 7. 니코폴리스 8. 케팔로니아 9. 펠레폰네소스 10. 헬라스 11. 테살로니카 12. 스트리몬 13. 마케도니아 14. 파리스트리온 15. 트라키아 16. 아비도스 17. 키오스 18. 에게해 19. 크레타 20. 사모스 21. 키비라이오트 22.트라케시온 23. 옵시키온 24. 옵티마톤 25. 뷰켈라리온 26. 파플라고니아 27. 아나톨리아 28. 셀레우키아 29. 키프로스 30. 카파도키아 31. 킬리키아 32. 카르시아눔 33. 아르메니아 34. 세바스테아 35. 리칸도스 36. 안티오키아 37. 텔루크 38. 폴레이스 파레파티디아이(에우프라테스의 도시들) 39. 멜리테네 40. 콜로네이아 41. 메소포타미아 42. 타론 43. 이베리아 44. 칼디아 45. 테오도시오폴리스 46. 바스푸라칸 47.케르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 공국, 살레르노의 롬바르드 공국, 카푸아와 베네벤토, 알레포의 아미레이트는 공물을 바쳤고 반면에 베네치아와 나폴리, 아말피와 가에타는 명목상 비잔틴의 도시들이었다.


 

맨 처음 테마가 나타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지만, 헤라클레이오스의 치세에 테마, 혹은 그 원형이 보인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테마 조직은 강력한 토착군대가 발생하는 토대를 제공했고, 그 덕분에 제국은 늘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데다가 항시 충분한 인원만큼 이용할 수도 없는 ‘만족’ 용병들을 값비싸게 모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국경 군대의 병사들과 나란히, 무엇보다도 전투에 능한 소아시아 및 카프카스인들로 보충된 비잔티움 정예군들과 나란히, 비잔티움의 농민들도 물론 둔전을 받음으로써 군복무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중략)...비잔티움의 군대는 용병 체제 아래서는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고 또 그 때문에 이미 제국을 자주 큰 위험으로 몰고 가곤 했었으나, 이제 이렇듯 새로운 병력이 유입됨으로써 새롭고 보다 튼튼한 군사 및 행정 체제의 틀 속에서 강력한 증원을 이룰 수 있었다...(중략)...그 밖에도 둔전들을 만들었다는 것은 자유민 소토지 소유의 강화를 뜻하기도 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71-72p.


스트라테고스에 소속된 군사들은 둔전병으로 군관구에 소속된 농토를 가진 자영농들로 필요할 때면 군사작전에 나섰다. 이 소규모 토지는 소유자의 장남에게 물려졌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군역을 이어받았다. 많은 테마의 병사들은 하인을 부리고 있었는데 부유한 사람은 그 자신의 노예를 부릴 수도 있었고 더욱 부유한 지주들은 테마의 1급 기병을 형성했다. 레오 6세의 탁티카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높은 수입을 통해 기병들이 필요로 하는 비싸고 질 좋은 장비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교적 가난했는데 9세기 초에는 가난한 테마의 병사들이 조를 짜서 그들 중 한 명에게 무장을 제공하도록 하라는 공표도 시행되었다.(테마의 병사들의 무기, 갑옷, 그리고 말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군역에 종사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니케포루스 2세는 여기에 추가로 법령을 발표 하여 부유한 병사들이 가난한 병사들의 무장을 돕도록 했다. 비록 무장은 때때로 표준 이하의 것이었고 제복도 통일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방패, 창기, 그리고 투구의 깃장식이 제복을 대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의 중앙군은 같은 색깔로 제복을 맞춰 입었다. 무장한 기병으로서 그 무장을 갖추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열악해진 병사들은 그들 소유의 토지에서 퇴출되어 비정규군으로 전환되는데 문학적으로 ‘소를 끌고 다니는 자’로 불렸는데(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요새 수비병의 책무를 수행했다. 탈주자들도 이와 똑같은 운명이었다.


이븐 알 파키흐나 코다마에서 언급하고 있는 숫자는 비잔틴 군대의 주력이었던 기병들의 숫자이다. 레오의 탁티카에 따르면 각각의 테마는 상급 기병을 최대한 4,000명까지 동원할 수 있는데, 레오가 카탁프락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갑이 없거나 반만 마갑을 입힌 말에 탄 기병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로 추측해 볼 때 좀 더 질이 낮은 병사와 비교해 볼 때 잘 무장한 기병의 숫자는 좀 더 적었던 것 같다. 테마는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테마에 소속된 하급 군대를 활용하기 보다는 이웃의 상급 군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오는 또한 그 4,000명 이상 전장에 내보내는 일은 없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동방 테마는 전장에 30,000명의 기병을 내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야 말로 퇴각하여 재정비 할 때도 굳건히 대열을 유지할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테마에는 보병들도 있는데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훨씬 부족하다. 이들은 기병처럼 모두 땅을 분배받지는 않았고 대신 징병으로 신입을 보충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몇몇은 정예 상비군이었음에 틀림없다. 탁티카에 따르면 하나의 테마는 24,000명의 보병을 동원할 수 있는데 기병과 같이 상급과 하급으로 나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경보병이었다.



테마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스트라테고스와 그들의 상급 관료들은 소속 테마의 거대한 지주가 되어 그에게 소속된 군, 관의 권력을 활용해 반독립적인 세력이 되어버렸고, 둔전병은 사병화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중앙 정부는 이런 변화를 막기 위해 별다른 조취를 취할 수 없었다. 제국 정부는 이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이러한 지방의 귀족정을 용인하고 더 많은 권리를 인정해주기도 했고 심지어 대지주들의 세금도 면제해 주기도 했다. 그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여러 법령을 세워 해결하려 했음에도 테마의 소규모 자영농들이 조금씩 억죄어 대지주에게 땅을 바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그 것은 테마의 전투 병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982년에 작성된 페르시아 기록인 훈디드 알-아람에 따르면 동방의 테마는 단지 3,000명에서 6,000명의 병력밖에 동원할 수 없었고 970년의 비잔틴 기록에 따르면 기병은 3,000명을 넘지 못했다.



 이것은 황제였던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가 테마의 귀족 지주 태생이었기 때문으로 몇몇 테마의 군대는 감소했으며 스트라테고스는 이제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고 그들은 비잔틴 고유의 군대보다 훨씬 질이 낮았고, 그 결과 1067년에 이르면 군대는 대부분 마케도니아인(슬라브인), 불가르인, 카파도키아인(아마도 아르메니아인),우즈벡인, 프랑크인, 바랑인 그리고 잡다한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수의 비잔틴 본래의 군대는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빈곤하고 비탄에 찼으며 갑옷도 없다. 검과 다른 무기대신에 사냥용 창과 낫으로 무장했고 이제 말은 물론 다른 장비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황제도 출정한 적이 없으며 그 이유는 매우 불필요하고 무익한 것으로 그들의 급료와 관습을 유지가 그 기회를 전부 앗아가 버렸다’


무엇보다도 동부 테마의 최정예이던 아나톨리아의 군대가 비참하게 몰락해버렸다.


-출처 [Men-at-Arms 089] - Byzantine Armies 886-1118



 7. 비잔틴 제국의 기본 전략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되겠지만, 비잔틴 제국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수세적인 것이 많다. 이는 제국의 주위에 있던 수많은 적들과 그에 따른 가용 자원의 부족을 의미했다. 실제 만지케르트의 대패 이후 비잔틴 제국이 소아시아의 주요 지대를 상실했어도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까지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나아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즉 스트라테고스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테마 제도, 그리고 관료 집단과 장군의 계속 되는 갈등이 문제가 된다. 나아가 원정 하는데 소비되는 재정과 언제 뒤를 칠 지 알 수 없는 적들을 생각해 보면, 비잔틴 제국의 방어적 전략은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다.


테마 제도의 둔전병 특성상, 이들은 급료를 받는 정규군이었으므로 당의 부병이나 서양의 봉건 병력에 비하면 장기 원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자유농민으로 구성된 병력의 잦은 원정은 제국의 부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어서, 바실리우스 2세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적을 파멸시키고 2년 동안이나 세금을 면제시킨 후에도 국고에 1440만 노미스마라는 거금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비잔틴의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군사정책은 이해가 된다. 이 정책의 목표는 영토와 자원이 보존이었다. 비잔틴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중세적인 전쟁억지력, 즉 웬만하면 전쟁은 되도록 피하고 싸우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가능하면 적은 경비와 인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적이 쳐들어오면 비잔틴은 탄력적인 방어-공격을 시도한다. 우선 요새 같은 방어 시설 안에서 해당 테마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적을 저지하고 침략자들을 방어선(주로 산맥이나 강)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다음 둘 이상의 테마를 보내 적을 섬멸하는 방법을 썼다.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인 술책으로 전쟁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적들을 서로 이간시켜 교묘하게 대립을 조장하기도 하거나 동맹을 늘려 적을 견제하는 것, 매수 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특히 비잔틴 제국은 야만국(Office of Barbarian)을 통해 현재 상황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정확한 흐름과 상황을 제공할 수 있었다.



종교는 비록 최후로 동원하는 수단은 아니고, 이슬람이나 십자군의 열정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황제들은 종교를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 하였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와 싸우면서도 나타나는데, 종교를 통해 병사들을 크리스트교 세계와 12사도와 동급인 황제(바실레우스)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군대로 인식하고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었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 밀리터리 발전사 - 비잔틴(600~1071) 이두선님 자료



8. 비잔틴 제국의 전술


1) 일반적인 전술 


기병으로만 이뤄지는 군대는 비잔틴에게 별로 색다른 것이 아니었지만 두 병종들이 비슷한 비율로 전투를 치뤄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보병 내에서도 경장과 중장은 같은 숫자로 나뉘었다.


비잔틴의 전술은 공세나 방어-공세, 행동, 적을 향한 몇 번의 타격 등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비잔틴의 전술적 진형은 다섯 개의 주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중앙 프론트라인(혹은 전투열 fighting line), 둘째로는 중앙 세컨드라인, (혹은 보조열 support line) 세 번째는 예비대 겸 후방경호대(주로 크게 두개로 나뉘어 측면후방에 섰다), 네 번째는 측면경호대, 다섯 번째로는 선발대 및 다목적 부대가 그들이다. 기병과 보병이 같은 비율로 이루어져 있는 합동부대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스쿠타투스가 가운데 있고 경장보병이 측면에 서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셋은 항상 기병이었다. 만약 보병의 비율이 더 낮을 경우, 보병들은 중앙 세컨드라인에만 서거나 아니면 예비대 겸 후방경호대만으로 세워졌다.


2) 일반적인 대형

 


비잔틴 제국의 진정한 힘은 이제 보병에서 기병에게로 넘어갔다. 보병이 있다면 대부분은 궁수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쓰는 활은 커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쏘는 활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보여주었다. 이외에 여러가지 병법서들이 편찬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리우스 황제의 스트라테기콘,"소포클레스(현자)" 레오 6세의 탁티카, 니케포루스 포카스의 탁티카(보충)등이 있다.


오래 전 로마의 레기온처럼, 비잔틴의 보병들은 중앙에 자리잡고 양익은 기병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병들의 전열은 기병이 만든 '날개' 앞쪽에 배치된 적은 별로 없었고, 중앙이 물러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덕분에 비잔틴의 보병을 공격하는 적은 양익의 기병들에게 측면에 노출되는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

높은 언덕이나 좁은 협곡에서 기병들을 활용하기 힘들 때에는 궁병들이나 투창병같은 경보병들이 양 날개에, 중무장한 보병(스쿠타투스)들이 중앙에 자리잡았다. 이 경우에도 양익은 중앙보다 살짝 전진 배치되어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짰다.


만약 중앙이 공격받는 다면 스쿠타투스들이 방패와 창의 벽을 짜고 적을 저지하는 동안, 양익의 기병들이 적에게 화살비를 퍼부었다. 만약 적이 궁수들을 공격할 경우에 이들은 즉시 스쿠타투스의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훈련이 잘 된 보병들이 전투의 전부는 아니었고, 지휘관들은 기병을 통해 그날의 승부수를 띄웠다. 비잔틴의 세련된 전쟁 기술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경우는 바로 전술에 있다.


병법서들에 따르면 기병은 이러한 형태로 진형을 짜고 적과 교전한다.


이러한 형태는 20개의 작은 전투 단위(banda-대대), 즉 4,600명의 기병이 만든 전투 대열이다. 이보다 수가 많든 적든, 혹은 보병과 같이 있든 비잔틴의 전투 배치는 이와 유사한 대열로 형성되었다.

주력 군대는 바로 전투열(Fighting Line-이 경우에는 1,500명으로 되어 있다.)과 보조열(Supporing Line-1,300명)이다.


보조열은 필요한 경우 전투열이 후퇴하여 재정비할 수 있도록 약간 틈을 두고 있다.



두 날개는 각각 400명으로 되어 있는데(즉, 총 800명) 이들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이 교전에 들어갔을 때 후위와 측면을 파고들어 휩쓰는 역할을 맡았다.



측면 부대(Flank)의 구성인원은 하나에 200명, 즉 합쳐 400명이다. 양 쪽에서 대기하며 적의 병력이 아군의 전투열과 보조열을 포위하는 것을 방지한다. 때때로 오른쪽의 [측면 부대]는 기회를 노려 적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전사들은 오른손에 무기를 쥐고 있기 때문에, 적은 좌익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비잔틴 우익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들었다.



뒤에는 세 번째 열, 즉 예비대가 있었다. 예비대의 총원은 500명으로 중앙 부대의 양쪽 뒤에 살며시 물러나 있다가 측면이 노출될 상황이나 전투열이 보조열 뒤로 물러나는 상황, 적의 측면이 노출된 상황이면 과감하게 전투에 뛰어들었다.


장군은 약 100명으로 이뤄진 자신의 직속 부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지휘를 맡았다.


3) 보병 전술


비록 비잔틴의 보병 전술이 고도로 숙련된 것이기는 했어도, 전투의 주력은 역시 기병이 수행했다. 그러나 보병은 제국의 힘을 증명할 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비잔틴의 역사를 아우르는 수많은 전투는 궁기병의 지원을 받는 전면의 스쿠타투스들이 적에게 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다.


이러한 공격이 개시되는 동안, 중앙에 위치한, 쐐기꼴 대열을 취한 두 개의 천인대는 앞으로 나아가 적의 전열을 붕괴시킨다. 그 동안 두 천인대는 약간 물러선 날개 대열을 짜고 중앙을 엄호하며 적을 포위한다. 이러한 전술이 가장 잘 사용된 것은 967년 니케포루스 포카스 황제가 불가르인들과 전투할 때 이다.


돌격이 개시되면 좌측의 프실로스들이 화살을 날려 스쿠타투스들을 엄호한다. 보병들이 적의 반격에 부딪치면 클리바노포로스들이 적의 기병을 분쇄한다.(이 전술은 주로 강력한 중기병을 보유했던 프랑크, 롬바르드, 혹은 다른 게르만계 부족들과 싸울 때 사용된다.)


비잔틴 보병은 기병과 합동 작전을 하도록 훈련되었으며 적의 전열을 무너트려 기병 돌격을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반대로 기병이 만든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을 붕괴시켰다.


아주 효율적이지만 위험한 전략으로, 보병을 언덕 같은 고지대에 엉성하고 무질서하게 배치시키는 방법이 있다. 적이 공격해오면 클리바노포로스나 캐터프랙터같은 정예 기병은 보병을 보조하며 적의 측면을 포위한다.


보병은 때로는 기병 앞에 포진하기도 했다. 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면 보병들은 전열을 벌려 길을 열어주고, 그 사이에 기병은 적에게 돌격을 시도한다.


4) 기병 전술

 




비잔틴 기병이나 군마는 고도로 훈련받았으며 다양한 전술 대형을 취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캐터프랙터-캐터프랙터와 클리바노포로스-에서 초기의 비잔틴 기병들은 활과 창을 동시에 사용했으며 양쪽 모두에 숙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오 6세의 시대에 이르면 일반적으로 창기병과 궁기병은 분리되었으며, 그 비율도 3:2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가장 주된 전술 단위는 누메로스(혹은 반다)로 300~4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고대 로마의 코호르트와 비슷하게, 누메로스는 8~10열로 전열을 짰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말을 탄 팔랑크스와도 유사하다. 비잔틴 인들은 이 대열이 유연성이 없다는 것, 그리고 기병들에게 더더욱 귀찮을 것이란 것도 알아차렸지만 깊은 대열이 주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했다.


캐터프랙터는 보병과 마찬가지로 적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열로는 4개 대대가 보병 대열 주위를 감싼다. 양익에 하나의 대대가 배치되고, 오른쪽, 왼쪽 후방에도 기병 대대가 하나씩 배치된다. 이 기병대대들은 측면을 보호하고 포위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본대를 지원하고 후방 방어도 담당했다.


비잔틴 인들은 기병으로 정면 돌파를 노리기보다는 측면 공격과 포위 작전에 몰두했다. 이 작전들은 대부분 궁수부대의 엄호와 함께 개시되었다. 대대의 전열은 활을 쏘며 적의 전열을 무너트리고, 적이 충분히 약화되었을 때는 창을 들고 돌격을 개시한다. 후위는 활을 들고 따라오며 계속해서 사격한다. 이 효과적인 화살 세례와 충격 작전의 조합으로 비잔틴 기병들은 적의 대응도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적들이 창을 들고 비잔틴 기병에게 돌진한다면 캐터프랙터들은 달아나며 화살비를 퍼부을 것이고, 반대로 적이 화살을 쏘기 위해 분산된다면 비잔틴 기병은 창을 들고 약화된 적진을 돌파할 것이다. 화살 공격에 이은 창기병의 돌격 때문에 캐터프랙터들이 접근하여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기 전에 적들이 패주하는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캐터프랙터들이 강력한 적의 기병대와 마주친다면, 비잔틴 기병대는 퇴각하여 매복작전을 펼친다. 측면의 대대는 활을 들고 적에게 접근하다 적이 뛰어오면 말을 돌려 달아나며 파르티안 샷을 날릴 수 있었다. 만약 적 기병이 추격하지 않는다면 추격해 올 때까지 화살을 날리며 적을 괴롭힐 것이다. 그동안 후위에 있던 대대는 돌격 대열을 짜고 적의 약점이 노출될 때까지 기다린다. 만약 적이 추격하다 측면이 노출된다면 그들은 일제히 돌격에 나서 적진을 돌파하고 붕괴시킬 것이다. 적들은 새로이 나타난 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추격을 중단해야 된다. 그 때 달아나던 기병들이 적의 후방을 찌를거나 포위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창을 들고 최고 속도로 돌격을 시도한다. 이렇게 해서 적이 두 부대 사이에 끼어 약화되고 붕괴될 되면 비잔틴 기병은 역으로 추격을 시도한다. 그 때 매복해 있던 기병부대가 뛰쳐나와 노출된 적의 약점을 찔러 붕괴시키고 포위, 섬멸할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시도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의 기병대는 우세한 폼페이우스의 기병 부대를 유인했고, 카이사르가 신뢰하던 정예 여섯 대대, 즉 “네 번째 열”들이 뛰어나와 역으로 폼페이우스의 기병 부대를 격파했다. 유사하게 아랍인이나 몽골 기병대도 그들보다 강력하고 중무장한 적과 마주쳤을 때 이와 비슷한 전술을 사용하여 적을 물리쳤다.


비잔틴 기병이 할 수 없이 강력한 적 보병 대열을 향해 돌격을 시도해야 했을 때, 캐터프랙터들은 쐐기꼴 대열을 취했다. 캐터프랙터 대대는 약 400명의 인원이 8-10열의 전열을 짰다. 앞의 세열은 창과 활로, 남은 대열은 창과 방패를 들었다. 첫 열은 25, 다음은 30, 그 다음은 35, 나머지는 40, 50, 60식으로 10명 씩 늘어났다. 적에게 돌격을 시도하여 접근할 때, 적진의 약 100-200m정도에 이르면 앞의 세 개 열은 화살을 날려 적진에 틈을 만든다. 그 뒤 활을 버리고 창으로 바꿔든 뒤, 최대한의 속도로 후위 부대와 함께 적진을 돌파한다. 물론 적의 보병이 정예라면 돌격력이 상쇄되고 적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비잔틴의 보병들이 전진해와 적들과 교전하며 아군 기병들을 물러나게 한다. 이 때 기병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대열을 재조직한 뒤, 적과 교전에 나선다.


만약 반달족이나 아바르같은 강력한 중보병을 가진 적과 마주쳤을 때, 비잔틴 기병은 스쿠타투스들 뒤에서 대기한다. 만약 스쿠타투스들이 적과 교전하여 대열을 흔든다면 비잔틴 기병은 적을 향해 바람같이 돌진할 것이다.


5) 경기병 활용


만약 경기병이 필요할 때면, 비잔틴 제국은 따로 경보병을 소집하고, 이들에게 말을 타는 방법을 가르친다. 외국 용병들이 필요할 때 비잔틴 제국은 사르마티아인, 스키타이인, 카자흐인, 쿠만인들 같은 유목민들을 선호했다. 때로는 불가르인, 아바르인, 마자르인 등, 적들도 고용할 때가 있었다. 이외에 아르메니아인들도 훌륭한 경기병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경기병은 정찰, 스커미쉬 작전을 행하고 적의 정찰 병력이나 스커미쉬 병력에 대응 활용된다. 이들은 중무장한 캐터프랙터가 잡기 힘든 적의 경기병을 추격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활과 창을 동시에 이용했던 캐터프랙터와는 달리, 이들은 전문적인 궁수, 혹은 투석병이었다. 때로는 창이나 투창을 활용하는 용병도 있었지만, 이들은 활에 능숙하지 못했다. 용병의 무장은 무기와 갑옷, 장비 모두 그들 부족 출신 고유의 것이었으며 시기와 주위 상황에 따라 의존도가 변했다.


6) 적에 따른 대응


먼저 프랑크인과 롬바르드인은 기사같이 중무장한 기병에 의존하고, 직선적이지만 강력한 돌격을 행한다. 이 돌격은 적에게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이들과 정면 충돌하는 것은 삼가해라.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았고,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통솔하기도 쉽지 않으며, 제대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그들은 기병으로 구성된 정찰대도 제대로 보내지 않고, 밤에 숙영지를 요새화 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하다.

 

만약 비잔티움의 장군이 이들과 마주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밤에 야습을 가하는 것이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단 군대를 물려 달아나는 척 해라. 기사들이 돌격하도록 유도한 후, 군대를 되돌려 반격하라. 그들은 복병을 만나 크게 지거나 달아나게 될 것이다.



마자르나 페체네그족과 싸울 경우-비잔틴 인들에게 투르크족이라 불린-, 이들과 같이 활과 투창, 시미터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대항하라. 그들은 매복작전을 행하는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에 자주 정찰을 보내야 할 것이다.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은 산개하여 활을 쏘며 아군의 전열을 괴롭힐 것이다. 돌격은 그들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에만 실시하라.일반적으로 보병 궁수들은 전열에 배치했다. 그들의 큰 활은 기병이 쏘는 것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서 아군을 지켜낼 수 있다. 한번은 투르크족이 비잔틴 궁수들의 활에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반격하기 위해 자기들 활의 사정거리 안으로 파고들어 활을 쏘려 했을 때, 비잔틴 중기병들이 기습을 가해 이들을 깔아 뭉개버렸다.



세르비아인, 슬라브인, 크로아티아같은 슬라브족들은 여전히 강건한 보병들 위주로 군대를 꾸렸다. 그러나 발칸 반도의 험한 산지에서 살아온 자들은 궁수와 창병을 이용해 능숙한 매복 작전을 펼쳤다. 군대가 가파른 협곡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들이 위에서 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는 바람에 낭패 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들 험한 영토를 공격하는 일은 그다지 바람직하진 않지만, 필요하다면 매복 작전을 피하기 위해 자주 정찰대를 보내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만약 슬라브인 침략자들이 노략질 하러 내려왔을 때, 혹은 평지에서 적들과 만났을 때가 이 귀찮은 부족민들을 뭉개버릴 좋은 기회였다. 이들은 갑옷을 별로 입지 않았으며 원형 방패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방어 수단도 없었다. 그러므로 슬라브 보병은 비잔틴 중기병의 압도적인 공격에 쉽게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레오 6세는 모든 적중에서 사라센을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적이라 여겼다. 이전 세기에 이들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막강한 힘을 보여줬지만 레오 6세의 치세(886-912)에는 비잔틴 군대의 무기와 전술을 도입했다.

 

초기 타우루스 산맥의 산길에서 대패한 이후, 사라센 인들은 영속적인 정복지를 찾기보다 영토를 침입해서 분탕질 치고 나가는데 맛을 들였다. 만약 그들이 이 산길을 넘는다면, 이들의 기병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파고들어 땅을 노략질 할 것이었다.



이에 대한 비잔틴의 전술은 즉시 근처의 테마(군관구)에서 기병을 모아 사라센 군대를 요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로 불러 모은 군대는 적의 침략자에 대항하기엔 수가 적었으므로,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적의 분대를 기습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는 사이 비잔틴 군대는 소아시아의 군대를 집결시켜 침략자들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레오는 사라센 보병들은 무질서한 폭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에티오피아인 궁수들은 가볍게 무장했음에도 비잔틴 보병들과 일전을 벌일만한 정예였다고 한다.



또한 사라센의 기병들은 훌륭한 군대였으나 비잔틴의 훈련과 조직을 완전히 받아들여 적용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비잔틴의 중기병과 궁기병의 강력한 조합은 사라센의 경기병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라센의 기동력은 훌륭했으므로, 이들을 잡을 수 있을 때는 약탈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였다. [사라센의 저승사자]로 악명 높은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그의 병법서에 이들을 잡아 족칠 수 있는 방법을 서술했다. 밤이 되면 보병들을 동원해 세 방면으로 진격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길만 남겨놓는다. 사라센인들은 약탈품을 지키기보다 즉시 말을 타고 고향으로 줄행랑을 칠 것이다.



또 다른 작전으로는 적의 퇴로를 끊는 것이다. 비잔틴 보병들은 적의 진로를 막는 요새 안에서 수비대의 지원을 받으며 저항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퇴각하면 비잔틴의 기병은 협곡 안으로 그들을 몰아넣고 쫓아내 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적은 아무 소득 없이 좁은 협곡 안에 짓눌려 아군의 책략에 대항할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제 이들은 비잔틴 궁수들의 밥일 뿐이었다.



세 번째 전술은 역으로 사라센의 영토로 반격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라센 군대는 이 소식을 들으면 허둥지둥 돌아갈 것이다. 

 

 

9. 급료 지불

 


비잔틴 병사는 일반적으로 높은 급료를 받았다. 자료에 따르면 테마(지방군)은 한달에 1 혹은 1.5 노미스마(1/72파운드 금화)를 지급받았고, 연봉으로 계산하면 12에서 18 노미스마를 지급받았다.(파운드로 따지면 1/6-1/4파운드다.) 거기에 테마 소속병들은 또한 땅을 지급받았고, 947년 콘스탄티누스 7세의 포고에 따르면 적어도 금 2파운드(144노미스마)의 가치가 있는 땅이 제국 해군(그리고 아마도 보병에도)에게 지급되었고 4파운드(288노미스마)의 가치가 있는 땅이 테마 소속의 해군과 기병에게 지급되었고, 10세기 말에 이르면 기병에게 주어진 둔전의 가치는 864노미스마에 이르렀다. 그러나 9세기의 아랍 역사가에 따르면 테마 군사들은 오로지 3년에 한 번, 어떤 경우는 4,5 심하면 6년에 한 번 급료를 받는다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테마 소속병들은 네 개로 나뉘어 4년에 한 번씩 번갈아 급료를 받는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것이 “오래된 관습”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그가 실제론 언제 급료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는 테마병들은 3~6년마다 한 번씩 근무하며 정예병들은 상비군이었음을 의미한다. 또는 보조금은 훈련이나 소집 시기에 지급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병사들은 작전행동에 나섰을 때 보조금을 받았고 특별 상여금이나 전투의 전리품 분배, 상이병이 받는 지원금, 전사한 군인의 과부가 받는 보상금도 있었다.(9세기의 경우 금 5파운드였다.)



 레오 6세의 치세에 관료들이 받는 급료는 다음과 같다. 십인대장은 연봉으로 금 1파운드(72 노미스마), 오십인장은 144 노미스마, 대대장은 216 노미스마, 5등급의 스트라테고이 혹은 “제너럴”은 360 노미스마를 받았고 4등급의 스트라테고이(Kibyrrhaiots, 사모스섬, 에게해의 해군 대장)는 720 노미스마(10파운드), 3등급의 스트라테고이는 1440 노미스마(20파운드), 2등급은 2160 노미스마(30파운드), 최고위의 스트라테고이는 2880 노미스마(40파운드)를 받았다. 근위 대장(헤타레이아아크스), 모이라르카이(moirarchai)와 투르마르카이(Turmarchai)가 받은 급료는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이 섬기는 장군의 급료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동방의 군대가 받는 급료에 비해 서방의 테마는 좀 더 적은 급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에서 걷힌 세금은 먼저 이들에게 지급되었고 제국 국고로 바로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Men-at-Arms 089] - Byzantine Armies 886-1118


10. 해군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적어도 카르타고와 킬리키아 해적들과 이집트의 멸망 이후 로마의 해군력에 도전할만한 국가는 없었음이 사실이다. 고트와 북아프리카의 반달해적들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로마의 해군력은 비잔틴에게로 계속 이어졌다. 실제 비잔틴 해군은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하는데 재빠른 기동력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과 이슬람 군대의 반격에 알렉산드리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슬람 군대는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7세기 후반 이슬람의 해군력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비잔틴 해군을 격파하면서, 이를 의식한 비잔틴은 곧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레오 3세가 이끌었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볼 수 있듯,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두 차례 이슬람 해군을 격파한 후, 8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해상권은 다시 확립되었으며 그 뒤 많은 위협과 혼란이 있었지만 콤네누스 왕조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이 제국의 해군을 담당하기 전까지 해상권은 대체적으로 유지되었다.


비잔틴 해군의 본거지는 아나톨리아 남부해안에 있는 로마공화국 시절에 해적들의 본거지로도 유명했던 키비라이오트 테마였다. 배와 선원들은 주로 에게해의 섬들이나 아나톨리아의 해상지역에서 공급되었다. 키비라이오트는 비잔틴에 육군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 테마였지만 거의 백여 척의 배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이만 명의 선원들을 보유하는 등 인력으로만 치면 비잔틴 해군전력의 반을 차지한 테마였다.


해군은 작고 가벼우며 빠른 속도의 각각 두개의 돛대와 삼각돛을 가진 이단갤리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드로몬(dromon)이라 하는데 노는 한쪽에 30~40개 정도였다. 배에는 비상시 백병전을 치룰 수 있도록 훈련받은 격꾼들 외에 소수의 해병들도 타고 있었는데 이들을 합치면 한척에 200~300명이 탑승한 샘이다. 대형전함에는 회전하는 탑과 전쟁기구들을 탑재했다. 하지만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67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화염방사기의 원조 그리스의 불이었다. 제국은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이슬람의 해군들을 몰아 낼 수 있었으며, 해군이 싣고 오는 그리스의 불은 공성전에도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