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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제작한 쌍발 비행정‘제해호’-1957년

구름위 2013. 1. 1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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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경찰 시절의 수륙 양용 비행정 제해호

1964년 6월 28일.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가 느껴지던 이 날, 국내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사회면 톱 기사로서 해양 경찰대 소속 비행정 H 6호가 전날 2월 27일 오후 서남 해상에서 실종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비행정에는 조종사 정학용 경감, 부조종사 홍근덕 경위,
해양 경찰대 경비 과장 주사원 총경과 손호남 순경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 전날 오후 3시30분 제주도 서귀포에서 이륙한 비행정은
흑산도 근해에 나타난 중국 어선들을 정찰하고 귀로에 올랐는데 서귀포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비행정은 27일 5시 30분 귀환 예정이었다. 연료는 27일 7시 30분까지 비행 가능했으며 해상의 기상은 양호했지만 파고(波高)는 2미터가 넘었다.

일부 관계자들은 비행정은 파고가 1미터 정도에서만 해상 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설사 해상 불시착했다해도 그 운명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관측을 했었다.


                                      당시의 신문 보도

 

행방불명된 H-6라는 해경의 유일한 비행정은 본래 한국 해군에서 제작했으며 해군에서 비행하는 동안은 제해호[制海號]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력부터 소개한다.

제해호가 시험 비행한 해는 그로부터 7년 전인 1957년이었다. 당시 가난한 한국의 해군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항공과라는 최첨단 R&D 조직이 있었다.

해군이 특수 부서를 만들고 항공기 개발과 제작에 뛰어 들게 된 것은
조경연 중위라는 이인(異人)의 출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경연씨와 1954년에 제작 시험 비행한 SX-1 서해호


중위였던 그는 압록함 전기 사관으로 근무중인
1951년, 목포에 불시착 중 대파되어 폐기 처분 직전이던 미 공군 소속 T-6 택산 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차피 미군이 버릴 기체를 양도 받아서
개조하자고 상부에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조경연 중위는 일본 해군이 진해에 버리고 간 일본 해군 수상 정찰기의
부주[浮舟-플로트]와 다른 부속들을 이용해서 이 T-6를 수상 비행기로 개조했다.

개조작업은 잘 마무리되어 1951년 8월 15일 시험 비행에 성공시켰다.
개조 수상 비행기의 명칭은 해취호[海鷲號]였다.


                  해취호, 대파된 연습기 T 6를 수리해서 일본 해군의 영(0)식, 
              아니면 2식 수상기의 플로트를 결합한 것으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취역한 이 수상 비행기는 3개월 후 1951년 11월 21일 악천후를 무릅쓰고 해상 착수[着水]를 시도하다가 추락하고 두 조종사는 사망했다.

이후 조경연 중위의 재주에 주목한 당시 해군 참모 총장
정긍모 제독은 해군 과학연구소 제 1연구부 항공과를 설치하고 조경연 중위를 과장에 임명하여 항공기 제작에 매진하게 하였다.

공군도 아니고 해군에 항공기 개발 부서가 있었던 것을
보면 참 기발하고 기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장이 된 그는 1954년 연줄을 통해 공군에서 L-5 연락기 엔진을
양도 받아서 자체 설계한 한국 최초의 비행정을 제작했다.

공군이 제작한 경비행기에 부활호[復活號]라는 이름을 내려준
이 대통령은 이 단발 비행정을 서해호[誓海號]라고 명명했었다.

 

                                    공군이 제작한 부활호


그러나 이 단발 비행정은 소금기로부터 알루미늄을 보존하는
기술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심한 부식으로 9개월 뒤에 퇴역하고 말았다.


 

                                           서해호


항공과는 다음 비행기로 단발기[SX-2]를 만들었는데 이 비행기는
만족할 성능을 보이지 못해 시험 비행 단계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SX-2.



조경연 중위는 이 비행기를 일본 항공 잡지만 보고
힌트를 얻어 설계했다고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상당한 기술 축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축적 되어 가면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한 것이 6인승 쌍발 비행정 제해호다.

도대체 어떻게 이 고난도의 비행정 설계를 해냈고 제작했는지
경탄스럽기 짝이 없다.

쌍발기 설계 착수와 동시에 노력한 것은 비행정의 심장인
엔진의 획득이었다.

조경연 중위는 필요한 엔진을 구입하기 위해서 전방을
찾아 다니다가 춘천의 육군 항공대에서 추락하거나 손상된 연락기 L-19[나중에 O-1으로 개칭] 기체에서 분리해낸 중고 엔진 4기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육군 정찰기 L-19, ,나중에 O-1으로 개명


엔진만 제외하고 전 부품을 국산화한 제해호는
1957년 3월 30일 첫 시험 비행을 성공리에 마쳤다.

바닷물의 소금기에서 기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염처리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의 해군 항공 기술이 대단한 경지까지 올랐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비행정은 완성되었을 때 제해호[制海號]라는 명칭을
부여 받았었다.

내가 학생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낡은 신문에서 이 이름을 내린 분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확인이 가능하지가 않다.

공군이 만든 부활호나 전의 서해호도 이 분이 명명한 사실을 보면 제해호라는 이름도 한문 실력 높은 이승만 대통령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신문은 제해호의 시험 비행을 크게 보도해서
전후 고달픈 삶을 살아가던 국민들을 놀라게 했었다.


                                     해군 시절의 제해호


제해호의 취역과 함께 해군은 그해 7 월 해군 항공대를 신설하고 조경연 씨[중령 진급]를 초대 항공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해군은 예산이 확보된 뒤로 성공한 제해호의 후속기를 4기
쯤 더 제작해서 항공대를 제대로 편성하고자 했었다.

제해호는 정찰과 대공 훈련, 함포 사격 관측, 긴급 후송 등
다목적으로 크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 고문단이 택클을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미 군사 원조는 미국산 군용 장비만 사용하는 경우에만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제해호가 쓰는 연료까지도 트집을 잡았다.

트집의 목적은 경비 절감을 위해서 해군 항공대를 해체
시키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한심한 단견(短見)의 집대성적인
고문단의 행패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군에서 미 고문관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해군은
할 수없이 압력에 굴복하여 해군이 보유했던 제해호를 비롯한 L-19등 수기의 항공기를 61년 2월 23일 해양 경찰에 이양하고 항공기 없는 항공대는 이어서 63년 1월 자체적으로 해산했다.

이로서 불모지에서 싹 텄던 한국의 기적 같았던 항공기
제작
은 그 싹이 잘리고 모두 백지화되었다.

항공기 이관 후 그 운용에 필요한 상당수의 해군 항공대
인원이 경찰로 이동했다.

그러나 한국 항공사에 작지만 거대한 족적을
남긴 조경연 중령은 군을 떠났다.

해양 경찰대로 새로 시집을 간 제해호는
새 주인에 의해 바쁘게 활용되었다. 제해호는 해경이 보유한 단 한기의 비행정이었다.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남획을 일삼는 일본의 어선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해, 서해, 남해에 그은 긴 평화선이 있어서 침범하는 일본 어선들을 감시해야 했었고 서해에 자주 침범하는 중국 어선도 감시해야했다.

특히 중국 어선들은 모두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검문하려는 해경정은 물론 한국 어선에도 총격을 서슴치 않았었다.

전투함처럼 중무장하고 해적선 처럼 도발을 일삼는 중국 어선을
조기 발견하고 대처하기 위한 정찰에 제해호의 역할은 아주 컸다.

제해호는 그 작은 몸으로 한반도 주변의 넓은 바다를
종횡으로 누비며 국가에 큰 공헌을 했었다.

해군이 포술 훈련을 할 때는 약정에 따라
친정집을 찾아가 관측의 임무를 해주는 봉사도 했다.

이야기를 다시 제해호가 제시간에 귀환하지 못하고
실종이라는 비보를 국민들에게 전했던 1964년으로 3월로 되돌려 보자.

첫 보도 그 다음 다음 날인 1964년 3월 1일 신문들은 비행정의 묘연한 실종에 대해서 또 기사들을 실었다.

H-6 기는 중공 어선에 접근했다가 그들의 대공화기에 격추당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까지도 하며 그 행방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수색을 총 지휘할 치안국 장동식 경비과장이
제주도에 급파 되었다는 소식과 신영철 해경대장이 해경 경비함을 타고 당일로 긴급 출동했다는 소식, 그리고 출어한 어선에 무선으로 이 비행정의 행방을 찾아 보라는 긴급 통보가 갔다는 소식등을 전했다.

다행히 진도 근해에서 조업하던 어선의 어부들이 이 H-6 비행정을
보았다는 제보를 해왔다.

비행정이 비행하던 27일 다섯시 경, 동남쪽 제주도 방향으로
비행하는 동 비행정을 목격했다는 믿을만한 정보였다.

이 정보에 따라 해경은 비행정이 적어도 서해의 흑산도 근해를 벗어나
진도와 제주 사이 남해에서 실종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수색망을 좁혔다.
3월 4일 국내 신문들은 해경 비행정 탑승원들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제주항에 귀환한 사진도 크게 보여주었다.




중국 청도를 떠나 일본 고오베로 가던 5,000톤급 일본 화물선
고요마루가 72시간이나 표류하던 비행정을 발견하고 해경 대원들을 구조했다.

구조 무전에 급파된 해경 868정이
3월 2일 새벽 7시 제주도 남쪽 160마일 해상[일본 가고시마현 앞 해상]에서 네 명의 해경 인원을 모두 인수하여 3일 아침 7시 제주항에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온 조난자 4명들을 대신해서 해양 경찰 경비과장
주사원 총경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다는 사과로서 첫 귀환 소감을 밝혔다.

이어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들의 조난 경위를
들려주었다.

비행정이 결정적으로 조난하게 된 이유는 출발 당시
예상도 못했던 포그 뱅크(fog bank, 바다 안개)를 제주도 서북방에서 만났기 때문으로 제주도를 찾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한 시간이나 헤매면서 조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연료가 떨어지고 비행정은 해상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곧 밤이 왔고 캄캄한 절해(絶海;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속에서 풍랑에 몸을 맡긴
비행정에 목숨을 걸고 표류한지 한 시간 만에 지나가는 어선을 발견하고 불을 피워 구조 신호를 보냈으나 허탕이었다.

두 번째 배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새벽 한 시경.
네 사람은 제각기 옷을 벗어 태우며 결사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는데도 또 허탕이었으며 이날 아침 8시경과 밤 11시에도 세 번째와 네 번째 배를 보고 구조 신호를 올렸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3월 1일 아침 9시 30분 쯤 5천 톤 급의 화물선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또 횃불을 올렸으나 다시 허탕이었다.

이날 오후 2시 20분쯤 고요마루를 멀리서 발견하고
여섯 번째 구조 신호를 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고요마루의 기관사 다케나카 씨가 갑판에 나와 바람을 쐬다가 표류 중인 비행정을 발견하고 쌍안경으로 보니 조난자들이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고요마루는 선수를 돌려 이들을 구조했다.



                   

                   조난 해경 인원을 인계하고 멀어지는 고요마루, 5,000톤


주사원 총경은 이들이 다가오는 죽음과 벌인 투쟁과 함께 비행정의 아쉽기 짝이 없는 최후를 들려주었다.

탑승원 홍 경위와 손 순경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퍼
서 마시려고 했으나 해군 소령 출신 주 총경은“해수를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고 타이르기도 했으며, 29일에는 갈증을 참다 못해 제각기 오줌을 누어 제 오줌을 마시고 나서야 갈증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에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는
피로와 함께 졸음이었다. 죽음에의 초대를 거부하기 위해서 서로를 꼬집어 가며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하였다.

구조된 다음 날[3월 2일] 새벽 4시쯤 일본 선원들이 잠든 탑승원들을 깨우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예인중인 비행정에 물이 들어와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종사 정 경감이 발가벗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어 애기(愛機)를
보수하려했으나
우측 날개가 부러져서 기울어지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행정은 결국 기울어지며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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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높은 바다에서 장시간 예인 되면서 우측 날개의 부주[플로트]가 금속 피로로 약화되어 파손되고 따라서 날개도 수면에 기울어져 있었다.

예인되던 중 날개도 부러져
수면에 기운 기체가 침수되어 침몰했을 것이다. 두 개의 연약한 지지대로 날개에 장착 된 플로트는 이런 장시간 파도 가르기의 시련을 버티기가 힘들다.


        

           실종 소식과 함께 신문에 보도한 제해호 사진- 오른쪽으로 기운모습이  보인다.
                 거친 파도에 플로트가 부러지기 좋은 구조임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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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이기지 못한 승조원들은 해경정이 사라진 바다에 묵념으로서 애도했다. 이 때가 해경이 급파한 인수함과 만나기 30분전이었다.

제해호가 기체 고장이 아니라 악천후에 의한 연료 고갈로
조난했었고 탑승원들이 모두 구출된 뒤에 7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밤바다에서 조용히 마감한 것은 드라마같은 스토리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그 제해호가 오늘날 한국에 남겨준 의미를 분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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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발기 제해호가 첫 비행을 한 1957년 무렵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라디오도 없었고 전화기도 없었다.

프라스틱 제품이 한국에서 처음 제조 된 것이 이 무렵이었고 백설표 설탕이나 미원 같은 조미료가 겨우 국내 생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국 전쟁 때 미 공군이 활용한 SA-16 비행정은 제해호보다 훨씬 크다.
       제해호가
미군 비행정의 설계도를 가지고
복제 생산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냉장고니 뭐니 하는 것은 먼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였었다. 고성능 기계라야 자전거 정도나 있었을까?

이런 때에 순수 우리 기술로 쌍발 비행기를 제작했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 대단한 민족 발전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조 경연[1918-1991]이라는 이인적[異人的] 인재를
다시 안돌아 볼 수가 없다.

요새 유행하는 라이센스니 뭐니하는 호사스런 외국 기술
도움 없이 순전한 국산 수작업으로 이 비행정을 설계하고 제작해낸 그 분의 정체가 항상 궁금했었다.

                                          조경연씨
                               (해군 본부 김한솔 중위 제공)



나는 적어도 그 분이 일본에서 제대로 항공기 제작 교육을 받고
나카지마[육군 전투기, 하야부사 생산]나 미쓰비시[해군 제로 전투기 생산],또는 비행정 전문회사인 가와니시[1식 비행정 생산] 항공회사에서 일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런 전문 교육이나 경력이 없는 분이었다.
단지 타고난 재주꾼이고 항공 매니아였다.

고향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신안 부락이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 라디오도 만들었고 오토바이 엔진으로 전봇대 높이를 단시간이나마 날았던 비행기를 직접 제작했었다.

원래 부잣집 아들로서 해군에 들어오기 전에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제해호가 착수 하는 장면 - 구하기 힘든 사진이다
                              (해군 본부 김한솔 중위 제공)


6.25 후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 세에 해군에 들어갔다.
[기술 좋은 그에게 좌익들이 여러 수리 일을 맡겼는데 수복 후에 이 일이 트집이 될 가능성이 있자 군에 갔다는 증언이 있다.]

조경연 씨는 해군 항공대가 해산 할 무렵
해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1년 작고하였다.

해군이 더 이상의 항공대 제작과 운용을 못하게 되자
실망한 그는 군복을 벗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사업을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든다.

강진군의 신원면에는 아직도 그 분의 며느님이 살아 계시고
집에 조경연 씨가 남긴 조종복 등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선배의 업적을 기린 해군 항공대는 포항 항공대 사령부의
한 건물을 경연관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었던 조경연 씨, 그리고 한국 해군
항공과와 항공대의 인사들은 물론 제해호는 한국 국방사나 항공 산업사에서 크게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엉성한 창고에서 T-6를 개조하는 해군 항공반[항공과 설치 이전 가칭]요원들.
이들은 일본 해군 항공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문관들이었다. 선견지명이 있던 당시 해군에서 이들을 전원 고용했었다. 현재 KAI에서 국산 초음속 연습기 T-50을 제조하는 현대기술이 모두 적용 되는 조립 현장과 대조가 된다.


이들은 미래 한국이 국가 전략산업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는 항공기 생산의 선구자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항공 관련 전문 교육도 받지 않은 분들이 외부 기술 지원없이
그처럼
놀랄만한 일을 해냈다는 것은 한국 과학 인력 자원이 원석(原石)상태에서도 그 잠재력을 보였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만약 그 때 미 해군 고문단이 이 항공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속 운영하게 하고, 그 뒤 국가의 재정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 때 해군의 항공기 제작을 미래 투자적으로 적극 후원했더라면 오늘날 어떤 결과로 발전했을까?

가능성을 상상해볼 한 사례가 있다.
믿을 수없는 제해호가 탄생하기 2 년 전, 미군에서 불하된 미군 지프(jeep) 차체와 엔진에 드럼통을 두들겨 만들었다는‘시발’승용차가 출현했었다.

그 뒤 우여곡절은 겪었으나 이 시발 자동차 제작은
한국 자동차 공업의 초라했지만 소중한 출발이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세계 5위를 넘보는 거대 한국 자동차 산업의 첫 단추였었던 것이다.

시발 자동차와 오늘날 세계로 뻗는 한국 자동차 산업은
제해호와 이를 제작한 인재들이 계속 활동을 했더라면 대단히 많은 항공인재들이 배출 되었을 것이고, 이들이 이제 겨우 본격적인 시동을 거는 한국 항공 산업을 훨씬 전에 본 궤도에 올려놨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일본은 전시 대형 비행정을 제작하던 기술을 그대로 간직해서 해상 자위대용 대형 비행정을 제작했다. 비행정 제조 기술은 현재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비행정 제조업체 가와니시가 이름을 바꾼 신메이와 PS-1 비행정.


여기까지 제해호의 시작과 끝을 소개하는 간단한 첫 글을
소개했지만 한국 항공기의 원조 제해호는 내가 항상 개발과 운용에 참여하신 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그 자세한 이력을 국내 사회에 소개해보겠다는 염원을 지녀왔었던 대상이었다.

이 제해호에 대한 나의 특별한 관심은 그 배경이 있었다.

나는 아직 아장거리는 아기 시절 금강 하구에서
제해호를 처음 보았었다.

그때 제해호는 밀물 때 금강 어구에서 상류 쪽으로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상공으로 박차 올랐었다.

정말 장쾌한 장면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내 눈 바로 앞 상공으로 스쳐 지나가는 비행정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쌍발인 그 비행정은 폭음이 무척 컸었고 기체를
푸른색 아니면 녹색으로 도장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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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 조경연 씨의 오른 팔 역할을 하며 고생하였던 정회근 대위가 아직도 생존해 계셔서 자신이 직접 만든 제해호의 모형을 포항 해군 항공대에 기증했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꼭 한번 만나 뵈려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해군 항공대에 개발에 참여했던 정회근 대위가 제해호 모형을 직접 깎아 만든 모형을 기증하고 있다. 이 모형이 현재도 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