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상식/시사.상식

목민심서와호치민,그리고 박헌영

구름위 2013. 1. 14. 16:24
728x90

 

80년대인가?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이미 죽은 베트남의 국부(國父)적인 존재인 호치민이 근세 조선의 석학인 정약용 선생의 명저(名著) 목민심서(牧民心書)애독했다는 말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썼던 책으로 일선 지방 관리의 행정 매뉴얼과 윤리 지침서격의 책이다.

 

요즈음도 꾸준한 독자가 있는 스티디 셀러로써 여러 다산 연구가들이 다산 최고 수작(秀作)중의 하나로 꼽는 명저다그 때는 30만 명의 국군이 파월되어 싸웠던 치열한 월남전의 기억이 생생했을 때였다주월(駐越) 한국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공격했었던 베트콩들과 정규 월맹군들이 자기들 아비처럼 존경하는 공산당의 괴수 호치민(胡 志明)이 정약용 선생의 책을 애독했다니 도대체가 맞지 않은 소리로 들렸다.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

 

 

처음에는 목민심서가 어떻게 해서 월남어로 번역 되었을까하는 치졸한 상상을 하다가 그 쪽 방향으로 지식이 축적되면서 호치민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처럼 한문에 능했었고 그가 중국에 머무를 때 목민심서를 구입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실제로 호치민은 다량의 한시를 남길만큼 한문에 능했었다.)

 

동아시아 최고 걸작 의술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진작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목민심서도 중국에서 수입되어 팔릴 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관련된 토픽성 일화가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가끔씩 점멸하듯 떠올랐다.

 

호치민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한 정도가 아니라 평생 통치의 정신적 바이블로 삼아 머리맡에 놓고 수시로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또 죽고 나서 그가 즐겨 읽던 목민심서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말도 들었다. 호치민은 북쪽의 무식한 김일성처럼 개인 숭배 같은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릇이 크고 겸손하고 소박해 베트남 인민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런 자가 목민심서를 크게 평가했다고 하니 한 때는 우리와 피나게 싸운 적국의 우두머리인 그에게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남양주군과 베트남의 하노이 시가 이 목민심서를 인연으로 자매결연을 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를 의심하는 글이 뜨기 시작했다어느 연구심 많은 분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베트남까지 찾아가 호치민 기념관을 조사해보니 전시되었다는 목민심서도 보이지 않았고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봐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는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의심의 것이었다글쎄? 아직도 살아 계신 관계자 분이 많은 한국 전쟁사에서도 아는 사람을 눈뜨고 병신 만드는 거짓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겪어 본 나로서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손에 넣어서 읽게 된 한 책에서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한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로당의 괴수였다가, 후에 김일성에게 잔인하게 제거당한 박헌영임을 알게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20세기가 개화하는 1900, 양반 출신으로 미곡상이었던 유부남 아버지와 과부로서 주막집 주모였던 어머니 사이에 서자(庶子)로 태어난 헌영은 일생을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파란만장하게 살았으나 결국 1957년 미제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이상은 그에게 비참한 죽음과 가족의 불행한 파탄을 선물했을 따름이었다박헌영은 경성고보 (현 경기 고등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가, 이루츠크 파인 고려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을 살았지만 1926년 두 번째 체포 된 뒤에 형을 살다가 거짓으로 미친 행색을 해 가석방 되었다. 석방된 그는 1928년 국내 공산당 조직의 도움을 받아 부인인 주세죽(世竹)과 함께 두만강을 거쳐 모스크바로 밀출국했다.

 

--------------------------------------------------------

주세죽은 함흥 영생여고보 출신으로 허정숙, 고명자등과 함께 조선 공산주의 활동 초기 여성 지도자 3 총사 중 한 명이었다. 상해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 곳에서 박헌영과 만나 여운형의 주례로 결혼했다초기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3인의 여성들

 

 

 

당시 경성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자 지성인이었으나 모진 인간을 만나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못 생긴 허정숙이 김 일성의 총애를 받아 북한의 여러 요직을 다 거치고 천수를 다한 사실과 대조가 된다그녀는 박헌영이 귀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현재 4.19 도서관 앞의 양복점에서 점원 노릇까지 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헌영은 세 번 체포되어 10년 가까운 형을 살았다. 그리고 이것이 1차 체포 때였다.) 더 이야기 하겠지만 주세죽은 1953년 모스크바에서 늙고 병들어 객사(客死)하였.

---------------------------------------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 교육을 위해서 만든 최고 교육 기관인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을 했다. 박헌영은 이 학교에서 19291월에 입학하여 1931년 말까지 3 년간을 다녔다. (조선인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나중에 그의 아내 세죽을 빼앗아 간 김단야가 있다.)

 

그가 이곳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중에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다호치민은 상당한 국제파다. 그는 20세가 넘자 국제 여객선 주방 보조로 취직해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타고난 역마살이 있었고 요리 솜씨가 있어 밥 벌어먹을 걱정이 없었던 배경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했고, 그 후 영국으로 가 1919년까지 살았다. 그 뒤에 프랑스와 소련, 홍콩, 광동 등지에서 젊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호치민이 베트남 혁명에 매진하고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저우 생활 당시인 192636세 때 21세의 중국인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으로 호치민이 도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그녀는 호치민을 만나지 못한 채 1991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은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호치민 전기에 아주 기묘한 글이 나온다. 미국에서 살던 1911-13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를 만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이 당시 행적을 숨긴채 활동한 박헌영을 말하며 그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한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학교 졸업후 공산주의 운동을 본격화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본인의 모스크바 체류 사실만은 끝까지 숨길 정도로 행적을 숨긴 채 활동했다.)

 

부인 증설명(曾雪明)에게 보낸 호 치민의 한문 편지 - 대단한 달필이다. 이 정도이니 목민심서는 문제없이 읽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박헌영은 그에게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선물했다그가 전해 받은 목민심서는 우리말 번역판이 아니라 순수한 한자의 원본이었으리라고 본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교육자와 말단 관리를 지낸 그의 아비가 실력있는 유학자여서 호치민은 한학을 배워 열 살 무렵에 한시(漢詩)를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한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 책에 막역한 친분이 있는 친구를 일컫는 붕우[朋友] 라는 단어를 서명으로 써주었다

 

책에 붕우(朋友)라는 서명이 있었다는 세밀한 사실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호치민에게 책을 선사한 사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당사자인 박헌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그러면 한국에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또한 이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인연에 대한 일화가 왜 월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세계의 이목이 호치민에게 집중되고 있던 60년대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80년대에야 나타나서 지금까지 띄엄띄엄 세간에 알리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아직까지 이에 관한 자료를 구할 길이 없으니 추리를 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左)과 박헌영(右)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퇴색되고 한국과 공산주의와의 접촉이 시작되면서야 호치민과 목민심서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가능성있는 추리는 이렇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후에 김일성 밑에서 외무상을 지냈다.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자주 왕래했다.

 

남쪽을 침공하였던 김일성이 유엔군의 개입으로 북으로 패주할 때 모택동을 찾아가 지원을 애걸한 사람도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호치민 뿐만 아니라 모택동과도 인연이 있었다.

 

--------------------------------------------

박헌영과 모택동간의 인연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헌영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밀출국을 하던 때에 주세죽은 임신 6개월의 임신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삭이라서 함경선 열차에서 딸을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내생각에는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박헌영은 이 딸에게 비비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32년 박헌영의 졸업 후 부부는 상해로 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딸은 모스크바의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졌다. 스타소바 육아원은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 자녀를 위한 고급 육아원이었다.

   

 

그러나 1933년 박헌영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다. 그로서는 세 번째 체포였다홀로 남은 주세죽은 할 수없이 소련으로 돌아가 동료 공산주의 운동가 김단야와 눈이 맞아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김 비탈리라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 되어 총살되고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에서 조선어 교정원으로 일하던 주세죽은 중앙 아시아 크질오르다의 방직공장 개찰원(開札員)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그녀는 15년간 그 곳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김단야와 주세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곧 죽고 말았다.

 

그녀는 힘든 고생 끝에 박헌영이가 북한의 요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스타린에게 몇 번이나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젊은 내연의 처가 있던 박헌영은 그녀를 외면했다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진 비비안나는 틈을 내 크질오르다에서 찾아온 주세죽과는 몇 년에 한 번 씩은 만났지만 아버지 박헌영과는 해방 후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와 비비안나가 그가 외상으로 있던 북한으로 갔을 때에만 만났을 뿐이었.

 

비비안나는 비록 고아원에서 컸지만 소련 민속 무용의 천재로서 일찍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고급 육아원에는 모택동의 두 아들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죽은 큰아들 모안영과 조금 정신이 부실한 둘째 아들 모안청이었다. 두 사람은 모택동이 혁명을 한답시고 일찍 집을 나갔고 어머지 양개혜가 장개석군에 총살당하자 상해의 거리에서 고아처럼 살다가 공산당 조직에 의해서 구출되어 극비리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두 아들들은 전후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모택동(左)과 모안영(右) - 모택동과 만났을 때 박헌영은 두 사람의 자식이 얽힌 인연을 틀림없이 들먹였을 것으로 본다. 

 

스타소바 육아원에서 박헌영의 딸 비비안나와 모택동의 아들 안영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택동 아들 모안영은 한국 전쟁때 미군기의 네이팜탄에 죽었다

 

박헌영은 외상으로서 국제 활동중에 소련 아니면 중국에서 호치민과 상봉했거나 제 삼자를 통해서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여기에 그럴 가능성이 있을꺼라 예상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일성은 1950330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중.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오른쪽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주세죽이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무려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스타린을 세 번이나 만나 남한 침공 허락을 졸라댔다. 스타린의 허락을 받자 다시 두 사람은 513일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나 남한 침공의 동의를 받았다당시 호치민도 1950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같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과 스타린의 대 프랑스 항쟁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었다.

 

 

박헌영

 

그가 어느 정도 오래 모스크바에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박헌영과 만났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양국의 거물이 되어 상봉했을 때 호치민은 사실이건 아니건 인사치레라도 그가 선사한 목민심서를 잘 읽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이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사실의 시초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박헌영은 호치민과 접촉 후 이런 사실을 김일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라는데 공산주의자들도 예외일 리가 없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1949년 방문때이다.

   

박헌영과 목민심서의 일화를 포함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많은 북의 남로당 간부들은 거의 처형당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또 북에서 알만한 인간이 있다해도 김일성의 치하에서 감히 미제 간첩으로 몰려죽은 박헌영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탄압 당하자 북한에서 중국이나 소련으로 탈출해나간 인사중에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르고 한국의 기자 같은 사람들을 만난 기회에 이 사실을 털어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럴만한 사람들을 보면 남로당의 신진 간부로 활동하다가 월북해서 노동당 유럽국장까지 지냈지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탈출한 박갑동씨나 소련파였으나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강동 정치 학원장 박병률씨 등을 예상한다. 

 

박갑동 씨는 한국에 여러 번 왔었고, 국내 주요 신문에 자기의 회고록을 연재 하는 등 한국 언론과 관계가 깊었었다. 소련으로 망명했던 박병률 씨도 한국에 다녀간바 있다이런 연유로 탄생한 목민심서의 일화가 연줄을 타고 한국 사회에 한 역사 정보로써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추리다.

 

 

--------------------------------

박갑동 씨는 국내에서 1983년에 박헌영에 관한 책을 출판했었다. 이 책에는 목민심서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생존한 남로당원으로서 박헌영이 아끼는 후배였던 그가 목민심서의 일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

 

박헌영이 자기의 최후를 부르는 짓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을 부추겨서 남침을 주도한 것은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없는 민족 범죄 행위다.

 

------------------------------

무지한 김일성은 대남 침략을 생각했을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예상과 박헌영이 큰 소리를 친 20만 명의 지하 남로당원의 봉기를 기대하고 남한 붕괴는 서울만 점령하면 다 될 줄 알았다그래서 전쟁이 빠르면 3일 이내에 끝나리라고 기대했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김일성이 그가 월북 남로당을 사냥할 때 한 구실이 되었다. 두 한심한 인간들의 치졸한 욕심이 남북 민족에게 끔찍한 3년의 전란의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

 

김일성(좌)과 박헌영(우)

 

하지만 목민심서의 일화를 떠나서 박헌영을 보면 참 기구한 인생을 살다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헌영을 소개하는 김에 여기에 한마디 더 그의 가족과 그의 최후를 말해본다. 박헌영이 마지막 순간에 추구했던 것은 인민의 해방이니 노동자의 천하니하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아니었고, 목민심서가 가르치는 치민(治民)의 철학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동댕이 치고 떠나야 하는 처와 두 명의 자식들에 대한 근심과 애정이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자식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추구하다가 죽음으로 보답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었다첫 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 낳은 박비비안나라는 딸은 고아원에서 부모없이 불운하게 자라야했다. (그래도 천부적인 무용솜씨로 이 불행을 극복하고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인 남편과 잘 살고 있다.)

 

소련 유학후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어 조선에 돌아온 1933년으로 부터 6년간의 형무소살이를 하고 1939년에 출감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비밀 아지트의 위장생활을 위해서 조직에서 알선해주어 위장 동거하던 10대 산골처녀 정순년과 눈이 맞아 아들 박병삼을 낳았다.

 

그러나 정순년은 아기를 두고 아버지에게 끌려가 다시 시집을 가야했고 박헌영이 월북 후 버려진 아들은 박헌영의 어머니와 그의 이복형 박지영이 기르다가 다시 박헌영의 남로당 동지인 김삼룡과 김제술이 맡아 길렀다. 아들 박병삼은 김제술이 지리산 남부군 이현상을 만나려고 찾아간 화엄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원경 스님이 된 박병삼은 나중에 어머니를 찾아 만났고 세월이 지나자 다시 언론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를 찾아가 누나 박비비안나와 상봉하였다. 누나 비비안나가 동생인 그의 초청으로 한국에 한 번 왔을 때 박헌영의 딸이 왔다고 언론의 대단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었다.

 

원경 스님은 아직도 오산의 어느 절 주지스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박헌영의 윗 자녀는 그래도 이데올로기를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운명을 비교적 잘 극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그러나 박헌영에게는 이미 한국 언론에 잘 알려진 두 자녀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낳은 아들, 딸의 남매가 있었다박헌영이 첫째 주세죽과 중간의 여인 정순년외에 북한 외무상 때 김일성도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윤옥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박헌영과 윤옥

  

미모의 그녀는 남한에서부터 박헌영의 비서였다가 박헌영을 찾아 월북해서 역시 외무상인 그의 비서를 하다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되었지만 금슬이 좋아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알려지기는 박헌영은 윤옥과의 사이에 낳은 첫 딸에게는 나타샤라는 이름을 주었고 두 번째 아들에게는 세르게이라는 소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성 세상에서 불안해지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식들만은 김일성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기르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작명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런 박헌영에게 최후가 왔다. 한국전이 끝나가는 19523월 김 일성은 그와 남로당 일파를 몽땅 체포하여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단체 누명을 씌워주고 숙청을 개시했다.

 

이강국, 이승엽, 임화, 한설야, 설정식등 한 때 남한의 지성인으로 행세했었던 그들은 명분뿐인 재판을 받고 줄줄이 처형당했다. 그래도 소련과 중국의 참견으로 박헌영은 1957년까지 그런대로 감옥에서 실낱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처형일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일 늦은 1957년 설을 채택한다.)

 

19577월 연안파와 소련파가 주도한 8월 종파 사업에 놀라 발광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처형할 것을 소련 비밀경찰 출신 이며 내무상인 방학세에게 지시하였다1957719일 밤에 박헌영을 끌어내서 야산으로 데려가는 방학세에게 박 헌영은 일제나 김일성의 재판정에서 쏟아내던 독한 사자후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나약한 넋두리를 했다.

 

오늘 죽을 것은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 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애뜻한 애정은 마지막으로 그를 김일성 같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에게 매달리는 환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방학세는 못 들은 척하고 그의 머리에 두 발의 권총 실탄을 안겼다그리고 한반도를 소란스럽게 뒤흔들던 인간중의 하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품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아내 윤옥과 두 자녀의 소식은 어디에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