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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의 국군복장 위장 전술에 당한 경찰간부

구름위 2013. 1. 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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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9대 원칙에 경계의 원칙이 있다. 군이 6.25때 당했듯이 잘 지키지 않으면  자칫 국가 붕괴의 화를 초래할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이다. 접적시 아군 지역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중의 하나가 아군의 군복을 입은 적의 침투다.

 

1944년 발지 전투 때 미군 복장을 한 독일군의 모략부대에게 미군이 크게 애를  먹은 것은 아마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적군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하는 것은 아군, 적군 모두 함께 했었다. 1950년 8월 17일 낙동강 남쪽 고지에서 국군 복장을 하고 낙동강을 건너 침투하던 북한군에게 속아 미군 소대 31명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가 사살된 참사(생존자는 4명)는 북한군 위장 침투의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왜관 낙동강 근처에서 북한군이 잔인하게 사살한 미군 포로를 위해 군목이 기도하고 있다.

 

반대로 국군의 대부대가 전원 북한군으로 위장하고 적진에 침투해서 성과를 거둔 일도 있었다. 1951년 2월 후에 월남전 사령관이 되었던 채명신 중령이 지휘하는 600여명의 백골 병단은 전원 부산의 피복 공장에서 만든 북한군의 누비옷을 입고 공산군 무기로 무장하고 적진에 침투하여 두 달 간 적진을 휘젓고 나왔다,

 

이 침투 작전에서 백골 병단의 북한 군복 위장에 속은 북한군 다수가 섬멸당했다. 후방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신병 90여명을 인솔하고 가는 북한군 장교들을 북한 군복의 백골 병단 부대가 검문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모두 잡아 포로로 만들었다. 안타깝지만 유격 작전의 특성상 이들은 포로로 끌고 다닐 수 없어서 전원 사살했다.

 

적진 투입 2개월만에 살아돌아온 백골병단의 용사들-투입병력 600명중에 절반이나 전사했지만 대단한 성과를 올리고 귀환했다.

 

 

아래는 이용하씨가 쓴 ‘섬진강 별곡’에서 발췌한 글이다. 한국전 정전협정이 발효된 1945년 7월 27일 이후에도 남쪽 지리산 일대 공비들의 활동은 왕성했으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아직 생존해서 도주중에 있었다.

 

그 해 1951년 8월 12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지구에 위치하고 있는 서남 지구 전투 경찰대 제2연대 본부에 보고 된 바에 의하면 제1대대장 김동진 경감이 공비들의 습격을 받고 끌려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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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지구 전투 경찰대 사령부(약칭 서전사)는 준동하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전투 기동대와 지역 지서들을 통합 지휘하기 위해서 창설한 군대 체제의 전투 조직이다. 사령부 밑에 연대가 있었고 연대 아래에 대대와 중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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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즉시 연대 본부 직할 수색대장 김 용식 경사에게 그 진상을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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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차 일혁 총경은 얼마 전 TV에도 기획물이 소개된 일이 있었던, 전투 경찰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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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경사의 수색대는 차일혁 총경이 임실 경찰서장으로 재직시에 조직한 수색대원 31명을 그대로 데리고 온 부대로서 이들은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 직속 부대였었다. 이외에 서전사 직속 보아라 부대가 있었다. 보아라 부대란 지리산 지구 경찰 경찰전투 사령관이었던 신상묵 경무관이 창안한 역빨치산 부대로서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서남지구 전투 사령부로 개편되면서 사찰 유격대로 개편한 것이다. (신상묵 경무관은 신기남의원의 아버지며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이다.)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비들은 목숨만 살려준다면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군경부대는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고, 곧 무장을 하고 연고지인 각급 경찰서 지서등에 배치되어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실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격으로 같은 전투 대원으로서 적을 소탕하는데에 앞장섰다.

 

전투 경찰대 장비 - 수복후에는 무기가 없어서 지방 유지들에게서 성금을 거두어 미군들로 부터 M1총은 쌀 세가마니, 기관총은 쌀 열가마니, 로켓포는 30가마니를 주고 구입했었다.

 

이들은 3,40명 규모의 공비 전력자로서 산 생활에서 몸에 밴 은밀성, 인내성, 기동성을 발휘해 활동했으며, 작전시 공비들이 입었던 남루한 복색으로 위장하였고, 야생 동물과 같은 공비들의 후각을 피하기 위해 비누 치약등을 쓰지 않고 혹한의 산중에서 며칠씩 계속 잠복했다.

 

공비에서 전향했기에 누구보다도 공비들의 성질이나 활동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 이들이 공비 토벌에서 올린 성과는 대단하였다. 그랬기에 상황에 따라 공비로 변장하여 적의 아지트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작전 계획을 수집 보고하기도 하였으며, 내부 공비들에게는 회유책을 써 자수를 권하거나 일부는 유인하여 사살하는 등 공비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군경의 활동을 도왔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린다.

 

제2연대 수색대장 김용식 경사의 보고에 의하면 제1대대장 김동진 경감은 공비들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작전 명령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출 예정선을 벗어났다가 공비들의 속임수에 걸려 납치되어 생사를 가늠할 수가 없어 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었다.

 

사건 발생 전 상황은 이러했다. 용강에 제1 대대를 주둔시키고 쌍계사에 주둔하고 있는 제618 부대가 용강에 진출할 때까지 예정선을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는데 바로  제1 대대장 김동진 경감은 이를 어기고 무리하게 삼강 가까이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적들과 대치하고 있던 지서들은 거의 이런 보루라고 하는 방어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국군 남부 지구 경비 사령부 예하의 보병 제56연대와 제11경비 대대가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남부지구 경비 사령부 소속의 부대는 경찰 제2연대 제1대대가 배치되기 전 이곳에서 이영회 지도부 소속 행동대 (두목은 송관일)의 기습을 받아 육군 소령을 포함한 몇 명의 장교들과 사병들이 희생당하는 바람에 공비들은 군복을 빼앗아 입고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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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회와 송관일 두 명 모두 여순사건의 주모 부대인 국군 14연대 소속으로서 반란후 입산하여 공비부대의 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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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같은 지역으로 진출한 경찰 부대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국군 군복으로 변장한 송관일 일당은 정찰 나온 제1대대원들을 불러 작전 구역에 무단 침입했다고 호통을 치고는 바로 경찰 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켜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대담하게도 경찰대원 한 명을 시켜 대대장을 데려오게 하였다.

 

대대장 김동진 경감은 전라남도 백아산 전투경찰 대장 시절 백아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지휘관으로 공비토벌에서 항상 선봉을 지켰던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부하들이 군인들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있다는 보고를 받자 전후 사정 가리지 않고 5명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공비들은 이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대대장 김동진 경감을 앞장세운 뒤 경찰관들의 무기를 탈취하고 모두 형제봉 방면으로 압송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1대대원들은 대대장이 끌려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려 뒤쫓았지만 이미 허사였다. 경찰대원들은 대개가 나이가 많은 철도 경찰 출신과 훈련과 실전 경험이 미숙한 대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공비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서남지구 전투 경찰대가 발족하기 이전에는 경찰이 군의 통제하에 작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정보 교환이 원활하였으나 경찰이 군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부터 군과의 정보 교환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고 게다가 서로간에 경쟁 심리가 팽배하여 상호 협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실한 무기는 고사하고 공비들에게 끌려간 경찰 대원들의 생사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먼저 김명주 경위의 제618 부대와 김용식 경사의 수색대를 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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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경위는 북한군 출신으로 본명이 김창순이다. 경찰에 투신했지만 후에 저명한 북한 문제 전문가로 활약하였다. 제618부대란 약 180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인데, 대원들 전원이 북한군 포로 출신으로 휴전 직전인 6월18일 반공 포로로 석방된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강인한 부대로서 보아라 부대라는 별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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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방면으로 도주중인 적을 발견한 제618부대와 제2연대 수색대는 맹렬히 추격하여 형제봉 부근에서 교전하게되었고 이때, 제618부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하여 공비들에게 탈취 당했던 무기를 회수하고 대대장 김동진 경감과 5명의 경찰대원들의 시신을 찾아 귀대하였다.

 

그러나 회수한 김동진 경감의 시신은 칼로 잔인하게 난자당해 있었고, 다른 경찰관들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제618 부대의 맹공격에 공비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함께 수색에 참가한 수색대는 부상을 입고 거의 죽어가는 공비 1명을 생포하여 연행해왔다. 서전사에는 포로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김동진 경감의 시신을 보고 격앙된 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권총을 꺼내 포로를 사살해버렸다.

 

출동하는 전투 경찰대

 

이 사건으로 지금까지는 포로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영회 부대가 잔인하게 포로들을 학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는 이들의 최후가 멀지않음을 느끼고 발악 하는것으로 파악되었다.

 

피난의 고통 끝에 다시 수복된 서울로 돌아오는 수도 경찰들.

위의 비극적인 일화는 전투 경찰사에서도 상당히 주목받은 일화다. 공비들이 국군 군복을 입고 전투경찰들을 속이는 짓은 이미 1950년 1월12일 선보인적 있었다.  

 

경상남도 하동군 고진면 전도리의 하동 경찰서 신방 초소에 현역  군인을 가장한 무장 공비 7명이 신월리 주민 1명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이때 초소의 경찰대원들은 피아 식별을 못한채 망설였고, 국군을 가장한 이들은 자신을 현역 군인이라고 소개한 뒤 안심하고 있는 경비 경찰관들에게 수류탄 2발을 투척하였다. 이에 경찰관 1명, 한청대원 2명, 민간인 2명이 그자리에서 사망하였으며, 공비들은 소총 1정을 탈취하고 섬진강을 건너 전라남도 광양군의 백운산으로 도주하였다. 군복위장의 사건이었는데, 흥분한 경찰들이 그만 경계의 끈을 늦추었던것 같다.

 

사찰 유격대 -보아라 부대와 같은 역할을 했었다.

 

군복 위장 기습 사건은 위의 두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동진 경감의 살해로 군복 위장에 재미를 느낀 이 영회는 토벌 당하기 전  잔인한 위장 기습을 저지르게 된다. 1953년 11월23일 60여명의 이영회 부대는 그간 노획해서 모아둔 국군복을 전 대원이 착용하고 진주 의령간 국도에 매복해 있다가 민간 트럭을 강탈했다.

 

이영회 부대는 트럭을 그대로 타고 의령 경찰서를 기습했다. 경찰서 정문에서 하차한 공비들은 경찰서로 난입하면서 사격을 가해 의령서장 박영동 경감 및 여러 경찰관을 죽이고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경찰은 즉시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매복 작전을 실시해, 다음날 11월 27일 새벽 2시 지리산으로 입산하려던 이영회 일당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매복  기습에서 이영회와 9명의 공비들이 사살되었는데, 이영회는 살해한 의령서장의 점퍼와 오메가 시계를 포함한 강취한 시계만 10개나 차고 있었다. 이 사건을 끝으로 휴전 후에도 기승을 부리던 이영회 부대는 섬멸의 길을 가게 된다. 

  

6,70년대에 북한의 남한 도발이 극심했었고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국군 복장을 하고 침투했었다. 그 시절 전방의 국군은 신병들까지도 거동 수상자들에 대한 철저한 경계 교육을 받아서 비록 국군 군복 차림이라고해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에게는 가차없이 수하를 하거나, 검문을 했었기 때문에 국군 군복 차림을 하고도 간첩들은 식별이 어려운 야간 밖에 이동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보면 6.25때 국군복 위장 침투때의 비극적인 결과는 경계 의식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은 접적시 아군복 위장 침투조에 대한 경계 의식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전사로써 군경의 경계 교육을 위한 아주 좋은 자료라고 할 수가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접적 경계시에 군복을 입고, 접근하는 거동수상자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 준비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