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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구에즈 구출 작전과 미 해병 포로 학살 사건

구름위 2013. 1.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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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 된 뒤에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기세를 크게 올렸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곧 공산화 되었고 북한의 김일성도
북경으로 달려가서“전쟁이 나면 잃는 것은 [휴전선의] 철조망이요, 얻는 것은 통일이다." 하고 큰소리를 치며 남한을 협박했었다.

[그런데
이 생각없는 짓이 남한이 자주국방 강화를 추진하는 계기가되어 오늘날 한국의 방위산업을 일구게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기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 루즈 정권은 이미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미국을 크게 모욕하는 도발을 해왔다.
미 상선 마야구에즈 호를 납치 한 것이다. 

                              마야구에즈 호 - 마야구에즈는 미국령 푸에르토 리코의 도시 이름이다.
미국은 구출 작전을 전개해서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을 구출해냈지만 작전 중에 헬리콥터의 추락과 전투로 다수의 미 해병들이 전사했다.
그런데 미
군의 마지막 월남전 작전인 이 작전에 한 특징이 있었다.
구출은 성공했지만 정보 부족과 졸렬한 작전으로 세 명의 미 해병들이
크메르 루즈군의 포로가 된 것인데 크메르 루즈 군은 이들 포로 중 한 명은 쏴죽이고 두 명은 때려 죽이는 잔인한 짓을 하였다.
이들의 운명이 알려진 것은 캄보디아와 미국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고 왕래가 개시 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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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12일 오후 2시경 크메르의 포우로 와이 섬 근해를 항해하던 미국 컨테이너 상선 마야구에즈 호는 크메르의 쾌속정에게 나포되었다.
마야구에즈 호는 컨테이너들을 싣고 태국의 사타힙 항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항해 수역은 모든 선박들에게 자유 항해가 보장되는 국제 수역이었지만 집권한 크메르 루즈는 이 해역이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포우로 와이 섬과 그 위의 코탕 섬
크메르 루즈 군 쾌속정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접근하자 마야구에즈호가 속도를 줄였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달아나자 크메르 루즈는 RPG 탄 한 발을 마야구에즈호의 상공으로 스쳐 발사했다.

결국 선장 찰스 밀러는 SOS를 타전한 뒤에 배를 정지시켰고
일곱 명의 크메르 루즈 병사들이 승선했는데 그들의 리더이며 대대장인 사미엔은 지도의 한 지점으로 선수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곳은 포우로 와이 섬의 동쪽이었다.

마야구에즈는 오후 4시쯤 포우로 와이에 도착했고 20 여명의
크메르 루즈가 더 승선했다.

이곳에서 크메르 루즈의 리더 사미엔은 밀러 선장에게 캄보디아의
본토에 있는 항구인 레암으로 가도록 명령했지만 밀러 선장은 배의 레이다가 고장났고 그런 상태로 계속 항해를 하면 암초에 부딪혀 침몰 할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부렸다.

사미엔은 무전으로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는지 그 자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라고 했고, 마야구에즈는 4시 55분 닻을 내리고 정박할 차비를 하였다.

마야구에즈 호의 구조 요청 신호는 여러 곳에서 수신되었으며
그중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석유 채굴 회사가 이를 접수하고 즉시 미국 대사관에 알려주었다.

워싱턴에 보고된 마야구에즈 호 납치 사건은 백악관의
아침 브리핑 때 포드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으며, 즉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마야구에즈 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항공 정찰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워싱턴 당국은 회의 끝에 2주 전에 월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이 시국에 이런 모욕은 좌시할 수가 없으니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968년 동해에서 미 정보함 푸에블로 호가 납치되었을때
신속한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해 그 후 11개월이나 납치 상황이 지속된 것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다짐도 했다.
우선 시급한 일은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이 캄보디아 본토로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지만 미국은 캄보디아를 접수한 크메르 루즈 정권과 외교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항의조차 하기도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불러 중국에 크메르 루즈를
설득해서 마야구에즈호와 선원이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크메르 루즈 정권에 대해서는 직접 마야구에즈호의 석방을 요구하고 불응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프놈펜에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였다.

분주히 외교적 조치가 취해지는 가운데 필리핀의 큐비 갑(岬)에 있는
미 해군 기지와 태국의 우타파오 태국 해군 비행장에서 이륙한 해군 P-3 오라이온 기가 행방불명된 마야구에즈 호를 찾아 출격하였다.

                  P-3 오라이언(ORION) 기. 한국 해군도 보유한 해상 정찰기이다.
호주로 가던 미 항모 코랄 씨도 급거 항로를 변경해서 문제 해역으로 향하도록 명령받았다.


 

                                                                            항모 코랄 씨

필리핀 근해에서 항해 중이던 호위 구축함 해럴드 E. 홀트 함과 유도탄
구축함 헨리 윌슨 함도 마야구에즈 호가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실종된 마지막 위치를 향해 최고 속도로 직행했다. 
필리핀 수빅만에 있던 미 해병대에 비상이 걸린 것은
마야구에즈가 나포된 다음날인 5월 13일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포우로 와이 상공을 수색 비행 하던 P-3 오라이언 기의 탐지 레이다에
큰 해상 물체가 탐지되었고 오라이언 기는 조명탄을 투하했다. 
이에
크메르 루즈는 대공 사격으로 응수했고 연료가 다 해 가던 두 기의 오라이언 기들은 어쩔 수 없이 레이다에 탐지된 물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기지로 돌아와야 했다. 
 

                                                               호위 구축함 홀트 함

이어서 이륙한 두 기의 P-3 오라이언 기 중 한 기가 대공 사격을 무릅쓰고 포우로 와이 섬 상공에 저공으로 진입하여 마침내 아침 8시 16분에 마야구에즈 호를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오라이언 탐색기가 저공으로 마야구에즈 호의 상공을 지나 간 뒤에
크메르 루즈 대장 사메안은 밀러 선장에게 마야구에즈 호를 이동시키라고 요구했고 아침 8시 45분 마야구에즈 호는 쾌속정이 인도하는 대로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라이언 기도 마야구에즈 호가 포우로 와이를 출발한 이후 계속 뒤를 추격했다. 
마야구에즈 호의 위치가 확인 된 뒤에 미 해군 참모 총장 게이러 제독은
태국 낙혼 파놈 태국 공군 기지의 7공군 사령관 존 J 번스 중장에게 문제 해역으로 전투기를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13:00에 훈련 비행을 하다가 급파된 두 기의 F-111 전폭기가 현장에 도착하여
마야구에즈 호의 상공을 스치는 위협 비행을 수차 하였다. 

 

                                                                                F-111 전폭기


두 기는 비무장이었다. 위협 비행을 하던 F-111 기가 돌아가자 사메안은 밀러 선장에게 쾌속정을 따라 코탕 섬을 감돌아 들어가 해안에 닻을 내리도록 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북쪽 해안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이었다.

이어서
두 기의 F-4 팬텀들이 나타나더니 마야구에즈 호의 선수 앞 해면에 20mm 기관포탄을 퍼부었다. 위협 사격은 후속한 A-7 공격기에 의해서 계속되었고 다시 F-111 기가 추가로 나타나 선수와 선미 해면에 대한 사격을 했다.

그것은 더이상 배를 이동시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16;15에 크메르 루즈는 마야구에즈호의 선원들을 두 척의 원주민 어선에
태워 코탕 섬으로 더 가까이 이동시켰다.

 

 

                                            코 탕섬


그런데 현재 이 해역으로 달려오고 있는 코랄 씨나 홀트 그리고 윌슨함들은 5월 15일이나 도착할 예정이었고 그나마 세 척 모두 구출 작전에 투입할만한 병력은 없었다. 해병들이 승함하고 있는 행콕 함은 16일에야 도착할 예정이었고 오키나와는 5월 18일이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결국 필리핀의 제 3 상륙 사단의 79.9 기동단 중 D 중대가 마야구에즈를 구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번즈 장군은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 추가적인 병력 동원 방법을 찾았고,
동원이 결정된 것은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9 해병연대 2대대였다.
5월 14일 아침, 병력은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를 떠나 C 141 수송기를 타고 태국으로 이동했다.
이 대대는 1965년 최초로 월남에 파병 된 부대였지만
1975년 이때에는 소수의 장교와 부사관들만 전투 경험이 있을 뿐 대부분은 전장을 구경하지 못한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국 우타 파오 기지에는 미 공군 40 탐색 구조대 소속의 HH-53 JOLLY GREEN[졸리 그린] 9 기가 있었고, 낙혼 파놈 기지에는 10 기의 CH-53 KNIFE[나이프]기들이 있었다. 둘다 같은 탐색구조 헬기였지만 졸리 그린과 나이프 기들은 장비의 차이가 잇었다.


 

 

                                                     코 탕 섬 작전에  참여한 강습 헬기

HH-53 졸리 그린은 공중 급유가 가능했고 보조 윙 끝에 450갤런의 연료 탱크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이 연료 탱크에는 유사시 발화를 막는 화학 거품이 들어 있었다. 후방에는 방탄 판이 부착 된 미니 건이 설치 되어있었고 측면의 두 문에도 미니 건이 설치 되어 있었다. HH-53은 적지에 낙하한 조종사 구조 전문 헬기였다. 

이에비해 CH-53 기는 공중 급유가 되지 않았는데, 대신 650 갤런의 연료 탱크가 장착되어 있었고 미니 건도 좌우 도어에 두 문만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대형 헬리콥터들은 마야구에즈 호 구출 사건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막심한 피해도  보았었다.

5월 13일 번스와 그의 7 공군 간부들은 공군의 56 기지
경비단 병력으로 마야구에즈 호를 구출할 계힉을 세웠다.

5월 14일에 헬기를 이용해 75명의 병력을 마야구에즈 호의 컨테이너 박스 위에 착륙 강습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준비를 위해서 태국 내 미군 기지 2~3 곳에 있던 5 기의 HH-53 기와 7 기의 CH-53 기가 우타파오 기지로 집결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 날 21:30 KNIFE-13 이라는 헬기가 고장을 일으켜
탑승했던 18명의 기지 병력과 5명의 승무원들과 함께 해상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헬기 사고로 공군은 작전 개시를 일시 중단하고 해병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결국 작전의 결론은 미 해군 함정들이 도착한 뒤에 해병대가 코탕 섬 해안을 강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편 포드 대통령은 공군에게 코탕 섬에서
캄보디아 본토로 출발하는 모든 선박을 저지 또는 격침하라고 지시했다.

5월 14일 아침, 크메르 루즈는 마야구에즈 호의 
선원들을 태운 어선과 호위용 쾌속정 두 척을 코 탕 섬에서 약 30 마일 떨어져 있는 본토의 캄퐁 솜 항으로 출발시켰다. 마야구에즈 호는 코탕 섬 앞에 빈 배로 정박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항해 시작 얼마 후 두 기의 F-4 팬텀과 두 기의 A-7 공격기가 나타나서 이들 쾌속정 앞에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쾌속정이 말을 안 듣자 선체에 직접 사격을 가해 파손이 생겼는데 그제서야 쾌속정 중 한척은 다시 코탕 섬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AC-130H 건쉽이 합류하여 두 번째 쾌속정에게 사격을 가했고
다음에 A7 D 공격기가 20mm 포를 뿌려 격침시켰다.

 

 

                             AC-130 스펙터 건쉽


쾌속정 뒤에서 납치된 선원들을 싣고 따라오던 어선 위에는 최류탄을 투하하고 선수 앞의 바다 위에 기관포를 발사했다. 바다위에 떠 있던 쾌속정의 파편이 무수히 어선의 뱃전에 튀어들었다.
그때 조종사들은 어선 위 갑판에 총알 받이로 세워 둔 여러 명의
백인들을 발견했다. 마야구에즈 호의 선원들이 틀림없었다. 

조종사들은 어선의 키를 조준해서 박살을 낼 수 있다며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워싱턴은 납치 된 선원들의 생명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최류탄 등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의 쾌속정들은 모두 격침 시키도록 하였다.

반면 마야구에즈 호 선원들의 정확한 위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일부는 어선에 태워져 본토로 이송되고, 일부는 마야구에즈 호에 남아 있으며, 일부는 코탕 섬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해병들로 하여금 코탕 섬을 일시에 강습하는 방향으로 작전 지시를 내렸고 동시에 캄보디아의 주요 항만시설과 선박을 공습하기로 했다.
 
10:10. 미국 해군 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을 싣고 본토의 캄퐁 솜에 도착한 어선은 미군의 공습 가능성에 겁을 먹은 그 곳 경비 사령부에 의해서 쫓겨났고 어쩔수 없이 더 남쪽으로 내려와 롱삼 렘 섬에 닻을 내렸다.
 
그런데 공중에서 선회하며 어선을 지켜보던 미 해군 기들은 어선이 캄퐁 솜 항에 입항 한 뒤에 잠시 어선의 행방을 놓쳤고, 조종사들은 이 캄퐁 솜 섬이 어선의 마지막 기착지라고 보고하였다.

11시 29분경 미 해군은 캄퐁 솜 섬 앞 바다에서 크메르 루즈의 초계정 한 척을 격침하고 한 척을 대파 시켰다. 

5월 14일 오전 05:45, 필리핀에서 출발한 미 해병들이 태국의
우타파오에 도착하여 마야구에즈 호 공중 강습 출동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선원들을 태운 어선이 캄퐁 솜 항에 도착한 것으로 알게 된 해병들은 공중 강습 작전을 잠시 유보하였다.

14;00 경에는 오키나와의 해병 부대가 우타파오 공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5월 14일 오후 번스 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 코탕 섬과 마야구에즈 호에 대한 동시 공격을 감행하는 원래의 작전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이 계획은 5월 15일 해가 뜨기 직전에 한 해병 부대가
마야구에즈 호를 공격하여 선원들을 구출하고 다른 해병 부대는 마야구에즈 호가 정박하고 있는 코탕 섬에 억류되어 있는 선원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코탕 섬 공격을 맡은 해병 부대장은 코탕 섬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오후 16:00 참모들과 함께 U-21을 타고 코탕 섬의 정찰에 나섰다.


 

                        u-21.  비치크래프트 사의 민간기를 군용으로 채택한  것


그들은 대공 포화의 위험을 방지하고 또 작전 개시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섬에 너무 근접해서 비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정찰 비행을 통해 섬이 빽빽한 정글로 뒤 덮여 있어서 헬리콥터들이 착륙할 만한 개활지는 서쪽 해변과 북부의 동쪽 해변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하였다.

                                                                            
그날 밤 21:00 작전 계획이 최종 승인되었다.

두 개 중대[골프와 에코 중대]로 구성된 600 명의 해병들이 5 기의 CH-53과 3 기의 HH-53 헬리콥터, 총 8기의 헬기로 코탕 섬을 공중 강습하는 것이 주 골자였다.

양동 작전으로, 2 기의 헬리콥터가
서쪽 해변에 착륙하는 한편, 6 기의 헬리콥터는 더 넓은 동쪽 해변에 상륙하기로 하였다.  동쪽 강습 부대는 마야구에즈 호 선원들이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크메르 루즈 군의 숙소를 급습할 것이었다.

병력을 증파하기 위한 헬리콥터 강습이 두 번 더 있을 예정이었는데
태국 우타 파오에서 코탕 섬까지는 4시간의 비행 시간이 필요하였다.

필리핀 해역에서 출발한 홀트 함은 작전 개시 시간에 현장에 도착하여 마야구에즈 호에 항해 수병들을 승선시키기로 했고, 월슨은 마야구에즈 호를 구출한 뒤에 코탕과 캄보디아 사이의 바닷길을 차단하기로 하였다. 항모 코랄 씨의 해군 함재기들은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캄보디아가 구출 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캄보디아 본토를 타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미국의 예측과는 달리 코탕 섬에 미국인 선원은 한 명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작전 수립 시 미 해병은 코탕 섬에 단지 2~30 명의 크메르 루즈 병력만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코탕 섬에서 쏴 올리던 치열한 대공 포화나 코탕 섬에 있던 여러 척의 크메르 루즈의 군용 쾌속정에 대한 정보는 해병들에게 전달되지 않았었다.
 
구출에 나설 미군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코탕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먹잇감이 아니었다. 실제로 코탕 섬에 주둔하고 있던 크메르 루즈 군이 100 여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미군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인접국 베트남의 침공에 대비하는 병력이었다.

월남 사이공이 함락 된 뒤에 공산 베트남은 재빨리 군대를 보내
과거 남부 월남이 관할하던 도서들을 점령했었는데 이 중에는 전에 캄보디아와 영토 분쟁이 있던 섬들도 있었다.

크메르 루즈는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크메르 루즈는 캄퐁 솜 지구 사령관 엠 손에게 코탕 섬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긴급 지시가 내려갔고 엠 손은 5월 1일 부하 100 명을 인솔하고 이 섬을 점령하였다.

[마야구에즈 호 납치를 지휘했었던 사 메안에게는 그 남쪽 포우로 와이 섬을 방어하는 책임이 주어졌었다.] 


해병대 주력이 랜딩할 코탕 섬 동쪽 해안의 각 양 끝에는
모래를 파고 만든 진지에 두 기의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래 언덕 뒤에는 20미터 마다 요새화 한 중화기 진지가 있었고 이 진지들은 지그재그형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정의 M-60 기관총과 RPG-2, 두 문의 DK-82 박격포가 이 방어망을 이루는 중화기들이었다.

 

  

 

 

 

                                공산권 구 소련제/중국제 82mm 박격포


서쪽 해변은 무장이 더 잘되어 있었다. 중기관총과 M-60 이 한 정, 그리고 RPG-2[B-40]와 75mm 무반동포가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 해안과 서쪽 해안의 북쪽에는 61mm 박격포가, 남쪽에는 82mm
박격포가 설치되어있어서 담당한 해변은 물론 다른 해변도 지원 사격하게 되어있었다. 포탄은 잘 엄폐 된 진지에 은닉되어 있었으며 여분의 탄약과 포탄이 정글에 숨어있는 엠 손의 CP에 저장되어 있었다.

한편 본토에 끌려가서 롱 삼 렘에 상륙한 선원들 중 선장 밀러는 그 지역의 크메르 루즈 군 간부를 만났다.

그 간부는 간단한 신문을 하더니 밀러에게 마야구에즈 호에 돌아가서 미군의 공습을
중지하도록 미군과 교신을 할 수있을지를 물었다. 그들은 미군의 공습으로 이미 세 척의 쾌속정과 많은 인원을 잃었다며 이를 중지시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밀러는 마야구에즈 호로 돌아가면 배의 엔진을 다시 돌려서 전기를 발전시키면
무전기를 가동시킬 수 있고, 무전기로 방콕의 선박 대리점 사무실을 호출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군과 접촉, 공습을 중지시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크메르 루즈  간부가 상부에 이를 보고 하자 상부의 크메르 루즈는 밀러와
선원 중 9 명을 마야구에즈 호로 보내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선원들이 마야구에즈 호로 돌아가는 것은 다음날인 15일 아침으로 미루어졌다.



5월 15일 06:13. 마야구에즈 호 구출을 위한 작전의 첫 단계가 개시 되었다.

3 기의 HH-53 기가 해병 1개 중대 병력을 홀트 함으로 이동시켰다.
홀트 함은 천천히 마야구에즈 호에 접근했고 미 해군의 A-7D 기가 최류탄 가스로 덮어놓다 시피한 마야구에즈 호의 선내로 방독면을 쓴 해병들이 뛰어 들었다.
 

 

                                                               마야구에즈 호에 승선하는 해병들


07:25에 선내 수색이 완전히 끝나고 마야구에즈 호가
확보되었지만 기대와 달리 선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야구에즈 호는 마침 필리핀에 와 있던 미 해군 용역선 선원 중 이 작전에 자원했었던 선장, 기관장, 무선사 등에 의해서 외해로 이동되었다.



                         왼쪽이 동쪽 해변, 오른쪽이 서쪽 해변

 

                                      06:12. 병력을 실은 8 기의 CH-53 헬기가 미리 선정된 코탕 섬 두 곳의 해변을 강습했다.

서쪽 해안에는 2 기의 CH-53 기가 접근했다.

첫 헬기인 나이프 21 기가 크메르 루즈의 기관총 사격 중에도 안전하게 착륙하여 병력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엔진 하나가 크메르 루즈 군의 자동화기에 파괴 되었고, 나이프 21은 동료 기인 나이프 22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간신히 이륙해서 해안에서 1.6km 떨어진 해상에 불시착했다.

나이프 22는 피격으로 대파되어 병력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태국으로 돌아와 트라트 해변에 불시착했다. 착륙하지 못한 병력 중에는 이미 해변에 착륙한 병력의 중대장도 있었다.

 

  

                                   탐색구조 전문의 HH-53 헬기 -앞에 다총신의 미니건이 보인다.


06;30. 주력을 싣고 동쪽 해안에 접근하던 CH-53 기들은 크메르 루즈로부터 치열한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나이프 31은 두 발의 RPG-2 사격을 받았는데 한 발이 기수 왼쪽으로 튀어나온 왼쪽 연료 탱크에 명중하여 불덩어리가 되어 해안에서 50m 떨어진 해상으로 추락했다.

조종사와 다섯 명의 해병 그리고 두 명의 해군 의무병이 추락과 동시에 죽었다. 다른 한 명의 해병은 헤엄치는 중에 익사했고 세 명의 해병은 해안에 도달하려다가 크메르 루즈의 사격에 전사했다. 10번째 해병은 불타는 기체에 그냥 붙어 있다가 부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열명의 해병과 세 명의 공군들은 두시간이나 헤엄을 치며 바다에 떠있다가 추락지점에 도착한 윌슨 함에게 구출되었다. 구출 된 해병 중에 전방 관측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공군의 구조 요청용 무전기로 건전지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상공에서 지원하는 A-7 기에게 공습 목표를 유도하였다.

두 번째 CH-53 기도 꼬리 부분에 RPG-2 로케트 탄을 맞아 날아가 버렸지만
해변에 무사히 불시착해서 20명의 해병과 5명의 승무원을 내려 놓았다.

그들은 해안에 방어 거점을 만들고 저항했고 부조종사는 그의 구조용 무선기로 공습을 조정했다.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가 12 시간 후에야 겨우 구출되었다.

나이프 32는 동쪽 해안에 접근하다가 RPG-2를 맞자 랜딩을 포기하고
대신 서쪽 해안으로 가서 나이프 21이 추락한 현장으로 가서 연료를 버리고 표류하던 세 명의 해병들을 구출했다.

6;30에서 07:00 사이에는 제 2파 공격대 
4 기가 저항이 치열한 동쪽 해안을 피해서 서쪽 해안으로 가서 해병들을 모두 내려놓았다.

강습에 나선 12 기의 헬기 중 마지막 헬리콥터 졸리 그린 41은 AC-130 기의 엄청난 화력 지원을 받고도 다섯 번째 시도 후에야 착륙할 수가 있었다.

나이프 32와 졸리 그린 41, 졸리 그린 42는 위험을 무릅쓴 노력 끝에 81명의 해병을
서쪽 해안에 내려놓았고 졸리 그린 43 28명의 해병들과 대대 CP, 그리고 박격포 소대를 약 1KM 떨어진 남서쪽에 성공적으로 랜딩시켰다.

크메르 루즈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07:00까지 109명의 해병들과
다섯명의 공군 요원들이 코탕 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세 곳으로 격리된데다가 각 부대가 크메르 루즈와 접전하는 아주 안좋은 상황이었다.

서쪽 해안의 북쪽 끝에 착륙한 해병들은 해안을 가로질러서
남쪽에 착륙한 오스틴 대대장과 접촉하고자 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크메르 루즈의 사격에 아스톤 론리 병장이 죽자 이 독킹을 포기하였다.

서로 격리되어 있었지만 해병들은 기지를 발휘해서 통신 네트 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박격포로 긴급한 화력을 지원해 주거나 미 해군의 A-7과 F-4 기들의 항공 지원을 유도 할 수가 있었다.

 

                                                                             A-7D 


동쪽 해안에 고립된 소대의 후퇴가 절실했다.

08:15, AC-130 기의 화력 지원 아래 졸리 그린 13이 기관총 사격을 무릅 쓰고 착륙했지만 고립된 소대원 어느 누구 하나도 크메루 루즈의 기관총 화망을 뚫고 100미터를 질주하여 이 헬리콥터에 탑승할 용기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격심한 적 기관총 사격에 졸리 그린 13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냥 이륙해서
현장을 탈출 할 수밖에 없었다. 연료 배관들이 파손되어 겨우 비행을 하던 졸리 그린 13은 태국 라용지역 해안에 비상착륙을 했다.

코탕 섬을 강습했었던 헬기 중에 세 기가[나이프 21, 나이프 23,나이프 31]
격추 되었으며 다른 네 기도 파손이 심했고 [나이프 22, 나이프 32, 나이프 41, 졸리 그린 42] 여기에 추가해서 마야구에즈 호 탈환 작전에 동원되었던 졸리 그린 13도 고립되었던 해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쪽 해안으로 이동했다가 대파 되었다.

헬리콥터들의 극심한 피해로 태국 기지의 미 공군이 보유한 전투 자산 중에 추
가 병력을 수송 할 수 있는 헬기는 단 3 기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고, 탐색 및 구출 등의 비상 상황을 위해서 남겨 두었던 2 기의 헬리콥터까지 추가 병력 수송에 동원 할 수밖에 없었다.

5 기의 헬기들은 두 번째 강습 병력인 127명의 해병들을 탑승시켜서
태국 우타파오 기지를 이륙했다. 이들 중 나이프 52와 나이프 51, 졸리 그린 43이 코탕 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경이었다.

해병들은 동쪽 해안에 랜딩할 준비를 하였다.
접근하던 나이프 52가 적 사격으로 연료 탱크에 구멍이 나서 할 수없이 착륙을 포기하고 연료를 누출하면서 태국으로 돌아갔다. 크메르 루즈의 사격에 다른 헬기들도 착륙을 포기하고 상공에서 대기 비행을 하며 기회를 보았다.

헬기들이 첫 강습을 시작하기 직전인 아침 06:07,
크메르 루즈의 공보 선정 장관 후 님은 방송을 통해서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의 석방을 공식 발표하였다. 이 방송이 태국의 CIA 감청 시스템에 녹취되어 번역된 후 백악관에 보고 된 것은 한 시간 후인 07:15 이었다.

  

                                                  마야구에즈 호를 점령하고 성조기를 올리는 미군


백악관은 일단 이 방송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아침 08;15에 언론에 마야구에즈 호 선원들이 풀려 날 때까지 군사 작전은 계속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국무 장관 헨리 키신저는 자기 직권으로 코랄 씨 항모에게 캄보디아 콤퐁 솜 유류 저장소와 레암에 대한 항공 공격을 일단 연기하라고 지시했다.

06:30. 롱 삼 렘에 억류되어 있던 마야구에즈 호 선원들은 곧 석방되어
마야구에즈 호로 돌아갈 것이라는 통보 받았고, 07:15 태국 어선 신 바리 호에 승선하여 마야구에즈 호로 향했다. 신 바리 호는 5개월 전에 크메르 루즈들에게 납치되어 억류 중이던 선박이었다.

신 바리호는 마야구에즈 호를 납치했던 사 메안이 지휘하는 두 척의 크메르 루즈 쾌속정의 감시를 받으며 출항했다.
밀러 선장은 마야구에즈 호로 돌아가서 미군의 공습을 중지하라는 무전을 하도록 지시를 받았었다.

  

                                               공산권 '표준' 대공화기. 다쉬카 [DShK 12.7mm]


09:35 초계 비행 중이던 P-3 오라이언(ORION) 기는 신바리 호를 발견하고 역시 초계 항해 중이던 윌슨 함에게 이를 검문하도록 통보했다.

오라이언 기는
처음에는 이 선박을 크메르 루즈의 함선으로 생각했으나 저공으로 비행하며 보니 선상에 백인들이 있었고 09:49에 마야구에즈 호 선원들은 모두 윌슨함으로 옮겨탔다

선원 석방은 11:27에 백악관으로 보고 되었고 포드 대통령은 전국에 중계 된 TV 방송에 나와 마야구에즈 호의 탈환과 선원들의 구출 성공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크메르 루즈가 선원들을 석방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얼버무렸다.


                                                                             제랄드 포드


포드 대통령은 키신저 국무 장관의 건의에 따라 코탕 섬의 해병들이 무사히 철수 할 때까지 캄보디아 본토 목표들에 대한 공습 계획을 폐기하지 않고 감행하기로 하였다.

09:05 코랄 씨의 함재기 A-6, A-7 기들은 F-4의 호위를 받으며
캄보디아 남부 연안에 있는 군사 목표들을 강타했다. 이 공격으로 두들겨 맞은 크메르 루즈의 목표들은 캄퐁 솜 바지선과 유류 저장소, 레암 공군 기지의 수송기와 T-28 공격기, 그리고 해군 기지의 군 함정들이었다.

  

                                                                  미 해군 OV-10 기


미 합참은 마야구에즈 호와 선원들이 석방된 이상 코탕 섬의
증원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1:55, 작전 중이던 미군들에게 크메르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공세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작전 지역과 해역에서 즉각 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지시는 착륙의 기회를 보며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제 2 파 공격대에게 전달되었다. 2 파 헬리콥터들은 코스를 바꾸어 기지로 복귀 비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코탕 섬에서 고전하고 있던 오스틴 대대장은 7공군 사령관에게
긴급 지원 요청을 하였고 제 2파는 다시 코탕 섬으로 되돌아 갔다. 철수 명령은 12;10분에 철회 되고 작전은 계속 되었다.

제 2 파 공격대는 회항과 재투입을 하다보니 시간이 늦어져
12:10분에 100 여 명의 해병들을 서쪽 해안에 랜딩시킨 후 9명의 부상병들을 싣고 우 타파오 기지로 돌아갔다.

이제 코탕 섬에는 225명의 해병들이 활동하게 되었는데
서쪽 해안에 205명, 동쪽 해안에 20명의 해병과 공군이 있었다.

서쪽 해안 남쪽에 격리되어 있던 오스틴 중령의 대대 본부는
해안 북쪽의 해병들과 연결하기로 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두 부대 사이의 정글 지역에는 크메르 루즈들이 있었지만 81mm 박격포의 화력과 해군기 A-7 공격기의 화력을 이 정글에 집중하여 크메르 루즈를 제압한 뒤에 이를 돌파하여 12:45에 독킹에 성공하였다.

 

                            왼쪽이 서쪽 해변, 오른 쪽이 동쪽 해변


14:00에 서쪽 해안에 대한 적의 압력은 매우 미약해졌다. 크메르 루즈 대장 엠 손이 그의 부대 주력을 해안에서 철수시키고 해병들이 있는 두 해안에는 각각 세 명의 대응 병력만을 남겨 놓았었기 때문이다.

대대장 오스틴 중령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섬을 횡단,
동쪽 해안에 고립된 병력들과 합류하겠다는 의견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은 동쪽 해안의 병력에 대해서는 헬리콥터 구조 작전이 다시 한 번 실행 될 것이니 그 뒤에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14:15에 졸리 그린 11과 43이 동쪽 해변에 접근했으나 적의 대공 사격으로
구조를 단념하고 철수 하고 말았다. 졸리 그린 43은 연료 파이프가 파괴 되어 항모 코랄 씨에 비상 착륙하여 긴급 수리를 받았고 17:00에 다시 이륙하였다.

졸리 그린 43에게 가한 사격은 전 날 AC-130의 공격을 받고 반쯤 침몰해버린 쾌속정에 숨은 크메르 루즈로부터 나왔다는 관측이 있어서 A-7 공격기가 20mm 기관포로 이를 제압했다.

16:20분에는 공군의 OV-10 전방 관측기가 코탕 섬 상공으로 출동하였다. 관측이 전문으로 그 정확성이 매우 높은 전방 관측기는 윌슨함에게 5인치 포로 쾌속정을 완전 파괴 하도록 하였다.



                                           OV-10 기


17:00 크메르 루즈 대장 엠손은 탄약이 다 떨어져 가는 그의 부하들을 섬안으로 철수시켜 동쪽 해변과 서쪽 해변 사이에 있는 탄약고로 집결시켰다. 그는 심한  공중 폭격에도 탄약고가 아직 완전한 상태로 보존 된 것을 보고 놀랐다. 크메르 루즈들은 탄약을 보급받고 해병들에 대한 전투력을 다시 충전하였다.



18:00.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다시 한번 동쪽 해변에 대한 구출 작전이 개시되었다. 졸리 그린 11이 구조를 담당하고 졸리 그린 12와 나이프 51이 화력지원에 나섰다. M-60 기관총 4문을 장비한 윌슨함의 구명보트도 화력 지원을 위해 출동했다.

OV-10 전방 관측기도 먼저 AC-130 기로 하여금 동쪽 해변 지상공격을 유도하고 이어서 F-4와 A-7 공격기로 하여금 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이 공격이 있는 동안 초대형 폭탄 데이지 커터를 적재한 5 기의 C-130 기들이 나타났다. 이 15,000파운드의 초대형 폭탄은 군사 목표 파괴에도 사용되었지만 빽빽한 밀림을 초토화해서 헬리콥터 착륙장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다.


  

                                                                            데이지 커터


데이지 커터의 사용에 대한 별다른 필요를 느끼지 않던 전방 관측기는 이 폭탄을
해병들의 위치 훨씬 남쪽에 투하하도록 하였다.

18:15에 졸리 그린 11은 동쪽 해변에 접근했지만
착륙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추락한 나이프 23의 동체 잔해가 해변에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종사 도날드 백룬트 중위는 헬리콥터를 지상 위의 몇 피트 위에서 호버링 시킨 상태에서 구출을 시도했
지만 이 상태에서는 헬리콥터가 상하로 요동하기 때문에 해병들이 탑승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단 몇 명의 해병들만이 뛰어 올라 헬리콥터에 탑승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 끝에 동쪽 해변에 고립된 해병 20명과
공군 요원 5명을 모두 구출하였다. 구출이 완료 되는 시점에 첫 번째 데이지 커터 폭탄이 투하되었고 서쪽 해변을 충격파로 쓸다시피하였는데 놀란 오스틴 중령은 더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요청했다.



                                  데이지 커터 탄의 폭발


한편 동쪽 해변에서 해병들을 구조한 졸리 그린11은 탑승한 해병들로부터
추락한 나이프 31의 추락 기체에 중상을 입은 해병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졸리 그린 12에게 탐색을 요청했다. 졸리그린 12는 전형적인 구조 작전에 들어가 구조 요원이 줄을 타고 내려 가서 수색해보았지만 살아 있는 해병은 없었다. 이 와중에 졸리 그린 12는 적의 사격에 손상을 입고 항모 코랄 씨에 불시착하였다.


달 없는 밤이 코탕 섬에 찾아왔다.

남아 있던 작전 가능한 두 기의 헬리콥터 나이프 51과 급히 수리한 졸리 그린 43에
태국 낙혼 파놈 기지에서 수리를 받은 졸리 그린 44기가 날아와 합류하였다.

18;40부터 이 부대는 서쪽 해변에서 205명의 해병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AC-130 기와 월슨 함의 함포 그리고 기관총을 장치한 구명 보트가 화력을 지원하며 이들의 철수를 도왔다.

18:40분 첫 번째 철수에서 나이프 51이 41명의 해병을 싣고 이륙해
항모 코랄 씨로 이동했고 두 번째 철수에서는 졸리 그린 43이 해병 54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졸리 그린 44가 44명의 해병들을 탑승시키고 떠나자
크메르 루즈는 미군들의 철수를 눈치 채고 화력을 퍼부었다. 남아 있는 병력 수가 적다보니 방어 구역이 축소되었고 크메르 루즈가 돌격을 감행한다면 유린당할 우려도 있었다.

항모 코랄 씨까지는 왕복에 30분이 걸렸다.
사태가 엄중해지고 있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조종사 밥 브로흐는 앞 바다의 해럴도 홀트 함에 철수 병력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그의 헬기는 앞 바퀴만 갑판에 내려놓고 병력을 내려 놓았다.


  

                                                                    해럴드 홀트 함


5분만에 졸리 그린 44는 서쪽 해변으로 되돌아와 34명의 해병들을 싣고 이륙했다. 그러나 엔진에 이상이 생겨서 이번에는 항모 코랄 씨로 향했다. 이제 코탕 섬에는 해병들이 단지 32명만이 남아 있었다.

20;00.
드디어 마지막 철수 헬기가 투입되었다. 나이프 51이 서쪽 해변 어둠 속에서 해병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해병 모두가 탑승한 후 데이비스 대위와 맥네마 상사가 행여 탑승 낙오자가 있을까 주변 해변을 모두 수색하였다.

나이프 51에 탑승하고 있던 웨인 피스크 하사가 헬기 뒷 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어둠속에서 튀어 들어온 두 명의 해병을 챙겼다. 그는 데이비스 대위에게 전원 모두 탑승했는지를 물었고 데이비스 대위는 모두 다 탑승했다고 확인했다.
하지만 혹시라는 염려에 피스크 하사는 주변 해변을 한 번 다시 확인하고
호버링하는 헬리콥터에 뛰어 올랐다. 08:10에 드디어 마지막 철수 병력을 실은 나이프 51이 이륙해서 항모 코랄 씨로 향했다

헬기가 철수 병력을 싣고 이륙할 때 마다 해병들은 점령 구역을 축차적으로 좁혀 나갔다. 병력 감소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존 스탠패스트 하사는 분대장으로 이 구역 축소 때 분대를 지휘했다.

 새 축소 구역으로 이동하기 전 그와 소대 향도(嚮導 ; 행진할 때, 대오의 선두에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병사) 앤더슨은 자신 분대가 점령했었던 구 구역으로 가서 참호 등을 일일이 확인하며 인원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였다.


먼저 철수한 E 중대장 마이클 K. 스탈은 졸리 그린 44에 탑승 준비를 하면서 데이비스 대위에게 그의 병력들이 모두 새로 설정한 구역안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중대 M60 기관총반의 세 해병들이 새 구역 밖 측면 바위 돌출부에서 경계 임무를 서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마지막 철수 헬기인 나이프 51이 서쪽 해변을 출발하기 전부터 해병들이 다 탔는지 안 탔는지에
대한 혼란한 의견들이 많아서 조종사 브림스 중위는 전방 관측기에 탑승 해병들 몇 명은 아직도 탑승하지 못한 병력이 있다는 말을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는 데이비스 대위에 의해서 남아 있는 해병들이
절대 없다고 부정되었다.


 

                                                          서쪽 해변에  랜딩하는 해병대


철수 병력들이 해군 함에 모두 분산 승선한 후에 E 중대 중대장은 기관총 반의 세 명이 실종한 사실을 발견했다. 크게 놀란 지휘부는 해병들을 태운 해군 함들을 모두 찾았지만 조셉 하그로브 하사, 개리 홀 상병, 데니 마셜 일병을 찾을 수가 없었다.

탑승 전 수색을 했던 앤더센이 세 명을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 진지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고 이야기 했었다.

이들이 죽거나 살았거나 코탕 섬에 유기 된 것이 틀림없었다.
해병들과 해군 간부들은 이들의 구출을 여러 방법들을 논의하였다.

그날 밤으로 해병들중에 지원자로 구조팀을 구성해서 투입하자는 의견부터 날이 밝으면 함의 구명 보트에 백기를 달고 해안선에 가서 크메르 루즈에게 시체와 이들의 협상을 요구하자는 말까지 여러 가지가 나왔으나 73 기동함대 사령관 쿠간 소장은 해병들이 살아 있다는 어떤 확증이 없는 상황에서 구조팀 투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었다.

 

 

                                                                  헨리 윌슨 함


다음날 윌슨 함은 세 시간 동안 동쪽 해변과 서쪽 해변을 오가면서
영어 프랑스어와 크메르 어로 미군은 아무런 적대의식이 없고 단지 미군이 살아있건 전사했건 양도 받게 해달라는 말을 되풀이 해서 방송했다. 그러나 섬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함의 승조원 절반이 갑판에서 섬에서 무슨 신호가 있을까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그들의 생사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구조 병력을 투입해서 더 이상의 사상자를 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은 설득력을 얻었다.

이들 세 명의 불운한 해병들은 실종자로 분류돠었댜가
1976년 7월 21일 전사자로 분류되었다.

1985년 해병 철수후 한 부상 해병이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당했다는 풍문이 캄보디아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풍문은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었다.

 

  

                                                     폭연이 휩쓴 코 탕 섬 해변의 오늘 날 모습


1999년 코탕 섬에서 전투를 지휘했었던 엠 손은 미국의 실종자 진상 규명 위원회가 코탕 섬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이 단체에 접근해왔다.

그는 미군이 떠난 뒤인 5월 16일 아침 동쪽 해변과 서쪽 해변 일대를
수색하게 하였다. 해변에서 100m 떨어진 지점에서 한 크메르 루즈 병사가 미군 낙오병이 발사한 M-16 탄에 맞았다. 크메르 루즈는 사격 지점에 박격포 사격을 가하고 포위했다. 얼마 후 다리에 부상을 입은 미 해병 한 명이 체포되었다.

엠 손이 기억하는 신체상의 특징은 실종 해병 중에서 하그로보 하사와
일치했다. 크메르 루즈는 수색을 계속해서 유기된 M-60 기관총 한 정과 장비들 그리고 나뭇잎으로 덮어놓은 미 흑인 해병의 시체를 찾아 냈다. 그는 미 해병 애스턴 론리 하사였다.

엠손은 그 시체를 묻어 주라고 명령하고 잡은 포로를 데리고
본부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는 하그로브 하사가 발사한 총탄에 맞은 크메를 루즈 병사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처형했다.

  

 

동쪽 해변의 미  공군 헬기  나이프 23과 나이프 31, 그리고 우측에 파괴 된 크메르 루즈의 쾌속정이 보인다.


하그로브를 처형한지 일 주일 뒤에 엠손의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버린 음식물 찌꺼기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수색을 재개했다. 수색에서 진흙땅에 발자국이 찍힌 것을 발견한 크메르 루즈는 야간 매복을 했다가 사흘 뒤에 두 명의 미 해병 낙오병을 잡았다.

엠 손이 말하는 인상 착의는 실종한 게리 홀 상병과 대니 마샬 일병과
일치했다. 엠 손은 캄퐁 솜의 사령부에 두 사람의 미군 포로를 잡았슴을 보고하자 사령부는 그 두명을 캄퐁 솜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두 명의 포로들은 본토로 끌려가서 다시 차 편으로 시하누크빌 북쪽에 있는
티 네안 파고다로 이동되어서 구금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팬티만 남기고 벌거벗기워 져서 족쇄에 채워진 채 감금되었다.

일 주일 뒤에 프놈펜에서 두 사람의 처형 지시가 내려 왔다.
두사람의 해병들은 크메르 루즈 병사가 철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RPG-2 로켓 발사관에 비참학게 맞아 죽었다.



                      RPG-2 로켓 발사기. 쇠 몽둥이로 쓰기에 적합한 크기다.


홀의 시체는 해변에 얕게나마 묻혔는데 마샬의 시체는
해변의 둔덕 구석에 그냥 버려졌다.

1999년 미국 조사팀은 홀과 마샬의 매장 장소에서 뼈조각들을 수거했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것인지는 그 뼈조각들이 너무 작아서 DNA 검사에서도 확실하게 나오지 않았다.

세사람의 낙오 해병들은 사망 경위가 밝혀지자 미국 정부는 세명에게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했다. 2008년 처형 당했던 하그로브와 세명의 병사들이 전사체로서 유기되었던 코탕 섬에서 발굴 작업이 있었다.

엠 손이 처형한 하그로브를 매장했다고 하는 지역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백인으로 의심 되었으나 확실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코탕 섬의 유해 발굴 사업- 미군은 캄보디아에서 7회에 걸쳐 유해 발굴 사업을 했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다


1991년과 1999년 사이 일곱 번이나 미군들의 유해를 찾는
발굴 작업이 있었다. 작전 개시 직후 크메르 루즈의 로켓에 맞아 추락한 나이프 31의 추락 지점에 대한 수중 탐색이 행해져서 조종사 리차드 반데기어와 6명의 병사들 유해가 발굴되었다. 


마야구에즈 작전은 후에 군내외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었다.

자기들의 구출 작전을 통해 
선원들을 구해낸 것도 아니었고 미군들이 과감한 공격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었다. 정보 부족으로 크메르 루즈의 화력 앞으로 헬기와 병력을 내보내서 그 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