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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를 거저 얻을 수는 없다.

구름위 2013. 1. 1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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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군비관련 자료를 보게 되면 최근 스위스의 총병력은 12만 명에다가 즉시동원가능 예비군도 약 10만 명 정도로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최강의 MBT로 평가받는 레오파드2 전차 같은 최신예 무기로 충실히 무장하고 있습니다. 인구 800만, 우리나라의 반 정도 되는 작은 국토에 그것도 주변에 위협을 줄 만한 잠재적국도 많지 않은 나라가 이렇게 많은 군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스위스 육군의 날렵한 훈련모습

 
사실 이 정도도 대규모 감군이 단행된 1990년대 말까지 유지되던 현역 30만, 예비군 30만에 비하면 많이 축소된 숫자입니다. 이웃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같은 강대국이 약 30만 내외의 군대를 보유하고 항상 준 전시상태인 이스라엘이 15만 정도의 현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결코 밀리지 않는 전력입니다. 막연히 연상하는 평화이미지가 큰 영세중립국이 이렇다고 하니 언 듯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기동 훈련 중인 스위스 육군의 레오파드2전차

 
하지만 스위스의 평화는 절대로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세중립은 다자간의 국제 조약에 의해서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반드시 남들이 와서 도와준다고 담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립국이니 침략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던 양차 세계대전 당시의 베네룩스3국 예만 봐도 스스로 중립을 보존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이 있어야 평화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 영세중립국인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군

 
현재 시점에서나 스위스 주변에 적대 세력이 없어 보이는 것뿐이지, 역사적으로 스위스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침탈을 피하기 힘든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엄격한 무장을 통하여 중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스위스 인들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스위스 국민들의 찬란한 기록입니다.
 
* 모르가르텐 Morgarten 전투 (1315년)
전투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독립을 선언한 4개 칸톤으로 구성된 스위스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을 모르가르텐 계속 인근의 애게리 호수에 수장시킨 전투로 스위스 최초의 승리였고 이후 무장을 통한 적극적 자위정책이 시작됩니다.

 

모르가르텐 전투 기록화
 

* 셈파흐 Sempach 전투 (1386년)
4개 칸톤이 자치권을 획득하자 이에 고무된 주변지역이 연방에 합세하려 하였고 이를 막으려는 오스트리아와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연방의 대승으로 전투는 종결되었고 그 결과 대략적인 오늘날 스위스모습이 이뤄지게 됩니다.

 

셈파흐전투 600주년 기념주화

 
* 낭시 Nancy 전투 (1477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스위스의 독립을 방해하던 전통적 외세였습니다. 현재 프랑스의 일부인 당대 지역의 패자 보로고뉴왕국이 스위스의 합병을 노리고 침략을 개시하여 2년간 전쟁이 벌어졌는데 스위스는 낭시에서 침략군을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낭시 전투 기록화
 

* 30년 전쟁 (17세기)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신구교간에 벌어진 세계대전이었는데 비록 당시 스위스도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런 거대한 전쟁에 휩쓸리지 않고자 대외중립을 표명하고 군대를 국경으로 보내어 철통경비를 하여 전화를 차단하였고 이때부터  무장중립의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 뒤프르 (Henri Dufour) 장군의 통일전쟁 ( 1847년 )
 앙리 뒤프르는 나폴레옹시대의 몰락 후 스위스의 통일을 이룩한 군사영도자입니다. 그는 전투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외세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분열된 스위스를 통일하고 독립을 수호한 스위스의 이순신 장군입니다.

 

앙리 뒤프르 장군의 동상
 

* 보불전쟁 (1870년)
 스위스는 무력의 대부분을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집중배치 하여 외세의 침탈에 대비하였습니다. 실제로 파리가 독일에 포위되자 프랑스는 스위스를 통과하여 독일의 배후를 치고자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스위스의 강력한 반대에 눌려 실패하였고 그 결과 스위스는 중립을 지켜냅니다.
 
* 제1차 대전 (1914년~1918년)
보불전쟁당시처럼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에 배치하여 중립을 지켜냅니다. 영세중립을 표방하다 독일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벨기에와 극명히 대비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제2차 대전 (1939년~1945년)
히틀러가 동맹국 이탈리아로의 최단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위스를 접수하려 생각하자 스위스 국민들은 앙리 기상 ( Henri Guisan ) 장군의 영도 하에 똘똘 뭉쳐 최악의 경우 터널과 도로를 파괴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히틀러의 침략욕구를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접경지역에 배치된 스위스군을 시찰하는 앙리 기상의 모습
 

사실 위에서 열거한 전투나 에피소드는 오늘날까지도 단단한 자위 무장을 통하여 중립을 지켜온 스위스의 피나는 수많은 투쟁 중 극히 일부이며 오늘날도 무장중립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스위스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지금까지 자국을 침략한 외세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하였고, 대부분 승리를 거두어 주변의 외세도 스위스의 무장중립을 인정하게끔 만들 수밖에 없는 피의 투쟁을 벌여 왔습니다.
 
평화는 결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것 입니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략 야욕을 결정적으로 포기 하게 만든 것은 서희의 입이 아니라 '강감찬의 힘'이었습니다. 물론 서희의 입은 힘으로도 대적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힘으로써 의지를 보여주자 평화는 찾아왔습니다.

 

준비를 소홀히 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처럼 힘도 없으면서 모화사상에 물들어 입으로만 평화를 원한다고 해보았자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여기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철저한 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스위스의 노력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할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