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구름위 2013. 1. 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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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그는 오와리의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머니가 정실(正室)이라 적자(嫡子)였으며, 2살 때 이미 나고야(名古屋)의 성주(城主)가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청년기에 걸쳐서 기묘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오와리의 바보(尾張のうつけ)’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아버지의 죽음(1551)은 그에게 큰 계기가 됩니다.

 일부 가신들이 총명하다고 알려진 동생(同母弟) 노부유키(織田信行, 1536 ~ 1577)를 옹립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가독(家督)’을 둘러싼 형제간 권력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오와리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어쩔수 없이 죽게됩니다.)

 

                         

                                                    ▲ 오와리(尾張)                                                 ▲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얼마 후, 스르가(駿河)의 막강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1519 ~ 1560)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옵니다(1560).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노부나가의 기지에 힘입어 이마가와 군대를 습격,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천하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이미가와는 하루 아침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맙니다[오케하자마의 전투(桶?間の?い)].

대장을 잃은 군대는 급격하게 후퇴하였습니다. 판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다케다 신켄(武田信玄)

 

이마가와의 몰락에 힘있어, 미카와(三河衆)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독립해서 센고쿠 다이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에야스와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습니다(1562년, 攻守同盟).

 노부나가는 미노(美濃)를 공략하는 중이었고,

 이에야스는 가이(甲斐)의 다케다 신켄(武田信玄, 1521 ~ 1573)과 잔존한 이마가와 세력을 경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미노를 제압하면 천하를 제압한다’는 말이 있는 지역을 장악한 노부나가는 그곳 지명을 기후(岐阜)로 바꿉니다.

 그 무렵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 새긴 도장을 쓰게 됩니다.

 

         

                                     ▲ 천하포무(天下布武)                                                          ▲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그 무렵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도와 교토(京都)로 진군함으로써

 쇼군(將軍)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 하지만 얼마 후,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으며, 노부나가는 그를 폐위시켜 버립니다(1573).

 그것은 아시카가 바쿠후(室町幕府)의 사실상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 지역에 대한 지배세력을 다지기 위해 노부나가는

 비와호(琵琶湖) 부근의 아즈치(安土)에 거대한 성을 쌓고서, 자신의 본부로 삼았습니다(1576).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구절이 상징해 주듯이,

 노부나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전란’의 시대에 바야흐로 ‘통일’의 비전을 보여 주는 무장(武將)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목할 만한 개혁 정책들을 과감하게 실시해 나갔습니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돋보이느 부분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  엔랴쿠지(延曆寺)                                                                     ▲ 잇코슈(一向宗)

 

우선 그는 기존의 권위와 세력들(조정, 불교)을 과감하게 부정했습니다. 대단한 배짱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시카가 바쿠후를 종식시킨 것은 물론이고,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불교 세력에 대해서도 철퇴를 가했습니다. 8세기 헤이안(平安) 시대 이후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천태종의 본산 엔랴쿠지(延曆寺)를 초토화시킵니다(1571). 그러자 광신적인 잇코슈(一向宗)는 신도들로 하여금 여러 지역의 권세 있는 다이묘들과 연합하게 함으로써, 전체 일본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노부나가에게 완강하게 하게 합니다. 그 같은 저항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노부나가는 결국 잇코슈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지(本願寺)의 항복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 혼간지(本願寺)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노부나가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대한 보호 조치를 확대했으며

 교토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하도록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 상당히 정치적인 선택인 것이었죠. 유럽 문화나 기리스탄(기독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불교 사찰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아케지 미쓰히데(明智光秀)                      ▲ 다키가와 가즈마스(瀧川一益)

 

둘째로, 그는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서 ‘능력’에 따라 과감하게 등용하는 개방적인 인사 정책을 밀고 나갑니다. 미천한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로닌(浪人) 아케지 미쓰히데(明智光秀), 닌자(忍者) 출신 다키가와 가즈마스(瀧川一益)등을 과감하게 등용하는 한편, 오랫동안 섬겨 온 신하라 할지라도 모자라거나 문제가 있으면 과감하게 내?아 버렸습니다. 충성을 다했으나 추방당한 사람들로서는 원망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기리스탄(기독교)이 들어와 있었던 만큼, 선교사들과 같이 들어온 외국 군사도 받아들여서 국적을 따지지 않고서, 자신의 군대로 만들어 버립니다.

 

셋째로, 그는 각 방면에서 혁신적인 정책을 실시합니다. 당시 새로운 병기로 떠오른 화승총(火繩銃), 즉 조총(鳥銃)을 적극 도입, 활용함으로써 전투 패턴 자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통적인 전투 방식(騎馬戰)을 고집한 다이묘들은 보란 듯이 격파해 나갔습니다. 기묘한 행동을 하곤 해서 ‘오와리의 바보(尾張のうつけ)’라 불렸던 것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셈입니다. 또한 그는 통행세와 동업조합에서 걷는 세금을 폐지했는데, 그들은 지방 다이묘의 특권적인 수입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원과 사찰의 토지를 빼앗아, 사무라이와 부농들에게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노부나가의 지배를 환영했음은 물론이며, 자연스레 자신의 확고한 정치적 · 경제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금은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 혼노지의 변 (本能寺の?)

 

그야말로 멋지게 새 시대를 열어젓힐 것처럼 보였던 노부나가, 하지만 불행한 최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토 부근의 혼노지(本能寺)에서 자신이 아꼈던 부하 아케지 미쓰히데(明智光秀, 1526/28 ~ 1582)의

 의외의, 그야말로 급작스런 모반 · 습격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本能寺の?). 나름대로의 야망, 혹은 남모르는 서운함,

혹은 어떤 두려움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쓰히데의 군대가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했으며,

소수의 병력만을 대동하고 있던 노부나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센고쿠 시대에 몇 개의 郡에서 몇 개 쿠니(國) 규모의 영역을 일원적으로 지배한 다이묘(領主)를 가리킵니다.

2) 기묘한 행동을 많이 한 만큼, 서양에서 전해진 타네가시마총(種子島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3) 은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압한 고사를 따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書經』을 참조.

4) 요시아키가 죽을 때까지(1597), 명목상으로 아시카가 바쿠후가 지속되기는 했습니다.

5) 가혹한 정책으로 인해 그는 ‘마왕(魔王, 第六天魔王)’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6) 아케지 미쓰히데는 자신을 거두어 준 주군 노부나가를 토멸했기 때문에 ‘謨反人’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미쓰히데의 심정을 짐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는데, 모반 동기와 배경이 예매한 것과 맞물려서,

 좋든 싫든 간에 미쓰히데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