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구름위 2013. 1. 1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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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동상

이 글은 16세기 일본에서 ‘전국(戰國, 센코쿠)’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으면서 마침내 ‘통일(統一)’로 이끌어 가는 역동적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리더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른바 통일의 3대 영웅으로 불리는 인물들, 구체적으로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1534 ~ 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7 ~ 1598),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 ~ 1616), 그들 세 사람이 걸어간 정치적 궤적과 더불어 그들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그들 세사람의 성품과 개성을 전해주는 일화가 전합니다.

 

“누군가 두견새를 보냈는데 그 두견새는 울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려라(노부나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이에야스)”

 

작자를 알 수 없지만 노부나가의 결단과 냉혹함, 히데요시의 임기응변과 적극성,

이에야스의 끈기와 인내, 그들 세 사람의 성품과 개성을 간결하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독특한 개성, 개방성과 결단력, 그리고 자존심과 약간의 인간적인 결단(독단과 성급함)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백성의 아들에서 ‘천하인’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지와 임기응변, 그리고 군사적 · 정치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가진 리더십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후에는 균형감각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조선 침략은 최대의 어리석은 짓(愚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직의 질서와 체계를 중시하면서 부하들의 의식과 능력을 이끌어 내면서 동시에 교묘하게 통제하는 리더십을 보여 줍니다. 참고 기다리는 미덕 역시 한몫을 합니다. 마침내 그는 천하를 통일한 ‘천하인’으로서, 텐노(天皇)의 승인을 받아 ‘쇼군’이 되었으며, 도쿠가와 바쿠후를 열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그는 미카와(三河國)의 토호(土豪)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제8대 당주(當主) 히로타다(松平廣忠, 1526~1549)의 아들(嫡男)로 태어납니다.

 이름은 다케치요(竹千代), 전란(戰亂)의 시대였던 만큼, 그 지방의 사무라이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노심초사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어린 시절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떠나갔으며,

 일곱 살 때 슨푸(駿府)[지금의 시즈오카靜岡市]에 근거지를 둔 강력한 이미가와 가문(今川氏)의 인질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 슨푸성(駿府城)과 이마가와 가문(今川氏) 문장

 

인질로 있으면서 그는 군사 · 행정 기술을 익혔으며, 매사냥을 즐겨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며,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 군대를 통솔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가 가신(家臣)에게 살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멀리서 가문의 몰락을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院)

 

그런 참에 기회가 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院)가 신예 강자 노부나가와의 싸움에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1560).

 이에야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친척과 가신들을 수습해 영주(領主)가 됩니다.

이어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습니다(1562, 淸州同盟=織德同盟).

 그는 영지 내의 반란 세력인 불교 종파를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행정관들을 임명합니다.

과세 · 소송 · 치안 절차를 규정하고 실행합니다.

    

▲ 하마마쓰(浜松)와 하코네(箱根)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지하는 한편, 이에야스는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본거지를 연안 도시 하마마쓰(浜松)로 옮겼으며(1570), 그곳을 상업적 · 전략적 요지로 개발합니다.

점차로 힘을 모은 그는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의 한 사람이 도리 수 있었습니다.

 오카자키를 비롯해서 하코네(箱根)의 산간지방까지 펼쳐진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영지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편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1582), 그 휘하의 히데요시가 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주군의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 명분을 제공해 주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자연스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정적(政敵)으로 부각 되기에 이릅니다

. 몇 차례 전투가 있었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습니다. 신중한 이에야스는 충성 서약을 했으며, 히데요시는 그것에 만족합니다

. 그리고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히데요시가 남서부의 다이묘를 정복해 가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기 영지의 농업 생산력을 높였으며,

 행정의 효율성과신뢰성을 향상시킵니다. 그리고 근거지를 인질생활을 했던 슨푸로 옮기고(1586),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실하게 다집니다.

 

그러다 히데요시와 더불어 하코네 산지 동쪽의 호조 가문(北條氏)을 정벌한 후,

이에야스는 하코네 서쪽의 5개 연안지방을 반납하는 대신 동쪽에 있는 호조씨의 영지를 물려받게 됩니다.

 히데요시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江戶: 도쿄) 부근에 가신들과 군사장비 그리고 가족들을 신속하게 이주시켜버립니다.

 그곳은 히데요시의 근거지에서 걸어서 한 달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지게 된 셈입니다.

 

1592년과 1597년, 히데요시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에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호조 가문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계책은 먹혀들게 됩니다.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새 영지로 옮겨 간 것을 계기로,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영지의 방비에 힘씁니다.

 정예군은 영지 외곽과 중 접근 도로에, 약한 군대는 에도 가까이에 배치합니다.

 균등한 과세를 위한 토지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해 농민반란 가능성을 줄였으며, 장인(匠人)들과 상인들을 불러 모읍니다.

 성을 확장 및 개축했으며,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킵니다.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 보급을 위해 토목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때(1598),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다이묘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불렀는데,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히데요시를 지지하는 세력(西軍)과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는 세력(東軍)이 맞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동군(東軍)의 우두머리였습니다.

 1600년 가을, 교토 북동쪽 약 80㎞ 떨어진 들판에서 자웅을 가르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집니다.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가 그것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은 이에야스의 편을 들어줍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에야스는 명실상부한 패자(覇者), 다시 말해 ‘천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패권을 굳히기 위해, 신속하게 후속 조치를 취합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이묘들의 영지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다이묘들의 근거지 부근 전략적 요충지에다 심복 부하들을 배치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중부 일본 거의 전 지역을 직할시지로 만들어버립니다.

 또한 다이묘, 궁중 세력, 승려, 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으며, 감족 기관을 두게 합니다.

 

▲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마침내 활실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쇼군(將軍, 정식 명칭은 征夷大將軍)’이라는 직위를 부여합니다(1603).

텐노(天皇)가 ‘천하인’으로서의 위상과 평화유지 임무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입니다.

 2년 후 은퇴를 선언한 그는 쇼군 지위를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 1579~1632)에게 물려줍니다. 제2대 쇼군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로써 쇼군 직이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적 특권임을 분명하게 밝히게 됩니다. ‘전국(戰國)’시대가 끝나고 ‘통일(統一)’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히데타다로 하여금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증축 · 개축하다록 합니다(1604~1614).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한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인원이 끊임없이 동원되었습니다.

 넓은 해자(垓字), 높은 성벽(石壁), 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

 곡식과 동전이 가득 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이묘들의 가족은 그 주변 주택에서 인질과도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에도는 도시와 항구로 번창하기 시작합니다.

 

기리스탄 및 외국과의 무역에 대해서 처음에는 다소 호감을 가졌던 이에야스도 외교 사건 발생(1612)을 계기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이 힘들게 만들어 낸 정치 체제를 그들이 위협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계자들 역시 그런 정책을 따릅니다. 외국과의 무역은 나가사키(長奇)를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1)『朝鮮王朝實錄』에서도 그 같은 정치권력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慶尙左兵使 成允文이 치계하기를, ‘포로가 되었던 사림이 와서 말하기를 關白이 7월 17일 죽자 德川家康이란 대장이 國事를 다스리면서 이곳에 온 倭將들의 처자를 모두 붙잡아 가두고 謀叛하지 못하게 하고 두세 번 사람을 보내어 加藤淸正 등을 소환하였으므로 청정이 이달 내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도망쳐 돌아온 자가 말하기를 ‘관백이 7월 초에 병으로 죽고 여덟 살 먹은 자식은 어려서 국사를 다스리지 못하니, 二也恩란 왜장이 멋대로 호령을 내리며, 청정의 6촌인 加藤窓은 청정을 소환하는 일로 빈 배 50척을 거느리고 나왔다. 지금 島山의 왜적이 집을 부수어 밥을 지어 먹고 날마다 짐을 꾸리고 있는데, 군량과 戰馬의 3분의 1은 이미 일본으로 실어 갔으며, 잡곡 창고는 수송해 가지 못하고 흙으로 문을 발랐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啓下하였다.(『朝鮮王朝實錄』宣祖 31년 11월 참조. 강조는 인용자, ‘이야스’는 ‘이에야스’를 가리킨다.)  

2) 아는 바와 같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메이지유신(1868) 이전까지 약 260여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3) 이어 오사카성을 두 차례나 공격해서, 후환이 될 수 있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마저 제거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