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구름위 2013. 1. 10. 16:27
728x90

     

▲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6 ~ 1598)하면, 우리는 곧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조선왕조실록』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중에는 ‘천하인’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센고쿠 제일의 출세남(戰國一の出世頭)’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 같은 ‘출세’ 이야기는『조선왕조실록』에도 개략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 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백은 그에게 변소지기를 시켰다. 수길이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관백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신을 삼게 하였는데 역시 정밀하게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관백이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수길은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 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 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의 총애를 받아 승직의 길이 열렸다. 이때 국내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관백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수길이 토벌을 자청하였다. 수길이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관백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관백이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마라’고 당부하였다. 수길은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관백이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관백이 시해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길은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관백을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豊臣秀吉神社)

 

정확한 출저를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당시 조선의 정보 체계 아래에서 수집, 정리된 소박한 정보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닌 셈입니다.

 ‘전 관백’은 오다 노부나가를 가리킵니다. 생긴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는 ‘고자루(子猿, 어린 원숭이)’라 불렸습니다.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 그가 출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은 역시 노부나가를 만난 이후의 일입니다.

 

▲ 아시가루(足輕: 하위직 보병) : 긴 창을 들고 있는 병(兵)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 하위직 보병)가 된 히데요시는 쾌활한 성격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총명한 두뇌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능력’을 중시하는 노부나가의 인재 등용 정책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기지와 용병술에 뛰어난 그는 각 지방을 정벌하여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에 큰 공을 세웁니다. 그는 오미구니(近江國)와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으며(1573),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守)라 불렸습니다.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이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그는 산인-산요(山陰山陽: 中國地方) 지방을 정벌하게 되었으며, 도중에 빗추 지방(備中國)을 침공합니다.

 하리마(播磨國)의 히메지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노부나가가 아케지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재빨리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케지 미쓰히데를 공격, 처단함으로써 주군의 원수를 갚습니다[야마자키의 전투(山崎の戰い)].

 

▲ 오다 노부다카(織田信孝: 오다 노부나가의 삼남)의 묘

 

       

                ▲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                  ▲ 시마즈 요시히사 무덤(島津義久 墓)          ▲ 오토모 소린 동상(大友宗麟)

 

노부나가 사후의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가신들, 특히 유력한 두 명의 가신은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한 명을 쳐부수고, 여러 성을 함락시켜버립니다. 그는 오사카에 큰 성을 짓습니다(1583). 지금도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어 전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섭니다. 이듬해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기도 ?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는 간파쿠(關白)에 임용된 이후 타이조 다이진(太政大臣)이 되었으며(1585), 텐노(天皇)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 받아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키이(紀伊), 시고쿠(西國), 규수(九州)를 정벌했으며, 그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어 이에야스 원조 아래 간토(關東)와 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킴으로써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고, 전국을 장악한 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평소에 그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했으며, 오사카성에는 노부나가에게 물려받았다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내걸었으며, 자신의 칼에도 ‘천하포무’라 새겼다 합니다.

 

하지만 일본 통일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히데요시는 해외 침략의 야심을 품고선 조선 침략을 기도합니다(1592). 중국, 필리핀, 인도 정복까지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일본 안에서 싸웠던 내부의 열기와 에너지를 외부로 돌린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1597년 재차 조선을 침략했으나(정유재란),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듬해(1598)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62세).

 

히데요시는 기본적으로 노부나가의 정책과 노선을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 체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우선 농부 · 상인 · 승려의 무기 사용 및 휴대를 금지하는 가타나가리레이(刀狩令)를 내렸습니다. 동시에 불필요한 성(城)을 철거시키는 시로와리(城割)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전란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또한 사농공상(士農工商) 제도를 도입, 무사 · 농민 · 장인 · 상인의 계급을 엄격히 구분하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그 같은 신분체제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각 계급으로 하여금 도시나 마을에 살도록 합니다. 겐치(檢地, 토지측량)을 실시해 조세 징수를 고르게 했으며, 교통의 원할한 소통을 위해 도로검문소를 철폐합니다. 광물자원 개발을 하려함으로써 화폐가 무리 없이 주조될 수 있도록 했으며, 교역을 촉진시킵니다. 그러니 히데요시는 통일정권의 기반을 굳혔을 뿐만 아니라 바쿠후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히데요시가 보여준 민첩한 행동, 특히 군사적 · 정치적 수완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채 1년도 안 되어, 노부나가 휘하의 서열 3, 4위의 군단장에게 일약 주석(主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하인’으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융합을 도모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후에는 점차 균형감각을 잃게 되?고, 때로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히데요시의 일족이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5) ‘독재’에 의한 폐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결정적 패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 ‘최대의 어리석은 짓(愚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기리스탄의 선교 활동을 묵인했던 듯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강경책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기리스탄의 병폐를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가사키에서 26명이 순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종교를 앞세운 서양의 침략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습니다. 그 같은 정책은 도쿠가와 시대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1) 일본에서는 ‘文??慶長の役’ 라 부릅니다.

2) 豊臣秀吉을 입력하면『조선왕조실록』국역본에는 114회, 원문은 11건 확인됩니다.

 그는 乎秀吉, ‘관백’ 등으로 불리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그보다 한층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참조)

3)『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4월 13일자.

4) 그는 이름을 몇 번이나 바꿉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 후지하라 히데요시(藤原秀吉)로 개명했으며,

다이조 다이진(太政大臣)과 간파구(關白)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면서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쓰게 됩니다.

5) 어머니와 누이는 이에야스의 인질이 되었으며, 친동생으로 유능한 보좌역이었던 히데나가(秀長)는 일찍 죽게 됩니다.

조카 히데쓰구(秀次)와 그 일족은 처형을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