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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의 역사에 관해서 괜찮은 글 펌-화승격발방식(matchlock)의 시대 1

구름위 2013. 1. 1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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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격발방식(matchlock)의 시대 1


15세기쯤되자 핸드건도 발전합니다.

흑색화약의 성능이 개선되며 추진효율이 더욱 증대된 알갱이 화약이 등장합니다.
고운 가루상태의 화약은 총신속에서 뭉쳐져 연소했으며 덕분에 연소속도는 느렸고 추진효과도 낮았습니다.
하지만 약간 굵은 알갱이 모양의 화약이 사용되면서 연소 속도가 높아지며 덕분에 추진효율도 증가하죠.

총신 제작법이 더욱 발전합니다.
어쩌면 이 기술은 칼을 만드는 방법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담금질과 같은 열처리 기법이 도입되며 점차 칼처럼 접어서 만드는 방법과 총신을 다듬는 방법이 적용되죠.
이는 개선된 화약의 능력을 견디며 총을 더 강력하게 발사할 수 있게 만듭니다.

또한 다루기 쉽게 길이는 줄어들면서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무게가 증가된 개머리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화승 격발장치(match-lock or fire-lock)가 개발되었습니다.
가장 혁명적인 발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총에 스페인인들은 화승을 물고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접시로 화승을 쳐박아주는 용두(serpentine
)을 장착합니다.
아마도 14세기말 혹은 15세기초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문서 기록은 1411년의 독일 필사본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S자 모양의 쇠막대의 한쪽 끝에 화승을 꼽게되는 바늘귀 모양의 구멍을 내고 다른 한쪽을 방아쇠로
서 누르는 구조였습니다.
쇠막대 한가운데는 못으로 고정되며 회전축의 역활을 하게 됐고.
방아쇠를 당기면 불붙은 화승이 화약접시로 찔러지고 그러면 점화약이 연소하며 총이 발사되는거죠.

너무나 간단해 요즘 애들 장난감보다도 더 조잡하기 짝이없는 구조죠.

곧 방아쇠를 눌렀다 때면 원위치시켜주는 스프링이 방아쇠에 연결됩니다.
다음은 스프링이 붙은 좀 더 복잡해진 구조의 격발장치중 하나입니다.

각 부분의 흰색원은 회전축입니다.
1처럼 방아쇠를 당기면 2에서처럼 방아쇠의 끝부분이 올라가죠.
그러면 짙은 녹색으로 표시된 활대가 회전축을 중심으로 3처럼 내려가게되죠.
이 순간 밝은 녹색으로 표시된 스프링이 눌려지게 됩니다.
3처럼 활대의 끝이 내려가면 진한 붉은색으로 표시된 용두부분이 회전축을 중심으로 4처럼 향하게 됩니다.
용두에서 화승을 꼽는 부분은 생략했습니다만 4처럼 되면 화약접시에 화승을 박아넣을 수 있으리라 감이 잡히죠.
매우 간단합니다.
대신 방아쇠에서 손을 때면 스프링에 의해 방아쇠가 원위치되며 용두 역시 원위치되죠.
활대길이만 적당히 증가시키면 용두를 어디둬도 괜찮아지며 지랫대의 원리로 인해 방아쇠 당기는게 좀 무거워지긴
하지만 더 강한 힘으로 재빨리 용두를 화약접시에 넣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구조의 격발장치에 비해 위쪽의 단순한 용두가 붙은 것을 따로 serpentine-lock이라 부르며 구분
하기도 합니다.

조잡하긴 했지만 이 화승 격발장치는 이전의 핸드건들처럼 따로 노는 눈과 3개의 손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눈은 조준에만 전념하며 한손은 총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총의 뒷부분을 잡으며 방아쇠만 당기면 되었으니까요.
화승 격발장치는 핸드건의 발사율과 명중율을 늘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총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죠.

아래 사진은 현재 재현된 서양식 화승총의 모습입니다.
30년전쟁전후로 사용되던 것을 흉내낸 것이죠.
물론 총신은 현대적인 냉연강판을 사용해 만든 것지만 화승격발기구의 모습을 잘보여줍니다.

용두에 화승이 꼽힌 모습과 화약접시 덮개의 열림과 닫힘, 화약접시와 희미하게 보이는 점화구의 모습에 주목하시
길 바랍니다.

총의 구조와 그에 따른 사용법은 대략 다음 순서를 따릅니다.

1. 먼저 장전봉으로 총구를 확인하며 청소해줘야 합니다.

2. 확인이 끝나면 발사약용으로 제조된 굵은 입자의 화약을 총구쪽으로 부어넣습니다.

3. 다음으로 납 총알(흔히 총병이 스스로 주조하여 만들죠.)을 총구쪽으로 넣고 그 위에 천이나 종이뭉치를 다져
   넣어 총알이 아래로 굴러 나오지 않게합니다.

4. 화약접시의 덮개를 열고 고운 가루상태의 점화약을 부어넣고 덮개를 닫죠.
   점화구안쪽으로 점화약이 완전히 들어가야 하므로 그 상태에서 톡톡 쳐주거나 총을 흔들어 줘야하며 아울러 화
   약접시주변에 붙어있는 점화약은 입으로 불어 냅니다.

5. 용두에 화승을 꼽고 필요하다면 불을 붙입니다.

6. 총을 들고 조준한 다음, 덮개를 열고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됩니다.

7. 발사된후 장전봉으로 총강내부에 눌러붙은 화약찌꺼기를 한번 털어줘야 합니다.
   또한 화약접시도 작은 솔로 충분히 털어줘야하죠.
   만약 여전히 불타고 있는 찌꺼기가 총강에 남아있고 그위에 화약을 부었다가는 사고로 직결입니다.

화승은 항상 불이 붙어있나 확인해야하며 총을 발사하기 전에 입으로 불어줘 화승이 타는 빨간 불빛과 치직대며
타는 소리를 확인해줘야 합니다.
만약 화승에 붙은 불이 꺼지면 사격은 물건너가버리는거니.

화약접시에 점화약 부어넣고 점화구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항상 점화구는 화약찌꺼기가
없게 청소되야해야 했죠.
흔히 당시 병사들은 화약접시 청소용의 작은 솔과 뾰족한 철사를 같이 연결해서 휴대했고 이건 장전봉과 함께 필
수적인 휴대품이었습니다.
언제나 총이 발사된 후 화약접시를 솔로 털어주고 철사로 점화공을 뚫어주는게 불발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흔히 전투중 이런 것은 곧잘 가볍게 여겨졌고 덕분에 2번중 1번쯤은 flash in the pan이란 현상을 일으킵
니다.
직역하면 화약접시속의 번쩍임이며 총을 쐈으나 점화약만 타고 발사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졌으나 점차 '헛방치
다.' 내지는 '용두사미로 끝나다.' 란 의미로 사용되어 숙어로도 오늘날에 사용중입니다.


A의 경우는 발사약과 점화약이 점화구을 통해 제대로 만나있는 상태입니다.

B의 경우는 점화약이 발사약과 점화구속에서 제대로 만나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흔히 점화약을 화약접시에 부은 다음 잘 흔들거나 쳐주지못해 점화구속으로 제대로 안들어갔거나 점화약의 입자가
미세하지 못해 점구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해생깁니다.

C의 경우는 총을 쏘고 난뒤 점화구를 제대로 청소하지 못한 경우 화약찌꺼기등으로 인해 점화구가 막혀버려 점화
약과 발사약이 만나지 못했을 때 생깁니다.

B와 C의 경우는 언제든지 flash in the pan은 발생합니다.

만약 총을 쏘다가 불발이 생기면 다음 순서로 조처합니다.

1. 총을 조준자세로 들고 열까지 천천히 센다.
   간혹 화약이 총속에서 천천히 타들어가다 갑자기 발사되는 현상(지발, back-fire)이 생겼으니.

2. 화약접시 덮개를 닫고 용두에서 화승제거.

3. 화약접시 덮개를 열고 점화구 확인하고 점화구 청소용 철침으로 뚫어준다.

4. 만약 내부의 발사약이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면 화약접시를 잘털고 점화약을 다시 붇고 화승 꼽고 다시
   사격.

5. 필요하다면 화약과 총알을 모두 털어내고 다시 장전해서 사격.

한 때 유럽에서 총의 도입에 열성적이었던 스페인 총병들의 경우 불발에 대한 대처를 했는데도 총이 3번연속으로
불발된다면 주변의 동료들에게 총의 고장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른 해결법에 대해 듣고 다시 해봤는데도 발사가
안된다면 임의로 전장을 이탈해도 됐다고 하는군요.

불발탄 제거의 경우는 어떻게 했나?
이건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냥 털어 냅니다.
어차피 탄은 종이로 고정된 정도니 몇번 흔들어버리면 쑥빠져버리죠.
이렇게해도 안빠진다면 물을 한주전자 부어버리면 됩니다.
종이도 물에 불고 화약도 녹고 막혔던 점화구도 뚫어지고 겸사겸사 총신 청소까지.
물론 그후에 총신을 깨끗하게 씼고 잘말려야 녹이 안쓸지요.
약실뒷부분에 나사식으로 잠겨진 부분을 풀어낼 수 있는 경우 이를 풀어내고 불발탄을 털어내기도하나 보통 총들
은 이 부분이 꽉막혀있고 총상속으로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있어 총을 거의 분해합니다.
무척귀찮은 일이고 그래서 잘 했던건 아닙니다.

총의 관리에서 총신부분은 사용후 물로 씼어내야 합니다.
오늘날이야 강중유와 윤활유를 사용합니다만 이전에는 따뜻한 물로 총신과 화약접시를 씼어냈죠.
만약 잘 안씼어내면 총은 금방 녹덩어리로 변합니다.
당시 총신용 금속은 녹이 잘쓸고 화약역시 부식성 산화물을 내놨으니.
기록에는 일주일 그냥 뒀더니 총이 완전히 삭아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무 부분도 때때로 기름 먹여 손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그러면 나무가 뒤틀리며 부숴졌다고 하니까요.

보통 화승총의 제작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합니다.
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총신이고 당시처럼 두들겨 만든 총신을 다마스커스 총신Damascuss barrel)이라 부르죠.

1. 철판이나 청동/놋쇠같은 금속판을 불에 달궈서 두들겨 띠모양으로 만들기.
   테이프처럼 만들며 두들기는 동안 재료가 단련되는 효과도 얻어집니다.

2. 이렇게 만든 금속띠를 열을 가해가며 심봉(mandrel)을 두고 맙니다.

4. 감아붙인 금속띠를 열을 가해 붙입니다.

5. 금속띠를 총신에 다시 감아 붙입니다.
   2번정도 감았다은 뒤 대충 모양을 잡고 끝냅니다.

6. 총신 외형 다듬기.
   보통 육각형이나 팔각형으로 외형을 깍아내고 연마시킵니다.
   요즘의 총기들은 총신의 단면이 대부분 원통형입니다.
   그에 대해 손으로 두들겨 만들던 시대에는 육각형이 흔했습니다.
   이는 두들겨 만들 경우 원형 단면보다는 육각형 단면쪽이 다루기 쉽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 기계로 만들 때 육각형 단면쪽이 오히려 만들기 힘듭니다.

7. 총신이 얼마나 곧은가 검사합니다.
   어느정도 총신이 곧은가 검사되면 이제 심봉을 뽑아냅니다.
   아울러 총강면이 거칠지 않은가 검사합니다.

8. 내면을 다듬게 됩니다.
   이 과정이 총신 완성에서 중요합니다.
   오늘날의 바이스 비슷한 물건에 물려놓고 각각 지름이 다른 쇠막대들을 크기순으로 밀어넣어 총강면을 다듬죠.

9. 총구끝을 막습니다.
   이 작업이 가장 육체적으로 힘들고 중요합니다.
   총의 후미(오늘날 총으로 보자면 약실부)를 막는 작업으로 열쇠와 나사를 합쳐놓은 것같은 도구로 후미에 나사
   산을 파고 여기에 나사식으로 만든 쇳덩이를 돌려넣어 틀어막습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총이 폭발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 부분은 화승총 사수가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청소와 불발등을 제거하기 위해서하죠. (흔히 한건 아닙니다.)
   후일 원시적인 형태의 선반이 나오며 이런 작업은 좀 더 쉬워지지만 16세기까지만해도 가장 흠든 작업이었다고
   하죠.
   아예 뒷부분을 풀어내지 못하게 용접해서 붙여버리기도 했답니다.

10. 총신의 겉부분을 마무리합니다.
   다듬어진 총신의 외부에 상감을 넣기도 했으며 그보다 실제적인 것은 총신을 불에 태워 산화물 피막을 입혀 부
   식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11. 후미 측면에 점화구를 파냅니다.
   또한 조준장치와 총상, 격발장치를 붙일 곳을 표시하고 대충 파내어 둡니다.

12. 이미 만들어지고 준비된 개머리판이 포함된 나무로 만들어진 총상에 총신을 물립니다.
   총상은 보통 오동나무등의 목재로 만듭니다.

13. 점화구 부분에 화약접시를 붙이고 준비된 격발장치 부착.

14. 준비된 조준장치 부착 및 마무리.

총을 만드는 공정들은 분업화되어 몇명이상의 장인들이 제각각 다른 작업을 합니다.
즉, 총은 분업화와 전문화된 공정을 채택한 것이란 거죠. (표준화까지 되기에는 시간이 더 지나야 합니다.)

총신같은 작은 구경의 관모양 물체는 주물을 부어 만들기에는 오히려 복잡합니다.
내부에 기포가 생기거나하고 특히 총신같은 작은 물체를 만들기에는 당시 주물기술이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들겨 만드는 법을 선택한 것이죠.

또한 당시 대장장이들은 두들겨 만드는 것에 익숙했고 그 결과 그들의 기술내에서 만들 수 있는 총은 활보다 생산
성에서 앞서버립니다.
적어도 활보다는 대중화된 제작법을 도입하기 좋은 것이었습니다.
쌔놓고말해 전혀 실생활에는 도움이 안되는 활제작과 가진 기술로 쟁기만들다 총만드는 편이 훨씬 일손구하기도
쉽고 기술을 전파하기도 좋은 거죠.
그 결과 총은 활보다 더많은 양을 만들고 지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더 많은 양의 생산과 지급은 경제성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화승(slow match or match)은 밧줄이나 노끈을 초석용액(질산칼륨 혹은 질산나트륨)에 적셨다 말려서 만듭니다.
불을 붙이면 어지간한 바람이 불어도 약간의 비가 와도 불이 꺼지지 않게됩니다.
또한 일정시간을 타들어 갑니다. (그래서 화승작이란 것이 있었죠.)

밧줄은 보통 아마를 사용하며 그외 면이나 종이 노끈같은 홉수성이 괜찮은 식물성 섬유도 사용가능합니다.
동양권에서는 대나무를 잘풀어 섬유로 만들고 초석용액을 적셔 만들기도 했다죠.

만들어진 화승에 초석분이 많을수록 더빨리 타오릅니다.
또한 연소중 불똥이 생기기도하죠. 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화승을 만드는데 적당한 초석의 양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물 1리터당 10g가량이라는군요.
(상온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녹는 양입니다.)

만들어진 용액속에 밧줄이나 노끈등을 담궈뒀다 건져내어 잘말리고 다시 용액속에 집어넣었다 빼내어 말립니다.
이를 3 ~ 5번 정도하면 화승이 완성됩니다.

화승작:
일정한 길이의 화승을 사람수만큼 걸어두고 불을 붙인 뒤, 화승이 다타기 전에 시나
글을 짖는 당시 글쟁이들의 놀이.
화승을 시계로 사용한 좋은 예일듯.
향을 피우면 좀 더 운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향은 값이 비싼지라...

당시 서양의 총병들은 화승을 보통 2 ~ 4 피트가량의 길이로 개머리판이나 오른쪽 팔에 감아 손가락으로 밀어가며
사용했고 예비 화승은 모자 둘레에(습한 날씨에는 이따금씩 모자 내부에) 혹은 왼팔에 둘러 두었거나 탄띠에 매달
아 두었습니다.
이건 일본이나 우리나 비슷했다고 하죠. (모자에 화승을 감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당시의 화승총 사수들은 일반적인 발사약용의 굵은 화약이 담긴 큰 화약통(powder flask)과 발사약보다 입자가 곱
고 빨리 타는 점화약이 들어 있는 점화약통(touchbox, 우리식으로 귀약통)이라고 불리는 보다 작은 화약통을 휴대
합니다.
화약통들의 일종입니다.

오른쪽은 뿔로 만들어진 것이며 왼쪽은 금속으로 된 것입니다.
이들 화약통의 목 부분은 정확히 총알 한 발을 쏠 수 있을 만큼의 화약이 담겨지게 만들어집니다.
즉, 이런 화약통은 마개가 개량컵으로 만들어진 샘입니다.

개중에는 화약통 내부에 스프링이 걸려있는 차단판이 들어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사수가 화약통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막고 뒤집으며 병목부분의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면 차단판이 열리며 화약이
일정량 쏟아집니다.
화약이 잘떨어지게 흔들어 주는게 요령입니다.
그리고 눌렀던 것에서 손을 때면 화약은 더이상 나오지 않게되겠죠?
이 상태에서 총구에 화약통의 입구를 대고 손가락을 때면 알맞은 양의 화약이 총신속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뭐 애들 장난감 같은 물건이나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개량장치가 달린 화약통은 일견 무의미해 보이지만 약간만 깊게 들어가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장총시절, 얼마만큼의 화약을 넣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사수들을 고민하게 만든 것입니다.
많은 화약은 더 강력한 힘으로 탄을 추진시켜주지만 반대급부로 그만큼 총에는 위험합니다.
특히 총신과 총의 각 부분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면 이는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희안한 일이겠죠.
그렇다고 적은 화약은 안전할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탄은 약하게 추진될 수 밖에 없는것이고.

흔히 (총신내에서) 손가락 3 ~ 4마디 분량이라 일컬어지는 화약량이 장전됩니다.
머스킷의 경우 화약이 2온스(약 62.2g)정도 장전되는 경우도 있었고.

화약통에서 화약을 일일이 꺼내는 것보다 더 빨리 장전하기 위해 미리 양이 개량된 발사약과 총알을 넣어두는 작
은 나무병이 등장합니다.
나무병의 마개에는 탄을 넣어둘 수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흔히 탄띠(bandolier)에 12개가 휴대되어 사용됐으므로 12사도(12 Apostle)란 별명으로 불리게되죠.

중요한 것은 이 12사도를 전투중 다쓴 경우가 드물다는 겁니다.
능숙한 사수라도 12사도를 다쓰려면 30분가량 전투를 치뤄야했고 이는 그만큼 당시의 총이 다루기에 호락호락하게
만만한건 아니라는 반증이 됩니다.
총은 2분당 1발꼴로 장전과 사격됐고 어설픈 사수는 5분에 1발정도 쏘는 것이 신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장전중 조금만 실수해도 사고와 불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 당시 총은 사고가 빈번합니다.
특히 총의 뒷쪽이 터지는건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죠.
특히나 이런 총기들은 항상 점화구 주변을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만약 총뒷쪽이 금이 갔거나하면 당장 총의 사용을 중지하는게 좋은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 총병들의 경우 만약 사수가 3번을 연속으로 불발할 경우 동료들에게 그 원인을 물어보고 해
결책을 못찾으면 지휘관과 동료에게 자리를 떠도 되냐고 물어보고 전장을 이탈해도 됐다는 겁니다.

또한 습한 날씨에는 화승은 불이 꺼져 버렸고 화약도 그 성능이 떨어졌습니다.
만약 비가 온다면 화승총은 무용지물로 변해버렸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화승총을 사용하고 있었던 그의 병사들에게 아무 이유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은 아닐겁니다.

'믿음은 신 안에, 화약은 언제나 말라 있게.'

영국해군에서는 'Keep your powder dry'라는 오래된 경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죠.

탄은 12사도의 마개, 탄띠의 쌈지, 별도로 만든 총알통등등에 넣어 두었고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서양의 경우 두
발을 입안에 넣어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글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을 수 있게 됐죠.
'명예롭게 항복한 군인들은 그들의 총알을 입안에 넣어 둔 채 행진해 나갈 수 있다.'
즉, 무장을 그대로 가진채 항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에서는 1파운드의 납으로 몇발의 탄을 찍어내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총신에 꽉 낄 정도로 만들어 명중률은 좀 더 좋게 하지만 장전은 힘들게 할것인가?
(장전하려면 장전봉을 총신에 넣고 나무망치등으로 살살 쳐줘야 할정도죠.)
아니면 헐렁하게 만들어 명중률은 떨어져도 장전을 쉽게 하느냐?
아무래도 총신에 꽉 낄 정도면 납 1파운드당 찍어낼 수 있는 탄의 양도 감소합니다.
하여튼 이런 특정 무게(파운드같은)에서 몇개의 납구슬(탄)을 찍어내냐는 것은 총의 구경을 결정하는 것으로 사용
됐고 현재 산탄총에서 게이지(gauge)란 구경 단위로 남아있다는걸 아실 겁니다.

탄의 경우 납으로 만든 공모양의 것으로 병사들이 납을 받아 스스로 찍어냅니다.
병사들의 사물가방에는 탄을 찍어내는 주물(bullet mold)과 납을 녹이는 작은 국자, 여분의 납덩어리나 납조각등
을 들고 다녔습니다.
총알찍어내는 주물은 마치 팬치처럼 생겼고 중간에 총알크기만한 구멍이 나있어 이 부분을 사용해 붕어빵 찍어내
듯이 총알을 찍어냅니다. (붕어빵 굽는 틀을 유심히 보셨다면 쉽게 이해되실듯.)
다음 사진은 총알을 찍어내던 주물중 하나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팬치처럼 보이며 위에 녹은 납을 부어넣을 구멍이 보입니다.
이걸 벌리면 다음과 같이 둥근 총알 모양의 틀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탄을 만드는 과정.
1. 주물을 붙이고 작은 국자에 납을 넣어 녹입니다.

2. 주물을 꽉잡아 닫은 다음 녹은 납을 주물의 윗쪽에 나있는 작은 구멍으로 부어넣습니다.

3. 납이 충분히 식으면 주물을 벌려 탄을 빼냅니다.

4. 탄의 튀어나온 부분을 자르면 둥그런 탄환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게이지:
12게이지 산탄총의 경우 납 1파운드로 12개의 구슬을 만들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즉, 12게이지는 납 1/12 파운드로 구슬을 만들었을 때 그 구슬의 지름에 해당하는 길이가 구경으로 통용된다는 의
미입니다. 자세한건 산탄총 부분을 보시고.

납 1파운드로 만들 수 있는 대략적인 총알수.
구 경 42 46 49 53 59 62 67 74 78 84 93
총알수 64 발 50 발 40 발 32 발 24 발 20 발 16 발 12 발 10 발 8 발 6 발


그외 화승총 사수들은 이에 더하여 총을 쏘는데는 필수적인 장전봉(ramrod, 총의 자루 안에 넣어 두었음), 총을
닦을 수입포, 화약접시 청소도구, 화승에 불을 붙이는 점화도구(부싯돌과 부시를 칠 철판, 부싯깃, 불씨를 담아둘
통)등을 들고 다녔습니다.

또한 여러 목적에 사용하려 칼 한자루를 차고 다니죠.
당시 칼은 이전 시대보다 가볍고 짧아지며 흔히 레이피어라 불리는 그런 유의 칼이나 단검류였습니다.
그나마 짧아지고 가벼워 졌다는 레이피어도 휴대가 불편하다는 점이 곧 부각되어 단검쪽이 더욱 인기가 상승해버
리지만.

불은 손바닥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불씨를 보존하는 도구가 있었습니다.
겉에 통기용 구멍이 나있고 뚜껑을 열면 내부에 또다른 구멍이 여러개 나있는 통이 하나 더 들어있는 겁니다.
여기에 숯덩어리같은 불씨를 넣을 수 있죠.
아니면 부싯돌과 부싯깃, 부싯돌을 칠 수 있는 철판을 붙여둔 작은 통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 아닌 당시의 생활도구였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병사들의 모습니다.

허리에 찬 레이피어, 총, 점차 가벼워지는 갑주들, 특히 가장 왼쪽의 빨간색 스타킹을 신은 총병에 주목하시길.
이 총병은 한손에 총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와 가슴에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탄대에는 탄약통인 사도(apostle, 오옷 에반게리온?!)들이 줄줄이 걸려있죠.
거기다 허리춤에는 탄을 넣어두는 쌈지와 그 밑에 달린 화약통, 쌈지 뒷쪽에 묶인 한꾸러미의 화승이 달려있고.

 

화승격발방식(matchlock)의 시대 2


화승 격발장치를 쓴 화승총은 서양에서는 아쿼버스(arquebus or harquebus)와 머스킷(musket)으로 구분됩니다.
사실상 같은 무기가 짧으냐 기냐에 따라 구분한 정도였고 머스킷은 아쿼버스보다 총신이 훨씬 더 길며 더 두껍고
튼튼해 더 많은 화약을 넣을 수 있고 덕분에 더 무거우며 더 비쌌습니다.
또한 더 멀리 나갔으며 비교적 좀 더 정확했고 화력도 강합니다.
(근거리건 장거리건 총신길고 화약 많이 들어가고 강력하게 발사시키는 놈이 세지 구경크다고 장땡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머스킷쪽이 다루기엔 까다로운 편입니다.
긴 길이와 무거운 무게로 장전이나 휴대등에서는 불편하니까요.
머스킷은 손쉽게 다루기에는 크고 무거워서 아쿼버스가 지지대를 포기한 것에 반해 꽤 오랫동안 지지대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머스킷 사수는 노끈으로 된 고리를 그의 손목에 걸어서 지지대를 들고 다녔으며 뾰족한 지지대는 상대방을 꼬치로
만드는 방어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었답니다.

아쿼버스는 독일어에서 유래됐다고 봅니다.
독일어로 하켄부흐세(hackenbuchse, 갈고리총)이란 말에서 나왔다고 제법 큰 영어사전등에서는 설명합니다.
(옥스포드 영영사전등을 참고바랍니다.)
하켄은 아시다시피 갈고리입니다. (하켄크로이츠, 갈고리 십자란 단어를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갈고리(하켄)는 총을 지지하는 목적으로 총구아랫부분에 장착됐고 초기의 핸드건들이 무거웠다는 것을 반증합
니다.
무거우니 어딘가 거치해야했고 아쿼버스도 지지대를 사용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아쿼버스병을 그린 그림들이 참고가 되죠.
(분명히 당시 총병의 장비에는 그가 아쿼버스건 머스켓이건 지지대를 포함시켰습니다.)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이언 호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 하켄부흐세가 영어로 옮겨진 것은 해크버트(hackbut)라고
하며 1527년의 프랑스에서 기록된 문서에 따르면, 해크버트 사수와 아퀴버스 사수는 각기 다른 봉급을 받았다고
하네요.
해크버트 사수가 아퀴버스 사수의 10배의 봉급을 받았다고 하며 결론적으로 해크버트와 아퀴버스는 별개의 무기이
며 아퀴버스가 보다 널리 퍼져서 일반화되었다는 것이 호그의 주장입니다.

머스킷은 이탈리아어 모스켓토(moschetto)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게 이탈리아의 산악지에 서식하는 매라나요.
매처럼 날카롭게 잘맞아서 그런지 매를 맞춰 떨굴정도로 잘맞는건지 심심한 차에 붙여본건지 모르지만 이렇게 이
름이 붙여졌답니다.

그러다 이 머스킷이 점차 작아지고 다루기 편한 정도로 가벼워집니다.
(총신제작기술이 좀 더 발전하죠.)
개량된 머스킷은 아쿼버스를 밀어냈고 120 ~ 140cm 정도 되게되며 총병의 화기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소총을 라이플(rifle)이라 부르듯이 머스킷이 당시의 소총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잡게되며 17세
기 중반쯤에 부싯돌 격발장치(flint lock)이 붙게되면서도 여전히 머스킷이란 단어가 사용되게 됩니다.
이 머스킷이란 단어는 라이플이 본격적이 되며 이젠 자리를 라이플에게 내주며 역사속으로 묻혀버립니다.
지금으로선 전장식 활강의 구식소총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정도로.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소총을 라이플이라 여전히 부르고 있고.

만약 누군가 새로운 계념의 라이플을 대채할 그런 소총을 만들고 이것이 표준화기로 운용됐다고 칩시다.
이 새로운 화기가 블러스터라 불린다면 미래의 서적등에선 소총을 블러스터라 부를 수도 있죠.
그리고 라이플에 대해서는 또한 구시대의 물건이라고 지칭하겠죠.
이건 언어적인 측면도 고려해야할 사항입니다.

명확하게 이해할 것은 아쿼버스보다 머스킷이 더 무겁고 더 강력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쿼버스가 두손에 들려져 쏘아진 시대에도 머스킷은 지지대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고 머스킷이란 단어는
꽤 오랫동안 사용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전된 화승격발식 총기들은 현재와 비교하자면 매우 불편했지만 전쟁의 방식을 변화시키게되죠.

기록상 아쿼버스의 경우 100야드 거리에서 당시 사용되던 갑주를 어렵지 않게 관통했고 이는 강력한 석궁만큼은
나온 편이었습니다.
석궁들이 대략 100 ~ 120야드정도에서 최고의 갑주를 제외한 일반적인 갑주에 유효했으니.
아쿼버스보다 긴 총신에 더많은 화약을 사용하는 머스킷의 경우 100야드내라면 사람이 입고 돌아다닐만한 무게의
갑주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종종 이전의 구식 총이라고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날의 44 Magnum탄과 비슷했다면 과연 그래도 만만할
까 의문이 생깁니다.

이는 동양에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일본 전국시대의 총병대에게 50 야드이내로 접근해 갑옷을 자랑한다는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철포는 이런 갑옷을 깨끗하게 관통해서 사람의 몸을 파괴하고 때때로 등뒤로 총알이 튀어나올 정도의 위력을 보여
줬으니.

일본에서는 다네가시마를 통해 화승총이 전례됩니다.
지금도 이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 전례를 기념하는 마츠리가 매년 열린다지요.
이렇게 전례된 철포는 일본에서 국산화되며 초기의 일본 조총은 후미 폐쇄가 제대로 안되어 폭발이 잦았다고하죠.
총의 뒤를 막는 문제를 해결하려 딸을 서양상인에게 붙여주고 정보를 빼낸 전설적인 사기극이 일본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뎃포:
이 말은 '일하는게 무뎃포다.'는 식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는 일본식 표현으로 '무'(없는) + '철포'(화승총)이 합쳐져 나온 말이며 해석하자면 철포없이 까분다는 이야
기입니다.
즉, 전쟁에서 철포도 없이 간크게 싸움건다는 이야기죠.
총이 일본의 전쟁에서 어느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주는 한장면이겠죠.

구경표시는 서양처럼 납탄의 무게당 지름으로 표시됩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몬메'라고 부릅니다.

몬메와 mm로의 환산, 그리고 총신두께 정하기.
몬메는 당시 일본의 무게단위로 1몬메는 약 g입니다.
0.1몬메는 1분()이며 아래 환산표에서 8.5몬메는 8몬메 5분을 의미합니다.
종종 몬메는 한자로 '목'자를 쓰고 '메'라 읽기도 합니다.
그래서 6몬메가 6메로 읽히기도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통경은 총강의 지름입니다.
옥경은 탄의 지름입니다.
(현실적으로 6몬메 이하는 상당히 없습니다만 참고삼아 보시길 바랍니다.)
몬메 통경(mm) 옥경(mm) 몬메 통경(mm) 옥경(mm)
0.1 4.0 3.9 11 19.3 18.9
0.2 5.1 5.0 12 19.9 19.5
0.5 6.9 6.8 13 20.4 20.0
0.8 8.1 7.9 14 20.9 20.5
1.0 8.7 8.5 15 21.4 21.0
1.5 9.9 9.8 20 23.6 23.1
2.0 10.9 10.7 25 25.4 24.9
2.5 11.8 11.6 30 27.0 26.5
3.0 12.5 12.3 35 28.4 27.9
3.5 13.2 12.9 40 29.7 28.2
4.0 13.8 13.5 50 33.0 31.4
4.3 14.1 13.9 60 34.0 33.3
4.5 14.3 14.1 70 35.8 35.1
5.0 14.9 14.6 80 37.4 36.7
5.5 15.3 15.0 90 38.9 38.2
6.0 15.8 15.5 100 40.3 39.5
6.5 16.2 15.9 150 46.2 45.3
7.0 16.6 16.3 200 49.8 49.8
7.5 17.0 16.7 250 54.7 53.7
8.0 17.4 17.0 300 58.0 57.0
8.5 17.7 17.4 400 64.0 62.8
9.0 18.1 17.7 500 68.9 67.6
9.5 18.4 18.0 1000 86.9 84.2
10.0 18.7 18.4

총신의 두께는 무게와 상당히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주로 철이나 구리합금으로 만들어진 총신은 일정한 두께를 가질 필요가 있죠.
여기 재미있는 공식이 하나있습니다.
총신의 외부 지름(구경은 내부 지름이죠?)에 대한 것인데 mm로 환산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통(총신) 외부의 최대지름(mm) =1.52 X 구경(mm) + 8.6

통의 외부 최소지름 = 1.33 X 구경(mm) + 2.45

물론 이 공식대로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해볼 가치는 있을 겁니다.


사거리는 100m정도에서 유효, 실제적인 사격은 50m정도에서 이뤄지며 10몬메정도의 철포면 60mm가량의 나무를 관
통하며 30m에서 일본갑옷을 충분히 관통가능했답니다.

아래는 기록상 일본의 철포 동원양입니다.
연도로 표시했지만 일본에서의 어떤 군사적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은 보시는 분이 심심풀이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시기 사용철포수 병력대비
철포장비수
1575년 3,000 정 30%
1592년 60,000 정 30%
1597년 50,000 정 30%
1600년 80,000 정 40%
1614년 100,000 정 30%

최초 도래시기에 철포한정은 무려 1천금입니다.
현재의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무려 1,155만엔.
오다 시대에는 철포한정이 10석~12석 가량이었다죠. 현재 일본돈으로 9석이 54만엔이라는군요.
토요토미 시절에는 6몬메 한정이 9석, 30몬메가 40석.

서양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16세기동안 여전히 전투에 동원됐지만 실효성은 줄어들으며 총을 휴대한 보병들이
전투의 핵심세력이 되어갑니다.
1605년에 출간된 돈 키호테(Don Quixote)는 점점 사라져가는 기사들을 처철하게 비웃어 버리죠.
비록 여전히 기사들은 그에 대해 반발하려 했지만...

총알로 인해 절망적일 정도로 무겁게 만들어진 갑옷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머스킷이 도입되면서 대부분의 갑옷이
거의 쓸모 없게 됩니다.
전신 갑옷은 16세기에 들어서며 없어지기 시작하며 16세기 중반이후로는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과 투구 정도로만
남겨집니다.
덕분에 갑옷은 장식용이자 전리품으로, 혹은 만약을 위해 입는 정도로 변하게 됩니다.
또한 무거운 갑옷은 병사들에게 경시됩니다.
갑옷 값이 그들의 급료에서 공제되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한편 총은 위력을 제외하고도 전쟁을 더욱 경제적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활은 숙련된 사수가 쏠 경우 총보다 훨씬 우위의 발사속도와 장거리 명중률을 보여줍니다.
능숙한 총병들이 보통 50 야드정도의 사거리에서 1분당 1발을 쏘아댈 수 있었지만 활은 능숙한 사수라면 300야드
의 적에게 같은 시간에 2발이상을 퍼부어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숙한 사수란 점은 총과 활이 전혀 다릅니다.
능숙하게 총을 다루는데는 고작 1달정도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능숙하게 활을 다루려면 1달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몇년씩이 투자되야할 지경이었죠.
영국이 그들의 장궁병을 키우기위해 일정한 토지가 있다면 주말마다 파핀제이를 쏘게 법으로 정한 것을 보시길 바
랍니다.
과연 이런 판에 활을 든 사람들이 전장에서 어느정도의 맥을 이어갈 수 있을런지 자명한 사실입니다.

더욱이 총은 그저 들어올려 견착하고 조준한 뒤 방아쇠만 당기면 되고 장전문제만 해결하면 1명의 훌륭한 사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발사할 때 활처럼 근력이란건 필요가 없었고 백병전 상황에서 총을 몽둥이 삼거나 허리의 칼을 휘두를 때만 근력
이 필요합니다.
어느 이슬람 기병의 말대로 아녀자와 어린애도 전사를 죽일 수 있는 비열한 병기였죠.

여기에 기존의 석궁병을 총병으로 다시 훈련시키는 것은 까다로울게 전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석궁사수들은 석궁의 기계장치와 발사될 때의 반동에 익숙했고 조준법도 총과 비슷했죠.

생산기술이란 면에서도 총은 대중적인 기술과 폭넓은 장인층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렴하다는거죠.
평시에는 쓸모없는 활제조업보다 평시에 금속가공업을 하다 총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큰 잇점입니다.

총의 위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명중률의 문제는 총의 사거리를 100야드에서 50 야드가량의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
은 것으로 제한하는 큰 원인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전장식 활강총들은 아주 실망스러운 명중률을 가집니다.
사람만한 표적을 150 야드에서 조준해서 쏘는건 달을 맞추겠다고 작정하는 것만큼 쓸모없다고 말해질 정도였죠.

전장식 활강총의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점은 먼저 그 구조에서 연유됩니다.
이른바 유극(windage)이라 불리는 것 덕분이죠.

총강의 지름(구경)과 총알의 지름이 같다면, 즉 유극이 작다면 적어도 명중률이 심각하게 나빠지는걸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총강에 꽉 끼는 총알은 그만큼 장전이 힘들며 장전속도를 떨어트립니다.
부차적으로 아직은 나무로 만들어진 장전봉(ramrod)를 부러트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유극이 큰, 총강보다 작은 총알이 사용되는 경우 장전은 매우 쉬워집니다.
그저 총알을 총구에 굴려넣어도 그만이니 장전속도는 더욱 빨라집니다.
문제는 유극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명중률은 감소됩니다.
또한 유극사이로 빠져나가는 가스는 화약이 내는 힘을 총알에 전달하는데 나쁜 영향을 줍니다.

주물로 만들던 총알이 잘못되어 유극을 크게 하며 아울러 비행중 탄도를 불안정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통 여가시간을 활용해 총병들이 직접 납조각을 작은 국자에 녹여 주물에 부어 총알을 만들었는데 이때 충분히
식어 굳지않은 상태에서 주물을 벌려 총알을 빼내면 흔히 총알은 알게모르게 이그러지게 됩니다.
덜식은 것을 완전히 식히려 물속에 빠트리면 이런 일은 적어지지만 이 역시 믿을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어느정도 굳기 전까지는 주물을 벌리지 않는게 좋은 총알을 만드는 요령이었죠.

이런 식으로 불규칙하게 제작된 총알은 당연히 총강내에서 더 큰 유극을 만들며 또한 비행중 부정확한 탄도를 형
성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오랫동안 총알 제작에 경고됐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시된 적이 적지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총알을 만들고 식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이었죠.

한편 총의 정확성을 높이고자 patch라는 것이 애용됩니다.
그리스를 먹인 가죽이나 두터운 천으로 구슬모양의 총알을 감싸 들어가는건 어느정도 쉽게 하면서 유극을 작게 만
들겠다는 것이죠.
물론 발사하면 총알을 감싼 가죽이나 천조각은 총구주변에서 떨어져버립니다.
일종의 송탄통(sabot) 역활을 하는 것이죠.
이 방법은 후일 전장식 라이플이 사용되면서도 계속 사용됩니다.



종종 병사들이나 사냥꾼들은 좀 더 딱들어맞는 총알에 빡빡한 천이나 가죽조각을 대고 망치로 장전봉을 쳐가며 장
전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면 장전시간은 더걸리지만 명중률은 상승됩니다.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활강식 전장총에서도 잘 감싸고 장전할 경우 50 ~ 100야드부근에서 10발당 8발은 4인
치 원안에 적중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100야드에서 3피트정도의 오차는 감수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명중률이 나올 정도로 총알을 감싸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고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죠.
이런 답답하고 세심한 방법보다는 집중된 화력을 마치 거대한 산탄총처럼 뿌려대는게 전투에서는 효율적이고 또한
당시 지휘관들과 군사전문가들도 인지했던 사실입니다.

하여튼...
명중률 덕분에 전투는 흔히 혼전으로 치달았고 명중률을 보완할 어떤 방법이 동원되야 했습니다.
바로 총병의 밀집과 일제사격으로 화력을 통한 명중률의 보완인 것이죠.
겸사겸사 누군가가 총을 다루는 순서를 불러주어 박자를 맞춰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군가처럼 노래로 불려졌을지도 모르죠.)
장전과 발사의 순간들을 지휘자가 일치시켜 사고와 불발을 방지하고 또한 화력마저 통제 가능하다는거죠.

또한 사격속도의 공백을 치고 들어오는 기병의 돌격을 막기위해 창병(pikeman)의 호위가 첨가됩니다.
총을 장전하는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나며 연속된 일제발사도 장전중의 무방비 상태를 막지는 못합니다.
이 무방비한 틈에 창병들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죠.
그들의 엄청나게 긴 창(22피트정도로 6m가량)은 그리스의 팔랭스만큼이나 길었습니다.
당시 창병의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어떻게 장창을 잘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지도 모르죠.

'알아서, 잘.'

창병들의 고슴도치같은 진형은 기병들의 돌격에 대해 효과적이었으며 총병들에겐 이상적인 엄호라는 것이 입증됩
니다.

종종 장창은  자루의 엄청난 길이로 인하여 잘라낸 역적이나 적의 목을 꿰어두는 효수대로서도 아주 유용하게 사
용됩니다.
덕분에 장창은 봉사가 아니라면 충분히 보이는 것이었고 여기서 명백한(as plain as pikestaff)라는 숙어가 등장
합니다.

최초로 전투중 총병의 밀집대형과 일제사격을 행한 것은 유럽의 종교전쟁이 한참이던 때입니다.
대략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반쯤이죠.
당시 총은 화승격발식(matchlock)의 아쿼버스와 머스킷이 사용되던 때였고 특히 신교도(Protestant)의 군대들은
새로운 가볍고 다루기 쉬워진 머스킷을 의욕적으로 받아들인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16 ~ 17세기 초반의 머스킷은 6피트 정도의 길이로 4피트 정도인 아쿼버스보다 길고 더많은 화약과 긴
총신으로 더 강한 위력을 가졌던 것이죠.
다만 무거워서 받침대는 필수적으로 필요앴고 다루기 불편하며 장전속도는 아쿼버스의 2배정도가 더 필요했죠.
아울러 가격은 4배정도 더 비쌌고.
그러나 이런 결점도 17세기에 들어서며 총신제조법이 발전하며 사라집니다.

한편 영국인들은 꽤 오랫동안 장궁에 집착합니다.
그나마 능숙한 장궁사수들을 많이 보유한 덕분이었죠.
그러나 1535년, 영국조차 장궁을 폐지해 버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에 최초로 도입된 머스킷은 해군용의 소형대포처럼 사용됐다는 겁니다.
종종 스프라이트(spright)라는 작은 화살을 발사하거나 2발의 총알을 6인치의 철사로 연결한 사슬탄(chain shot)
을 발사하여 돛과 삭구를 베어냈는데 문제는 둘다 총자체에 문제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때로 영국의 소형대포로서의 화승총들이 스프라이트나 사슬탄을 쏜 것처럼 화공용의 불붙은 화약뭉치등
이 달린 화살모양의 탄도 발사됐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이런 화공용 화살(?)을 쏘는 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은 전통적인 이른바 불화살이며 왼쪽은 총에 이런 불화살을 넣고 쏜다는 것을 보여주죠.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의 총류탄들(rifle grenade)의 먼 조상이라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1630년 무렵, 머스킷은 점차 가볍게 만들어졌기에 총신을 받쳐주는 받침대 없이 쏠 수 있게 됩니다.
아쿼버스보다는 아직은 좀 느렸지만 2분간 1발의 발사속도를 보여줬고.
이런 머스킷의 발전은 아쿼버스를 역사속에 묻어버렸으며 이후 소총을 의미하는 단어로 머스킷이란 단어가 꽤 오
랫동안 사용되게 됩니다.

신교도 군대들은 새로운 총의 채택외에 총을 사용하는 법도 실험합니다.
그들은 총병들을 2열 이상으로 세워 차례로 일제사격(salvo fire)을 퍼붓는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프랑스 종교전쟁(the French Religious Wars)에서 Henry of Navarre 휘하의 위그노들(Huguenots)이 이 방법을 처
음 실전하며 곧 네델란드인들이 스페인의 총병에 대항해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침내 스웨덴의 Gustavus Adolphus 휘하의 총병들이 밀집대형과 일제사격을 사용하며 30년전쟁(the Thirty Years
War)이 한창이던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Battle of Breitenfeld)에서 훨씬 많은 병력의 기병들이 돌격하는걸
저지합니다.

이 시기에 사격의 연속화를 위해 사격대형은 더욱 정교해지며 흔히 총병부대는 횡으로 6열이상으로 늘어서서 한열
씩 사격을 가합니다.
사격을 끝낸 열이 앉거나 종종 뒤로 빠져나가 장전을 하는 동안 그 뒤의 열이 사격을 했으며 충분히 두터운 열을
갖춘다면 총병의 대열은 마치 거대한 산탄총을 연달아 쏘는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밀집되고 정리된 사격대형은 지휘관들에게 사격통제의 용이함과 총병들이 장전시 까다로운 총을 다루며
일제사격을 퍼붙는데 좀 더 유리했습니다.

총이 전장을 지배하면서 참호와 방책의 존재는 더욱 커집니다.
의외일지는 모르지만 총의 발전은 활의 시대보다 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해줍니다.
총병들은 시간이 나면 기병을 막을 전통적인 나무 목책과 참호를 파야했습니다.
이 목책과 참호, 특히 목책은 이미 활의 시대에도 궁병들에게 통용되던 것중 하나입니다.

흔히 전방에 나무를 깍아 비스듬히 세운 목책을 세워 기병이 돌진하지 못하게 하면서  종종 그 목책사이에는 삼발
이 형태의 쇠못이 뿌려지기도 하죠.
이 목책과 장애물 뒤에 호가 파여지고 호에는 나무와 흙으로 보강된 벽이 세워지죠.
이 호속에 총병의 대열이 들어가 전투를 벌입니다.

이는 지금과도 그 기본적인 것에서는 별다른 차이점은 없습니다.
다만 영화등에서 흔히 전투는 열을 지어서있는 병사들끼리의 평지에서 서로 우둔할 정도로 총격전으로 펼치므로
이런 사실은 흔히 간과되기 쉽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구덩이를 파고 숨어서 일제사격을 펴는 총병은 100야드 안으로 접근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고용됐던 그 용감하고 단창으로 흔히 무장했던 스위스 용병들조차 총병들에게 쓴맛을 보고 다시는 건드
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방어적인 자세이며 적은 이 방어적인 총병을 피해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래서는 적의 세력을 파괴한다는 것이 어려워지죠.
좋으나 싫으나 적과 대면해야 전투가 되죠.

더불어 대군은 언제나 좋은 길을 요구합니다.
넓은 평원은 그만큼 좋은 이동로가 되어주는 것이고 만약 양측이 제대로 정찰을 안하며 전진하다 조우하면 참호를
파고 어쩌고할 시간도 없이 전투를 벌여야하죠.
당시 정찰은 소규모의 기병과 척후병으로 이뤄졌으며 무전기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평원에서의 조우와
죽고 죽이는 총격전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한편 스웨덴인들은 12사도 대신 더욱 간편한 페이퍼 카트리지(paper cartridge)를 채용하며 덕분에 능숙한 사수의
장전속도는 1분에 가깝게 단축됩니다.

그림은 1770년대의 머스킷 및 라이플용 페이퍼 카트리지를 만드는 법이지만 페이퍼 카트리지에 대한 개략은 설명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A는 사용된 종이의 치수입니다.
탄약을 감싸는 종이는 흔히 방수와 장전시의 편의를 위해 기름이 먹여지며 후일 인도에서 영국군은 실전부대의 건
의를 무시하고 소나 돼지의 지방분을 사용하다 이에 반발한 인도인 용병 세포이의 항쟁에 피를 흘려야만 했죠.

A의 종이를 B처럼 총알과 총알과 비슷한 지름의 막대를 댄 다음 말아서 C와 같은 둥근 원통을 만듭니다.
원통이 만들어지면 막대를 빼내고 D처럼 종이 원통의 앞부분을 꼬거나 묶어서 막습니다.

그런 다음 E처럼 총알이 들어간 부분을 다시 묶습니다. (안묶어도 됩니다.)

그리고 F처럼 적당량의 화약(소총의 경우 흔히 손가락 마디 2개정도의 높이)을 넣은 뒤 G처럼 뒤를 꼬거나 묶어버
립니다.

이렇게 완성된 페이퍼 카트리지는 탄약통에 넣어집니다.
탄약통 내부에는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어진 페이퍼 카트리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탄약통이 병사들의 탄대에 매달리게 되는거죠.

사용법은 G의 완성된 페이퍼 카트리지의 H처럼 뒷부분을 찢어서 총구에 대고 화약을 부어넣은 다음 I처럼 총알과
겉의 종이포장을 통채로 총구에 대고 J처럼 장전봉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답니다.



고운 가루상태로 만든 점화약은 별도로 작은 통(touchbox)에 넣어져 휴대되며 총의 화약접시에 부어집니다.

활을 몰아내고 전장의 주역이 된 총은 명중률을 화력으로 보완하게되며 차차 군사방면의 연구자들과 지휘관들은
화력우위에 빠져들게 됩니다.
더 빨리 더 촘촘한 화력을 퍼부을 것인가가 주요관심사였으니.

이런 분위기에서 불붙은 화승이 필요없는 방식이 요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