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조(新撰組)란 새로운 조직, 조합이란 뜻으로..
교토의 치안을 맡은 경찰조직입니다.
이기면 관군이란 기치에 희생양이 된..
일본의 개항후..
교토에서 좌막파와 유신파가 대립하면서, 수많은 탈번무사들이 살인을 자행하여
교토의 치안을 콩가루로 만들 무렵..
14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에도에서 교토로 상경할 때,
호위를 위해 어떤 조직이 만들어졌고.. 교토에 도착 후, 리더격이던 자가..
<장군을 지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양이를 하기 위해서 쿄토에 온 것이다.>
라는 발언을 하자, 조직은 분열되어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이 뛰쳐나와 별도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뛰쳐나온 무리들은, 교토의 치안에 골몰하던 아이즈번에 낙점되어..
아이즈번의 통제하에 교토의 치안을 맡게 되고..
1863년에, 미부라는 촌에서 신선조가 결성됩니다.
이때, 결성된 마을 이름을 따서 미부로라는 신선조의 별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에도에서, 실전검술에 치중한 검술도장을 운영하던..
천연이심류의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오시, 이노우에 겐자부로 등이 중심이었는데..
곤도가 국장으로 있을 때, 스모경기를 열기도 합니다.
이는, 신선조의 나쁜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개선시켜 주는데, 약간의 역할을 했고..
그 후의 신선조는, 68년까지 5년 동안 교토의 치안을 맡아.. 유신파와 피터지는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1864년, 신선조의 최대업적(?)이라고도 하는 이케다야 사건이 터지는데..
이 사건으로, 메이지유신이 삼년 늦어졌다라고도 하죠.
천황을 옹립하기 위해, 교토방화계획을 계획하여 이케다야란 여관에 모인
조슈번의 지사들을 비롯한 과격파들을 도륙한 사건이죠.
(이 공으로, 신선조는 막부와 천황에게서 훈공장을 받게 되죠.)
이 사건을 계기로, 신선조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를 받지만.. 개인적으론 글쎄요..
또한, 살인자집단이라느니, 테러리스트라느니 하며 교토에서 혐오받기도 하죠.
하지만, 당시의 교토에서 일어난 온갖 범죄들은 유신파들의 몫이 컸으며..
신선조는, 이들에게서 나라나 시민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좌막이란 사상보다는, 경찰이란 임무상.. 난동을 부리는 유신파들을 단속하기 위해..
칼부림을 하게 되고.. 이에 맞서 대항하는 유신파..
서로간에 감정이 격화되는 시점에서..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고.. 신선조는 관군에 어긴 형태가 되어 악역이 되어 버립니다.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하자 북상,
마지막 하코다테 전투까지.. 끝까지 유신에 저항하다가 사라지죠.
지휘체제는, 국장 - 부장의 명령체제에 참모라는 보좌역이 중간에서 조언을 했으며..
부장의 제량권이 매우 커서, 이케다야 사건에서 보듯이 결단과 행동이 매우 빨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선조의 강점이었을거라 여겨집니다만..
부장이 실패를 하면, 할복하는 것으로 책임문제는 끝났다고 하죠.
조원은, 초창기는 13 ~ 24명 정도.
이케다야 사건 무렵엔 83명.. 전성기 때는 170 ~ 180명
도바 후시미 전투 직전엔 66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출신으론, 무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농민, 상인, 의사, 승려, 장인들이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10번대까지의 행동조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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