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사무라이

구름위 2013. 1. 1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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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侍(さむらい) 바로 武士(ぶし)일 것이다. 검은 도복에 칼을 차고 할복 자살을 기도하는 그들의 상징적인 모습은 만화나 영화의 주요 아이템이 되기도 한다. 남성다움, 잔혹함, 진중함의 대표이기도 한 사무라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侍(さむらい)의 어원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武士)는 "가까이에서 모신다" 는 뜻에서 나온 말로,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헤이안조[平安朝(へいあんちょう-평안조]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せっかんけ-섭관가) :섭정과 관백 벼슬을 하는 가문]와 院(いん-어린 천황을 대신해 은퇴한 천황이 정치를 하던 기관)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보통 무사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카게무샤[ 影武者-かげむしゃ]란, 일본의 전국시대에 영주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적을 속이기 위하여 대장이나 주요 인물처럼 자신의 외모를 닮은 가짜자무사를 데리고 나가 위장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 가짜무사를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라고 불렀다.

가마쿠라시대 - 낭당(郞黨)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이 있는 무사를 일컬었으며 형벌도 낭당과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 - 대체로 상급무사를 지칭하였다.

에도[江戶]시대 -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막신(幕臣) 중에서는 하타모토(旗本:에도시대 將軍家 직속으로 만석 이하의 무사)를 가리켰으며, 가치[徒]와 주겐[中間: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무사와는 구별하였고, 제번(諸藩)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무사 직위의 하나] 이상의 무사를 이렇게 간주하는 등,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무사가 발생하게 된 배경

귀족들이 지방을 돌보지 않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있는 동안 정치는 문란해져 갔고 특히 지방은 무법화 되어 갔다. 이후 각 지방마다 무력집단이 생기기 시작 사실상 이들이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武士였다. 이들은 幕府(막부)라고 하는 지방 정부격에 해당하는 곳의 지배자인 영주에게 속하여 나라의 통치를 도왔고 그 대가로 농지를 받아 농민들을 직접 관리하며 힘을 키워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무사의 특권

에도(江?)시대 무사에게는 세가지의 특권이 부여되었다.

첫번째로 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는 제도로 에도시대에 농민이나 상공인등 양민이 무사에 대해 무례를 했을 때 칼로 목을 쳐 죽여도 죄가 안되었던 제도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베어서 버려도(切り捨て) 벌을 받지 않는다(御免)는 것이다. 무제한으로 허용된 권리는 아니었으며, 死後에 반드시 조사가 뒷따랐으며 정당한 이유없이 양민을 살해한 경우는 처벌되기도 했다.

두번째는 무사에게만 허리에 칼을 찰수 있도록 허락했다.

무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칼은 한사람이 패도(큰 칼. 또는 장도), 급발(1자 이상의 중도), 해수도(1자, 즉 22.5cm 정도 길이의 칼) 등 세자루의 칼을 가지는데, 이를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 대전시 크고 작은 칼 두가지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일본식 쌍검을 이도류라고 한다. 그러나 조총이나 활, 창 등을 든 자는 장도 하나만을 휴대했었다.

侍(さむらい)하면 떠오르는 것, 武士道

충(忠)과 무(武)를 중시하는 武士道는 충성. 희생. 신의. 예의. 결백. 상무. 명예 등을 중시하는 무사계급층의 도덕체계로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으며 일본의 통치이념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의 무사(武士)는 주군의 은혜와 보호에 대한 대가로 영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우는 것이 주군에 대해 충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식밖의 행위도 무사도(武士道)라는 명분아래 서슴없이 자행했고 싸움에서 졌을 때는 주인에 대한 충성으로 할복(切腹)을 했던 것이다.

그럼 왜 하필 배(腹)를 갈랐을까?

무사의 할복은 평안시대 이후 시작됐다고 전해지는데 봉건시대의 무사는 정신이 머무르는 곳을 배(腹)라고 여겨 무사로서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죽을 때 할복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사가 죽을 때 할복하고 죽는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칼로 자기 배를 그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할복의 실패를 막고 참혹한 고통을 빨리 없애기위해 스스로 배를 찌르려할때 뒤에서 동시에 목을 쳐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이것은 쇼군의 동영상에서도 나오는 부분이죠??^^) 4명이 있으면 2명이 남은 2명의 목을 치고 살아남은 2명중 또 한명이 한명의 목을 치고 최후에 남은자는 혼자서 할복해 죽어야 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더 무사적인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말도 있다.

할복 장소도 따로 있었다!

할복장소가 따로 있었다는 자료가 있다. 히메지성(姬路成)은 1346년 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성의 한쪽 구석에 외부랑 다 차단된 작은 공간이 있었으며 그곳이 바로 할복장소이었다. 아예 할복장소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일본 사무라이들은 일단 패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할복을 하면 높이 칭송을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일본 무사의 충의와 신의를 상징하는 것이 할복이 됐으며 현재 일본의 조직폭력배 야쿠자들도 무사도 충의와 신의의 덕을 강조하며 충을 표시하는 단지(指つめ : 손가락을 자르는 관습)를 행하고 있다.

ヤクザ(야쿠자)와 侍(さむらい-사무라이)

ヤクザ라는 말은 원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라는 뜻을 가진 말로 폭력배를 지칭하는 은어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보통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이들 ヤクザ 조직은 侍(さむらい)와 그 성격이 매우 비슷한데 충성과 의리를 중시하며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반성의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단도(短刀)로 자르는 것이 자신의 실패를 할복자살로 대신하는 侍(さむらい)의ㅣ 경우와 흡사하다. 또한 ヤクザ의 親分(おやぶん)은 武士계급시대의 영주에 子分(こぶん)들은 侍(さむらい)에 견주어 볼 수 있겠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

 

본래 사무라이라는 용어는 귀족 출신인 무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2세기에 권력을 장악하여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에 소속된 모든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지방 무사 출신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사무라이들은

 상당 수준의 무예를 지녔으며 자신들의 극기주의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이전의 잔잔하고 세련된 왕실 문화와는 전혀 다른 절도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의 사무라이들은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다도(茶道)나 꽃꽂이 같은 일본 고유의 예술들을 탄생시켰다.

  이상적인 사무라이는 불문의 행동규범을 따르는 극기적인 무사여야 했으며,

  이 행동규범은 뒤에 무사도(武士道)로 정립되어 용기, 명예, 개인적 충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이때문에 불명예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할복 자살(셋푸쿠[切腹])을 택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 초기에 전체 인구 중 10% 미만에 불과했던 사무라이들은

     사회질서를 정착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 속에서 폐쇄적인 계층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2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250년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아래의 평화시대에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관리가 되거나 다른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18세기초부터 상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일본에는 활기찬 도시문화가 꽃피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사무라이들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동시에 주로 고정된 봉급을 받고 살아가던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지위도 점차 악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무라이 가족들이 궁핍에 시달렸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여 새로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출세를 열망하던 하층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1871년 봉건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을 때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지위도 상실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출신들은 1870년대에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창설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다.

     
    侍(さむらい-사무라이)에 관한 뒷 이야기

    1. 浪人(ろうにん)은 바로 여기서 온말!

    현대 일본어에서 "실직자" 혹은 "재수생"을 뜻하는 浪人(ろうにん)이라는 말은 과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武士를 浪人이라 칭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지금의 운전 규칙이 侍의 칼과 관련 있다?

    예전에는 칼이 비스듬히 부딪히는 걸 도발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좁은 골목을 우측 통행 하다가는 왼쪽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상대방의 칼과 부딪히기 십상이였는데 이 같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버릇처럼 왼쪽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 江戶(えど)시대에 보행예절이 되었고 이 후 자동차가 도입되면서 운전 규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일본은 우리와 반대로 차는 좌측통행 사람은 우측통행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진짜로 여기서 나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