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일본은 노예를 해방하라! - 1872년 마리아 루즈 호 사건

구름위 2012. 12. 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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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7월 9일, 요코하마에 한 척의 상선이 들어옵니다.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즈(María Luz)라는 이 배는 마카오를 출발해서 카야오(Callao)로 가는 길이었죠. 그런데 이 배에 실린 화물은 상품이 아닌 인간이었습니다. 페루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가는 쿨리(*)들이었죠. 마리아 루즈는 본래 요코하마에 들를 예정은 없었지만, 폭풍을 몇 차례 만나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선체 수리를 하려고 입항한 참이었습니다.





 

쿨리를 형상화한 조각상.
(사진출처 : http://farm4.static.flickr.com/3158/2350132931_ab83f98880.jpg?v=0)



*쿨리(苦力, coolie) : 저임금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인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국 국내에서뿐 아니라 미국, 호주, 남미, 태평양 등 세계 각지에 보내졌고 많은 경우 이들 지역의 차이나타운은 쿨리들의 집단거주지에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인도인 노동자도 쿨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요코하마에 기항했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쿨리 한 명이 배에서 뛰어내려 옆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군함으로 도망쳤고, 영국인들에게 이 사람을 인도받은 일본 관리들이 그를 마리아 루즈 호로 돌려보내려고 하자 "배에서 지독한 학대를 당했다"면서 231명의 다른 쿨리들도 똑같이 학대받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일본 당국에 호소를 합니다. 이에 일본 당국은 청나라인을 마리아 루즈 호로 돌려보내기 전에(일단 돌려보냅니다) 선장인 리카르도 헤레라(Ricardo Herrera)를 소환해서는 탈출한 쿨리를 관대하게 취급하고 다른 노동자들도 선장이 맺은 계약보다 좀 더 잘 보살피라고 강력하게 권고를 하지요.

여기서 선장이 마음씨를 고쳐먹고 노동자들을 잘 대해줬으면 좋았겠지만 사태는 이 정도에서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탈출 이후에 다른 계약노동자들도 잇달아 배를 탈출했고, 이들의 입을 통해 처음 탈출했던 쿨리가 페루인 선장에게 짐승처럼 지독한 취급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와 영국 대리공사 왓슨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 왓슨 본인이 직접 영국 해병대원들을 이끌고 마리아 루즈 호로 건너가 배를 임검하고 중국인 승객들의 대우가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탈출자들의 전언이 사실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일본 외무경인 소에지마 다네오미를 찾아가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죠.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아직 페루와 외교 관계가 없어서요-_-;;; 외교 관계의 부재로 인해 당시 일본 내에서 페루의 이권은 미국이 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나가와 현령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무쓰 무네미쓰(陸奥 宗光)는 일본과 서구 국가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어떤 사태도 일으키지 말자고 했지만, 사법경인 에토 신페이(江藤 新平)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이 사건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국내에는 에토도 반대했다는 책도 있음). 하지만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三条 実美)가 개입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외무경 소에지마에게 사태를 처리할 권한을 주자 무쓰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정부의 의견이 결정되자 외무경인 소에지마는 마리아 루즈 호의 출항을 금지시킨 다음, 배의 항해일지를 점검하고 간부 승무원들을 접견하여 사태의 진상을 캐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마카오에서부터 이 배에 탑승하고 있는 중국인 계약노동자들이 모두 문맹이고, 이 점 때문에 그 내용도 알지 못하면서 극도로 비인간적인 조건을 제시한 계약서에다가 서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죠. 게다가 상당수는 허위계약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니고 납치당해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이 배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사람이 오오에 타쿠(大江卓)지요.

오오에는 본래 무츠가 발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막부를 타도하는 데도 큰 공헌을 했으나 도사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사쓰마와 조슈가 양분한 신정부 안에서 별로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죠. 하지만 1868년부터 고베의 외국사무소에서 사건 처리를 맡으면서 외교 경험을 쌓은 데다 1871년에는 일본 내의 에타히닌(穢多非人, 일본 내의 천민계층. 에타는 주로 피혁을 취급하는 백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히닌은 주로 걸인이었습니다)에 대한 법적인 차별을 철폐시키라는 청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때의 해방은 오오에의 의협심이나 일본 정부의 순수한 인간애적 행위의 발로라기보다는, 구미제국의 압력에다 세수를 더 확보(인간이 아니면 재산에 대한 세금을 매길 수 없으므로)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겹쳐진 것이었지만 말이죠.

하여간 이번 사건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 이를 외무성 관할의 재판으로 만든 소에지마는 요코하마에서 외국인 사무를 맡고 있던 오오에를 가나가와 권령(지금으로 하자면 부현지사)에 임명한 후 특명재판장의 지위를 주어 사건에 대한 처리를 맡깁니다. 이에 심리를 연 오오에는 이제까지 수립된 증거로 보아 마리아 루즈 호 선장이 국제법상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배에 탄 청나라 노동자 전원을 하선시켜 현청에 수용하죠.

일본 정부가 이 조치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 일본 주재 각국 영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서양 영사들의 반응은 반대 일색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요코하마는 치외법권 지역 한가운데인데다가, 이들이 주목한 반대의 핵심은 "일본 영토 밖에서 일어난 불법 행위에 대해서 과연 일본 정부가 개입할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서, 외국 회사 및 선장의 상업행위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지나친 간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867년에 체결된 <요코하마 거류지 단속 규칙>에 근거를 둔 것으로, 기껏해야 단 두 나라가 이에 동참하지 않을 뿐이었어요. 미국은 "우리랑 상관 없는 일이다"라는 이유로 논평을 거부했고, 오직 영국 영사만이 일본측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사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영국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해군을 동원해서 대서양 노예무역을 차단해오고 있었거든요. 영국 선적의 노예선 뿐 아니라 프랑스, 포르투갈, 에스파냐 등의 노예선이라도 영국 해군에게 잡히기만 하면 선적을 가리지 않고 노예들을 석방한 다음 승무원들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런 나라였으니 노예무역 통제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였죠.

오오에로부터 외국 영사들의 반응에 대한 보고를 받은 소에지마는 신경쓰지 말고 원심을 존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오오에는 청나라인 전원을 해방,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선장은 인신매매와 가혹행위에 대한 처벌로 곤장 1백 대 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특별히 사면하니 대신 얼른 출항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사태가 종료됐....으면 참 일본 정부가 국제적으로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로서 인정도 받고 좋았겠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제2막으로 이어지죠. 헤레라 선장이 가나가와 현청에 대해서 정식 재판을 다시 청구한 겁니다(....)

이번에도 재판은 오오에가 계속 담당했습니다. 선장은 일본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까지 고용해서 어떻게든 청나라 노동자들과의 계약을 합법적이고 유효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의 주요 논지는 "마리아 루즈 호에 승선한 청나라 노동자들의 고용계약은 마카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는 포르투갈 정부의 법적 관할에 해당하는 문제이며, 포르투갈과 치외법권 협정을 맺고 있는 일본 정부 당국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이들은 위와 같은 내용의 포르투갈 대사로부터의 편지까지 소송 서류에 포함하여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오오에는 선장의 죄가 일본 국내법 뿐 아니라 인도에 대한 국제법까지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 원고측의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두 번째 재판에서도 역시 피고인 청나라 노동자 측에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헤레라 선장이 그동안 해온 행위는 국제법 및 일본 국내법 모두에 어긋나는 비인도적 행위이며, 노예계약이므로 합법적인 계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페루 해군의 철갑선 함대가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도 있었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고, 이에 선장은 마리아 루즈 호를 요코하마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다른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버리고 맙니다.

이 사건의 해결은 일본 측에 상당한 이득을 안겨 주었습니다. 먼저 청나라 정부와의 사이에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국제적으로도 좋은 인식을 확산시켜 장래 불평등조약의 폐기에도 도움이 되었지요. 물론 페루 정부는 오오에의 판결에 반발하여 이의를 제기했는데, 무려 페루 해군장관이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무역 및 치외법권 문제 때문에 페루 정부를 지지했으므로, 미국 공사의 제안으로 "가능한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 두 나라에 대한 이권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판단되는 러시아 황제 알렉상드르 2세가 이 세 번째 심판을 맡게 됩니다(1873). 당시에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상설기관으로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2년 후 알렉상드르 황제가 일본의 판결을 지지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를 짓게 되지요.

읽고서 고개를 갸우뚱하셨겠지만, 여기까지는 분명 일본에 좋은 이야기입니다. 문제가 뭐냐고요? 바로 지금부터 소개하는 두 번째 재판에서 디킨스 변호사가 내놓은 변론의 일부입니다.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즈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디킨스의 표적은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예·창기약정(芸·娼妓約定)>도 노예계약이라는 거였죠. 디킨스는 이런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실제 유녀의 연한계약증서 사본과 요코하마 병원의 치유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실제 일본 내에서 인신매매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이러한 변론을 받자 오오에로서도 당장 논리가 궁해질 수밖에 없었죠. 급거 휴정에 들어간 재판정은 한참 후에야 재개장되었고, 고심 끝에 내려진 최종판결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어떻습니까?^^

디킨스의 폭로로 인해 재판을 참관중인 각국 영사들에게 일본의 인신매매 실태가 공공연하게 알려지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재판이 종결된 직후, 문제가 된 인신매매의 폐지(예창기해방령芸娼妓解放令)를 즉각 선언합니다. 이번 사건에 직접 관여하고 있던 오오에의 품의로 이루어진 이 해방령은 예기, 창기의 대가없는 해방 및 고용주가 이들에게 빚을 받아내는 행위의 금지(기존 채무의 불인정)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들은 갈 곳이 없었으므로 결국 대부분 홍등가로 다시 돌아가야 했죠. 가족이 다시 받아줄 리도 없고, 취직할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해방령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인신매매를 불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차후 가난한 농민이나 어민들이 다른 길이 있다면 딸을 사창가에 팔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줌으로서 여성 인권이 신장되는 밑바탕이 되기는 합니다. 이후 일본 사회에서 여성 교육이 확산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무실이나 공장에 취업하는 여성들의 수도 갈수록 늘었거든요.
물론 그 후에도 수십 년 동안 가난한 농어촌 집안 딸들이 홍등가로 팔려나가는 게 현실이었고 정부도 이를 묵인했지만, 적어도 법적으로 따지자면 이런 행위는 불법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들여다볼 부분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오오에의 판결문이 실질적으로 거짓말이었다는 거죠. 당시에 일본인 창녀들은 해외로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었고, 이런 행위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계속 이어졌습니다.

배경 설명을 위해 일본인의 해외 노예 매매를 거론하자면, 그 시초는 최소한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주름잡았던 전국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주로 서부 지역의 가톨릭 영주(상당수가 해적, 즉 왜구 두목인)들이 중심이 되어 약 40년에 걸쳐 50만에 가까운 일본인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았는데, 이는 서양인들로부터 화약을 사기 위해서였죠. 이들 가톨릭 영주들의 대량 노예매매는 히데요시가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는데 원인의 일부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인 노예의 대외판매가 금지된 것은 1588년의 일이었어요. 그 뒤에 일본인 대신 임진왜란에서 잡힌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노예로 팔린 사실은 아마 다들 아시겠지요.

당연히 이들 노예의 상당수는 여성이었습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서 젊은 여자나 소녀들을 구입해서는 배 안에서 성노예로 활용하거나, 일본인 노예집단이 있고 일본 상인들이 주로 들르는 마카오나 고아 등 포르투갈 식민지에 갖다 팔았죠.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들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에 걸친 일본의 해외진출 매춘부,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 唐行きさん)이라는 존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가라유키상은 "바다를 건너간 여자"라는 뜻으로, 주로 나가사키의 시마바라 반도나 구마모토의 아마쿠사 제도에 사는 가난한 농민이나 어민의 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모집인(이 뚜쟁이(pimp)들을 일본어로는 嬪夫(ピンプ)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들은 해외에 일반 잡역을 하러 가는 거라고 속여서 부모들에게 현금을 주고 딸을 사서는 해외의 매춘굴에 팔아넘겼죠. 바다를 건너간 여자의 머리수에 따라 돈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개중에는 뚜쟁이짓으로 돈을 모아서, 아예 해외에서 직접 갈보집을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이들 가라유키상들이 보내진 곳은 중국,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 타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지였고, 심지어는 훨씬 오지인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북미, 잔지바르, 마다가스카르 등에까지 보내진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가라유키상의 전성기는 메이지 시대 말기로, 이들은 여론에서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미화되어 불릴 정도였습니다. 왜냐고요? 가라유키상은 외화 획득의 첨병이었거든요-_-
가라유키상은 일차적으로 현지의 일본인 선원 등을 상대함으로서 외화(은화)유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항구에 내린 선원들이 술과 여자로 기분을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게 외국 여자를 상대로 하면 그 돈은 그대로 흘러나가 사라져 버리므로, 기왕이면 해외에서라도 일본 여자를 상대하게 함으로써 은의 유출을 방지하자는 거였죠. 그리고 "나간 김에" 외국인 상대로도 영업 좀 해서 부수입 좀 벌라는 거였고, 이건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 들은 거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백인에게는 금화로, 일본인에게는 은화로 요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원주민들은? 돈 없으니까 안 받습니다-_-. 이렇게 벌어오는 외화가 1910년 경 일본 전체 수출금액의 10%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아직 문서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1910년 경 사이공에서 촬영된 일본인 매춘부들의 사진.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3%83%95%E3%82%A1%E3%82%A4%E3%83%AB:Karayukisan_in_Saigon.JPG)



하지만 일본의 국위가 점점 향상됨에 따라 이런 대규모 일본인 매춘부의 존재는 "국가의 수치"가 되어 망신스러운 것으로 간주됩니다. 결국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외의 일본인 매춘굴은 대부분 폐쇄되고, 여기에서 일하던 일본 여성들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돌아오지만 일부는 현지에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들의 처우에 대해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전기까지 보르네오에 있었던 한 갈보집의 사례를 들어서 살펴보면, 손님을 받았을 때 받는 돈은 포주와 창녀가 50:50으로 나눴습니다. 여기서 다시 절반인 25%는 선불금으로 받은 빚 변제에 들어가고, 나머지 25%로 옷값과 식비 등 잡비를 해결해야 하는데 추가로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달에 최소한 20명의 손님을 받아야 했다고 하네요. 만일 한달에 100엔쯤 모으고 싶으면, 120명은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필리핀에서는 창녀들이 주1회의 임질검사와 월1회의 매독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그 비용은 전부 창녀들 본인이 부담했습니다. 실금액의 2배로 말이죠).

이들은 평소에는 꽤 한가한 편이었지만 항구에 배가 들어왔다 하면 그날 밤은 난리가 났고, 갈보집마다 만원이 되어 심하게는 하루밤에 30명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롱타임(숙박)은 10엔, 숏타임(일만 치르고 가는 것)은 2엔에 주어지는 시간은 길어야 5분, 제한시간을 넘기면 할증요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휴일도 없고요. 이쯤 되면 뭐-_-;;

뭐, 대부분의 경우 매춘산업(과거나 현재나)에서 인권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기는 하죠. 하지만 이 시기 일본에서 했던 것처럼 외국인도 아닌 자국민 여성을, 그것도 이정도 대규모로 공공연하게 국내외의 매음굴에 팔아먹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뭐, 요새도 경제가 어려운(나라 전체적으로는 별로 어렵지 않아도 개인 차원에서 여러 이유로 매춘의 길로 가는 사례도 있고) 나라들에서는 매춘조직이 자국 여성을 해외에 팔기는 하지만 말이죠. 뭐, 그쪽 현실을 잘 모르니 양자가 어느 정도로 비슷한 수준으로 영업(?)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1872년에 "일본은 자국민을 해외에 팔지는 않는다"고 판시했던 오오에 타쿠 재판장은 과연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알면서도 명분상 저런 판결문을 읽은 걸까요, 아니면 정말 몰랐을까요? 궁금해지지 않으세요?

덧 : 쓰다 보니 1945년에 있었던 아주 황당한 사건과 단체에 대해 쓰는 걸 잊어먹었군요. 포스팅이 너무 길어지니, 이 문제는 별도의 포스팅으로 다루겠습니다 :)



참고자료 :

메이지 천황(상), 도널드 킨, 다락원, 2002
일본 근대의 풍경, 유모토 고이치, 그린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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