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이토 히로부미의 동아시아 제패 야욕

구름위 2012. 12. 3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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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를 도운 스코틀랜드 무역상 토머스 글로버.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를 저격한 지 100년. 아직도 안중근과 이토를 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은 극과 극이다. 특히 이토는 일본에서는 화폐에 들어갈 만큼 영웅이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조선 말살 정책의 원흉으로 지탄받는다. 과연 그는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동아시아 제패를 꿈꾸게 되었을까. 그리고 안 의사는 왜 그를 선택해 저격했을까. 이토의 생애(1841~1909년)를 돌이켜보면, 그 답이 보일지 모른다.

이토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 사람 토머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년)다. 1859년, 일본 나가사키 항에 한 영국인이 상륙한다. 홍콩 소재 영국 회사(자딘 매티슨) 소속의 글로버(21)였다. 그의 입국 목적은 간단했다. 질 좋은 차를 수입해 유럽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영국인 30여 명이 머물렀는데, 그들은 글로버를 '톰'이라 부르며 반겼다. 그는 뛰어난 사업 통찰력으로 이내 두각을 나타내며 다양한 상권을 장악하고 나가사키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집권 세력 도쿠가와 가(家)를 견제하던 소외 번주(藩主:지역 영주) 조슈ㆍ사쓰마ㆍ도사ㆍ히젠 등과 연계된 것은 이 즈음이었다. 이들 번주는 일왕을 옹위하며 한창 세력을 불려가던 중이었다. 그들은 글로버에게 은밀히 근대식 포와 화약, 배 등의 공급을 부탁했다. 글로버는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었다. 1863년, 세력을 강화한 번주들은 글로버에게 무기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바로 조슈의 젊은 무사(사무라이) 다섯 명의 밀항이었다. 밀항 기안자는 조슈 5인방으로 불리는 이노우에 몬타(28ㆍ훗날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순쓰케(20ㆍ훗날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26), 엔도 긴쓰케(27), 노무라 야키치(23ㆍ이노우에 마사루)였다.

같은 해 6월 말, 조슈 5인방은 머리를 자르고 자딘 매티슨 소속의 증기선에 오른다. 그리고 상하이에 잠시 기항한 뒤 대형 범선 두 척에 분승해 영국으로 건너간다. 11월, 런던에 도착한 5인방은 런던대학(UCL)에 청강생으로 등록한다. 영국에서 무역상을 하던 글로버 형제들이 그들을 돕는다. 조선소 등을 보여주며 선진 문물을 접합시킨 것이다. 조슈 5인방은 신기술 중에서 무엇보다 조선 기술ㆍ해군 편제ㆍ전략 등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기술 습득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던 탓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상하이에서 범선으로 갈아탄 뒤 5인방은 자딘 매티슨 인사에게 자신들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말했다. 해군 편제ㆍ전략ㆍ함대 운용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영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해군을 뜻하는 'Navy' 대신 'Navigation(항해술)'을 사용했다. 선장은 이들이 항해술을 익히고 싶어하는 줄 알고, 영국으로 가는 내내 5인방을 범선 밑바닥에 배치해 훈련시켰다. 그들은 배 삯을 충분히 냈는데도 수개월 동안 배멀미 등에 시달렸다(<이토 사전(史傳)>에서).

이토 등 5인방, 일본 근대화 이끌어

사무라이 이토 순쓰케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왼쪽). 오른쪽은 1901년 예일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

이후 5인방은 영국에서 일본 선진화에 필요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습득한다. 분야는 정치ㆍ교육ㆍ철도산업ㆍ조선산업ㆍ화폐 등 다양했다. 1864년 6월, 이토는 외침으로 번주들이 위기에 처하자 이노우에와 급거 귀국한다. 다른 3인도 귀국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노우에와 이토는 제지하고 나선다. 더 배워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이들에게 귀국 배를 내준 것도 글로버 형제들이었다.

이토는 귀국해 자신이 영국에서 보고 온 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개혁에 앞장선다. 다른 유학 무사도 다르지 않았다. 역시 일본으로 돌아와 근대화에 엄청난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토는 강대국과의 대화를 설파하며 외교가로 나섰고, 야마오 요조는 근대식 조선산업을 일으켰다. 엔도 긴쓰케는 조폐국을 현대화했고, 노무라 야키치는 일본 근대 철도의 창시자가 되었다. 글로버도 단순한 후견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수만금을 투자해 조선 산업소(지금의 미쓰비시)와 기린맥주까지 세운다. 또 일본 여성과 결혼해 일본인의 환심을 산다(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로 알려져 있음).

이후에도 글로버는 사쓰마ㆍ조슈ㆍ구마모토ㆍ사가 같은 번에 함선을 여러 척 팔아 이득을 챙긴다. 1864~1868년 그가 판매한 함선은 20척이나 되었다. 글로버는 일본 젊은이들을 계속 영국으로 밀항시키며 격전으로 사이가 나빠진 사쓰마와 영국을 화해하게 한다. 그 덕에 그의 위치와 인기는 삼국지의 제갈량만큼이나 올라간다. 또 짬짬이 증기기관차와 군함 등을 도입해 일본인의 환심을 산다. 객차 세 량을 시범 운행할 때는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으로 글로버는 파산 위기에 처한다. 전쟁이 끝나면서 무기와 함선의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나가사키의 다카시마 탄광으로 부활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도입한 채탄 기술을 이용해 막 소비가 늘어난 석탄을 일본 각지에 공급하며 이득을 챙긴 것이다. 그 사이 조슈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그가 밀항시킨 이토와 이노우에는 총리와 장관직을 번갈아 맡으며 유럽에서 배운 선진 정치ㆍ경제 체계를 일본에 이식해나간다.

특히 이토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어를 구사하며 승승장구한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는 한층 지위가 강화된다. 당시 그에게는 몇 가지 외교 철칙이 있었다. 먼저,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군대와 전쟁을 가장 낮은 해법으로 보았다. 그는 외교 교섭과 정치 거래를 가장 중시했다. 그는 해외 생활과 군수품 교역 등을 하며 외교ㆍ정치 기술을 몸으로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토는 환심을 잘 사는 인물이었다. 한 예로 그는 대한제국 왕실의 궁중 나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 비결은 간단했다. 유럽 과자와 선물을 뿌리며 매너 있고 온화한 척 꾸민 덕이었다.

이토는 오랫동안 조선과 청을 점령할 야욕을 품었다. 교활하고 노련한 외교술로 그는 그 본심을 숨겼다. 열강에게는 자국이 아시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곤 했다. 1909년 10월, 북만주(하얼빈) 방문도 그 같은 외교 전술의 일환이었다. 러시아와 협상해 힘 빠진 청나라 땅(만주)을 나눠 가지려 그 먼 곳까지 출행했던 것이다.

안 의사는 이토의 그 같은 거짓 화해 제스처와 의뭉한 야욕을 일찍이 간파한 듯하다. 재판정에서 안 의사는 일왕이 러일전쟁 때 선포한 대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한ㆍ중ㆍ일 세 나라가 동맹을 맺고 평화를 외치며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개화 진보에 힘쓴다면 유럽과 다른 세계의 외국과 더불어 모든 나라 국민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안 의사는 "이토가 살아 있어서는 한국의 독립이 침해되고 동양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되어 이 의거를 결행했다"라고 밝혔다. 그가 시대를 앞선 예지자이자 선각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헌상 (스코틀랜드 국제개발청 한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