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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条英機 1884.12.30~1948.12.23
총리 임기 : 1941.10.18~1944.7.18
한자 발음으로는 동조영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장교의 이미지가 '안경 끼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은 이 사람 탓이 크다.
무능의 대명사로 손꼽히며, 멍청하고 부지런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딱인 인물이다.
1 그는 누구인가? ¶일본의 파시스트로,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패망에 가장 크게 일조하였고 구 일본군이 막장화 되는데 일조한 인물. 도쿄 출생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관동군 헌병사령관, 참모장, 육군차관을 역임했다(그가 관동군에 있었을 때 그 악명 높은 731부대가 생체실험을 하기도 했다.). 1940년, 육군대신이 되어서 중국전선의 확대를 주장했고, 그 후 내무대신마저 겸임, 1941년 10월 대미 개전을 막으려던 고노에 수상의 노력이 실패하자 내각을 무너뜨려 수상이 되고 12월 7일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2 태평양 전쟁이라는 병크 ¶사실 집권을 하게 된 것도 절반쯤 쿠데타에 가까웠다. 그 이전에도 군인 수상들은 있었어도 정치가들과의 밸런스에 의해 그나마 상식선에 머무는 정치가 벌어지긴 했으나, 그 이후 일본은 점점더 막장일보로 치닫게 된다. 일본군을 세기말 막장 집단으로 만든데는 도조 히데키도 한몫 했다. 하지만,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에 방탄장갑과 연료 자동 봉입장치를 장착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전쟁 시작 후엔 독재를 시작해 더욱 관직을 집어먹었는데, 문부, 상공, 군수대신까지 겸임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 무렵 도조 히데키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국방부 장관 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겸 문화관광체육부 장관 겸 지식경제부 장관 겸 행정안전부 장관 겸 기획재정부 장관 겸 육군참모총장 겸 국무총리(…)인 셈. 덕분에 태평양 전쟁이 미군이 타격을 주는 것 이상으로 막장으로 치달아 가자 일본 정계에서도 도조 히데키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언론 통제로 인해 민간과 군에서는 나라 돌아가는 자세한 꼴을 몰라 대놓고 비난은 못했다. 당시 일본의 정보통제는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몇 개월이 지난후에야 알게됬을 정도. 그래도 반감이 있긴 있었다고...그리고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상 다나카 장군이 선박 지원을 요청했지만 도조가 거부하자 욕설을 퍼부어 경질되기도 했다. 무다구치 렌야의 희대의 팀킬 만행인 임팔 작전을 실행하는 것에도 이 인간이 기여했다. 다만 이 부분은 결재받을 때 우물쭈물 준비도 안한걸 그냥 넘어간 아랫 사람 책임도 있다. 거꾸로 도조는 임팔 작전시 위험사항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차피 결재한 건 마찬가지지만.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 사퇴 후 죽기까지 ¶이미 전황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가던 1944년 7월 일본 본토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사이판 점령을 구실로 스스로 사퇴[2]했지만, 해놓은 짓이 워낙 많은지라 종전 후 '포로'로 전범 재판에 서게 된다. 재판에 올려지면 사형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체포되기 직전 권총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심장을 쐈다가 빗나갔다. 아이고 나죽네... 자살 실패 후 치료받는 도조 히데키 이 사람도 패전의 책임을 일본 국민과 정부에게 전가하는 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떨어졌으며, 그렇다고 정치가라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실력이 떨어진다. 사실상 그냥 막장. 그 유명한
나라가 이 꼴이 되는데 자기가 공헌한게 제일 많으면서 정작 책임을 정부와 국민에 떠넘기는 것을 보면 역시 미친놈 맞다. 이 쯤 되면 이 딴 생각을 가진 놈의 도구로 이용당해서 죽은 일본군 병사와 일본인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4 현대 일본에서의 대접 ¶보통 이런 대접.[4] 야스쿠니 신사에 이 사람도 합사되어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 일본 우익들이야 이 인간이 그 당시 최고지휘관이라 어쩔 수 없이 미화하지만, 우익에서도 일본군 말아먹은 졸장이라고 욕설하는 이들도 꽤 있다. 우익들조차 거론하기 싫어하는 무다구치 렌야라든지 츠지 마사노부같은 인간을 유능하다고 써먹은 자이니 오죽할까? 도조 유코는 '저런 멍청한 부하들을 등용하여 아군을 무수히 죽이며 패전에 기여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슈?'라는 질문에 그래도 다른 유능한 부하들도 등용했다고 넘어가면서 반론조차 못했단다. 인도인 펄 판사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여 그를 영웅시한 영화 프라이드가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바 있지만, 극우 단체들의 반복적인 관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뿐이지 대중적 흥행은 영 별로였다고 한다. 심지어 개봉 첫날에는 극장에 교련복 입은 시커먼 사내놈들이 우글거려서 일반 관객은 접근도 못하는 분위기였다고...그리고 이 영화 감수 및 제작에 이시하라 신타로와 가세 히데아키[6]가 참여했다. 우익적 견해로 유명한 베츠미야 단로는 도조를 가리켜 "인사계원으로나 쓸모있고 지휘관으로서는 중대장조차 위험하다."고 적시했다. 후기에는 매리애나 결전[8] 직전에 학도병 출전식 장면에서 다시 나오는데 전반부의 악마적 카리스마와는 달리 어느 정도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를 구현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대놓고 부하들이 디스하는 걸 알지만 이미 미쳐버린 군을 나름대로 제한하려며 강화는 위험하다는 의견, 즉 군에 의해서 완전히 미치게 된 일본보다는 차라리 화끈하게 지는게 낫다는 의견을 독백으로 제시한다. 도라 도라 도라에도 한 장면 나온다. 배우가 삭발을 하기 싫어서인지 뽀글파마 백발로 나오는게 압권. 5 당시 사람들의 대접 ¶이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말은 어떤 면에선 정말 천차만별이라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지나친 완벽주의자', '면도날' 같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맘씨 좋은 할아버지라 가을에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운동회를 열고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손녀인 도조 유코가 한 말이긴 하지만. 히데키의 조카 역시도 육군 장교였는데, 하루는 도조 히데키의 집을 방문했다가 하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조카의 뺨을 때리면서 '이놈이 체면도 없이 여자한테 정신놓고 뭐하는 거냐?'라고 막 뭐라고 했다고. 얼핏 이해가 안갈 정도로 쪼잔한 면이 있던 듯. 게다가 이 조카를 결전장이라고 찍힌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버릴려고 했다. 조카집안의 대를 끊어버리려면 다른 방법이 더 나을 것인데... 야마구치[9] 출신들을 싫어해서 육군대학 면접관으로 재직시에 야마구치 출신 수험생들에게 '귀관이 면접장소까지 걸어오는데 몇보였는가?', '본교 화장실의 변기는 모두 몇개인가?' 등의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질문을 하여 전부 떨어뜨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내 분위기는 반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군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 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 탓이지만. 여담이지만 총리대신 시절 도쿄를 시찰하면서 사람들이 쌀을 낭비하는지 확인한답시고 하수구를 살펴보면서 쌀이 몇알 떨어졌네 낭비하네 떠들어서 사람들의 어이를 털었다는 일화도 있다 카더라.[10][11]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절대 국방권은 도서 지역 확보를 통하 비행장 건설로 이루어질뿐 삽으로는 이룰 수 없다며 도조의 전략을 대놓고 디스한 신문기자를 자기 명령으로 이등병으로 징집해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이오지마에 보내서 죽이려고(!) 했다. 아마 이런 짓이 전매특허인 듯. 그러나 중간에 해군에서 이 기자를 빼돌려서 목숨은 건지게 해줬다고…. 전범재판소에서 오카와 슈메이라는 극우사상가도 전범으로 기소되었는데, 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 정신이상으로 사형을 면했다. 그가 말년에 코란을 일본어로 완역했다는 걸로 봐서 정신이상은 사형을 면하기 위한 연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아무튼 재판정에서의 모습을 담은 저 짤방은 합성이 아니다! '불량지식의 창고'라는 책에 의하면 도조 히데키는 단 것을 좋아해서 그의 치아 상태는 군대 상태보다도 훨씬 나빠서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교체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단것을 좋아해서 치아가 성치 않았다는데, 나쁜 놈은 서로 닮아가는 것 같다. 육군에 차출되어 근무하던 해군 치과 의사 조지 포스터와 잭 맬러리는 도조의 틀니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유명한 환자에게 장난을 치기로 작당했다. 그들이 만든 틀니는 아주 잘 맞았지만 거기에는 모스 부호로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 6 한국에서의 평가 ¶당연히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를 앞세운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일왕 히로히토와 함께 한국 침략의 주범 중 하나이자 한국사에 있어서도 한국을 침략하는데 선봉장으로 나선 악한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위안부 및 정신대 할머니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름만 나와도 펄쩍 뛰게 만들고 분노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장본인이며 1992년부터 일본대사관 앞에서 할머니들을 모이게 하여 지금의 수요집회를 만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원병 및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었거나 노역장으로 강제 징집된 노인들 입장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게 만드는 장본인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부상한 인물이자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 [1] 간혹 이 양반이 빠지고 히로히토가 들어가기도 한다.[2] 이것도 도조가 만주국 이래로의 맹우인 기시 노부스케를 장관직에서 해임할려고 시도했으나, 기시가 "나 자를려면 네놈도 절대 국방선 붕괴의 책임을 지고 같이 물러나라!"면서 강경하게 고집을 피운 덕분에 같이 사퇴하게 된것이다. [3] 전술적 결정은 하지않았지만 전략적인 결정에는 참여했다.# [4] 써 있는 말은 중국 간체로, '일본 갑급 전범 도조 히데키는 중국 인민에게 사죄하라'. [5] 사실상 상대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죄다 회피하고 녹음기처럼 자기 할 말만 해댔다. [6] 70년대 한국 정계에서 친한파로 통하다가 지금은 혐한에 앞장서며 일본 극우 홍보나 하고 있다. 93년에 박태혁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을 헐뜯는 추한 한국인을 내 잘 팔리기도 했지만 이후에 수익 배분 문제로 고소당하면서 자신이 쓴 게 드러나 책이 회수되기도 했다. 프라이드 대박(?) 이후로 무르데카란 인도네시아를 무대로 한 일본 극우영화를 만들었다가 인도네시아의 반발로 일본 기업들의 피해가 크면서 받은 소송 문제로 이후로 극우영화 제작, 감수를 포기했다. [7] 오죽하면 덴노나 기타 궁정대신들도 아는 미라이의 비밀을 도조가 알아서는 안된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한다. [8] 칠면조 사냥이 아닌 이 작품 한정의 대체역사. 여기서 전략적 무승부를 함으로서 지팡구의 역사는 바뀌게 된다. [9] 과거 초슈번. 한 때는 이곳 출신의 육군 파벌이 득세하였다(...). 게다가 도조의 부친인 도조 히데노리는 제1기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중 여단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의 실수를 초슈 파벌에게 트집잡혀 한직으로 맴돌다가 퇴역당했다. [10]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등장하는 일본인들간의 대화였는데, 출처는 확인필요. [11] 사실이거나 정말 당시 있었던 야사라고 한다면 은하영웅전설의 감자대장 도슨의 일화와 비슷하다. 어쩌면 이게 모델일지도. [12] 실제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서 이 사건을 배경으로 쓴 도조x오카와 야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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