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이어 일본 전국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자료의 출처는 경영정신의 적을 경영하라, 작가정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자유포럼의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이며,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보완해서 여러분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리된 일화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 교육용으로 각색되고 미화되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인물이 우리 역사(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가해자이기 때문에 꺼려지기는 합니다만, 그 인물을 추모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말라', '약자를 배려하라', '성실하라'와 같은 수 천 년간 이어지고 앞으로도 수 천년 간 이어질 사람의 기본 품성에 대해 정리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일화를 정리하면서 오만했던 지난 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에 일자무식이었던 400년 전의 무장이 남겨준 '갑의 위치에서 을을 충분히 배려하라'는 교훈은 우리나라 모든 기업, 특히 대기업들이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그럼 400년 전의 자고 일어나면 칼만 휘둘러대고 여자만 보면 덤벼들었던, 무식한 칼잡이들이 남긴 일화와 교훈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후꾸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 적은 전장에서만 미워한다.
도요또미 히데요시와 같은 고향의 인척으로 가또 기요마사(加藤?正)와 함께 용맹한 무장이 부족했던 히데요시에게 큰 힘이 되어 7본창(후꾸시마 마사노리, 가또 기요마사, 가또 요시아끼, 히라노 나가야스, 가따기리 가쯔모도, 와끼자따 야스하루, 가스야 다께노리)의 기둥이 된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요도 도노(히데요시의 측실)에 대한 증오때문에 판단력을 잃고 히데요시의 사망 후에 벌어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지만 도꾸가와 가문의 악랄한 토사구팽 모략에 걸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맞서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을 조직해 출진하기로 한다. 문제는 이에야스 자신의 군대 외에 대부분이 히데요시에게 충성했던 다이묘들이어서 오사까 성에 있는 어린 히데요리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에 히데요리가 미쓰나리 편을 든다면 죽고 이제는 없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준 히데요시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감한 갈등의 길목에서 히데요시 가문의 최고 가신인 후꾸시마 마사노리(그림 참조. 클릭하면 커집니다.)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공격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제 기요스 성을 도꾸가와 님이 사용하시게 내드리겠습니다"라고 나선다. 옆에 있던 다른 다이묘가 "오사까의 히데요리님이 미쓰나리 편을 든다면 어떻게 하려고요?"라고 묻자. "그 때는 이에야스 님께 죄송하지만 오사까 성으로 들어가 히데요리님의 뜻을 따를 겁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히데요리 님은 이제 여덟 살입니다. 미쓰나리 편을 든다면 그건 주위의 간교한 무리들이 조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오사까 성으로 쳐들어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재차 확인해주었다.
이 때부터 히데요시의 다이묘들이 충성경쟁 발언에 돌입하게 된다. "후꾸시마 님이 맞습니다. 오사까 성으로 가서 미쓰나리를 공격합시다.", "제 거성인 가께가와 성도 바치겠습니다.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저는 제 아들을 맹세의 보증으로 도꾸가와 님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후꾸시마 마사노리는 지혜가 부족했던 전형적인 무장으로 이에야스의 모사꾼들이 미리 전해준 대본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가장 반대가 심해야 할 인물에게서 의외로 성을 바친다는 초강수가 튀어나오자 동군 진영은 이에야스의 눈에 들기 위한 대반전이 일어나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마사노리는 아끼와 빈고의 50만석을 받고 히로시마의 거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포로로 잡혀 동군 진영에 끌려와서 "너희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놈들이다. 나와 너희의 입장이 뒤바뀌어야 하는데, 내가 운이 없을 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에야스를 없앨 테다"라고 말하자 이미 충성맹세를 한 다이묘들은 "저 놈이 아직도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구나"라고 빈정댔지만, 미쓰나리를 가장 증오했던 마사노리와 구로다 나가마사(?田長政)는 패장에게 예의를 갖췄다.
마사노리는 "당신이 한 말이 옳소. 그런 오기로 반드시 살아남기 바라오"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고, 나가마사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미쓰나리에게 걸쳐주었다고 한다.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몰락한 서군의 다이묘들 중에 우끼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있었는데 전투의 중심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다이묘들의 탄원에 따라 먼 섬으로 추방당했다.
새로 수도를 에도(지금의 도꾜)로 옮긴 이에야스가 다이묘들에게 성 건축을 책임지라고 명령했고, 술을 즐기던 마사노리는 히로시마에서 에도까지 술을 운반해서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운반된 술이 부족한 것을 보고 "술통이 한 개 부족한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운반책임자를 추궁했다.
운반책임자가 배로 운반을 하던 중에 폭풍우를 만나 섬에 잠시 대피해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닌 무사 한 사람이 술을 좀 나누어 달라고 했지만 주군이 아끼는 술이라 한 잔도 나누어줄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돌아가서는 무사의 모습이 이상하게 걸려서 이름을 물으니 우끼다 히데이에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주군이라도 술을 나누어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술 한 통을 남겨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마사노리는 "네가 각 통에서 조금씩만 빼냈어도 술이 빈 것을 내가 몰랐을 것이다. 그건 매우 정직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우끼다 님에게 한 잔이 아닌 한 통을 줬다는 것은 내 명예를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화를 내서 미안하구나. 포상을 하마. 그리고 앞으로 히로시마에서 술을 가져올 때마다 섬에 들려 꼭 술을 나누어드리도록 해라"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을 세운 후에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장수들을 하나씩 죽였듯이, 도꾸가와 가문을 이어받은 히데따다(德川秀忠)와 사악한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는 대대로 이어온 가신들을 제외한 다이묘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마사노리도 포함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한신이 그랬던 것처럼 정권 창출에 기여했던 마사노리도 덫에 걸려 서서히 질식하고 만다.
히로시마 성과 넓은 영지를 보상으로 받은 마사노리는 무장답게 성을 개축하겠다고 신청을 했지만, 이미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도꾸가와의 모사꾼 혼다 마사즈미는 2년이 넘도록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는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지방의 유력 다이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한 나라에 성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두 철거하라는 명령을 1615년에 내리면서 남은 성도 개축하려면 반드시 막부의 허락을 받으라는 포고를 한다. 혼다 마사즈미는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히데따다가 2대 쇼군에 오르자 본격적인 토사구팽 모략에 돌입해서 마사노리에게 "성을 수리해도 되지 않을까요?"라는 식의 애매한 구두약속을 하
고서는 "후꾸시마 마사노리가 막부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 성을 수리하고 있습니다. 반역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쇼군에게 모략을 한다. 결국 마사노리는 히로시마의 본성과 함께 영지 90%를 몰수당한다.
이렇게 당할 수 없다며 갑옷을 챙겨입는 부하들에게 "활은 전쟁에서만 도움이 된다. 평화 시에는 창고에 보관될 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활이다. 나는 전쟁에서만 도움이 될 뿐. 그래서 가와나까 섬으로 처박히는 것이다"라고 한탄하며 세상이 달라졌음을 인정한다.
영지를 거의 모두 빼앗긴 마사노리는 낭인신세로 전락한 가신들을 위해 성을 비워주면서 '후꾸시마 가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 명단을 붙였다. 다이묘들은 성이 비워지자 달려가서 이 명단을 손에 넣고 영입경쟁에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가신이 언젠가 주군이 다시 세상으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로 영입제의를 거절했다. 중신 중에는 우산을 만들거나 화장터 일을 하면서도 군자금을 모으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가신들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은 마사노리는 1624년 "옛 후꾸시마 가문의 가신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말고 다른 가문으로 들어가 제 살 길을 찾기 바란다"는 유언과 함께 자살을 한다.
그림 설명: 가또 기요마사. 호랑이를 잡아 모피를 깔고 지냈던 것과 당시의 일본인치고는 거인이었던 체격으로 유명한데, 우리에게는 가등청정으로 악명높았던 인물입니다. 축성기술이 뛰어나 조선에서 철군하지 못해 지은 울산성은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구마모또(토)성은 필수 관광코스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여담으로, 히데요시의 7본창 중 한 사람이고 용맹과 충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가또 기요마사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큰 공을 세웠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넓은 영지를 받고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까지 했지만, 도꾸가와 가문의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으로 독살을 당한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씁쓸한 일화다. 그럼 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이에야스의 일화로 넘어가보자.
도꾸가와 이에야스(?川家康) - 본색을 드러낸 천년묵은 늙은 너구리 영감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너무 유명한 인물이라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실력자인 이마가와 가문에서 오랜 동안 인질생활을 해서 인내하고 우직하게 맹세를 지키는 품성이 길러졌고 귀중한 교육을 받아 몇 안 되는 학식있는 무장이 된다.
젊어서는 온갖 위험에 앞장서며 도전하지만 노년에는 교묘한 모략으로 다이묘들을 이간질시키고 압도적인 우위에 섰을 때에 비로소 참뜻을 드러내는 교활한 성격으로 변해 늙은 너구리라는 별명을 얻는다.
지금까지 이에야스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들어왔을텐데 이번만큼은 승자의 역사를 비꽈보도록 하자.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잡혀있었던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어린 시절은 다른 무장이 누릴 수 없었던 선진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행복한 시절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린 아이가 억눌려 지내는 것을 보고 가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위로할 때마다 "이마가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 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 거야. 미까와에 있는 가신들도 지켜보고 있어. 내가 인질답게 굴어야 사람들은 나를 동정할거야"라며 영감같은 소리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것보다 의연한 태도로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이면 훨씬 우호적인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 설명: 오사까 공방전에서 사나다 유끼무라(?田幸村)의 기습공격을 받고 줄행랑치는 이에야스.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를 비꼬는 편이니까 민망한 그림으로 올립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오사까 성을 포위하고 히데요시 정권의 마지막 보루인 히데요리를 죽이려하지만, 성의 방어를 책임졌던 유끼무라의 기습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평범한 사람은 서울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울 사람이 되지만, 이에야스는 언제나 고향에 돌아갈 꿈을 꿨다고 한다. 인질이 된 이에야스를 위로하기 위해 상인이 개똥지빠귀를 가져온 적이 있다고 한다. "위로 삼아 이 새를 키워보시죠.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제대로 흉내내는 기술이 있는 녀석이라 재미있을 겁니다." 새가 흉내를 내자 이에야스의 가신과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신기해 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새에게는 자기 목소리가 없어. 무장이 키울 애완동물이 아니야. 가져가도록 해"라고 말했다. 주군을 인질로 보낸 미까와의 용맹스런 가신들은 굶더라도 돈과 무기를 모으며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식이 전해졌으니 눈물을 흘리면 감격한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잠시 미까와의 가신과 이에야스의 끈끈한 인연에 대해 잠깐 설명하도록 하자. 미까와의 가신은 어린 주군을 이마가와에 인질로 보낸 탓에 언제나 용병으로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러야만 했기 때문에 용맹함과 충성심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지만 지혜는 모자랐던 것으로 유명했다. 나중에 관록이 붙은 이에야스와 지략이 뛰어난 혼다 마사노부 등이 팀을 이루면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했지만...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실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은근한 불 때기로 말려 죽이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그 때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여정"이라며 온갖 모욕을 다 받아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늙은 여동생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이에야스의 후처로 시집을 보내고,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관동지방으로 영지를 이동하라는 명령에도, 중신들에게 황금과 지위를 뿌려가며 유혹하는 모욕을 모두 참아내고 전쟁을 피했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다이묘들이 새로운 지도자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하기 위해 성에 모일 예정인데, 처남인 이에야스는 올 생각이 없었다. 모양새를 중요하게 생각한 히데요시는 사위를 방문한다는 명목으로 어머니를 보내 '내가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는데도 네가 안 올 생각이냐'라고 시위를 하고 결국 이에야스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려 교또로 향한다.
주군이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이러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만, 혼다 시게쓰구(本多重次)가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집 주변에 장작을 높이 쌓아두고 감시인을 붙였다. 이에야스가 "저건 뭐하는거냐?"라고 묻자 "교또에서 히데요시가 수작을 부리면 장작에 불을 붙여 저 안에 있는 할망구를 태워죽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야스는 "노인에게 난폭한 행동은 하지 말아라"하며 길을 떠났고, 시게쓰구는 매일 그 집 앞으로 찾아와 "주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장작에 불을 붙일 겁니다. 아들에게 주군을 잘 대접하라고 전하십시오"라고 협박했다.
이에야스가 다른 다이묘들 앞에서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다행히(우리에게는 불행히도) 갈등이 봉합되고,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무사히 아들에게로 돌아간다. 당연히 "혼다 시게쓰구라는 놈은 정말 나쁜 녀석이야"라는 어머니의 하소연이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시게쓰구는 이에야스의 충신입니다"라며 오히려 부러워했다고 한다. 출신배경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다른 다이묘들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가신이 없었고 인재만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입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시게쓰구의 엄청난 돌출행동도 부러워 보였을 것이다.
결국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사천왕(사까이 다다쓰구酒井忠次, 혼다 다다까쓰本多忠勝, 사까끼바라 야스마사?原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에게도 손을 뻗쳐 이에야스와 분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이에야스의 성공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사천왕과 히라이와 지까요시(平岩親吉)를 불러 관직과 황금 100냥이라는 거금을 쥐어줬다.
이들의 반응에 따라 일을 꾸밀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천왕 중 사까끼바라 야스마사만이 주군에게 물어본 후에 알려드리겠다고 하고 히라이와 지까요시는 "저는 주군에게서만 보상을 받습니다"라며 거절했을 뿐, 다른 세 명은 넙죽 받아들였다.
그림 설명: 혼다 다다까쓰가 가또 기요마사와 겨루고 있습니다. 다다까쓰가 히데요시의 군대를 위협한 적은 있지만 기요마사와 마상창을 겨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히데요시의 군대에게 싸움을 걸어와 "이에야스에게는 과분한 무장"이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다다까쓰는 전국시대 최고의 창고수라고 알려져있는데 그의 돈보기리(??切)는 일본 3대 명창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무려 6m(나중에는 3m)의 길이로, 새가 날아가다가 부딪혀 반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자신의 보물은 가신이라고 했는데 사천왕 중 세 명이나 내 선물을 바로 받아들였다. 결국 지까요시만 이에야스가 믿을 수 있는 가신이군"하며 소문을 내기 시작한다. 이 소문이 미까와에도 전해져 중신 한 명이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 님에게서 사천왕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습니까?"라며 걱정을 했지만 이에야스는 "사천왕은 아마도 나오마사를 중심으로 의논을 했을 거야. 그리고 모두가 거절하면 히데요시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받았겠지. 그리고 히데요시의 선물따위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거야. 관직을 받는 가신이 많아지면 나도 지위가 올라가는데 나쁜 일도 아니지"라고 대답하며 소문을 종식시켰다.
이런 대답을 전해들은 사천왕은 "역시 주군은 우리를 알아주는구먼. 선물을 받았다고 보고해야 할 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역시 우리 주군이야"라며 감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이에야스 가문에서는 조금도 먹혀 들지 않은 히데요시는 쓴 웃음만 지으며 이에야스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늘어지지만 가신에 대한 이야기 하나만 더하도록 하자. 이에야스는 어떤 일에 여러 명을 임명하는 복수지명을 즐겼는데, 고향의 내정을 담당하는 일에 고리끼 기요나가, 혼다 시게쓰구, 야마노 야스까게를 지명했다고 한다. 바로 부처님 기요나가, 도깨비 시게쓰구, 인간 야스까게라는 별명이 붙은 3인방이었다. 기요나가는 관용과 인정을, 시게쓰구는 엄격한 처벌로, 야스까게는 공정한 판정으로 붙은 별명으로 균형을 맞춘 인사였다.
그런데 새로운 법령을 포고해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포고를 읽지도 않고 무시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세 명이 직접 현장에 가서야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일자무식인 백성들에게 어려운 한자로 된 포고를 붙인 것이었다. 전국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이한 일본어로 바꾼 후에 시게쓰구가 직접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사꾸자에몬(시게쓰구의 다른 이름)이 화를 낸다,"
백성들이 그 때부터 법령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실제로는 마지막 한 줄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게쓰구가 전쟁터에서 보낸 편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짧은 편지라고 하는데, 미까와의 무장들의 성격을 잘 알려준다.
"불조심하고 오센(시게쓰구의 아들)의 건강을 잘 돌보아주고 말을 살찌우도록."
지금까지는 이에야스에 대해 칭찬했으니 이제부터는 노년의 그를 빈정대보자.
젊었을 때의 이에야스는 이미 설명했듯이 항상 도전을 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연합군으로 나서 전진할 때에는 선봉에, 후퇴할 때에는 후위를 자청했고 다께다 신겐에게 무모하게 대들다가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것을 챙기기 시작하고 심지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장사꾼 기질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 속에 천하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기로 삼은 본대 뒤로 빼돌리기부터 빈정대보자. '우리 부대는 나중에'라는 겸손이 조선출정에서 한 번,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의 조선출정은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원정을 종용했고 이에야스에게도 가신과 군대를 내줄 것을 권한다. 마침 호조 가문의 간또(관동)지역으로 영지를 이동한 이에야스는 영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끝내 군대를 내지 않는다. 영지를 이동한 다른 다이묘들은 충성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막대한 출혈을 보면서도 가신과 군대를 냈지만, 이에야스는 각종 핑계를 대며 끝내 전력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
세끼가하라 전투에서도 '귀 부대부터 먼저'라는 겸손아닌 겸손을 떨면서 패전했을 경우를 대비하는 교활한 짓을 한다. 앞에서 후꾸시마 마사노리가 모자라게도 충성경쟁에 불을 붙였는데, 이에야스는 좀처럼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나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몸이 달은 서군의 다이묘들은 지도자인 이에야스에게 언제 출전할 것인지 계속 물었는데, "제가 거꾸로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귀하는 언제 출전하실 건가요? 이번 전투는 여러분 자신의 전투입니다. 여러분이 성문을 나서면 저도 뒤따라 나설 생각입니다"라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게 생각하면 서군 다이묘들이 이에야스만 바라보지 않고 능동적으로 전쟁을 벌이게 유도했다고 하지만, 비꼬아 보면 이미 인질로 잡힌 다이묘들이 선봉에 서게 만들고 자신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전력을 잃지 않겠다는 시꺼먼 속내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전력을 모두 투입하지 않고 보존했다는 의혹이 있다. 아들인 도꾸가와 히데따다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사나가 가문의 작은 성 하나를 오랜 동안 공격하다가 정작 전투가 끝나서야 세끼가하라에 도착해서 아버지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속이 시꺼먼 너구리가 과연 아들의 일탈을 그렇게 오랜 동안 참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만에 하나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해서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를 대비해서 전투에서는 동군의 주요 다이묘들의 전력부터 소비하고 자신의 전력 중 절반은 일부러 뒤에 남겨두었던 것이 아닐까? 미리 아들과 각본을 쓰고 다른 다이묘들 앞에서는 연극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천하가 손 안에 들어온 오사까 공방전에서는 더욱 황당한 짓을 한다. 오사까에서 농성 중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군대가 전쟁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대량의 납을 매점매석한다. 화승총탄의 재료인 납이 오사까 성에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것이야 뛰어난 전략이라고 칭찬하겠지만 문제는 진영에 합류한 다이묘들도 납을 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에게 납을 내어줄 것을 요청하는 다이묘들에게 이에야스는 "마침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내어드리지요. 그런데 돈 주고 산 물건이니 제 값을 받아야겠습니다"라고 대답해 다이묘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우에스기 왈: 이미 천하가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있으니 다이묘들은 비싼 돈을 내가며 납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상하게 변한 이에야스라고 해도 과연 이렇게 수전노 짓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미 이에야스는 전투 후에 예상되는 도꾸가와 막부의 안정을 위해 유력 다이묘를 말려 죽이기 모략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히데요시 정권 출신의 다이묘들을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씩 제거해나가는데 이때부터 이들이 반란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말려 죽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너구리 영감입니다.)
이에야스는 나고야 성을 증축했는데, 다이묘들에게 은근히 자발적 참여를 강요했다. 다시 한 번 충성경쟁에 내몰린 다이묘들은 막대한 지출을 하며 참여하는데, 이에야스가 다시 한 번 "이즈에서 나온 돌이 그렇게 좋다는데"라는 말을 한다. 다이묘들이 사람을 보내 이즈의 큰 돌을 수소문하지만, 다시 한 번 황당하게도 성에 사용할 수 있는 큰 돌은 모두 이에야스가 사갔던 것이다. 결국 다이묘들은 이에야스에게 머리 숙이고, 비싼 가격을 치르고, 이에야스의 성을 지어주는 죽음의 덫에 걸리게 된다.
이에야스에 대한 황당한 일화 한 가지만 더. 세끼가하라 전투에 동원당한 동군 다이묘들은 군자금이 필요했는데 이에야스가 당연히 도와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서 대출을 받는다. 이에야스가 군자금을 대주어도 마땅치 않은 판에, 그는 무려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앞으로는 인덕있는 지도자로 행세하며 뒤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온갖 권모술수를 다하는 늙은 너구리였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너무 늘어져서 한가지 미담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사실여부는 모르겠지만 전국시대의 무장들이 항상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깔끔한 일화다.
우에스기 가게가쓰 (上杉景勝)- 군신을 대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던 양아들
우에스기 가게가쓰(그림 참조. 클릭하면 커집니다.)는 군신이라고 불렸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양아들로, 아버지의 평생 원수 다께다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고 가문상속 전쟁에서 이겨 우에스기 가문을 이었다.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겐신은 조카 가게가쓰를 양아들로 받아들였는데, 아버지 겐신의 역량에는 크게 못미치는 인물이다. 물론 천재가 아니었다는 것이지 가문을 말아먹은 다른 후계자와는 달리 영지를 잘 다스렸고 가문을 훌륭하게 이어갔다. 도요또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세끼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합류해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리지만
다떼 마사무네(伊達政宗)에게 무기력하게 막혀 120만석의 대영주에서 30만석의 군소영주로 몰락하고 만다.
양아버지 우에스기 겐신의 재능은 다 이어받지 못했지만 품성은 그대로 이어받아 품격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생 한 번도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원숭이가 옆에서 자신의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폭소를 터뜨린 것이 유일하게 웃은 일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의 성에 다이묘들이 모였을 때에 여흥을 위해 마에다 도시마스(前田慶次)라는 뛰어난 무장이 다이묘들의 흉내를 내고 다녔는데, 가게가쓰만은 그의 품격에 압도되어 흉내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다께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이 국경을 맞대고 평생을 싸웠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었다. 다께다 신겐( 武田信玄)의 휘하에 있었던 사나다 가문은 지략과 계략으로 우에스기 가문을 상당히 괴롭혔는데, 오다 노부나가에게 다께다 가문이 몰락하고 시나노 일대를 도꾸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가쓰, 호조 우지나오 등의 공격을 받는데, 사나다 가문의 영지에 이에야스가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온다.
사나다 마사유끼(?田昌幸)는 아들을 데리고 가게가쓰 앞으로 달려가 배후를 공격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한다.
가게가쓰 : "이에야스 공이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하던데, 이길 수 있겠는가?"
마사유끼 :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싸울 뿐입니다."
가게가쓰 : "그렇다면 내가 왜 귀공의 아들을 데리고 있어야겠습니까? 아버지가 죽는 자리에 아들도 함께 있어야죠."
라며 귀중한 인질도 받지 않고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지략이 뛰어났던 사나다 마사유끼는 2,000명의 병력으로 3.5배에 달하는 이에야스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3,000명을 죽여 이에야스에게 참패를 안겨준다. 그리고는 우에스기 가게가쓰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림 설명: 동생 마사유끼 대신에 등장한 사나다 노부쯔나(?田信綱). 사나다 마사유끼의 그림을 해상도 높은 것으로 구할 수 없어서 형을 대신 올립니다. 노부쯔나 역시 용장으로 거의 모든 다께다 중신이 전사한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우에스기 왈: 위의 대화는 미화된 것이지만, 우에스기 겐신은 품격있는 무장으로 권모술수를 혐오했었는데 양아들에게도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겐신은 다께다 겐신의 영지가 내륙이라 소금이 부족해 고통을 받을 때에도, '원수는 밉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면서 거꾸로 소금을 보내줍니다. 사나다 마사유끼는 이에야스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낸 후에 가게가쓰와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는데, 세끼가하라 전투에서도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따다의 20,000명에게 대항해 우에다 성을 훌륭하게 막아냅니다. 그의 아들 사나다 유끼무라(이에야스의 그림 참조)는 오사까 전투에서 이에야스를 괴롭혀 대를 이어 이에야스의 골치거리가 됩니다. 그렇지만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장남 노부유끼는 이에야스 편에 합류시켰기 때문에 사나다 가문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기타 등등의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어가도록 하고, 순서가 뒤바뀐 다께다 신겐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에 다른 세계와 시대로 이야기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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