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일본의 주인을 바꾼 = 세키가하라 전투 =

구름위 2012. 12. 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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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죽은 뒤 일본의 대표적인 실력자는 간토 8주를 장악하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츄코쿠의 모리 데루모도(毛利熙元),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들수 있었지만 요시히사는 천하쟁패에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규슈 평정 에 주력하고 있었고, 데루모도도 개인적인 야심이나 실력이나 가문의 단결도 불안했기에 자연히, 즉 일본의 대권은 그중 가장 큰 정치력, 군사력을 가진 이에야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星) 등 도요토미家 가신들은 그것이 너무 불안했기에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를 히데요시의 후계로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긴 전국 시대의 수습과 원정의 실패를 수습하기엔 히데요리는 너무 어린 아이였고, 전국의 식견있는 대명이라면 이에야스의 대권승계를 당연시 하고 있었다.

사실 이에야스은 히데요시의 누이와 결혼했었기에 인척이라 할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정권승계가 가능했다. 미쓰나리는 이대로 도요토미家의 천하를 이에야스에게 줄수 없다며 책모를 꾸미다가 오히려 히데요시가 키워낸 도요토미家의 충신들이라 할만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대립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뻔 한다.

이때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간신히 근거 좌화산성으로 도망을 친다. 이에야스는 천하의 권력자로서 전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아직 전국시대의 살벌함을 버리지 못한 대명들을 위압해 전국시대를 수습해 나가지만 미쓰나리의 책모에 의해 준동하는 무리를 응징하고 전란을 뿌리뽑기 위해 일대 결전을 각오하게 된다. 이때 구령 에치고에서 아이즈로 옮긴 우에스기家가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군비를 확장하자 이에야스는 조정의 적을 치겠다며 천황의 명을 받아 교토를 비우고 에도로 향한다. 물론 미쓰나리를 비롯한 도요토미家 가신들의 반란을 예견하고 조거원충의 복견성에 입성 시킨채 출정했다.

아직 제대로 결속이 되지도 않았고 주모자는 이시다 미쓰나리인데 지휘자는 모리 데루모도이고 병력의 중심은 시마즈, 고니시, 대곡, 우키다 가문이라는 엉성한 체계를 찾추고 있었다. 하지만 병력수는 12만으로 동군의 9만을 압도하고 있었다.

서군은 오와리 기요스로부터 미노, 기후에 이르는 기소강을 따라 펼쳐진다. 동군 선봉인 후쿠시마 마사노리군과 이케다 데루마사군은 앞을 다퉈 전진해 순간에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 註:노부나가의 손자 - 가 지키고 있는 기후를 함락시키고 전장을 오와리 이북으로 옮긴다. 동군과 서군이 오미의 세키가하라에 집결할 무렵 덕천가강의 주력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 결전의 장소로 세키가하라가 선택된다.

동군의 이이 나오마사,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군의 쾌진으로 합전은 시작된다.

성질이 급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은 군공을 놓치지 않겠다며 거세게 군세를 몰아붙여 서군의 진지에 돌입하고 동군의 주력인 이에야스의 직속무사대도 서서히 진격을 시작한다.

이에야스의 능수능란한 지휘는 서군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때 서군의 주력이 되어야할 고니시와 시마즈군은 전선을 유지할뿐 쳐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쓰나리는 다급해져서 동군의 배후에 진을 친 모리수원에게 배후를 칠 것을 지시하지만 수원은 움직이지 않는다.

미쓰나리가 2만석을 주고 영입한 맹장 도승맹은 야차처럼 분투하지만 동군의 총알 세례를 받고 전장을 이탈해 버린다. 전투는 오전을 지나자 난전의 양상을 띄고 전선의 구분이 모호해 진다. 예상밖으로 전투가 길어지자 이에야스는 침반하기로 약조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움직이지 않고 산위에서 관망만 하는데 분노해 철포로 히데아키의 진을 향해 쏜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분노를 두려워한 히데아키는 서군을 배반해 동군으로 돌아서고 서군의 오다니군을 공격한다. 이때 오다니 요시쓰구는 이에야스의 본진급습을 시도하려다 히데아키의 군과 역시 배신한 서군 장수들과의 난전 끝에 장렬히 자결한다. 이때부터 전투는 동군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해져 서군의 부대들은 전장이탈을 시작한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조카 시마즈 도요히사, 가신 감부겸호의 도움을 받아 이이 나오마사,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혼다 다다카스의 추격을 뿌리치고 일찌기 없었던 호쾌한 전장이탈에 성공한다. 나오마사는 이때 시마즈군의 철포에 부상해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만다.

결국 세키가하라 평원엔 서군 전사자 3만, 동군 4천의 시체만 남기고 치열한 전투는 종결된다.

미쓰나리는 그로부터 6일 후인 9월 21일 체포된 가운데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특히 배반을 한 고바야카와를 크게 책하면서 10월 1일 고니시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패한 미쓰나리는 이부키산 깊숙이 들어가 숨어 있다가 죽마고우였던 다나카에 의해 체포되어 이에사스에게 압송되었다. 재판 결과 사형이 확정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미쓰나리는 목이 몹시 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다. 무사가 물 대신 곶감을 주자 미쓰나리는 곶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곶감은 몸에 해로울 뿐이다.' 라고 말하고 먹기를 거절하였다. 무사는 하도 기가 막혀 '잠시 후면 목이 잘릴 터인데 그렇게 몸을 아껴 무엇하겠소.' 하고 비웃자 '인간이란 죽는 순간까지 몸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