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성의 북부 수비선을 완전히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본진을 좀 더 성으로 옮겼다. 이에야스는 차우스야마(산)에, 히데타다는 오카야마(산)로 본진을 전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전투의 불길은 오사카 성 남부 외곽수비선인 사나다 마루와 마른 해자(남쪽 해자는 물이 없었음)로 옮겨 붙었다.
그림 설명: 제가 직접 찍은 오사카 성의 마른 해자입니다. 아마도 당시보다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겁니다. 오사카 성은 대부분 현대에 복구된, 심지어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공원이 되어서 일본 여행 길에 들르지 않는데, 이번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다시 들려보고 싶군요.
자신의 이름을 딴 사나다 마루보다 좀 더 외곽인 사사야마에 있던 사나다 노부시게는 동군의 주력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나다 마루로 급히 몸을 피했다. 사사야마를 장악한 마에다 도시쓰네 병력 중 일부가 무분별하게 사나다 마루를 공격하다가 노부시게가 노린 함정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입었다.
마에다 군이 고전을 하는 동안, 이에야스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사나다 마루 공격에 합류했다. 그는 전장에 늦게 도착해서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사나다 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궁지에 몰린 마쓰다이라 군에게 퇴각명령이 내려졌지만 전투소음이 너무 커서 일선병사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미우라 요에몬 휘하의 닌자부대가 아군을 향해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뒤에서 공격을 당한 동군은 허둥지둥 등 뒤의 적을 향해 공격에 나서는 자연스러운 퇴각이 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림 설명: 사나다마루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동군입니다. 창 모양의 깃발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표식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전열을 정비한 마쓰다리아 군과 이이 나오타카 군은 사나다 마루를 버리고 남쪽 성벽을 공격해 동군 중 처음으로 성문까지 돌파할 수 있었다. 오사카 군의 전천후 구원투수였던 기무라 시게나리는 급히 반격에 나서 성문을 다시 탈환하고 마쓰다이라 군까지 해자 밖으로 밀어내면서 하루의 전투를 끝냈다.
1615년 1월 4일, 동군의 도도 다카토라는 약간 서쪽의 성문을 공격했는데, 하필이면 무능한 오다 나가요리(오다 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던 곳이어서 바로 돌파당했다. 다시 한 번 오사카 군의 구원투수인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반격에 나섰고 도도군은 구키 시로베이라는 무장이 깃발을 들고 패주하는 병사들을 돌려세운 덕분에 참패를 면할 수 있었다.
이틀 동안의 공격에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야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남쪽 성벽은 오사카 성에서 그나마 취약한 곳인데 이곳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전 병력을 동원해 총공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백전노장의 아버지조차 반대하자 마음을 바꿨고 일본역사상 최초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식 대포를 구입해두었다. 아담스 대위가 대포와 화약을 팔았다고 1614년 7월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때부터 오사카 성에 대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4문의 컬베린과 한 문의 세이커 포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기록을 보면 이에야스가 네덜란드로부터 5문의 대포를 구입했다고 하니까 오사카 성 전투에는 최소한 8문 이상의 서양식 대포와 상당히 많은 수의 일본 재래식 대포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동군은 1615년 1월 8일부터 오사카 성에 제한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포격은 1월 15일에 시작되었는데 처음으로 서양식 대포의 위력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교토의 귀족은 일기에 오사카 성의 포격이 여기까지 들렸다는 글을 남겼고 안전한 오사카 성 안에 있던 수비군도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는데도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포격전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오사카 군의 대응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포격 하루 만인 1월 16일 밤에 서쪽 다리를 방어하던 반 나오쓰구가 성 밖을 나와 야습을 시도해 사기 회복을 노렸다. 오사카 군이 보유한 재래식 포로 대응사격했지만 사거리가 반도 미치지 못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림 설명: 반 나오쓰구의 반격모습입니다. 겨울 전투까지만 해도 오사카 군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일본식 재래식 대포에 비해 비교도 안되는 위력을 가진 서양 대포라고 해도 오사카 성을 무너뜨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장기전을 대비해 수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히로시마 성이 1945년의 원폭에서도 대부분이 그대로 버텼기 때문에 훨씬 탄탄한 오사카 성이 원시적인 포격에 무너질 리 없었고 설사 틈이 생긴다고 해도 14.5km에 달하는 성 둘레를 조금만 줄이면 해결되는 위기였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밤마다 총을 쏘고 함성을 울려 마치 야습을 하는 것처럼 수비군을 괴롭혔는데, 누구도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효과로 오사카 동계전투는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게 마무리된다.
1월 17일, 히데요시의 기일을 맞아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성 안의 사당을 찾을 것으로 예상한 동군은 예식 시간에 맞춰 포격을 시작했고 어쩌다가 정확하게 날아간 포탄 한 발이 본채 천수각 중에서도 요도기미의 거실 지붕을 뚫고 들어가 시녀 두 명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 출신으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온갖 전투를 경험했던 요도기미이지만 난생처음으로 보는 대포 탄의 위력에 얼마나 놀랐던지 바로 달려나가 히데요리에게 휴전하라고 매달라기 시작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휘관급 무장들과 전투회의조차 하지 않던 히데요리는 어머니의 종용에 따라 휴전하겠다고 나섰고 피를 흘리며 전장을 이곳 저곳 누볐던 사나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주전파 지휘관들은 제외된 채, 주화파 지휘관들 중심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야스는 전투에 가담한 오사카 군의 모든 무장들의 신변을 보장하고 히데요리도 오사카 성을 포함한 2개 영지 그대로를 가질 수 있는, 전투 직전으로 돌아가자는 제의를 했다. 히데요리는 시코쿠 섬 지역으로 영지를 옮겨 이에야스의 위협에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전파 지휘관들은 이에야스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지휘를 일임하고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에야스는 젊었을 때에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교도의 반란으로 고생을 하자 그들에게 절을 원래대로 돌려주겠다고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반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에야스는 절이 있던 자리는 원래 아무 것도 없던 자리이고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일향교도의 절을 모두 불태워 버렸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휴전합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615년 1월 21일에, 전투 직전으로 모두 되돌리는 휴전합의에 이에야스가 피를 내 서명을 하고 양쪽이 무기를 내려 놓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리고 이에야스가 얼마나 속이 검은 인물이었는지 바로 밝혀진다.
이에야스가 본대를 이끌고 귀국길에 오르고, 수 천 명의 인부가 동군의 포위진영과 막사를 부수는 공사를 시작하는데, 실제로는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고 남쪽의 사나다 마루를 비롯한 외곽 수비선을 모두 해체하는 작업이 목표였다. 인부들이 해자를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을 목격한 오사카 군은 이에야스에게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이미 교토로 돌아간 이에야스에게 사신이 왕복하는 동안 모든 외곽 수비선이 부숴지고 해자는 메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아주 간단하게 '실무진의 실수에 사과한다. 휴전합의가 중요하지 해자따위가 뭐 필요하겠느냐'라는 답변을 한다.
이에야스는 불과 보름 만에 서양식 대포를 제작할 것을 명령하면서 오사카 하계전투 준비에 돌입한다.
그림 설명: 오사카 전투는 전국의 다이묘가 총출동했기 때문에 부대단위로 자세한 설명이 어렵습니다. 이 지도가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의 양쪽 진영의 움직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으니까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제가 중요한 부분은 번역해두었습니다.
(우에스기 왈: 이 당시 오사카 군의 병력은 6~12만 명으로 기록에 따라 거의 2배의 오차가 나는데, 낭인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병력 수조차 파악이 안될 정도로 부대편제가 엉망인 상태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고, 낭인은 부대와 지휘관에 대한 소속감이 없기 때문에 이기는 전투에서는 전력에 보탬이 되지만 지는 전투에서는 오히려 혼란만 일으키는 사용하기 난감한 전력이었습니다.
오노 하루후사는 바로 다음 날 다시 행동에 나섰다. 이번에는 오사카 만을 따라 남쪽으로 가서 사카이 항을 불태우고 기시가와 성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사노 나가아키라의 5,000명과 만나 카시이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패한 그는 오사카 성으로 귀환하고 전장에는 반 나오쓰구(포격에 야습을 감행했던)와 같은 이름있는 무장들이 시체로 남겨졌다.
(우에스기 왈: 겨울 전투와는 달리 여름 전투에서는 오사카 군의 이름있는 지휘관들이 계속 전사를 합니다. 겨울 전투에는 그래도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여유있는 전투를 벌였던 반면에 여름 전투에서는 패배를 예상하고 죽을 생각으로 백병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고토 모토쓰구가 도묘지에서 도쿠가와 군의 오쿠보 다다노리와 맞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산을 넘은 동군은 묘지까지 전진한 오사카 군과 마주쳤다. 오사카 군의 좌익 선봉대는 지난 겨울전투에서 술에 취해 요새를 내준 스스키다 가네스케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전사하면서 그 자리에 뭍혔고 지금까지도 묘지는 보존되고 있다.
(우에스기 왈: 이에야스가 노부시게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게무샤-암살 등을 피하기 위한 가짜 대역-가 지휘를 대신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은 노부시게가 이에야스를 실제로 공격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일단 이에야스는 노년에 너무 살이 쪄서 갑옷을 입고 있지 못할 정도였는데 오사카 전투를 지휘할 때에도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옆의 그림은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이에야스가 상당히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설명: 모처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은 좀 과장이 있는데, 먼저 히데요리가 나이에 비해 너무 늙었고, 반면에 노부시게는 너무 젊습니다. 그리고 블랑기 포의 크기도 지나치게 큽니다.
노부시게는 깃발로 동전 6개의 육문전을 사용했는데 이건 죽은 사람이 황천을 건널 때에 사용하는 노잣돈이라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입니다.
오사카 전투를 그린 엄청난 크기의 그림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오사카 성에서 봤었는데, 가끔씩 오사카 성에서 관련 국보급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이야기에서 거북선을 흉내내 맹선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했는데, 파일 뒤지던 중에 오래 전에 사용했던 자료가 있었더군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배운 몇 가지가 있는데 이런 맹선과 해군포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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