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關原) 전투와 황석산성
임진전쟁의 패배에서 오는 화를 피할 수 없었던 풍신수길이가 죽고 일본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주도권 싸움인 <세키가하라>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풍신수길의 측근 행정관인 미쓰나리가 주축이 된 서군과의 한판 싸움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장본인은 행정관인 미쓰나리지만 그에게는 무력이 없었다. 서군을 결집케 한 무력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황석산성을 공격한 75,300명의 우군대장이었으며 동군의 총수인 이에야스와 대등하게 무력과 재력을 가진 히로시마(廣島) 성주 모리데루모토(毛利輝元)로 그의 애매한 태도가 이 전란을 유발시킨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가 지휘했던 황석산성을 공격했던 왜병 우군은 완벽하게 궤멸되어 전주성에서 부대해체를 당한 후 대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다음해 3월 강제 철퇴를 할 때까지 대장으로서의 이름마저 감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대망에서도 모리데루모토의 조카이며 그의 양자였던 모리히데모토(毛利秀元)을 정유재침략전쟁에 우군의 대장으로 참전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당시에 출전하는 부대장은 모두가 수십 만석의 영지를 가진 영주들만이 부대를 구성할 수가 있고 부대장이 될 수 있는데 영지도 없는 일개 무사가 75,300명을 지휘하는 부대장으로는 절대로 임명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황석산성 전투를 잃어버린 역사로 만드는 역사조작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소설 대망을 쓴 요시카와 에이지가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고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는 데에 일조를 하기 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모리데루모토를 대신하여 전주성에서 재편성 후 모리데루모토의 히로시마(廣島)군을 지휘했던 모리데루모토의 조카이며 가신인 깃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는 오히려 동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병들이 궤멸되자 전투를 일찌감치 전투를 포기를 하고 전사한 동료들의 시체에서 28,000개 이상 왜병들의 코를 베어서 조선인의 코라고 속여서 풍신수길에게 가장 많은 코베기 전과보고를 한 악랄한 사람이다.
그는 이에야스와 대적하여 싸워서 실패를 한다면 모리데루모토는 물론 모리가의 기반도 자신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와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 측과 이면공작을 지속하고 있었다.
깃가와 히로이에는 동군인 이에야스 측에
“모리데루모도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안코쿠지 에게이에 속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대신님께서는 모리가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보증만 해주시면 반드시 모리군이 적대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면서 모리데루모도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소설 대망에서는 모리데루모도가 동군을 편을 들던 서군을 편을 들던 이길 수 있는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리데루모도의 병력이 황석산성에서 완벽하게 소진되어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에야스가 알고 있었고 따라서 모리데루모토가 어떤 반항을 할지라도 이에야스의 적수가 될 수 가 없다는 이미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조선에서 오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부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코쿠지 에게이(황석산성 전투에 참전)와 모리데루모토 중 어느 쪽의 기량이 위라고 생각하나? ”
“글쎄요, 어는 쪽도 등급을 매기 어려운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데루모토 쪽이 훨씬 어리석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까?“
“ 있고말고, 한쪽은 고작해야 7, 8만석을 받는 보잘 것 없는 중인데 그 중에게 120만석이나 되는 영지를 가진 자가 속다니 그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나. ”
“과연 속인 쪽과 속은 쪽은 값어치가 좀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다르지, 그렇게 어리석어서야 난들, 어떻게 믿겠는가? 누구에게 또 속을지 모를 사람이니까.”
이로서 이에야스는 데루모토를 그대로 둘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이에야스는 모리데루모토나 깃가와 히로이에게 아무런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모리데루모토는 이면공작에 의한 <모리가문의 영지 보장>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나 처음부터 말로써만 서군의 총수이지 실제로는 참전 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세이타쇼군에 임명이 되었다. 전투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뒤의 경영에 있다. 승리자의 통제와 패배자의 처리에 영토문제까지 얽혀 조금만 잘못하면 곧 다음 싸움의 싹을 품게 된다.
이에야스는 이점을 명심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라날 수 있는 불평의 싹을 지우고 공평무사한 전후 처리가 필요했다.
첫 번째의 일로 모리데루모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썻다.
1. 샤쓰마 공략을 앞두고 히로시마까지 히데타다(이에야스의 둘째 아들)를 출동케 할 터이니 다이코님(풍신수길)이 정해 놓은 규칙대로 길목에 있는 여러 성에 수비대를 배치하도록 할 것.
1. 데루모토 부인을 전처럼 이곳 저택으로 옮겨 놓도록 할 것.
1. 샤쓰마 공략의 선두에 모리데루모토가 직접 출진하도록 할 것.
1. 이번에 올라온 동군의 장수들에게 그들의 인질을 속히 돌려주도록 할 것.
위 사항을 실행한 다음 모리히메나리(毛利秀就: 모리대루모토의 아들로 이에야스 측에 인질이 됨)와 대면 할 것.
이 명령서의 내용은
“ 히데타다에게 사쓰마 정벌을 명령했으니 히로시마 성을 비워달라. 가신과 중신들에게 인질을 내놓게 하고 대루모토 부인도 이곳 저택으로 옮길 것이며, 데루모토 자신은 사쓰마 공격에 선봉이 돼라 . 그리고 이제까지 잡아놓은 인질들을 저마다 돌려보내 주라. 그러면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 동갑내기인 너의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다. “ 라는 모리대루모토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치욕이었다.
“대감님!
아무래도 이래가지고서는 지금까지 공작을 해온 구로다와 후쿠시마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는 그들의 체면이 서지를 않습니다. “
“그래 ? 이번 싸움이 후쿠시마나 구로다의 체면을 세우주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나? ”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가지고 가. 데루모토는 서군을 소집하는 격문을 온 천하에 띄운 장본이야!”
입장을 바꾸어 깃가와 히로이에라 할지라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제 와서 생각하니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을 위해서 일전을 벌였더라면 아니면 좀 더 일찍 동군과 합류를 했어야 했다. 이러한 걱정도 이제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것과 같은 어리 섞은 일이었다.
히로이에는 명령서를 보고는 탄원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붓을 들었다.
히로이에는 글을 써내려가면서 몇 차례나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눈을 감았다. 이역만리 조선 땅으로 1차 출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왔고 재차출전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황석산성에서 대부대가 전멸을 당하다시피 하였고 모리대루모토 성주가 죽음 직전의 큰 부상으로 화왕산성에서 황석산성으로 전주성으로 장성으로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 1597년 8월에서 1598년 3월까지 7개월 동안이나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부대이동을 계속해야 했고 겨우겨우 살아 돌아와서는 이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밖의 큰일이었다.
자기가 쓰는 이 글 하나에 모리 집안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쏟아져서 그칠 줄을 몰랐다. 이 모든 것이 황석산성에서의 패배가 모리가문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깃가와히로이에가 작선한 탄원서 내용
"뜻밖의 반란에 갈피를 잡지 못하여 지난번에 부탁을 드렸던 바, 두 분께서(후쿠시마, 구로다 나가마사) 심려해 주시어 제 한 몸에 내대신(이에야스)께서 고마우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니 감사한 마음을 저승에서도 잊지를 않겠습니다.
이번 문제는 데루모토님 진심에서 우러나온 일이 아닙니다. 에케이의 계략대로 행정관들 말만 듣고 서성에 들어가는 게 히데요리님(풍신수길의 아들)에 대한 충성이라 여긴 것은 두 분께서 알고 계시듯 데루모토님이 분별없던 탓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내대신님께 야심 없이 충성을 다하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 없습니다. 모리毛利 라는 성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실 것을 부탁드릴 따름입니다. 데루모토님을 두고 저만 은혜만 입게 된다면 제 욕심을 위하여 종가를 저버리게 되는 일, 이것은 제 본의가 아닙니다. 데루모토님 심중은 물론 남 보기에도 면목 없는 일이오니, 데루모토님과 똑 같이 벌주시기를 거듭 말씀 드립니다.
이번에 은혜를 베풀어 모리일가毛利一家를 그대로 존속시켜 주신다면 앞으로는 반역의 뜻을 가진 잔당들도 데루모토님에 대한 이번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또다시 무엄한 생각을 품으면 그때는 종가이드라도 제가 직접 데루모토님 목을 베어 바쳐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이에야스는 구로다 나가마사로부터 간단히 설명을 들은 다음 깃가와 히로이에가 작성한 탄원서를 들고 이마에 올렸던 안경을 내리고 물끄러민 바라본 다음 이에야스는 눈앞에 있는 지도의 스오와 나가토 두 지방에 붉게 모리毛利라고 써넣고 말했다.
1. 히로시마에서 스오, 나가토 두 지방으로 나갈 것
1. 부자의 신병에 대해서는 다른 뜻이 없음.
1. 허황된 소문이 나돌 때는 규명할 것.
모리데루모토, 모리히데나리(아들) 앞
이렇게 해서 120만 5천석의 영주 모리데루모토는 36만 9천석의 중소 영주로 전락을 함으로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만약에 모리데루모토가 황석산성에서 그 많은 병력을 잃지 않고 그대로 보존을 하고 있었더라면 서군의 총수로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서군의 승리로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담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음, 거창, 함양현의 7,000여명의 백성들이 선전한 황석산성 전투가 풍신수길로 하여금 화병의 단계를 넘어서 간장과 신장에 병이 드는 고황膏肓 병에 이르도록 하여 생명을 단축시키고 임진전쟁 후 일본의 역사와 사회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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