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아이오와급 전함들의 재난

구름위 2012. 12. 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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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주리의 좌초

배는 수리 등을 위해 타의에 의해서만 아랫부분을 노출시킬 뿐 스스로 바닥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배가 아랫부분을 드러내는 경우는 사고나 침몰 등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뿐이며 (전복된다거나)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경우에 아랫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배의 경력에 있어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죠. 그런데 미국 최대의 전함중 하나인 미주리호가 이런 사고를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순순히 지휘부의 조함 실수로 인해서 말이죠.

1) 사건의 발단
1950년 1월, 미주리는 쿠바의 관타나모 만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습니다. 어느덧 준비를 마치고 출항만을 앞둔 1월 17일, 미주리의 함장에게는 한가지 특별임무가 주어졌죠. 그것은 잠수함 탐지능력을 보충하기 위한 실험으로써 부이를 통해 표시된 수로를 일정구간 진행하면서 전함의 스크류 추진음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1월 17일 오전 7시 25분 미주리는 순조롭게 출항하여 항구를 빠져나간 후 실험에 지정된 수로를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수로를 표시하던 5개의 부이중 2개가 없어져있었으나 미주리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전 8시 12분, 스크류의 회전력을 높일 목적으로 속력을 15노트로 증가시킨 함장은 잘못된 명령을 내리고 맙니다. 전방의 부이 왼쪽을 지나야 했으나, 반대로 오른쪽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죠. 이후 미주리 전방에는 수로의 끝을 표시하는 부이가 나타났는데 이곳은 수심이 약 4m 내외밖에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미주리의 흘수선 깊이는 12m였죠) 점차 배는 느려지고 키의 움직임이 둔해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오전 8시 17분, 미주리는 진흙 속에 선체 대부분이 처박혀 그대로 좌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좌초된 미주리의 주위에 모여든 소함정들]

2) 미주리  구조작전
미주리의 좌초 소식을 들은 해군은 즉시 해난구조팀을 급파하여 미주리의 구조에 나섰습니다. 최초에 해난구조팀은 바닷물이 다시 만조로 돌아서는 저녁 조석 시간에 함이 재부상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허사였죠. 이후 잠수부가 동원되어 수중 상태를 조사한 결과 해저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아 함의 구조에 희망적인 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미주리에는 더 이상의 손상이나 소실 위험은 없었으며 배는 보호된 바다에 놓여있었고 손상을 주거나 더 해안으로 이동될만한 환경적인 요인들도 없었습니다. 또한 미주리가 좌초한 딱딱한 모래 바닥은 배 전체 길이를 떠받치고 있어서 함체의 구부러짐이나 비정상적인 함체 영향 등을 방지하고 있었죠. 그리고 미주리의 함체 자체는 약간 경미한 손상을 입었을 뿐, 450개의 수밀격실 중 단지 3개만이 파손된 상태였습니다.


[함이 좌초되는 바람에 수면 위로 드러난 함미]

해난구조팀은 배가 손상되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기보다는 시간을 두더라도 손상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주리의 함내에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버릴 수 있는 모든 소비성 자재들로 가득 차있었으며 구조 기간 중에 생길 어떤 상황으로 인해 함 안정성에 문제가 생길 요인들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시간의 논의 끝에 세워진 계획은 미주리의 부력을 증가시키고 무게를 줄여서 함을 일단 부상시킨 후 탈출 통로를 만들어서 배를 이탈시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함내에 남아있던 여러 종류의 액체, 탄약, 창고물품, 그리고 다른 무게가 나가는 물품들이 모조리 하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량물 제거는 함미에 트림 변화를 주었고 함은 다시 재부상하기에 복잡한 상태에 빠져버렸죠. 하는 수 없이 구조팀은 미주리의 함미 부분에 부력탱크를 설치하여 함미에 추가적인 부력을 준 다음, 노포크 항으로 구조 인양함, 구조함, 잠수함 구조함과 함대 예인선 등 많은 배들을 불러모아 이들 배들을 사용하여 미주리를 강제적으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구조 인양함은 인양선과 같이 당기는 힘이 강하였으며 구조함도 이초장비(beach gear)를 설치하고 전함에 연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잠수함 구조함은 함미의 부력탱크에 대량의 공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어 부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고 함대 예인선은 구조함과 함께 결색 작업과 9개의 이초장비로 함미를 당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또한 미주리의 주변에 도랑을 파서 탈출통로를 만들려는 작업도 동시에 병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초에 도착한 육군의 준설선은 미주리에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조금씩 파낸 도랑도 조금씩 무너져내리면서 오히려 미주리가 점점 더 깊게 내려앉게 되는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이때문에 해군은 미주리 주변의 준설을 중단하고 대신에 2척의 준설선을 더 동원하여 미주리의 함미로부터 주 항로까지 폭 50m, 깊이 13m의 통로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당시 미주리의 좌초는 미국 여론의 상당한 관심을 끌었고 좌초 현장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자들이 나타나 대체 언제쯤 미주리가 구조될 것인지 묻는 일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해군은 미주리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언론의 압력과도 싸워야만 했죠. 구조가 길어질수록 해군은 재부상 날짜에 관해서 공개 발표를 강요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많은 종류의 요소들로 인해 정확한 구조 날짜는 정해질 수가 없었지만 구조 책임자였던 스미스 소장은 2월 2일에 미주리를 재부상시키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만약 미주리가 이날까지 부상하지 못하면 더욱 격렬한 압박이 가해질 뿐만 아니라 해군의 능력에 대해서도 거센 비판이 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실패로 끝난 1차 예인 시도]

1월 20일에 예상치 못했던 비정상적인 만조가 되어 한번 배를 당겨볼 수 있는 동기를 주었지만 이것은 시기상조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실패는 사전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좌초선을 재부상시키려는 의도는 무익한 일이라는 점을 재강조하였죠. 희망과 행운만으로는 배가 부상되지 못했고 철저한 준비, 우수한 공학, 그리고 뱃사람의 근성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1월 31일에는 다음 계획이 완전한 준비상태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작전은 일출 전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하였고 이초장비가 잘 정비되어서 각 구조선들은 최선을 다해 작업을 했죠. 오전 6시경, 모든 배들은 전속으로 미주리를 당기기 시작했고 이초장비가 장력으로 인해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죠. 항만 예인선 중 1척이 다른 구조함과 엉켜버렸고 그 결과 작업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예인선중 1척이 작업도중 대열에서 이탈하기까지 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버렸던 것입니다. 미주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작전은 일단 종료되었습니다.


[예인함들에 의해 좌초지로부터 이탈하는 미주리]

다음 번의 예인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구조팀은 미주리의 닻과 체인을 포함한 모든 불필요한 장비들을 제거했습니다. 또한 전방부 예비 탱크를 비우고 부력탱크 2쌍을 추가로 설치하였죠. 2월 1일 아침 5시 30분, 구조 대원들은 준비를 완료하였고 날씨도 좋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경 조석이 최고치로 되면서 함수쪽의 예인선들이 미주리를 우현 쪽으로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좌현 함미 방향의 이초장비가 장력을 받았고 배가 서서히 흔들리더니 함미 쪽으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8시 9분 경 미주리는 다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3) 뒷이야기...
미주리의 구조는 해군에서 가장 큰 좌초 선박을 순수한 해군 함정으로 구조 완료한 것이었습니다. 작전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완료하였고 이에 대한 반응은 빠르고 전반적으로 퍼졌죠. 잘 훈련된 구조 장비와 장교들을 제공한 해군 잠수학교의 가치가 재조명되었고, 구조 세력을 준비하고 비상시에 대처할 수 있었던 해난구조팀은 이후 해군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장차전-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이름 값을 톡톡히 해내게 되죠.

한편 좌초 사태를 초래한 함장은 미숙한 조함의 책임을 물어 미주리의 구조가 종결된 직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결국 다른 함선을 지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채 육상근무를 전전하다 퇴역하게 됐다고 합니다.


[좌초로 인해 손상된 함체 하부]

마지막으로 미주리는 구조 직후 곧바로 드라이독에 수용되어 정밀조사와 수리를 받았고 3개월 후에는 다시 함대에 복귀하여 태평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대활약을 한 것은 여러 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죠. 한편 이 좌초로 인해 미주리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루머가 분분했습니다. 좌초 시에 입은 피해로 인해 퇴역할 때까지 15노트 이상의 속도를 발휘하지 못했다는둥, 해저와 격돌한 충격으로 인해 3번 포탑의 바벳에 금이 갔다는둥 말은 많지만 이들은 모두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미주리의 승조원이 좌초 초기에 재빨리 기관을 정지시킨 탓에 피해가 예상보다 적게 억제될 수 있었던 것이죠.

아무튼 미주리의 좌초는 잘나가던 최강급 전함의 이면에 숨겨진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고나 할까요?


2. 위스콘신과 구축함의 충돌

1956년 5월 6일, 전함 위스콘신은 대서양 함대의 모항 노포크 인근에서 중순양함 데·모인 및 미드웨이급 항모 코럴씨 등과 함께 기동훈련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12시경부터 시작된 기동훈련이 2시간쯤 지났을 무렵, 주변 해상에 서서히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지만 훈련은 중지되는 일 없이 계속해서 진행되었습니다. 15시경, 항모 코럴씨로부터 승조원 1명이 해상으로 추락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코럴씨 주변의 모든 함들은 즉시 기동을 중지하고 해상에 빠진 승조원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위스콘신 역시 탑재된 수상 레이더로 익수자 수색에 나섰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함의 레이더로 사람 하나를 찾는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이때는 이미 해상에 안개가 너무 짙게 깔려서 육안으로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15시 13분, 다행히 다른 함에 의해 익수자가 구조되어 위스콘신은 다시 훈련 진형에 복귀하도록 지시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위스콘신의 레이더 스크린 좌현 전방에 점 하나가 나타났고 그것은 바로 구축함 이튼(DDE-510)이었죠. 아연실색한 함장이 "후진 최대"를 명령했지만 이미 6초 후에 구축함 이튼은 위스콘신의 함수 좌현 전방으로부터 위스콘신을 가로질렀고, 위스콘신의 날카로운 함수는 그대로 이튼의 전방 기관실 부근을 직격하여 구축함의 함수 부분을 거의 절반가량 꿰뚫은 후에야 간신히 정지할 수 있었습니다.


[충돌 후 위스콘신 옆에 계류된 이튼함]


[충돌로 인해 심하게 손상된 함수]


[위스콘신의 함수가 거의 없어져 있군요]


[파손된 함수의 세부 모습]

충돌은 양함 모두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튼은 함체가 두동강나는 것만은 모면했지만 함수가 절반 가까이 잘려나가다시피 했고 쪼개진 기관실 격벽에서는 이미 침수가 시작되어 노포크 항까지 예인이 가능할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승조원의 피해는 크지 않아서 옵서버 자격으로 승선하고 있던 민간인 1명이 충돌의 충격으로 인해 함교에서 갑판으로 내동댕이쳐져 다리가 부러진 것뿐이었죠. 한편 위스콘신은 이튼의 건현 높이만큼 함수에 손상을 받았으나 다행히 전방 2개 격실이 침수되고 상갑판 일부가 뒤틀리는 피해를 입는데 그쳤습니다. 충돌 후 2시간이 자나자 이튼은 도착한 함대 예인함에 의해 함미부터 거꾸로 예인되었고 위스콘신은 3노트의 저속으로 항해하여 자력으로 노포크 항에 복귀했죠.


[파손된 함수의 제거]


[운송해온 함수를 이어붙이는 장면]

위스콘신의 함수는 통상 완전히 수리하는데 1개월 이상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만, 미완공 상태로 방치돼있던 다른 자매함의 함수를 잘라다 붙임으로써 16일만에 수리를 완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그 와중에 사건의 진상조사 및 관계자의 징계도 병행되었습니다만, 조사 결과 위스콘신측의 과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결국 이튼의 함장이 해임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3. 이 2차례의 사고로 가장 피해를 본 배는 어느 것이었을까?

아이오와 급의 6번함인 켄터키는 1942년 3월 7일에 미국 동부의 노포크 해군 공창에서 기공되었습니다. 건조중에 어느덧 전쟁이 끝나버렸지만 건조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고 1946년경에는 이미 함체의 70% 이상, 즉 상갑판 바로 아랫부분까지 완료되어 있었죠. 하지만 이미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해군 예산을 급격히 삭감했고 함대에도 구조조정의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최신예 전함이라 하더라도 신조함을 만들 여력 따윈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1947년 2월 17일, 켄터키의 건조를 중단하라는 통보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좌)건조중인 켄터키 / (우)최후까지 완성되지 못한 추진축과 타]

켄터키는 그로부터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해군 공창의 드라이독에 쓸쓸히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해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켄터키가 방치돼있는 드라이독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드디어 건조작업이 다시 재개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건조를 재개하는 것치고는 뭔가 이상했습니다. 왜 함체 이곳저곳을 급하게 밀봉하는건지, 드라이독에 물은 또 왜 채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죠.

그리고 1950년 1월 20일, 켄터키는 아직 상부구조물은커녕 상갑판조차 깔지 못한채 그대로 해상으로 진수되었습니다! (물론 진수식 같은 것도 없었죠) 바다에 띄워진 켄터키는 드라이독 입구 옆 한구석으로 예인된 다음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한 척의 전함이 예인선들에 이끌려 드라이독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 아마도 눈치채셨겠지만 이것은 막 좌초상태에서 빠져나온 미주리였죠.


[미완성 상태로 진수된 켄터키]


[해군공창 구석에 방치된 켄터키]

내막인즉, 미 해군 당국은 좌초된 미주리를 구조한 후 인근의 드라이독에서 그녀의 정밀조사 및 완전수리를 행할 예정이었지만 불행히도 당시 노포크 주변의 드라이독들은 건조중이거나 수리중인 항모 이상 대형함들로 꽉 차서 전혀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먼 뉴욕까지 미주리를 끌고 가기에는 2월의 해상상태를 볼 때 미주리가 버텨낼 수 있을지도 의문시되었죠. 결국 건조가 중단된 켄터키를 드라이독에서 빼내고 그곳을 이용한다는 결론이 내려져서 켄터키는 미처 건조가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해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켄터키는 그후 두 번 다시 드라이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노포크 해군공창 한 구석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6월 5일, 켄터키는 갑자기 인근의 도크로 옮겨졌습니다. 곧 한 척의 바지선이 켄터키의 옆에 나타나더니 대뜸 그녀의 함수를 절단하기 시작했죠. 앞서 말했던 위스콘신의 충돌 사고 때문에 미 해군 당국은 또다시 켄터키를 희생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함수가 전방으로부터 약 12m 부분까지 잘려나갔고 이것은 그대로 바지선에 실린채 드라이독으로 옮겨져 위스콘신의 함수를 교체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켄터키로부터 잘라져 이송되고 있는 함수]


[스크랩처리를 위해 이동중인 켄터키의 마지막 모습]

그 뒤로 켄터키는 대공전함으로 완성한다든지, 대공미사일 탑재 전함으로 건조를 재개한다든지 여러 계획에 오르내리긴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실현되진 못한 채 1958년 6월 9일에 함대에서 제적되어 스크랩처리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미 해군의 투철한 재활용정신은 켄터키가 스크랩처리된 후로도 사라지지 않았고 켄터키에 탑재되었던 터빈과 보일러들이 신종 함대 보급함 AOE 2척에 재활용됨으로써 켄터키의 "살신성함(?)"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미 해군의 선택은 분명 옳았습니다. 2차대전후 전함의 시대가 이미 가버리고 기존 전함세력까지 축소되는 마당에 켄터키의 건조가 만에 하나라도 재개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 그냥 스크랩 처리하는 것보다는 재활용이 훨씬 합리적이었겠죠. 하지만 개개 함의 입장에서 본다면, 태어나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다른 자매들을 위해 무작정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은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었을까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미 해군 해난구조의 역사』, 해군본부, 2001
- 『조함술』, 해군본부, 2002
- http://home.hawaii.rr.com/schorr/Politics/MightyMoFAQ.htm
- http://www.ussmissouri.com/coll_AgroundiHistory.htm
- http://www.navweaps.com/index_tech/tech-03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