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유보트의 발견
1991년 1월, 미국 동부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한 팀의 다이버들이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보트의 잔해를 발견합니다. 발견당시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 정부 중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 침몰한 유보트에 대한 정보를 갖고있지 못했죠. 그 의문의 유보트는 연안으로부터 약 120km 되는 곳의 수심 70m 지점에 착저해 있었으며 함체는 함교가 완전히 날아가고 중앙부가 대파된 것 외에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죠.
[수중에 착저한 U-869의 잔해]
[U-869 온라인 투어 : 함내 여러 부분에 마우스를 가져다 대보세요]
의문의 유보트가 발견된 직후 함내의 유류품 및 기타 설비 등을 정밀조사하여 이 잠수함의
함번을 판명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엔진에 적힌 고유번호와 식기에 적힌 승무원의 이름을 토대로 하여 이 잠수함이 U-869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사단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본래대로라면 U-869는 이곳에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연합군의 유보트 격침기록에 따르면, U-869는 1945년 2월 28일에 북위 34.30′, 서경 8.13′ 지점 (지브롤터 해협 근해)에서 미국의 호위구축함 USS Fowler와 프랑스의 구잠정 L' Indiscret의 폭뢰에 의해 격침된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한편 전후에 조사된 독일측의 기록에서도 U-869는 2월 25일∼3월 1일 사이에 북위 34∼36′, 서경 7∼10′의 구역 내에서 연합군에 의해 격침된 것으로 되어있었죠. 이처럼 양측 모두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했기 때문에 이제껏 U-869는 지브롤터 근해에서 격침된 것으로 공식 기록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 50년도 더된 시점에서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U-869의 실제 잔해가 떡하니 미국 동부 해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잔해가 U-869가 맞다는 증거는,
① 잔해에서 발견된 나이프에 "M. Harenburg"라는 이름이 써있었는데, 독일 본국에 남아있는 유보트 승무원 명단을 조사한 결과, 이는 U-869의 무선사인 Martin Harenburg라는 것이 확인된 점.
② 엔진과 무선 설비에 각인돼있는 고유번호와 독일 본국에 남아있는 로트번호가 U-869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잠수함이 U-869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대서양 반대편에서 U-869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지브롤터에서 침몰했다는 U보트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무성한 추측을 해댔고 사건의 진상은 미궁에 빠지는 듯 보였습니다.
[(좌) U-869 내부에서 발견된 식기를 들어보는 조사팀 / (우) 식기 하부에 새겨진 문양]
[함내에서 발견된 나이프]
[클로즈업 한 모습. Harenburg라는 이름이 각인돼있군요]
2. 사건의 진상 : U-869는 실제 어디서 어떻게 침몰되었나?
지브롤터와 미국 동부는 거리 상으로도 수천km나 떨어져있는 곳입니다. 사소한 위치파악 오류나 해류의 영향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의심스럽고도 곤란한 점이 많았죠. 이러한 결과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어 TV에 방송되자, 일각에서는 이것을 미스테리 사건으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U-869가 모종의 비밀임무를 띄고 미국 근해를 항해하던 것이라서 공식기록 상에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이를테면 "종전후 남미 연안에서 XXI형 잠수함 수 척이 발견됐는데 그 안에는 몇 개월 분의 물자들이 대량으로 실려있었다."라는 식의 이야기와 연결지으려 했던 것이죠. 그렇지만 조사가 진전됨에 따라 이런 주장들은 모두 근거 없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로 판명되었고, 실제의 진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생전의 U-869 : 취역식]
1) 왜 U-869는 미국 동부 해역에 머무르고 있었나?
본래 U-869의 출항 당시 지정된 작전구역은 잔해가 발견된 곳인 미국 동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U-869가 독일 본국에서 출항하여 그린란드 부근을 지날 무렵, 해군 사령부는 돌연 작전구역을 미국 동부에서 지브롤터 해협 근해로 바꾸라는 지령을 무선으로 하달했습니다. 그러나 U-869는 통신장비의 고장으로 이 지령을 수신하지 못하고 계속 지정된 작전구역인 미국 동부로 항해했던 것이죠. 한편 해군 사령부는 U-869가 그 지령을 수신하여 지브롤터 근해로 항로를 바꿨을 것이라 추정하고 추적 관리하던 중, 2월 중순 이후 U-869로부터의 정기 연락이 계속 두절되자 지브롤터 근해에서 작전 도중 연합군에 의해 격침되었을 것으로 판명해버린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지브롤터 근해에서 격침됐다는 잠수함은 대체?
연합군측이 1945년 2월 28일에 지브롤터 근해에서 독일 잠수함 1척을 침몰시켰다고 생각했을 당시, 그 해역 반경 100km에는 U-869를 제외한 다른 독일 잠수함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즉, 실제로는 그 해역에 독일 잠수함이 단 1척도 없었다는 얘기죠. (U-869의 진짜 위치는 미국 동부였으므로) 결국 연합군 함정들이 공격한 목표는 잠수함이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수중의 고래나 침몰선의 잔해를 잠수함으로 착각했거나 소나의 난반사로 인한 허상을 오인했을 수도 있겠죠.
3) U-869는 어떻게 침몰되었을까?
현재 해저에 남겨진 잔해를 통해 추정한다면 함교가 완전히 날아간 것과 함 중앙부의 피해가 심각한 것을 볼 때, U-869는 중앙부에 어뢰의 직격을 받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연합군의 어뢰에 의한 것이 아니라 U-869 자신의 어뢰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1945년 2월∼3월간 미국 동부 근해에서 어떤 초계기나 대잠함도 유보트를 공격 or 침몰시켰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U-869 침몰의 원인은 U-869 자신이 발사한 호밍어뢰가 자신에게 돌아와버린 것이었죠. 대전중에 목표를 향해 발사한 어뢰가 내부 자이로의 고장으로 인해 큰 원을 그리면서 모함으로 돌아오거나 호밍어뢰가 모함의 추진음을 타겟으로 설정해서 돌아온 사례가 다수 있었는데, U-869 역시 불행히도 그런 눈먼 어뢰에 걸려버렸던 것입니다. 생존자는 제로... 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부지해서 수면까지 올라온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 해역에서 누가 구조되었다는 얘기는 없기 때문에 아마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존자가 있었으면 저 배가 50년이나 지나서야 발견될리도 없겠죠)
3. 교훈 : 전과확인의 신뢰성 문제
대체로... 전쟁에 있어서 어느 일방에 의해 발표되는 "전과"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국가든 전과의 확대는 국민의 사기진작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급적 실제보다 전과를 크게 잡고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죠. 일본처럼 과장이 심했던 국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비교적 전과확인에 엄격하다는 미국이나 독일조차도 실제 결과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것 이외에도 오인이라던가 기타 등등의 이유로 발표된 전과와 실제 전과가 차이가 나는 일이 종종 발생했지요.
잠수함에 있어서는 이런 문제가 더욱 커집니다. 아시다시피 잠수함이란 눈에 그다지 잘 띄는 병기가 아니며 설사 침몰시켰다 해도 수상함과 달리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면 이쪽은 침몰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해저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유유히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요. (2차대전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잠수함들의 사례는 대개 이런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아군은 적 잠수함을 1척 격침시킨 것으로 기록하겠지만 적군은 이것을 피해로 기록하지 않을테니 쌍방간의 기록 차이가 생겨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항공기로부터 공격받는 U보트]
[이런 경우에는 전과확인이 더더욱 어렵겠죠]
그렇기 때문에 특히 잠수함의 전과/피해수에 있어서는 어느 한 국가의 자료만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쌍방의 기록을 모두 참고하여 목표가 된 함이 침몰된 시간, 장소, 그리고 함번이 모두 일치하는가를 확인하여 둘이 일치한다고 판단될 때에만 비로소 공식 전과로 인정할 수 있겠지요.
*이런 방법이 완벽한 전과 산출을 보장하는가?
지금까지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U-869의 경우도 미국과 독일의 기록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지브롤터 해협에서 격침된 것으로 인정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1991년에 전혀 엉뚱한 곳에서 U-869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보면 과연 양측의 기록이 모두 일치했다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하고 의심해볼만 합니다. 물론 격침이 확실하다고 인증된 경우에는 (함이 격침된 후 그것을 증언해줄 생존자/포로 등이 나왔을 경우, 혹은 대규모의 파편/연료누출 등이 확인되었을 경우 등) 자료의 신뢰성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격침을 뒷받침해줄 자료가 부족한 경우라면 이를 의심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현재 알려진 유보트의 격침수 통계는 종전후 연합국과 독일의 자료를 종합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이들중 독일측 자료에 따르면 대전 기간 유보트의 총 손실수는 (자침, 항복, 사고 등 포함) 1,149척입니다. 그중 작전중에 연합군에 의해 격침되거나 실종된 경우는 606척으로써 264척이 함선에 의해서, 250척이 항공기에 의해서, 그리고 37척이 항공기&함선 협조로 격침되었고, 나머지 55척은 연합군에 의해 격침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사유나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 "실종"처리된 경우입니다.
(*주 : U-869도 실종 카테고리에 들어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측의 자료에는 대전중 격침시킨 유보트가 총 604척이며 이중 격침이 확실한 것이 391척, 격침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213척입니다. 얼핏 보면 총 숫자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이 기록이 맞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U-869같은 경우입니다. U-869는 이전까지는 "격침 추정" 카테고리에 속해서 미국/독일 모두 미국에 의해 격침됐을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이제는 항해중 사고에 의한 손실로 카테고리가 변경되었습니다. 당연히 전과에는 변화가 생길 것이고 만약 U-869와 같은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된다면 이제까지의 자료의 신뢰성은 토대부터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종전으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침몰선에 대한 탐사 기술이나 다이버 기술 또한 많이 발전된 만큼 이쯤에서 한번쯤 전과 자료에 대한 재조명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부록 : 주요 유보트들의 침몰 위치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http://uboat.net/boats/u869.htm
- http://www.deepexplorers.com/destinations/u-869.html
- http://www.njscuba.com/njscuba/u-869_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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