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함내 PX와 Canteen Messing의 관계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대로 가격표에 나와 있는 식재료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썼던 글 「도시화의 관점에서 본 군함의 생활환경」에서 언급했던 <자체 취사(canteen messing)>라는 식사 공급 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현재 군대나 학교, 회사 구내식당 등 대규모 인원이 식사를 해야 하는 조직에서는 중앙집중화된 거대한 취사장에서 한 번에 수 백 명 분량의 밥과 반찬을 만든 다음, 끼니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들어 식판을 들고 배식대 앞에 줄을 서는 광경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앙 급식(general messing)> 방식입니다.
[거주구역에서 밥을 먹을 것인가 식당에서 줄을 설 것인가? : 자체 취사와 중앙 급식]
그러나 범선 시대 이래로 빠르게는 1940년대, 늦게는 1950년대 초반까지 각국의 군함에서는 저런 중앙 급식이 아니라 수병들을 최소 6명에서 최대 18명 정도의 <식사 조(mess)>로 나누고 그 식사 조들이 각자 알아서 자기 조의 끼니를 만들어 먹도록 했으니, 이것이 바로 <자체 취사> 방식입니다. 이 <자체 취사> 체제 하에서는 오늘날처럼 전문화되고 취사만을 전담하는 전임 취사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함내 보직 중 'cook'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들은 정확히 말하면 취사장 관리병에 가까웠으며 오븐이나 화로 등의 작동과 관리만을 담당할 뿐, 실제로 요리를 만들지도 않았죠. 그 대신에 각 식사 조들이 조별로 조원 내에서 요리를 할 취사당번을 차출해서 자기 조원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체 취사> 체제 하에서는 식재료나 식단 또한 요즘처럼 전임 취사병이나 급양반장 등이 일괄적으로 결정하거나 관리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수병 1인당 정해진 분량의 식품과 식재료들(이를테면 하루에 쉽비스킷 몇 그램, 염장 쇠고기 몇 그램 식의)이 매일 매일 배급되었죠. 그러면 각 식사 조는 배급받은 재료를 갖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먹을지를 자발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느 날 배급으로 염장 쇠고기가 나왔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어떤 조는 그걸 스튜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을 테고 다른 조는 고기파이를 해먹을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조는 그냥 수프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는 식이죠. 한 부대나 함정 내의 모든 수병이 같은 끼니 때에는 일괄적으로 동일한 음식을 먹게 되는 요즘과 달리, 이처럼 자체 취사 체제 하에서는 같은 끼니 때라도 각 식사 조별로 전혀 다른 음식, 전혀 다른 스타일의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아마추어리즘과 자율성, 다양성 등이 이러한 <자체 취사>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었죠.
하지만 범선 시대에는 <자체 취사> 체제가 갖는 자율성이나 메뉴의 다양성 등이 잘 발휘되기 어려웠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선택할 수 있는 식재료 자체의 폭이 너무나 좁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범선 시대의 배급에서는 매일 매일 제공되는 것은 쉽비스킷 뿐이고 고기나 버터, 치즈 등은 기껏해야 1주일에 2번 정도나 나오면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던 것이죠. 또한 취사 환경의 측면에서도, 범선에서는 연료 적재량이나 취사장의 수용 용량에 한계가 있었고 불의 사용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요리 형태에 제한이 많았습니다.
결국 식재료나 취사 환경 등의 제한 상, 취사당번이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각 식사 조별로 자율적인 취사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그다지 차이가 없기 마련이었죠.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서 <자체 취사> 체제의 진정한 장점이 발현되었던 것은 바로 식품 생산과 보관 기술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던 19세기 중반 무렵부터였습니다.
1) 19세기의 식품 기술 발전과 통조림의 등장
1980년대를 경험하신 분들이라면 당시에는 바나나가 무지무지하게 비쌌다는걸 기억하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요즘의 바나나는 그냥 길거리 리어카에서 천원에 1송이씩 팔리는 신세가 됐죠. 또한 예전에는 봄에나 나오던 딸기를 요즘에는 할인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옛날에는 쉽게 사먹기 어려웠던 고기도 요즘에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식품은 아니게 되었고, 내륙에 사는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싱싱한 생선을 사먹을 수 있게 됐죠.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더 나아진 운송 수단, 재배 기술의 향상, 대량생산 등의 기술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의 19세기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식품의 운송이나 보존, 대량생산 등에서 많은 혁신이 있었고, 이로 인해 서민들의 식탁이 풍성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테면 기껏해야 삶은 감자와 베이컨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던 런던의 하층 노동계급 가정들도 철도의 발달로 인해 싱싱한 쇠고기의 대량 유통과 가격 인하가 가능해지면서 고기 맛을 보게 되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죠.
[19세기 중반의 장갑함 워리어의 배급실: 보시다시피 진짜 빵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마찬가지로 해군 수병들에게 배급되는 식품들도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품목이 다양해지고 질이 향상되기 시작했습니다. 방부제의 등장과 향상된 제분기술, 그리고 오븐의 개량 등은 딱딱한 쉽비스킷 대신에 부드러운 빵을 배 위에서 맛볼 수 있게 해주었고, 냉장고의 등장은 염장 쇠고기를 점차 식단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죠. 이러한 발달로 인해 1914년에 이르게 되면 영국 해군 수병들의 식단은 아래 표와 같이 변하게 되었고, 이 시기의 수병들은 범선 시대의 선배들보다 훨씬 잘 먹는 동시에 메뉴에도 많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종류가 다양해졌다 하더라도 기본 배급은 어디까지나 기본 배급일 뿐, 이것만으로는 식재료와 메뉴의 진정한 다양성을 가능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첫째로 통조림의 등장, 그리고 둘째로 그런 통조림을 PX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죠.
통조림의 기원은 나폴레옹 시절에 프랑스의 아페르라는 사람이 고기나 과일 등을 유리병에 넣고 밀봉하여 만든 병조림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 뒤 영국의 동킨이라는 사람이 잘 깨지기 쉬운 유리병 대신 양철제 캔에 음식을 넣고 밀봉함으로써 처음으로 통조림을 만들어냈다고 하죠. 물론 초기의 통조림은 신선한 식품보다 훨씬 비싼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간편하고 영양가 있는 저장식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탐험가 같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국 해군에게도 1840년대까지는 통조림이라는 것은 병상에 있는 환자 또는 열대나 극지 등의 원정대만이 맛볼 수 있는 귀한 식품이었죠.
또한 가격 외에 품질 또한 초기 통조림의 문제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보존기술이 아직 발전 단계에 있던 당시에는 통조림이 도중에 변질되는 일도 많았기 때문이었죠. 이를테면 19세기 중반 무렵에는 대형 캔에 대한 가열처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해서 미생물 등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캔을 땄더니 고기가 부패해 있었다는 사례가 종종 있기도 했습니다. 1850년에는 한 해군 군수창고에서 대형 통조림에 들어있는 고기 11만 파운드가 식용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고 하죠.
그렇지만 이런 단점들과 통조림 특유의 식감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식품을 간편하게 맛볼 수 있다는 통조림의 가장 큰 매력과 장점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이후 통조림 제조 기술이 점차 나아지면서 가격이 떨어지자 통조림은 곧 서구 사람들의 식탁에 당당한 일원으로써 자리 잡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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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년대에는 이미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perigord)의 트뤼프를 넣은 산토끼 파테를 인도 북부의 심라(Simla)에서, 그리고 트뤼프를 넣은 누른도요를 히말라야 산 기슭의 무소리에(Mussorie)에서 맛볼 수 있었다. 잠재적 시장성은 생산자의 수를 증가시키기에 충분하여, 통조림 생산은 점점 늘어났다.
(...)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수입된 양고기 통조림의 품질도 호평을 받지 못했다. 그 고기는 조잡하고 힘줄 투성이였으며, 지나치게 삶아서 맛이 없는 데다가 한쪽에는 식욕을 떨어뜨리는 지방 덩어리가 붙어 있었고, 통조림의 대부분은 고깃국물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숙련된 요리사는 고깃국물로는 수프를 만들고, 고기에서 지방을 말끔하게 떼어낸 다음 계란을 풀고 잘게 부숴서 오븐이나 불 위에서 갈색으로 구워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양파소스를 곁들이면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요리가 만들어졌다. 가난한 도시의 주부는 통조림에서 꺼낸 고기를 그대로 식탁에 내놓고 빵이나 감자를 곁들였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된 고기통조림은 큰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 가격은 영국산 신선한 육류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특히 1863~1867년 사이에 영국에서 만연되어 국산 육류의 가격을 폭등시킨 비극적인 소 전염병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 통조림 식품의 풍미는 여러 해 동안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완두 통조림은 신선한 콩과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고, 연어 통조림의 맛은 “생선이라기보다는 기름 같았고 양철의 금속맛이 강하게 났다.” 그러나 통조림은 대개 미국의 초원지대나 영국 맨체스터의 빈민굴에 사는 소비자들에게 판매되었는데, 이들은 신선한 식품을 먹어보기는커녕 접해보지도 못한 터였다. 비록 그 식품의 식도락적 가치는 최저였지만, 그것은 여느 때의 제한된 식사에 생기와 다양성을 제공해주었다.
(※출처: 레이 태너힐, 손경희 옮김, 『음식의 역사』 (우물이 있는 집, 2006), pp. 39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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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함내 PX와 부식의 추가 구매
‘그것은 여느 때의 제한된 식사에 생기와 다양성을 제공해주었다.’라는 문구는 해군 수병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앞의 글에 올려진 가격표에 야채 통조림이나 기타 식재료들이 등재돼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규 배급뿐만 아니라 PX 등을 통해서도 통조림이나 각종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자체 취사 체제 하에서 영국 해군의 수병들은 현물로 배급되는 식품들 외에 부식 구매에 사용할 수 있는 추가 부식비를 받았습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하루에 4펜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하루에 1실링(=12펜스) 정도였는데, 기본적으로 배급되는 식품(빵이나 고기, 감자 등)들을 보급관으로부터 추가로 구매하거나 혹은 함내 PX에서 요리에 필요한 추가 부식들을 사는데 사용할 수 있었죠. 이를테면 어떤 식사 조가 다음날 저녁에 카레를 해먹기로 했다고 가정합시다. 하지만 위의 배급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 배급에 카레는 포함돼있지 않죠. 이럴 때 조원들의 추가 부식비로 PX에서 카레가루를 사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음날 점심 때 스튜를 해먹으려는데 기본 배급되는 야채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다 싶으면 PX에서 야채 통조림이나 콩 통조림을 사는 식이죠. 함내 PX는 기본 배급 식품에 더해 이런 식으로 수병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한편, 식단에 상당한 정도의 다양성 또한 제공해주었습니다.
한편 다 사용하지 못하고 남은 추가 부식비는 월말에 봉급에 포함돼서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추가 부식비가 남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금액이 모자라서 봉급에서 얼마씩 금액을 더 걷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사정으로 돈이 엄청 궁하다거나 가정을 꾸린 수병들은 이를 악물고 기본 배급 식품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돈을 모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 참고로 근대 초기의 일본 해군에 이런 수병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예전의 「일본해군과 양식」 글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당시 일본 해군은 제도 등에서 상당 부분 영국 해군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자체 취사> 체제 또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초기 일본의 군 입대자들 중에는 가난한 농촌 출신들이 많았으므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부식비를 아껴서 송금하는 일이 많았고, 그 결과 영양실조나 각기병 등이 만연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잠시... 추가 부식비의 사용방법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번안해서 예화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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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현재, X국 육군은 매일 병사들에게 쌀 500g,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등) 200g, 채소 400g, 김치 약간, 고추장․간장․소금 등 조미료 약간, 그리고 기본 부식으로 초코파이 1개와 우유 200ml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추가 부식비로 1인당 매일 1,500원씩을 지급하고 있죠. 병사들은 이런 기본 배급량과 추가 부식비를 바탕으로 자기 분대의 매일 매일의 식단을 꾸려 나가게 됩니다.
일과가 끝나자 각 분대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내일의 식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내일은 쇠고기가 나오는 날이라 다들 나름대로 기대가 큰 모양입니다. 1분대는 쇠고기를 내일 저녁 때 조려 먹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과는 별도로 점심때는 보급되는 김치를 가지고 부대찌개를 끓여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대찌개를 만들려면 햄이나 라면 같은게 있어야겠죠? 이런건 기본 배급에 들어있지 않으니 내일 취사당번인 막내를 시켜서 PX에서 라면 6개와 스팸 3캔을 사오도록 시켰습니다. 분대원들의 내일 부식비를 전부 합치면 15,000원 정도가 되니 필요한걸 사고도 돈이 남을 것 같습니다.
한편 2분대는 내일 생일자가 있어서 저녁 때 생일파티를 겸해서 거하게 회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보급되는 쇠고기는 불판에 구워 먹으려고 하는데, 기본 배급량 200g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보관님에게 이야기해서 고기를 3kg 정도 더 구입하기로 했고 명색이 생일파티니까 PX에서 과자나 음료수, 냉동식품 같은 것도 더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을 짜고 보니 아무래도 예산이 내일 부식비를 훌쩍 뛰어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모레나 그 이후 부식비를 아껴서 충당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다들 이런 날은 돈을 좀 써도 좋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2분대는 각자 2,000원씩을 더 걷어서 내일 부식비에 보태기로 결정합니다.
3분대장인 김 병장은 외박을 나갈 때마다 씀씀이가 큰 탓에 주변에 빚이 좀 많은 편입니다. 분대 서열 2위인 박 병장은 세 끼 밥보다 담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항상 보급담배만으로는 양이 모자라곤 합니다. 한편 서열 3위 이 상병은 얼마 안 되는 사병 봉급을 꼬박 꼬박 저축하는 짠돌이로 유명한 사람이고, 그 밑에 최 상병은 다음 주에 휴가라서 휴가비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제 김 병장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문을 엽니다.
‘........얘들아 우리 사정 알지? 요즘은 좀 줄여야겠는데 말이다. 그니깐 사람이란게 늘상 좋은 때만 있는건 아니잖겠냐, 응?’
결국 3분대는 내일도 기본 배급량만으로 버티기로 했습니다. 쇠고기는 어떻게 하냐구요? 내일 보급나오는 무랑 같이 넣고 쇠고기 무국을 끓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무로는 채를 썬 다음, 반은 무치고 반은 볶아서 무나물을 만드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일은 삼시 세끼를 쇠고기 무국과 무채무침, 무나물, 그리고 김치로 때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뵈도 나름 1식 3찬은 착실하게 지키고 있는 셈이죠. 단, 한 끼당 국에 고기는 몇 점이나 들어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다음날 아침 기상 전, 각 분대 취사당번들은 일제히 일어나 취사장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3분대 취사당번인 유 일병은 영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국 끓일 때 간 맞추는게 영 고역이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식단도 부실한데 국 맛까지 이상하면 고참들한테 얼마나 갈굼을 당할까요? 물론 분대원들의 입장에서도 괴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땐 호텔 조리사 출신이라서 없는 재료나마 국을 기가 막히게 잘 끓이는 막내 조 이병이 휴가를 나가있는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취사당번을 하다 보면 음식의 질이 오락가락 할 때가 많아서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긴 한 편입니다.
한편 취사당번 유 일병은 취사장 한쪽 구석에서 무 껍질을 깎으면서 2분대 사람들이 회식 준비를 하는걸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몇 주 째 계속 이렇게 기본 배급량만 갖고 밥을 해먹는 자기네 분대의 현실 때문에 마음 한편이 답답해 옵니다.
‘그래도 다 같이 맛없는 짬밥을 먹었다던 시절보단 좀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 일병은 계속 칼을 놀려 갑니다. 그리고 발 한편으로 무 껍질도 하염없이 쌓여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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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런 정도의 느낌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3. Canteen Messing의 종말
기본적으로 수병들의 자율에 의해 식단이 결정되고 식단 자체도 기본 배급+PX의 조합에 의해 다채롭게 꾸밀 수 있었던 점 때문에 <자체 취사> 체제에 대한 참전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하지만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란 일괄적으로 뭉뚱그려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쉽지 않은 법이며, <자체 취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참전자들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는 다분히 누가 취사당번을 맡느냐에 따라 음식의 질의 편차가 심해지는 문제 때문이었죠.
한편 수병들 외에 해군 당국 또한 <자체 취사> 체제를 종결시킬 필요성은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군함이 커지고 승조원 수가 늘어나면서 식사 조의 수도 점차 늘어나게 됐는데, 소량 다품종 식으로 그 많은 식사 조들이 제각기 요리를 하려니 취사장은 식사 때만 되면 늘상 북적이기 일쑤였고 식사 준비와 뒤처리 등에 들어가는 시간도 만만찮게 되었던 때문이었죠. 또한 그것 이외에 자기 보직을 갖고 있는 수병을 취사 준비를 위해 빼내는 것보다 차라리 전임 취사병을 두고 단일한 식단을 대량으로 급식하는 쪽이 배의 운용 효율 측면에서도 더 나은 측면이 있다고 당국은 보았던 것입니다(부수적으로 음식의 질을 일정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 때문에 각국 해군은 20세기 초부터 대량 급식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국 해군성 또한 이러한 대세에 발맞춰 1910년대 말부터 <중앙 급식(general messing)>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했다가 마침내 2차 대전 이후부터 대형함을 시작으로 <중앙 급식>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하여 1950년대 중반에 전 함정에 오늘날과 같은 <중앙집중화되고 전문화된 취사병 +독립된 수병식당> 시스템을 완비하게 되었죠.
벨파스트 또한 2차대전과 전후 시기를 모두 경험한 함정답게 <자체 취사>와 <중앙 급식>의 흔적이 모두 남아 있습니다. 일단 전방 포탑들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2차대전 당시의 수병 거주구역은 범선 시대 이래 유지돼왔던, 생활과 취침과 식사가 일체화된 공간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수병 거주구역에는 저렇게 식사 조원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식사 시간 외에는 저렇게 앉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자기 개인 정비를 하거나 편지를 쓴다거나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죠. 한편 밤이 되면 사진 위쪽처럼 동일한 공간이 그대로 침실로 활용됩니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다닥다닥하게 해먹을 걸어놓고 잠을 청하는 것이죠.
한편 벨파스트는 1956~1959년 사이에 근대화 개장을 받았고, 이 시기에 거주 시설 등도 현대화된 방식에 따라 개조되었습니다. 현재 함 중앙부에 남아있는 전후의 거주 격실은 2차대전 당시의 미국 군함들이나 오늘날의 군함들과 같이 생활공간과 식당이 분리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격실 안에는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인 3단 침대와 철제 사물함이 놓여 있죠.
또한 <중앙 급식> 방식의 정착으로 인해 거주공간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식사 공간은 이렇게 배식 라인과 독립된 수병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좌측 사진 앞쪽에 보이는 선반에 식판과 식기들이 쌓여 있었을 테고 그 뒤에 있는 배식대(우측 사진의)에서 음식들을 식판에 받은 다음, 전방에 보이는 문 뒤에 있는 수병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배식대 한 쪽에는 이런 식으로 오늘의 식단이 공지되고, 그 뒤편에서는 그 식단에 낼 몇 백 명 분량의 피쉬 앤 칩스를 열심히 튀기고 있는 등 사실상 오늘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취사장 체제가 정착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맺음말
조금 글이 장황하게 됐습니다만,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① 본래 <자체 취사> 체제는 식사에 있어서 수병의 자율성과 식단의 다양성 등의 장점을 지닐 수 있었으나 범선 시대에는 식재료와 취사 환경 등의 한계로 인해 그런 장점이 발현되기 어려웠음.
②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식품 생산․보관․운송 기술 등의 발전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공급되는 식재료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식탁이 풍성해지는 한편, <자체 취사> 체제의 장점인 자율적인 식단 편성과 식단의 다양성이 발현되기 시작함.
③ 이러한 상황에서 PX는 기본 배급 식품에 더해 식재료의 선택의 폭을 넓힘으로써 다양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중에서도 통조림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음.
④ 그러나 군함 내 제반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자체 취사> 체제는 점차 시대적 한계에 봉착하여 <중앙 급식> 방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영국 해군에서는 1950년대 이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
오늘날 <자체 취사>는 사실상 거의 완전히 소멸됐다고 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소부대 등의 취사장에서 조금 유사한 면모를 볼 수 있긴 하지만 이것과 그것은 분명히 성격이 다르죠. 또한 현재의 군 규모나 구조를 볼 때 <자체 취사>는 장래에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의미를 갖기 어려운 하나의 '유물'처럼 돼버렸다고는 해도, 수병들 스스로 자기들의 식단을 결정하고 한 끼니 때 같은 배 안에서도 다른 식단이 올라오며 PX에서 식재료를 판다는 그런 생소한 방식이 자아내는 ‘낯설음’이 또한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네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J.F.C. 해리슨, 이영석 옮김, 『영국민중사』 (소나무, 1989).
- 레이 태너힐, 손경희 옮김, 『음식의 역사』 (우물이 있는 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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