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영국 해군의 함내 PX: ① 경순양함 벨파스트의 경우

구름위 2012. 12. 2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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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해군의 함내 PX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나 먹거리 등은 군인이라고 해서 민간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군인들도 가끔씩 군것질도 해야 하고 단추가 떨어지거나 옷이 해지면 바느질도 해야 할 것이며, 가끔씩 담배도 피워야 할 테죠. 하지만 문제는 군 당국이 이러한 일용품들 전부를 지급하지는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니면 지급하더라도 때때로 양이 부족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육군이라면 가끔 외출이나 외박이라도 나가서 물건을 사오면 됐을 테지만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군함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요?

 하나는 함내의 보급관으로부터 부족한 보급품을 추가적으로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 지급되는 물품에 한정될 뿐이고 공식 보급품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물건은 애초부터 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보급관들은 대체로 독점적인 공급자로써의 위치를 활용하여 물건의 양을 줄이거나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책정하기 일쑤였으므로 수병들로부터 악평이 자자했죠. 또 다른 방법은 예전에 「함내 PX 이야기」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항구에 정박했을 때 찾아오는 행상선(bumboat)들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수병들에 대해 유리한 입장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수병들은 품질은 조악하면서도 값은 육상의 상점보다 훨씬 비싼 물건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해야만 했죠.


[흔히 말하는 'PX용 광고'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습니다.-_-;;]

 그리하여 영국 해군성은 19세기 말부터 전 함정과 영내 시설에 PX를 설치하여 예하 장병들의 편의를 위한 물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단, 어뢰정이나 구축함 등 공간상의 문제로 PX를 설치하기 어려운 소형함들은 여기서 제외되었음) 그리고 PX의 운영은 육상 시설일 경우 군으로부터 위탁을 받은 민간업자가 담당했고, 함상의 경우 수병 중 비번인 사람이 맡아서 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러한 운영방식은 곧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함상의 경우 당초 수병이 PX운영을 맡는 것은 이제까지 보급관의 횡포와 비리에 치를 떨어왔던 수병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 PX병들도 보급관들과 똑같이 판매대금 일부를 챙긴다던가 하는 짓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또한 PX병은 PX병대로 PX 업무만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직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근무 시간이 늘어난다든가 하는 불편점이 있었습니다.

 허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육상 시설의 PX 운영에 있었습니다. 돈 문제가 개입되는 곳에는 어디든 돈과 관련된 트러블이 근절되기 어려운 법이듯이 PX 운영을 담당할 업자 선정 문제 때문에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본래 PX 운영에 관련된 제반 문제는 수병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관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뇌물을 받고 특정 업자를 선정한다든가 저질 상품을 비싸게 구매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해군성은 PX운영 관할권을 수병 위원회로부터 지휘관에게 넘기는 조치를 취했고, 1907년에는 이를 다시 해군성이 직접 관할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지만 업자 선정 등에 관련된 트러블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죠.


[순양전함 후드의 함내 PX와 관리관들의 모습]

 결국 영국정부는 1921년에 우리로 치면 <군 복지단> 정도에 해당하는 < NAAFI (Navy Army and Air Force Institute)>라는 기관을 설립해서 3군의 영내 PX 운영을 총괄하도록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NAAFI 소속의 PX관리관들은 요즘으로 치면 군무원과 같은 위치에 있었고, 이들은 함정이 항해중인 동안 배에서 승조원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PX에서 물건을 팔았다고 합니다. 물론 군인이 아니라고 해서 전투에 불참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를테면 순양전함 후드에 있던 PX관리관 7명은 최후의 전투 중에 의무병 보조나 탄약 운반 등을 맡았고 후드의 침몰 당시 전원이 다른 승조원들과 똑같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죠.


2. 함내 PX의 실제: HMS 벨파스트의 경우

 올 여름에 런던과 도쿄에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배 관련 방문지들을 왕창 돌고 왔는데, 그중에 현재 템즈 강에 정박해있는 경순양함 벨파스트에도 들러서 당시의 함내 PX가 어땠는지를 보고 오게 되었습니다. 벨파스트는 1939년에 취역해서 1963년에 퇴역할 때까지 근 24년을 현역함으로 있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내부구조도 2차대전 시기와 전후 시기의 모습이 혼재돼있는데, 그중 PX는 1950년대 당시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템즈 강에 정박해 있는 경순양함 벨파스트]

 함내 PX는 상갑판 바로 아래 중앙 부분에 위치한 작은 방 정도 크기의 격실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대 950명에 달했던 승조원들 전부를 상대로 장사하기에는 조금 작은 크기인 듯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물건의 공급량에 큰 부족함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진들은 클릭하면 원래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 통로에서 뱃머리 방향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오른쪽 위의 NAAFI Canteen이라는 파란색 간판이 붙은 격실이 바로 PX죠.


 PX는 ㄴ자 모양의 구조로 돼있습니다. 이 사진은 윗 사진을 찍은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2~3걸음 정도 옮겨서 찍은, PX의 정면입니다. 보시다시피 PX관리관 아저씨가 후덕한(?) 미소를 띠고 계시는군요. 정면에 보이는 책상과 서류 뭉치들은 관리관이 사무를 보는 곳이고, 오른쪽의 금속제 기구는 커피나 차를 우려내는 기계입니다. 당시의 PX는 요즘으로 치면 카페테리아도 겸하고 있어서 포장돼있는 공산품 외에 즉석에서 우려내는 커피나 탄산음료, 아이스크림, 심지어 케이크나 샌드위치, 파이 등도 팔았다고 합니다. (미 해군의 경우는 'Geedunk'라는 카페테리아가 공산품을 파는 PX와는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만) 한편 뒤에 보이는 것은 물건들을 전시해놓는 진열장입니다.


 첫 번째 사진에 보이는 파란색 간판 아래의 유리창 밖, 그러니까 ㄴ자의 옆 부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카페테리아의 구조가 잘 보이죠. 한편 진열장에 놓여 있는 물품들은 제일 윗단은 칫솔, 구두약 등 잡화류이고, 둘째 단은 초콜렛과 캬라멜, 셋째 단은 음료와 사탕, 그리고 차입니다. 넷째 단은 콩(baked bean) 통조림과 토마토 수프 통조림, 그리고 소스류, 마지막으로 가장 아랫단은 콜라와 오렌지 쥬스 캔이네요. 한편 카운터에 놓인 물건들은 담배와 머릿기름 등입니다.


 당시의 PX는 크기는 작지만 그야말로 요즘의 슈퍼마켓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이 사진은 PX 벽에 걸려 있는 1952년 당시의 가격표인데, 이렇게 가격을 공시해놓음으로써 관리관이 가격을 갖고 장난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죠. 그건 그렇고 어디 한 번 그 시절 PX에서는 어떤 물건들을 팔았는지 볼까요?

[※주: ① 당시의 영국 화폐제도는 파운드(₤)와 실링(s.), 펜스(d.) 등을 쓰고 있었고 1파운드=20실링, 1실링=12펜스였습니다. 따라서 1파운드=20실링=240펜스가 되죠.
 ② 당시의 수병은 1955년 기준으로 이등수병이 주당 3파운드 6실링(=66실링), 일등수병이 주당 3파운드 17실링(=77실링)의 급료를 받았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영국 노동자들은 주당 평균 8파운드 13실링 정도를 벌었죠. 물론 위에 언급된 저 급료 수치는 군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식료품 값이나 피복비 등이 포함돼있지 않아서 실제보다 상당히 저평가돼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의 급료는 당시의 평균임금에 비해서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③ 당시 노동자의 평균임금과 1실링 사이의 비율을 현재의 평균임금에 적용하여 계산해보면, 당시의 1실링은 대략 우리가 현재의 1,800원에 대해 느끼는 돈 가치와 상대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정확한 수치는 아닙니다)]


 가격표를 보면 좌측 상단부터 아래로 식료품(Groceries), 약품과 화장품류(General Goods), 초콜렛과 사탕(Chocolate & Sugar Confectionery), 흡연용 도구(Smoker's Requisites), 문구류(Stationery), 잡화(Sundries), 담배(Cigarettes & Tobaccos)가 나와 있고 가운데에 붉은 글씨로 커피와 음료, 케이크와 스낵 등의 가격이 적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종류의 물건에 한 가지 브랜드 제품만 들어와 있는건 아니고 여러 회사들의 제품이 다양하게 구비돼있어서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회사 제품을 고를 수 있게 돼있죠. 제일 종류가 많은건 아무래도 초콜렛 종류인 듯 싶고 담배도 그것 못지 않게 종류가 많아 보이네요.

 그럼 가격은 어느 정도 했을까요? 이를테면 가운데에 적혀 있는 탄산음료(Soda Fountain)와 커피는 한 잔에 각각 2펜스, 3펜스라고 적혀 있네요. 현재의 상대적 돈 가치로 따져 보면 대략 300원, 450원 정도에 해당하는 셈이니 그럭저럭 요즘보다는 쌌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담배 종류는 2실링에서 2실링 후반 사이에서 가격대가 형성돼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의 상대적 돈 가치로 환산하면 3,600~5,300원 정도가 되는 셈인데, 당시의 흡연자들은 요즘 우리들보다 담배 값에 더 많은 부담을 느꼈을 것 같네요. 한편 초콜렛 코너에 나와있는 킷 캣(Kit Kat, small)은 5.5펜스(약 800원 정도 느낌)입니다. 요즘 팔고 있는 킷 캣 초콜렛은 가격이 얼마 정도 됐던가요?


 카운터에 놓여 있는 초콜렛 종류들이네요. 상단의 Barker Dobson이 6펜스(약 900원 정도 느낌), 아래의 Cadbury 제품이 7펜스(약 1,050원 정도), 오른쪽의 Mars 초코바가 4.5펜스(약 650원 정도)입니다.


 물론 PX에는 음료수도 빠질 수 없습니다. 2차대전 이후 시대인 만큼 역시 코카콜라는 빠질 수 없겠죠. 그 옆의 오렌지색 캔은 색깔 그대로 오렌지 쥬스입니다. 한편 오른쪽 위의 노란색 캔들과 상자는 ‘Mac Ewan's Scotch Ale', 즉 에일 맥주입니다. 역시 상대적으로 술에 관대한 영국 해군답게 PX에서 술도 파는군요(물론 서구에서 에일이나 맥주는 거의 음료수 같은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아마 무제한 팔지는 않고 1인당 구매량 제한이 있다거나 주말에만 판매한다던가 하는 제약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진열대 전면과 카운터의 모습.


 진열대를 좀 더 확대해본 것.



p.s. 여기서 잠시 퀴즈... 위의 가격표 중에서 좌측 상단에 있는 식료품(Groceries) 코너를 보다 보면 조금 PX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상한 물건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앞 글자들이 잘려서 식별하기가 쉽진 않지만 PX에서 팔고 있던 식료품 중에는 밀가루(corn flour)나 카레가루(curry powder)처럼 완제품이 아니라 명백히 식재료에 해당하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군대로 치자면 PX에서 쌀이나 고춧가루, 간장 등을 팔고 있었던 셈인데, 야채 통조림이나 소스류 등은 그렇다고 쳐도 대체 이런 식재료들을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하라는 것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