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의 해양세계와 전조(前兆)에 대한 믿음
증기기관을 필두로 하는 과학기술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인간사는 자연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심하게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지형까지도 바꿔버리는 요즘과는 달리 옛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환경 하에서 약간의 미미한 영향력만으로 삶을 꾸려나가야 했던 것이죠. 이를테면 옛 시절의 농민에게 있어서 한 해의 작황은 농법이나 근면성 등 그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노력보다는 그 해의 강수량이나 토지의 비옥도 등 인간 외적인 요소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 외적인 요소들이 삶에 비치는 영향력이 크다 보니, 세계에 대한 지식이 한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정된 지식으로나마 자연과 환경과 기타 인간 외적 요소들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예측하고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옛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보였을겁니다.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여러 민간지식들, ‘제비가 낮게 날면 다음날 비가 올 징조’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아마 그런 사례 중의 하나일테죠.
이런 현상들이 가장 힘을 발휘했던 곳은 바로 바다에서 일하는 뱃사람들 사이에서였습니다. 옛 시절의 배들은 배를 움직이는 것부터 바람에 의존해야 했던데다가 날씨와 파도가 비단 수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선원 자신의 목숨마저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때문에 선원이 갖춰야하는 주된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을 정확하고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선원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여 신뢰할 만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죠.
[옛 선원들 사이에서 흔히 회자되었던 여러 기상 예측의 사례들]
이를테면 18세기의 선원이었던 윌리엄 댐피어는 ‘태양 주위의 커다란 원은 폭풍우나 많은 비가 있을 것을 의미한다’거나 ‘어떤 달에 매우 심한 악천후가 있다면 그것은 만월 2~3일 전후이다.’라는 기록들을 남겼죠. 또 다른 선원인 존 폰테인이라는 사람은 ‘달이 뜬 후 별이 뒤따라 떠서 별이 달을 따라가는 경우 선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는 폭풍우가 닥칠 조짐이며 대개 이런 비슷한 경우에 폭풍이 일어난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선원들이 기상 현상이 일어나도록 하는 어떤 과학적 법칙을 이해하여 저런 지식들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해와 달, 구름, 바람, 파도, 그리고 바다의 생물들까지를 포함한 오랜 관찰에서 우러나온 경험의 산물이었고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예측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대한 지식이 제한돼있던 옛 시대에 선원들이 가졌던 지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백한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관찰된 현상에만 근거하여 세운 예측은 항상 들어맞지는 않았고, 자연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며 통제 불가능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죠. 이렇듯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예측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그러한 간극을 메웠던 것이 바로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예측, 즉 전조(前兆)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려 했듯이 선원들은 마찬가지로 주술과 의례, 그리고 초자연적 해석을 통해서도 그러한 시도를 하곤 했던 것이죠.
[전설과 초자연적 전조들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과 성 엘모의 불]
전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배 위를 지나가는 혜성, 돛대나 마스트 꼭대기에 나타나는 성 엘모의 불(St. Elmo's fire), 죽은 선원의 유령이 갑판에 나타나는 것, 혹은 예전에도 언급했던 배에 탄 고양이의 행동에 대한 여러 초자연적 해석, 배에 여자를 태우는 것 및 휘파람과 예포 발사 수에 대한 금기 등이 바로 그러한 사례 중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런 사례들 외에도 뱃사람들 사이에서 큰 비중을 지녔고 꽤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던 것이 바로 ‘불운한 배(Unlucky Ship)’에 대한 믿음이었죠.
2. 불운한 배의 전설과 그에 대한 믿음
불운한 배란 용골이 놓이는 순간부터 불행의 운명 내지는 저주를 타고나는 배가 있다는 관념입니다. 대체로 배의 승조원들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거나 운항 중에 다른 선박과 충돌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없는 트러블이나 고장이 일어나는 등, 합리적인 이유로는 설명하기 힘든 불행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뱃사람들은 이 배가 불운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간주하곤 했죠. (단순히 설계가 잘못되었다던가 하는 객관적 원인으로 인해서만 성능이 나쁜 경우는 불운함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설계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여러 동형함들 중 유독 1척의 배만 트러블을 겪는다면 그런 배는 불운함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하죠.)
[건조 당시 세계 최대의 증기선이었던 그레이트 이스턴호(우)는 진수 전부터 잦은 사고로 악명이 높았고 전함 워스파이트(좌)도 1차대전 전·후까지만 해도 기동에 관련된 사고가 빈발하여 수병들에게 불운을 타고난 배로 여겨졌죠.]
이를테면 Peppercorn이라는 한 상선은 배가 취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리장의 실수로 배에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배는 항해 도중 해군의 군함과 충돌했는데 심각한 피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침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뒷날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결과, 배의 외판을 프레임에 고정해야 할 나무못 중 일부가 실제로는 전혀 박혀 있지 않았고 배가 침몰할 때까지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배를 운항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이 이후 Peppercorn은 불운을 타고난 배였다는 소문이 당대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 1892년에 건조된 범장 상선 Olivebank도 당대에 불운함으로 유명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특히 예정된 항해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배가 맞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어느 항로를 취하든 간에 역풍이 분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죠.
[배의 불운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작게는 항해 중의 역풍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폭풍우나 잦은 사고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불운한 배에 탄다는 것은 곧 배의 불운에 선원 자신도 한 발을 담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잘해야 일정이 늦어지거나 항해 과정이 험해지는 정도이고 심하면 선원 자신이 다치거나 배 자체가 침몰해버려서 배와 함께 저 세상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죠. 때문에 뱃사람들 사이에서 ‘불운함’으로 낙인찍힌 배들은 선원을 모집하는데 다른 배보다 어려움을 겪거나 더 나은 근무조건을 내걸어야만 했고 그런 배에 타려는 선원들은 주변으로부터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거나 아무 것도 모르고 속아서 팔려가는 풋내기로써 동정을 사곤 했습니다. 다음은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관련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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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자네들, 저 배에 타나?”
퀴퀘그와 내가 피쿼드 호를 떠나 각자 자기의 생각에 잠겨 어슬렁거리며 해변을 떠나려고 했을 때 낯선 사나이가 우리들 앞에 멈춰 서서 굵은 둘 째 손가락으로 문제의 그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색이 바랜 재킷에 누덕누덕 기운 바지를 입은 초라한 행색으로, 넝마가 다된 검은 수건을 목에 감고 있었다. 마마 자국이 생긴 얼굴에 온갖 무늬를 그려, 마치 물이 바싹 마른 강바닥에 생긴 복잡한 이랑과 같았다.
“저 배에 타기로 결정했나?”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피쿼드 호를 말하는거요?” 나는 좀 더 찬찬히 상대편 얼굴을 보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그래, 피쿼드야, 저 배야.”라고 하면서 그는 뒤로 당겼던 팔을 날쌔게 앞으로 쑥 내밀면서 그 뾰족한 손가락으로 목표물을 가리켰다.
“방금 계약서에 서명했소.”
...(중략)... 피쿼드 호를 손가락질 하며 눈을 부릅뜬 채 이 거지같은 사나이는 떠오르는 환상에 번민하는 듯이 한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이윽고 몸을 약간 떨며 돌아서서 말했다. “자네들은 타기로 했나? 서류에 서명을 했나? 그랬군, 그래. 서명한 것은 서명한 거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 거야. 그러나 또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여튼 모든 것은 다 정해졌고, 이미 다 끝난 일이야. 누가 됐건 가는 사람에게,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출처 : 허먼 멜빌, 양병탁 옮김, 『백경 : 1권』, (중앙미디어, 2005), pp. 13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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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K-19'의 진수식 장면. 샴페인 병이 깨지지 않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볼 수 있죠 --> 엠엔캐스트의 폭파로 동영상이 소실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K-19의 경우도 취역 전부터 사망사고가 빈발해서 수병들 사이에서 이미 불운한 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죠.]
빈발하는 사고나 트러블 외에도 불운한 배를 감별하는 전조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진수식 때 세례의 의미로 뱃머리에 부딪히는 와인 병이 제대로 깨지지 않는 배로써, 뱃사람들은 저런 현상을 배가 타고난 불운과 저주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로 간주했습니다. 영화 「K-19」의 진수식 장면에서 와인 병이 제대로 깨지지 않자 한 순간에 식장 분위기가 싸~해지고 한 수병이 “저주받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관념을 반영한 것이죠.
K-19에 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에서 묘사된 수장 준비 과정. 저렇게 평소 쓰던 해먹을 수의로 삼아 시신을 감싼 뒤 마지막 한 땀으로...]
[전사자의 시신을 수장하지 않은 예외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넬슨 제독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을 럼주 통에 담아왔고, 여기서 럼의 별명 중 하나인 Nelson's Blood가 생겨났죠.]
또한 시신을 싣고 다니거나 시신이 담겨있는 관을 운송한 배는 불운한 운명을 갖게 된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범선 시대에는 항해 도중 죽은 뱃사람의 시신을 육지까지 옮겨오지 않고 수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물론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부패를 방지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신을 싣고 다니는 것을 불길하게 여기는 관념 때문이기도 했죠. 실제로 범선 시대의 수장 절차에는 고인이 쓰던 해먹에 시신과 함께 무게추 역할을 할 포탄 1발을 넣은 후, 밑에서부터 실로 꿰메어 마지막 한 땀을 시신의 코에 뀀으로써 마무리 짓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죽은 선원의 유령을 수의(=해먹)에 구속함으로써 자신이 지내던 배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미에서였죠.
근대에 와서도 이런 관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1905년에 건조된 영국의 장갑순양함 Natal호는 취역 초기까지만 해도 행운함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역 10년째에 미국 대사의 시신이 담긴 관을 미국으로 운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항해 도중 탄약고 폭발로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지자 이런 관념은 순식간에 뒤바뀌고 말았죠. Natal의 침몰 이후에도 이를 인양하려던 수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그 중 한 번은 시공사가 부도가 나는 지경에 이르자, Natal은 시신을 운송했기 때문에 불운함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죠.
[장갑순양함 Natal호의 생전 모습과 침몰 이후의 잔해]
[영국 군함과 교전 끝에 나포돼버린 미국의 프리깃 체사피크호]
그 외에 일부에서는 불운함의 함명을 계승하는 배도 불운해진다는 속설도 있었습니다. 이전 글 「영국해군의 인력 수급과 강제 징병」에서 언급됐던 미국의 프리깃 체사피크(USS Chesapeake)는 영국 해군과의 충돌 사건 발발 이전부터 사고가 잦은 불운함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영국 해군과 충돌하여 예하의 수병이 끌려가는 굴욕을 당하고 전쟁 중에는 아예 영국측에 나포되어 해체되는 수모를 당하자 체사피크라는 이름은 미국 해군 내에서 불운의 상징 같은 것이 되어버렸죠. 이후 세월이 흘러 1899년 무렵, 해군 사관생도를 위한 훈련함 1척이 체사피크라는 이름으로 진수되었습니다. 허나 장차 해군을 짊어질 생도들이 탈 배에 왜 하필 체사피크라는 불길한 이름을 붙였냐는 여론이 들끓자, 당국은 1905년에 이 배의 이름을 Severn으로 개명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3. 배에 불운을 가져오는 사람들
특정한 사건이나 행동이 배에 불운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었는가 하면 마찬가지로 특정한 사람 자체가 배에 불운을 가져온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 그 대상이 어떤 무생물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에서 다른 경우들보다 훨씬 배 안의 사람들에게 복잡한 문제를 가져오기 마련이었죠.
이를테면 혼블로워 8권에서도 짧게 언급됩니다만 범선 시대의 선원들은 핀란드인을 가까운 장래에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핀란드인들에게는 마법을 거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으며, 특히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어서 배를 폭풍이나 악천후 및 맞바람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죠. 뱃사람들에게 핀란드인이란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의혹과 미움의 대상이었고 배 안에 안좋은 일이 발생하면(역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칠어지거나 저장해둔 음식이 갑작스럽게 변하거나 하면) 그 모든 일이 핀란드인의 소행 때문이라는 생각이 선원들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그러니 배 안에 실제로 핀란드 출신의 선원이 타고 있다면? 그가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 동료들 사이에서 백안시되고 따돌림 당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죠. 심지어 역풍이 불자 핀란드인 선원을 선창에 가두고는 그가 바람의 방향을 바꾸고 나면 풀어주겠다고 한 선장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요나는 신의 뜻을 거스르다가 배에 폭풍을 불러오게 되고, 바다에 던져진 후 고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결국 신이 정한 목적지로 가게 됩니다.]
비슷한 경우로 ‘요나(Jonah)'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는 성서의 요나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예언자 요나는 신으로부터 니느웨(고대 앗시리아의 대도시)로 가서 그 도시가 죄악으로 가득 차 징벌을 받을 것임을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언을 거부하고 신을 피할 생각으로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지만 항해 도중 예기치 않던 거센 폭풍이 배를 강타했죠. 선원들이 배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자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는 선원들에게 폭풍이 인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른) 자신이 배에 탔기 때문이라고 고백했고, 그의 요청대로 그를 바다에 집어던지자 폭풍이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른 자를 배에 태웠다가 그 배가 불행을 겪게 되었다는 구도는 이후 해양세계를 지배하는 전조의 하나로 정착하여 범선 시대의 선원들 사이에서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나’라는 관념의 무서운 점은 특정 국가 출신의 선원에만 국한되었던 ‘마법을 부리는 핀란드인’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배 안에 타고 있는 선원 누구나 요나로 지목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불운을 가져오는 존재로 인식되는데 있었죠.
‘지금 이 배가 끊임없는 폭풍에 시달리는 것은? → 요나의 탓.’
‘제대로 된 바람이 불지 않으면? → 이것도 요나의 탓.’
‘먹고 있는 물에서 썩은 맛이 나고 비스킷에서 바구미가 평소보다 많이 나오면? → 이게 다 요나 때문이다!! -_-;;’
...이런 식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뭐든지 요나에게 갖다 붙일 수 있는 식이죠.
안좋은 일들로 인해 불만과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불안감도 늘어만 가는데 딱히 원인은 찾기 어려울 때, 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희생양으로써 지금 이 배 안에 요나가 타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선원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누가 요나인지를 구별할 객관적 지표 같은 것은 딱히 존재하지 않죠. 자연스레 선원 내에서 미움받던 사람, 즉 일이 서툴거나 성격이 모나거나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는 사람에게 요나의 혐의가 쏠리게 되는 것이죠. 마치 마녀사냥 내지는 왕따와 비슷한 맥락이라 할까요.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에는 배 안에서 이러한 요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늦깎이 사관후보생 홀름은 항해사로서의 능력은 모자라지 않지만 소심하고 과단성이 부족해 첫 전투를 앞두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대처가 늦어져 피해가 더 커졌다고 수병들은 믿게 되었죠. 첫 전투가 있은 이래 신출귀몰하는 프랑스 사략선에 의해 몇 번이나 코너에 몰리기도 하고 케이프 혼의 폭풍을 거치며 무풍지대에도 갇히는 등 수병들은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점점 요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수병들 사이에서 떠돌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불행과 고난은 지금 이 배에 요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배가 처한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요나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돌게 되고 홀름이 바로 요나라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그럼 누가 요나인가? 몇 몇 수병들은 평소부터 불만을 갖고 있었던 홀름의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첫 전투에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데다가, 그 외에도 케이프 혼을 돌 때 수병 중 한 명이 바다에 휩쓸려 떨어진 것 등도 그의 지도력 부족과 결부되었죠. 요나의 존재를 확신한 수병들은 이제 그의 지도력 문제를 넘어서 요나, 즉 홀름의 존재가 유령선처럼 신출귀몰하는 프랑스 사략선을 끌어들이고 바람이 불지 않게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기 시작합니다. 안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했던데다가 그런 소문까지 겹쳐 스스로도 자신이 요나가 아닐까, 자기가 배에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닐까 괴로워하던 홀름은 결국 포탄을 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게 되었죠.
[소문에 더해 수병들에게 얕보이는데 대한 자신감 상실과 그로 인한 사건·사고까지 겹쳐 홀름은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리게 되고..]
[소문이 점점 커져 요나가 유령선(=프랑스 사략선)이라는 재앙을 몰고 올거라는 얘기까지 돌게 되자 결국 홀름은 자살하고 맙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요나에 대한 소문’을 대하는 선장이나 함장들의 태도입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오브리 함장은 요나의 ‘실재’에 대해서는 그다지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소문이 수병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 존재의 실재는 입증조차 어려운 불분명한 것이지만 그런 존재에 대한 ‘믿음'이 수병들 사이에서 갖는 ‘영향력’은 엄연한 현실로써 위험요소가 되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17~18세기의 고급 선원들이나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개명된 선원들 중에서는 이러한 초자연적 믿음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17세기 후반의 선원이었던 에드워드 콕시어라는 사람은 어떤 선원을 주술사라고 주장하고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제령 의식을 행한 한 선원의 행동에 대해 회의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죠.
그러나 17~18세기의 시점에서는 이들조차도 다수의 선원들이 여전히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불운을 가져오는 존재에 대한 선원들의 불안감이 확고한 이상 이런 불안을 무시하고 마냥 방치해두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은 아니었죠. 불운을 가져오는 요소가 물건이나 동물이라면 그냥 바다 속에 집어던져 버리면 간단할테지만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게 또한 그들의 고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핀란드인 선원을 선창에 가뒀던 선장의 일화도 그가 실제로 핀란드인의 마법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불안에 휩싸인 선원들을 무마하기 위한 어떤 제스처로써 행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4. 마치며...
초자연적인 존재와 법칙에 대한 해양세계의 믿음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남아 잔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의례나 단순히 옛 관습으로만 남아있지만(성 엘모의 불, 적도 통과제나 예포, 여자의 승선, 고양이 등), 또 다른 어떤 것들(여러 금기나 징크스 등)은 여전히 존재가 불분명한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있죠. 사실 현대의 과학으로도 미래의 운세나 영혼의 존재 같은건 증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반증하기도 어려우니 말입니다. 그러니 딱히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금기를 깨기 위한 적극적인 거부도 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경우인 듯합니다.
[불운함의 함명을 물려받는 것이 불운을 가져온다는 속설은 반증 사례도 꽤 많지만 그래도 해군 당국이 웬만큼 금기에 대해 도전적이 아니라면 이 둘의 함명은 당분간 다시 보기 어려울 듯하군요.--;]
하지만 과거의 여러 속설들 중에는 그것과 들어맞지 않는 사례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불운함의 함명을 계승하면 불운해진다는 속설의 경우, 19세기말에 건조됐던 미국의 장갑함 텍사스나 순양함 브루클린 등은 당대에 모두 엄청난 불운함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한창 교전 중에 항로가 제멋대로 어긋나서 함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뻔한 적도 있었음) 그러나 이들의 함명을 계승한 드레드노트급 전함 텍사스나 경순양함 브루클린 등은 모두 2차대전 중에 날아다니며 잘 활약하다가 별 탈 없이 조용히 퇴역했죠. 마찬가지로 배의 이름을 바꾸면 불운해진다는 속설도 있었지만, 12번이나 이름을 바꾸고도 별 사고 없이 제 수명을 다한 상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핵심은 저런 초자연적 현상들의 ‘실재’ 여부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배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와 초자연적 전조 사이에 어떤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사실상 '까마귀 날자 배떨어지는' 식의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현상이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저런 현상들의 실재 여부 자체와는 별개로 그것을 믿게 되는 ‘사람의 마음’, 혹은 저런 현상들이 사람들 사이에 가져오는 ‘심리적 효력’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대의 불운함으로 유명한 K-19의 승조원들 또한 처음부터 저주 같은걸 믿진 않았을겁니다. 딱히 믿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 그런 중간적 상태에 있었겠죠. 하지만 한 번도 검증해본적 없는 신형함이라는 점과 건조 과정에서 속출하는 사고, 그리고 잠수함이라는 폐쇄공간이 그들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고 그런 심리가 ‘과부제조기’라는 별명이나 진수식 장면에서 나오는 “저주받은거야.”라는 문구를 낳게 했을테죠.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점이나 징크스나 신비주의 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시험 등 중요한 일이나 불안을 앞두었을 때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사람마저도 그런 성향에 기울기도 하죠. 마찬가지로 이지스 레이더 등의 첨단 기계 장비가 지배하는 현대 해군에서도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나를 믿었던 17세기 선원들의 일도 단순히 지나간 옛 이야기나 ‘저런걸 믿다니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개하기 짝이 없군’ 식으로 치부할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김주식, 『서구의 해양기담집』, 해군사관학교, 1996
- 마커스 레디커, 박연 옮김,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까치, 2001
- Peter D. Jeans, Seafaring Lore & Legend, International Marine Publishing, 2004
- http://www.dtmag.com/Stories/Weird%20Stuff/08-06-feature.htm
- http://www.clydesite.co.uk/articles/olivebank.asp
- http://scholar.lib.vt.edu/VA-news/VA-Pilot/issues/1996/vp960602/05310624.htm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eapons_HMS_Warspit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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