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양인력 시장과 해군의 인력 수급
현재 우리 해군의 수병 모집은 지원병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면적인 군 복무 의무가 전제된 가운데(국민개병제) 복무를 어느 곳에서 할 것인가를 정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의 모병제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흔히 말하는 ‘심신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일단 일정 기간의 군복무를 거쳐야 하며, 사회의 남성 인력 수급 대상 또한 대체로 군복무를 마쳤거나 기타 사유로 군 복무가 해결됐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죠. 따라서 군의 인력수급은 사회의 여타 분야와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복무가 의무가 아닌 선택일 경우 군은 사회의 인력 시장에 편입되어 다른 집단들과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군은 ‘누구나 거쳐 가야 할 통과 의례’가 아닌 직업의 하나가 되며, 우수한 인재를 타 부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 또한 사기업 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유인책을 마련해야만 하죠. 이에 더해 한 집단에서 타 집단으로의 전환이 어렵지 않은 인력 시장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렇게 되면 부문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테죠. 19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서구 해양인력 시장은 그야말로 이런 상황에 가장 잘 부합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지원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던 당시의 해군들도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중세 이래로 미분화된 상태로 혼재돼있던 해군과 민간 해운업은 대항해시대의 도래 이후 서구의 해양세계가 점차 확장되어감에 따라 점차 독자적인 영역으로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대포가 해전의 중심이 되면서 군함과 상선이 점차 별개의 형태로 건조되기 시작했고, 상설 해군 조직이 설립되면서 그때까지 전시에만 임시로 편성되던 해군과 함대가 체계적인 행정 및 편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해군 장교가 민간 선박의 간부선원 집단과 구별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도 17세기를 전후할 무렵의 일이었죠.
그런데 이들과 달리 해양세계의 가장 기본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선원 계층 내에서는 19세기 초반 무렵까지도 해군 수병과 민간 상선 선원 사이에 완전한 분화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군함과 상선 승조원의 업무와 직책 사이에는 비록 공통점도 있긴 하지만 다른 점이 훨씬 많습니다.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훈련이나 재교육 등의 별도의 ‘전환 과정’이 필요하죠. 17~18세기 무렵의 해군 장교와 민간 상선의 간부선원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리직이 갖춰야할 덕목이라는 측면에서 해군 장교는 적하법이나 해사법(海事法), 관세 등과는 인연이 없었고 반대로 상선의 선장은 전술이나 전투교리 등에 무지했죠. 그러나 말단의 선원 레벨에 이르면 저런 구분은 상당히 경계선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즉, 상선 선원이나 군함의 수병이나 서로 별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분화 상태의 선원들 : 이들은 영국 해군 수병, 프랑스 해군 수병, 미국 사략선원, 무장 상선 선원인데... 설명이 없으면 과연 누가 민간인이고 누가 해군 소속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죠. (정답은 바로 밑을 마우스로 드래그 하시길)]
[A - 무장 상선 선원, B - 영국 해군 수병, C - 미국 사략선원, D - 프랑스 해군 수병]
이를테면 상선 선원을 해군 함정에 투입하거나 역으로 군함의 수병을 상선에 태워도 별 무리 없이 임무수행이 가능했습니다. 증기력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선원 레벨에서 해야 할 업무(돛·삭구·선체 관리 등)는 어느 선박이나 별다를 것이 없었고, 민간 선박 중에서도 사략선이나 일부 무장상선처럼 선원이 전투적 기능을 여전히 담당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죠. 한편 어느 배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생활양식을 공유하고 ‘갑판 밑에 사는 무리들’로서 공통의 선상문화를 공유했던 것 등은 정신적 측면에서도 군함의 수병과 상선의 선원이라는 분리된 잣대를 적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 집단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죠. 제복 착용이 당연시된 오늘날의 수병들과 달리 당시의 군함 승조원들이 당대 민간 선원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미분화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라 하겠습니다.
[수병복의 정착 : 1650년대(A)만 해도 그냥 당대의 선원들이 입는 복장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1850년대(B) 무렵에 오늘날의 제복과 유사한 형태의 복장이 제식화 되었고 1890년대(C) 무렵에 이 형태가 완성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됐죠.]
때문에 업무의 이질적 성격이 짙었던 장교나 간부선원들과는 달리 일반 선원 집단은 군함과 상선, 사략선, 심지어 해적선까지를 자유롭게 넘나들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영국 해군의 수병으로 근무하던 A는 모함에서 탈주하여 다른 항구로 도주한 후, 그곳에서 상선이나 사략선의 선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상선 선원이던 B도 너무나도 열악한 근무조건을 참지 못하여 중간 정박항에서 배를 내린 후 다른 상선으로 갈아탈 수 있었죠. 혹은 항해 도중 선상 반란을 일으켜 배 통째로 선원들 모두가 해적으로 신분을 전환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2. 해군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 현상과 그 해결책
해군, 해운업계, 사략선 등 해양세계 내의 여러 집단들이 해양인력 시장이라는 단일한 풀(pool) 안에서 인력 수급을 해야 했던 것, 그리고 한 집단에 속한 선원이 다른 집단으로 이직하는데 업무 성격상의 장벽이 크지 않았다는 점은 인력 수급 경쟁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 구조 하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을 막론하고 해군은 타 집단에 비해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죠.
즉, 해군 수병이 탈주하여 상선 선원이나 사략선 선원으로 취직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반대로 현재의 처우에 불만을 가진 상선 선원들은 웬만큼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은 이상은 해군에 자원하기 보다는 해운업계 내에 머물면서 다른 상선에 취직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출은 많은데 비해 유입되는 자원자는 적으니 당연히 해군은 인력 수요를 채우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죠.
1) 해군의 인력 부족을 낳은 원인들
왜 이런 불균형이 발생했는가? 그것은 해군 수병들의 처우가 해양세계 내의 다른 집단의 선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① 자유의 제한 : 상선의 선원들이 기항 때마다 자유롭게 육지에 상륙할 수 있고 한 차례의 항해가 끝나면 거취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었던 반면, 영국 해군의 수병들은 탑승함이 예비역으로 돌려지기 전까지는 좀처럼 육지를 밟을 수 없었습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년 가까운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기항하더라도 탈주를 우려하여 수병들의 상륙을 거의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죠. 당연히 휴가나 고향 방문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영국의 모항으로 복귀할 경우에만 아내 등이 배의 귀항 일정에 맞춰서 하룻밤의 면회를 갖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선원의 귀향 : 당시의 해군에서는 요즘보다도 제대의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습니다. 심지어 운이 나쁘면 복무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다른 배에 다시 끌려갈 수도 있었죠.]
[짧은 면회 : 함정이 영국에 복귀했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배에 올라 잠깐의 시간을 갖는 것이 면회의 전부였죠. 물론 배에 올라온 여자들 모두가 아내는 아니었지만요. (사진은 영화 「HMS 데파이언트」에서)]
② 가혹한 규율 : 마찬가지로 해군 특유의 규율과 제재도 해군 복무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상선에서도 폭력이 일상화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함에서처럼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에까지 처벌 규정이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수병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채찍질(flogging)이었는데, 이는 20대 이상 맞으면 건장한 남자라도 널브러지기 시작하고 40대 이상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중형이었습니다.
③ 저임금 :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급료였습니다. 16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군 수병의 봉급은 숙련수병(Able Seaman)이 22실링, 평수병(Ordinary Seaman)이 19실링 정도로써 당시의 상선 선원 및 육상의 노동자들이 받는 급료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죠. 그러나 이후 100년이 넘도록 수병의 임금은 동결(...;;)되었던 반면, 상선 선원들의 임금은 물가 상승에 따라 차근차근 올라서 1750년대에는 평균 임금 수준이 30실링 수준까지 상승했습니다. 또한 상선 선원들은 운송료 없이 약간의 짐을 실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므로 가외수입도 기대할 수 있었고, 전시가 되면 위험수당까지 붙어서 평균 임금이 42실링 정도까지 올라가곤 했죠.
게다가 저런 낮은 급료나마 제때에 정확히 주면 다행인데 항해 중에는 돈이 필요 없다는 이유로 해군 수병에게는 배가 모항에 복귀할 때 몇 달 치 급료를 몰아서 지급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심하게는 복무 기간 내내 급료를 주지 않다가 배가 예비역으로 돌려져서 간신히 복무를 마치게 됐을 때 그동안의 급료를 일괄 정산해서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죠. 또한 급료를 현금이 아닌 군표 형태로 주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이론상 수병은 지급받은 군표를 런던의 해군성 경리부에 가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수병이 복무 중 상륙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박 중인 항구에 상주하는 중개인이나 모함의 보급관을 통해서 군표의 환매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정 비율의 금액이 수수료 명목으로 떼이게 됐던 것이죠.
비슷한 일을 하면서 규율은 더 가혹한데 비해 임금은 2/3~1/2 정도밖에 안되고, 그나마 제때 제 액수를 받기도 힘드니 당연히 상선 선원보다 해군 수병의 인기가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해군에도 Prize Money라는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긴 했지만 이는 사실 그렇게 흔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는게 문제였죠)
[(좌) 채찍질 : 40대를 넘어가면 등에 영원히 흉터가 남게 되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죠. / (우) 수병들의 몫을 착복하는 보급관.]
(※주 : 열악한 음식이나 생활환경, 질병 및 사고 등도 해군의 낮은 인기에 한 몫 했을 것으로 예상하기 쉽지만 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의외로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군함이나 상선이나 저런 조건들은 대부분 비슷했기 때문이죠. 저런 요인들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딱히 해군만을 꺼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아예 해양인력 시장 자체에 진입하지 않거나 짧은 항해를 거친 후 다시 육상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위와 같은 형편이었으므로 17~18세기의 영국 해군에는 갖은 주의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의 탈주가 빈번히 일어나곤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793~1805년까지의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 동안 약 10만 명에 달하는 수병이 탈주를 감행했고(연평균 8,500명 수준), 전쟁이 한창이던 1803~1805년 동안에는 26개월 동안에 약 12,000명 정도의 탈주 병력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매년 거의 비슷한 비율의 사망자(사고나 질병, 전사로 인한)도 발생했음을 감안하면 영국해군의 수병 인력 감소 및 유출 규모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죠.
2) 인력 수급을 위한 대책
19세기 이전의 영국 해군은 수병 인력 수급을 지원병 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오늘날처럼 중앙의 행정기구가 일괄적으로 수병을 모집하여 예하 함정에 배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함의 함장이 개별적으로 모집대를 조직해서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원자를 끌어 모으는 방식이었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구인 정책도 없는데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무 조건도 상선 등에 비해 열악하니 지원자가 수요에 비해 모자라거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소설 『혼블로워』 6권에 묘사된 것 같은 함장의 고뇌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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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쇼 혼블로워 함장은 아침 일찍 인쇄소 직원이 하숙집으로 가져온 교정쇄를 보고 있었다. 잉크로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작성한 수병 모집 포스터였다. “용기와 정열이 넘치는 젊은이들에게 고함!” 이라는 제목이 거창했다. ...(중략)...
교정쇄를 보면서 혼블로워는 일종의 절망감을 느꼈다. 이런 모집 공고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광장의 어느 구석에 가더라도 최소한 십여 장은 붙어있을 것이다. 명성이 자자한 함장들이 최근의 항해에서 거둬들인 실질적인 상금액을 과시하며 수병모집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판에, 한눈으로 보기에도 낡아빠진 전열함에 이름도 없는 함장이 이런 공고문으로 지원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원병 모집을 위해 사관 4명에게 각각 6명씩의 수병을 붙여 남부지방을 순회케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이 포스터가 한 뭉치씩 들려 있을 것이다. 부하들의 여비도 항해기간 동안 저축해놓은 혼블로워 자신의 급료에서 충당해야만 한다. 걱정이 앞섰다. 돈은 돈대로 날리면서도 부족한 인원은 쉽사리 채워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리디아 함에서 자기 구실을 제대로 하는 수병 및 갑판원 200여 명을 데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2년간의 해상근무 후에도 영국 본토에 상륙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채 강제로 전속된 자들이었다. 모병 공고문을 쓸 때는 이런 사실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정원을 채우기 위해서는 50여 명의 경력 선원은 물론, 신입수병 및 소년수병 200여 명이 추가로 필요하다.
병력을 충원하지 못하면 함장 직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실업자나 다름없는 신세로 하루 8실링의 절반급여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혼블로워는 자신이 해군 고위층들로부터 어느 정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현역근무 여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후략)
[※출처 : C.S. 포레스터, 조학제 옮김, 『혼블로워 6권 : 불타는 전열함』, (연경미디어, 2005), pp.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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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무렵의 수병 모집대 : 감언이설에 홀려 모집대를 따라간 저 순진한 청년이 실상을 깨닫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을겁니다.]
그래도 평시에는 그나마 어찌어찌해서 수병 수요를 다 채울 수 있었는데 문제는 전시의 경우였습니다. 전쟁 발발로 인해 예비역으로 돌려져있던 함정들이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수병의 수요는 대폭 늘어나는데 비해 지원자의 수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으니 당장 수병 대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해군성은 여러 가지 정책을 모색했는데, 그중 하나는 해양세계 내의 다른 부문에 대한 인력 유입을 억제하여 수병 수급에 대한 경쟁을 완화해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전시에 일반선원이 상선이나 사략선 등에 취업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밥줄이 끊긴 뱃사람들이 해군으로 발걸음을 돌릴 것을 기대했던 것이죠.
보다 능동적인 대책으로는 아예 해양인력 시장 외부에서 새로운 인력들을 조달해오려는 정책들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756년에는 해사협회(Marine Society)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고아나 빈민의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성장한 후에는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도록 기초 교육 등을 실시하는 일종의 사회복지시설이었죠. 1795년에는 각 지방 행정구마다 일정 인원의 수병 모집 의무를 강제로 부과하는 할당령(Quota Act)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초기적인 징병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었는데, 각 행정구에서 충원해온 인원들이란 것이 평범한 양민이 아니라 채무자나 부랑자 또는 절도범·소매치기 등 범죄자들을 끌어 모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썩을래? 아니면 해군갈래?’ 해서 오게 된...) 그러니 머릿수만 채웠다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골칫거리만 늘어나는 일이 많았죠. 이외에도 영국인이 부족할 경우에는 외국인 선원을 수병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했다고 합니다.
3. 해군의 인력 수급을 위한 최후의 수단 : 강제징병(Press Gang)
허나 저런 방법들로도 전시의 수병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전황이 급박하여 느긋하게 지원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곤 했죠.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해군 당국이 실시한 것이 바로 악명 높은 강제징병(Press Gang)제도였습니다.
1) 강제징병 제도란 무엇인가?
강제징병이란 각 함의 함장들에게 군속이 아닌 일반 국민을 강제로 구속하여 수병으로 삼을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1664년에 처음으로 시행된 제도로써 이후 18세기~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쟁 때마다 발령되었는데, 징병이라는 명칭과 달리 근대적 징병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공권력에 의한 ‘합법적 납치’에 가까운 성격을 띄고 있었죠.
[부두에서 선원들을 강제로 납치해가는 강제징병대의 모습.]
구체적인 시행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함장이 예하의 위관이나 준사관에게 수병들을 모아서 징병대를 편성하도록 명합니다. 그러면 징병대는 부둣가를 돌면서 목표가 될 만한 선박을 물색한 다음, 갑판에 올라가 선장에게 국왕 폐하의 배를 위한 승조원을 모집하겠노라고 통보를 하게 되죠. 충분한 수의 지원자가 나타날 경우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협박과 포승줄, 몽둥이와 매질 등등으로 강제적으로 선원들을 포박·납치하여 배로 끌고 가게 됩니다. 그 후 함장의 주관 하에 갑판 위에 징병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국왕 폐하의 수병으로 복무하겠노라는 취지의 선언문 낭독 및 선서 행사가 이뤄집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징병된 사람들은 수병 복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어 정식으로 군법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죠. (강제로 서약서에 지장을 찍게 해놓고는 ‘지장을 찍었으니까 너는 자발적으로 지원한거다’라는 식)
물론 법적으로는 강제 징병된 자가 이 조치가 부당하다고 생각할 경우 해군성에 항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양 사이에 소식이 전해지는데 몇 개월이 걸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해군성에 항의한다고 서신을 보내도 너무 늦기 전에 회신이 돌아오리란 보장이 없었죠.(그 사이에 배가 육지를 떠나 버리면 상황 종료...;;) 게다가 배가 일단 육지를 벗어나게 되면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는 말처럼 국왕이나 해군성의 제독보다도 바로 옆에 있는 함장이 생사여탈을 좌우하게 되니 사실상 징병된 사람이 풀려나기란 가뭄의 콩나기 식이었습니다.
2) 강제징병 대상의 확산과 그에 대한 저항
본래 강제징병은 ①충분한 선상 경험이 있는, ②18~55세 사이의 선원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1600년대 이래로 영국이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거의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자 점차 납치의 대상과 무대가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초기에는 항구에 정박 중인 선박을 습격하여 선상에 있던 선원들만을 납치하던 것이 항구도시 자체로 범위가 넓어져서 선원들이 자주 들르는 선술집이나 여관 등을 습격하여 안에 있는 선원들을 몽땅 끌고 가는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던 것이죠.
심지어 극단적으로 인력이 모자라서 각 함 간에 강제징병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면 선원이건 아니건, 선상경험이 있든 없든 간에 일단 눈에 띄는 남자는 아무나 잡아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바다와는 전혀 거리가 먼 여관주인이나 그냥 지나가던 직공 등을 납치하는 사례도 있었고 노동계급과는 거리가 먼 시의회 의원까지 포박해갔다가 시의 유력자의 호소로 간신히 풀려났던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니 연안지방 주민들에게는 강제 징병령이 시행됐다는 소식이 곧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근 지방에서 강제 징병대가 돌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을 자제하기도 했고 아예 주민들 스스로 마을을 비우고 내륙 지방으로 피신하는 경우도 있었죠. 한편 소극적인 피신에 그치지 않고 강제징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징병의 직접적인 대상자인 선원들은 뱃전을 넘어오는 강제 징병대의 손을 도끼로 찍어대거나 몽둥이에 맞서 칼을 꺼내들곤 했죠. 마찬가지로 졸지에 가장이나 아들, 친지를 빼앗긴 도시 주민들 또한 낫이나 쇠스랑 등을 꺼내들고 강제 징병대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강제징병대에 끌려가는 가장을 구출해내려는 부인들의 저항.]
그리고 이 두 집단의 행동이 우연찮게 일치할 때는 강제 징병대에 대한 저항이 폭동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747년에 북미의 보스턴에서 일어났던 놀리스 폭동(Knowles Riots)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 소속 라크호의 함장인 찰스 놀리스는 강제징병 작전을 통해 보스턴 주민 몇 명을 포박하여 배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로 돌아가던 이들 징병대의 앞에 포박자들의 친지들로 구성된 군중이 몰려들었고, 당초 300명이던 시위 군중은 도시 주민들과 항구의 선원들까지 합세하여 곧 수천 명 단위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내 포박된 사람들을 구출하고 라크호의 간부들을 인질로 붙잡았는가 하면, 시 보안관을 때리고 감방에 집어넣었으며 모든 부두에 몽둥이와 칼로 무장한 분견대를 배치하여 빠져나간 해군 장교들이 그들의 배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방 의회 의사당마저 포위한 채 특정 지역에서 강제징병을 금지했던 법안을 북미 식민지들도 적용받을 권리가 있다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죠.
3) 강제 징병이 전쟁마저 초래한 사례
한편 목적지에서 강제징병이 행해지고 있다는 풍문을 들으면 항해 중이던 선원들은 갖은 수단을 써서 항로를 바꾸려고 애를 썼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배에서 탈주하거나 심지어 선상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해군 또한 지능화돼서 단순히 항구에서만 선원을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폭이 좁은 도버 해협 등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영국으로 귀항하기 직전에 긴장감이 느슨해진 상선을 덮치기도 했죠.
이런 행각은 비단 영국 선박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고 외국 상선을 습격하여 선원을 조달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특히 신생 독립국인 미국 선박의 경우 사실상 영국과 언어와 문화가 같았기 때문에 영국 출신 탈주자들의 주요 은신처가 되곤 했는데, 영국 해군은 탈주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미국 선박을 임의로 임검하여 미국 선원들을 종종 강제로 납치해가곤 했죠. 1793~1815년의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 동안 총 6,000명의 가량의 미국 선원들이 강제 구인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양국 간에는 감정의 골이 깊게 패였습니다.
[(좌) 미국의 프리깃에서 수병을 강제로 구인해가는 영국 해군. / (우) 강제징병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폭발 직전에 있던 영·미 관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807년에는 영국의 프리깃 레오파드 호가 미국의 프리깃 체사피크 호를 공격하여 3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를 내고 미국수병 4명을 납치해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영국 측은 체사피크에 승선하여 탈주자를 탐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체사피크 측이 이를 거부하자 다짜고짜 포격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체사피크가 항복하자 영국 측은 강제 징병대를 보낸 후 영국해군으로부터의 탈주자라는 명목으로 4명의 미국수병을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오직 1명만이 영국 국적자였던데다가 영국 측의 행동이 미국 군함에 대한 일방적 적대행위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미국에 대한 영국의 주권 침해로 여겨져 미국 국민들의 감정에 불을 붙였죠. 1811년에도 영국 군함이 미국 상선에서 선원을 납치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프리깃이 영국의 슬루프함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 양국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이는 결국 1812년의 영·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4. 강제징병 제도의 종식
선원들과 연안 지방 주민들, 그리고 당대의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악명 높았던 강제징병 제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이 결정적인 국면 때마다 수병 고갈 현상을 겪지 않고 신속히 함정들을 전력화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강제징병 제도의 역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해양인력 풀이 넉넉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병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는 전시에 이를 충당하기 위한 긴급대책의 성격이 짙었기에,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나자 더 이상 발령될 이유가 없었고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다만 실제 시행과는 별개로 법 조항 자체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이를테면 1835년에 개정된 강제징병령은 징병된 인원의 복무기한을 최대 5년으로 제한하고 1번 징병됐던 경험이 있는 사람의 재징병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죠. 이 개정 법안은 무려 1900년대 초까지도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래로 이들 법안들이 두 번 다시 실행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1815년 이후 1900년까지 영국해군이 나바리노 해전, 크림전쟁, 아편전쟁 등 몇 차례의 분쟁을 겪었음에도 강제 징병 제도가 부활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는 우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강제 징병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① 19세기의 오랜 평화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몇 차례의 분쟁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분쟁일 뿐 과거의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전면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병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일이 없었습니다.
② 수병의 처우 개선 :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범선 시대에 상선 선원 및 일반 노동자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급료가 현실화되었고 가혹한 규율도 완화되었으며, 생활조건 및 휴가·상륙 등에서도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수병의 탈주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줄어드는 한편, 해군 수병도 직업으로 괜찮은 편이라는 인식이 퍼져 순수 지원자만으로도 인력 수요를 채울 수 있게 되었죠.
또한 필요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19세기 중반 해양노동 시장의 변화된 환경 하에서는 예전처럼 민간 선원을 납치해서 바로 수병으로 삼는 것은 이미 기능적으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간부선원과 장교 레벨에만 국한되었던 집단 간의 구분이나 업무상의 진입장벽이 이 시기에는 선원 레벨에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입니다.(해군 수병과 민간 선원의 완전한 분화) 범선 시대에야 상선 선원이든 해군 수병이든 하는 일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해군에도 기술 발달과 전문화 추세가 강해지자 장갑함 등의 새로운 함종, 증기기관, 중포·어뢰 등의 신병기 등 민간 해운업계와는 전혀 다른 분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처럼 죄수나 건달, 아니면 항구의 술집에서 납치해온 선원 등을 주먹구구식으로 훈련시켜서 수병으로 만드는 시스템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그 결과 1830년 무렵부터는 이전까지 각 함장의 재량에 맡겨져 있던 수병의 모집이나 교육훈련도 중앙 행정기구에 의해 일원화되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수병 자체도 일시적으로 고용했다가 전쟁이 끝나면 해고하는 ‘소모품’이 아닌 일종의 ‘평생직업’으로 인정되어 체계적인 계급과 고용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890년대의 영국 해군 수병 훈련소의 모습.]
건국 이래 우리 군은 일반 인력 시장과는 별개의 위상을 갖고 사실상 인력 확보를 위한 경쟁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비가 부족했으면 부족했지 별로 사람이 부족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죠. 현재로서는,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장교나 부사관 레벨에서는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겠지만 현재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병(兵) 확보에까지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다만 간간히 제기되곤 하는 모병제 논의가 현실화된 사회적 이슈로 다가오게 된다면, 군의 인력 수급이 일반 인력 시장과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될 때 고려해야 할 쟁점 등에 대해 과거 해군의 인력 수급 환경이나 강제 징병제도와 같은 역사적 경험이 일종의 참고 사례로써 논의를 풍성히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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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커스 레디커, 박연 옮김,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까치, 2001
- 리처드 하딩, 김현수 옮김, 『해양력과 해전』,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2
- 어니스트 페일, 김성준 옮김, 『서양 해운사』, 혜안, 2003
- 윌리엄 맥닐, 신미원 옮김, 『전쟁의 세계사』, 이산, 2005
- Haythornthwaite, Nelson's Navy : 1793-1815, Osprey Publishing, 1993
- Gregory Fremont-Barnes, Nelson's Sailors, Osprey Publishing, 2005
- http://www.nelsonsnavy.co.uk/broadside7.html
- http://en.wikipedia.org/wiki/Impressment
- http://www.hms.org.uk/nelsonsnavyimpres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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