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주 정책 하에서의 예외적인 음주 허용 사례들
1914년 이래 전면 금주정책을 실시해온 미국 해군이었지만, 전시나 장기간의 항해 등으로 인해 정말로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예외를 두어 음주를 허용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1) 모그모그(mogmog) 섬
2차대전 중에도 미군은 전면 금주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수병이나 장교들 모두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소속함이 진주만이나 호주 등 배후에 민간인 거주구역이 있는 항구에 귀항할 때 상륙해서 시가지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 해군의 반격이 진행되면서 전선이 점차 북상해가자, 함정 역시 머나먼 진주만이나 호주까지 돌아오기 보다는 전선에 가까운 섬에 마련된 정박지에서 수리와 보급을 마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면 술은 물론이거니와 당연히 상륙도, 극장도, 클럽과 기타 레크리에이션 시설도 물 건너가게 되는거죠.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장병들의 사기 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미 해군 당국은, 1944년 10월에 중부 태평양의 울리시 환초에 함대 정박지를 신설하면서 환초 내부에 장병들을 위한 휴양시설도 건립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 수병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갔다는 ‘모그모그(mogmog)' 섬입니다.
정박지 내의 함정들을 순회하는 상륙정을 타고 모그모그 섬에 상륙한 수병들은 주어진 3시간의 휴식시간 동안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거나, 동료들과 야구·배구·복싱 등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병들이 모그모그 섬에서 가장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 일은 바로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죠. 수병들은 섬에 설치된 PX로부터 500cc짜리 맥주 캔(혹은 병)을 보직에 따라 1인당 2개 혹은 4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지급된 맥주는 대개 미지근한 상태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많은 수병들은 전선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즐겼다고 합니다.
[(좌) 모그모그 섬 내의 비어 가든(Beer Garden) / (우) 위병으로부터 맥주를 받아가는 수병들]
[(좌) 나무 그늘에서 맥주를 마시는 수병들 / (우) 섬 내의 장교클럽]
다만, 모그모그 섬에서의 휴식은 후방 항구에 기항했을 때보다 수병들에게 계급의 차이를 훨씬 더 자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반 항구에서도 장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나 술집 등이 많았지만 수병들도 돈만 있으면 다른 술집에서 그에 못지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데 비해, 모그모그에서는 장교들이 즐기는 것을 수병들은 그저 구경만 해야 하는 것이 꽤 많았죠. 이를테면 수병들은 맥주의 지급량에 엄격한 제한이 있었고 도수 또한 3도로 낮춰져 있는 것을 마셔야 했으나, 장교 클럽에서는 맥주를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었고(위스키만 반병으로 제한) 술의 도수도 정상적인 5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장교들이 섬에 상륙한 간호장교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던 반면에, 수병들은 그녀들에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엄격히 통제되었죠. 그 때문에 ‘모그모그 섬에서의 휴식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장교와 사병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게 된 탓에 울분을 느꼈다’는 수병들도 많았습니다.
2) 잠수함 승조원들
예외적인 음주 허용의 또 다른 사례는 잠수함 승조원들의 경우입니다. 혹독한 근무여건 때문에 잠수함 승조원들은 다른 보직의 수병들에 비해 식품 등에서 많은 배려를 받았고, 이는 음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모그모그 섬이 열린 후에야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수상함 승조원들과 달리 잠수함 승조원들은 그 이전부터 전방 기지에 머무르는 동안 하루 2캔씩의 맥주를 지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음주에 관한 잠수함 승조원들의 진정한 특권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전에도 언급했듯이 대형함에서는 장교와 수병 간의 계급적 거리가 분명하고 규율의 적용이 엄격했던 반면, 구축함 이하의 소형함에서는 장교와 수병이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규율도 다소 느슨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예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잠수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잠수함은....
① 소형함의 특성 상 승조원 간에 대면의 기회가 잦음.
② 극한상태에 가까운 생활환경과 전투상황을 공유하기에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이 강함.
③ 수상함과 달리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
이 때문에 2차대전 중의 잠수함에서는 함장 스스로 금주 규정을 적당히 무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2차대전 중 USS Barb의 함장이었던 유진 플러키(Eugene Fluckey) 중령은 자기 배의 샤워장 중 하나를 항상 맥주 상자로 가득 채워놓았는데, 이는 적함을 격침시켰을 경우 승조원들에게 포상으로 맥주캔을 돌리기 위함이었죠. 또한 ‘폭뢰 투하시의 진정용 약품’이라는 명목으로 의무실에 브랜디 등을 쟁여놓은 잠수함들도 있었습니다. 수상함에서라면 이런 식으로 규정을 무시하는 행위가 상부에 발각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란 거의 불가능 했을테고, 아마 함장 스스로도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테죠.
(※주 : 물론 저런 조치가 사기진작을 위해 약간의 술을 허용한 것뿐이지, 고주망태가 될 정도까지 마시는 것을 허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잊혀져선 안되겠죠.)
마찬가지로 전후의 잠수함에서도 승조원 단합대회 도중에 함장이 보는 앞에서 맥주캔을 경매에 붙이는가 하면, 기동훈련을 나가기 전에 ‘훈련 끝나고 파티나 열게 맥주랑 스테이크 고기를 준비해놓으라’는 지시를 내린 함장도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잠수함 승조원들은 수상함보다는 규정에서 자유롭고 술을 접할 기회도 좀 더 많았던 것 같다고 하겠습니다.
[(좌) 햄버거와 맥주를 먹는 잠수함 승조원 / (우) 1984년에 있었던 항모 미드웨이의 'Beer Day' 광경]
3) 'Beer Day'
전후 미국해군은 ‘Beer Day'라는 예외적인 음주 허용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①연속 항해일수 45일을 초과하고, ②차후 5일 이내에 귀항할 계획이 없으며, ③중대한 임무나 작전 수행 중에 있지 않은 함선의 경우에 한해 함장의 재량으로 일종의 부대 회식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회식 날에는 보통 바베큐 등이 딸려 나오고 21세 이상의 승조원들에게 1인당 2캔의 맥주가 제공됩니다.(보관하지 못하도록 배급 시에 캔 뚜껑을 땀) 45일 동안 육지를 밟지 못한, 그리고 상륙을 못 했을테니 당연히 술도 못 마셨을 승조원들에게 맥주 2캔 정도를 제공하는 것은, 음주사고를 유발하지 않으면서도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는 조치였죠.
하지만 몇몇 통제되지 않은 회식에서 ‘몰아주기’로 인한 만취자가 나타나자, 해군 당국은 2001년 이후부터 맥주 배급을 하기 전에 승조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맥주 배급표에 ‘다른 승조원에게 자기 몫의 맥주를 팔거나 건네주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회식 규정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4) 규정의 허점을 이용한 편법
그렇다면, ‘Beer Day'의 요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맥주는 무지무지 마시고 싶은 경우엔 어떻게 할까요? ’그냥 조용히 꾹 참는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가면서 규정의 허점을 찾아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잔머리가 일반화된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편적인 ’일화‘는 하나 존재합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7년, 페르시아 만에는 양국(특히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미국 국적의 유조선들을 호위하기 위해 다수의 미 해군 함정들이 전개해 있었습니다. 임무의 성격상 매우 단조로운 패턴이 반복되는데다가 긴장도가 높은 작전 환경에서의 항해가 길어지면서 많은 승조원들은 짜증과 지루함을 느꼈을테고, 그들에겐 스트레스를 씻어줄 무언가가 필요했을겁니다. 다음 일화는 미사일 순양함 폭스(USS Fox, CG-33)의 승조원이었던 마크 헤인즈(Mark S. Haynes)씨가 당시의 경험을 정리한 책인 『Liberty Call』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6월 13일, 토요일]
(전략) ... “미국 군함의 함상에서 음주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배가 45일 동안 항해를 하고 최소 5일 이내에 귀항이 예정돼있지 않은 경우 1인당 2캔의 맥주가 분배된다. 그러나 폭스는 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좌) 미사일 순양함 USS 폭스(CG-13) / (우) 아마도 저런 식으로 보트를 내리고 승조원들을 내려보냈을테죠]
하지만 배에 부속된 보트 위에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규정이 없다. 그래서 함장님은 배의 모터보트를 내려서 뱃전 옆에 바짝 붙이도록 지시했다. 곧 현측 사다리가 내려졌고, 선임 위병 부사관이 배의 연명부 및 차가운 맥주가 든 박스와 함께 사다리 옆에 배치되었다. 그리곤 한 명씩 맥주를 받아들고 사다리를 내려간 다음 보트 위에서 차가운 맥주를 들이켰다.
케빈과 내가 보트에 내려갔을 때에도 함장님은 여전히 거기에 서 계셨는데, 우리는 그 분께 하염없는 감사를 표한 다음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수병마냥 우리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끄억~’
그런 다음에는 모두들 다시 일상의 과업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상갑판에는 초병들이 추가로 배치되었고 모터보트가 밤새 배 주위를 순회했다.(물론 맥주 없이) M-14 소총으로 무장한 채, 나는 20시부터 24시까지 보트 위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휴, 얼마나 흥분되던지...“
(※ 출처 : http://cs-netlab-01.lynchburg.edu/users/roussos_c/teachtalk/book3.html)
해군 당국이 나중에 규정의 이런 확대 해석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장님이 참으로 센스 있는 분이었던거 같네요.^^;
3. 마치며...
대체로 요즘의 추세는 군대 내에서 술을 제한하는 것이 점차 대세인 듯 싶습니다. 확실히 군 내부에서 첨단장비에 대한 의존율이 점차 높아가는 현 시점에서는, 이를 운용하는 인원의 사소한 실수가 자칫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겠죠. 그러므로 적절한 빈도로 부대 외부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면, 굳이 영내에서까지 음주를 허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대안 없이 무턱대고 금지하기만 하면 항상 여러 종류의 일탈행위로 이를 어기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 또한 분명하고, 이를 방치해두면 음성적인 일탈행위가 악성화돼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하죠.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금하되, 2차대전 중의 모그모그 섬이나 'Beer Day'처럼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특수한 경우’를 허용하는 것은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육군의 경우는 부대 지휘관의 통제 하에 날 잡아서 부대 회식 등을 할 때 가끔씩 막걸리나 소주 등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해군은 겪어보질 않아서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Robert Hargis, US Submarine Crewman 1941-45, 2003, Osprey Publishing
- http://www.kypost.com/news/1998/hicks100998.html
- http://navy.memorieshop.com/Adair/Cruise-Book/Mogmog.html
- http://www.subsim.com/radioroom/showthread.php?t=107296
- http://en.wikipedia.org/wiki/Beer_day
- http://en.wikipedia.org/wiki/U.S._Navy_slang
- http://cs-netlab-01.lynchburg.edu/users/roussos_c/teachtalk/book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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