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올린 글에서는 시간에 따른 군함의 생활환경과 함내 문화의 변화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사실 이런 차이는 종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시대의 군함이라 하더라도 전함·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기타 소함정 등 크기와 배수량에 따라 생활환경이나 함내 문화는 많은 차이를 보였죠. 그리고 이제까지 여러 글들에서 간간히 언급해왔듯이 소형함에서의 삶이라는게 시설이나 공간 면에서 참으로 열악했을거라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으실겁니다.
이를테면 대형함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돼있는 카페테리아나 PX, 이발소, 분야별로 세분화된 진료실과 병실 등은 공간상의 한계와 적은 승조원수 등으로 인해 설치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배의 크기부터가 작다보니 거친 날씨 때의 거주성이나 침상 같은 것도 열악한 편이었죠. 이를테면 1930년대에 영국해군의 구축함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소형함에서의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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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토머스(Charles Thomas) : 1930년대에 구축함의 무전병으로 근무.]
“황천(荒天 : 비바람이 심한 날씨) 상황 하에서 구축함에 탄다는건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오. 특히 일반 가정의 주방만한 공간 안에서 20명의 남자들이 밥을 먹어야 했던 수병식당을 깨끗하게 유지한다는건 맑은 날씨에서도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지요.”
[‘거주구역은 언제나 북적북적~’ : 해먹끼리 서로 옆구리를 마주대고 있는 광경은 영국해군에서는 범선 시대 이래로 전혀 낯선 광경이 아니었습니다.]
[토머스 월레스(Thomas Wallace) : 2차대전 시기에 코르벳함의 갑판병으로 복무.]
"해먹(hammock)을 걸만한 공간은 있었지만, 승조원 전원의 것을 걸기엔 부족했지요. 해먹이란건 걸기만 하면 잠자기에 아주 편안한 물건인데 구축함에서는 그럴 공간이 없었어요. 가령 내가 있던 배에서는 6개의 해먹밖에 걸 수 없는 격실 안에 14명이 살고 있었다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사물함 위나 식탁, 아니면 심지어는 갑판 위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요.“
(출처 : Christopher Mckee, Sober Men and Tru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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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그딴거 없다~‘ : 어찌 보면 답답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또 서로 관계가 끈끈해질 수 있는 양날의 칼 같은 점이랄까요.]
게다가 워낙에 공간이 좁다 보니 소형함에서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려웠습니다. 배 안의 어디를 가더라도 어느 곳이든 반드시 이미 누군가가 자리해 있곤 했기 때문이었죠. 예를 들면, 가족이나 애인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식당 구석의 식탁에 앉아있다보면 그 맞은편에는 항상 다른 누군가가 책을 읽고 있거나 카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생활공간이 열악하니 식사의 질이라도 좀 나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일전에 “해군과 밥” 및 “쉽비스킷을 통해 본 영국해군” 의 말미에서 언급한 것처럼 딱히 나을 것이 없는 상태였죠.
생활환경이 이렇듯 열악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소형함에서의 근무를 견디지 못하고 대형함이나 육상으로 전출되기를 간절히 바라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1916~17년 사이에 구축함 ‘HMS 레디’의 승조원으로 있었던 에드워드 풀렌(Edward Pullen)은 복무 당시 탈장(脫腸 : hernia)이라고 꾀병을 부려서 대형함으로 전출 가는데 성공했던 것을 거의 신의 축복처럼 여겼다고 언급하기도 했죠. 그에 따르면 자신의 구축함 복무 시절에 겪어야 했던 것들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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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함에는 ‘삶’이라고 할만한게 전혀 없었소. 내가 겪었던 일들을 (가감없이) 똑같이 겪으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견디지 못할꺼요. 내가 ‘레디’호에 있었을 당시에는 항해 중에는 가만히 서있거나 걷기도 어려웠다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주변에 로프를 놔두곤 했는데, 그건 당신도 잘 알다시피 구축함에서는 배 바깥으로 휩쓸리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었지요.
[바다가 거칠면 구축함들은 이렇게도 되나 봅니다.--;]
게다가 항해 중에는 항상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지곤 해서 아무 것도 요리할 수가 없었다오. 나는 스카파 플로(Scapa Flow : 영국 북부의 군항)를 떠나기 전엔 항상 계란을 12개 정도 삶아놓곤 했지요. 그리곤 먼 바다에 나간 후부터는 끼니때마다 그 계란들을 까먹곤 했어요. 그게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으니 말이오. 그런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소? ...(중략)... 심지어는 쉴 새 없이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람에 차 한 잔조차 끓여 마시기 어려웠다오.
우리 함장은 (제대로 씻지 못해서) 밤낮 할 것 없이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다녔고, 항해 내내 속에 든 것들을 밖으로 게워내곤 했지요. 정말이지 끔찍한 생활이었다오. 내가 조금이나마 편안할 수 있었던 때라곤 함수부에 있는 방수(防水) 거적에 기대서 쉴 때 뿐이었으니 말이오.“
(출처 : Christopher Mckee, Sober Men and Tru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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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게 더 낫다’ 는 말도 있듯이 위에 말한 내용들을 영상으로 보는게 더 실감이 나실겁니다. 다음 화면은 1952년에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잔인한 바다(The Cruel Sea)'의 한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2차대전중 북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며 유보트 사냥에 임했던 한 코르벳함과 그 승조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데, 그중 황천 상황에서의 소형함이 어떤 일들을 겪게 되는지 잘 나타난 화면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엠엔캐스트가 폭파되어 동영상을 보여드릴 수가 없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위에서 풀렌씨가 한 말들이 대략 공감이 가실 듯합니다. 황천(荒天) 항해 중에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요리도 못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저런거랄까요. 영화의 한 장면만을 놓고 ‘실제 생활이 저랬을 것이다’ 하고 단정해버리는건 너무 섣부른 감이 있긴 하지만, 저는 저 장면을 보고 ‘정말로 저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면 어찌 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더랬죠.--;
그런데 더 신기한 점은, 저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풀렌씨처럼 소형함 근무를 기피한 수병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국, 아니 특정 국가를 떠나서 대다수의 수병들은 열악한 거주성이나 더 적은 편의시설에도 불구하고 대형함 보다는 소형함에서 근무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합니다. 이는 저번 글에서도 살짝 언급했듯이 소형함 근무는 생활상의 불편함을 보상해 줄만한 다양한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이를테면 소형함에는 전함이나 순양함처럼 빡빡한 일과가 적용되지 않았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처벌을 가하려는 헌병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대신에 모두들 똑같이 일을 한다는 점에서 소형함만의 독특한 유대감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형함에서는 좀체로 보기 힘든 광경들]
또한 인간관계 면에서도 소형함 쪽이 승조원 간에 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형함에서라면 공식적인 경계가 분명히 존재했을 장교와 수병들도 소형함에서는 좀더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고, 종종 알력과 경쟁 상태에 놓이기 쉬운 기관병과 일반 수병들 사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수병은 소형함에서의 좁은 공간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계급을 불문하고 누구나 고된 생활들을 함께 공유한다는 상황’ 자체가 서로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은 복무기간 내내 언제나 1명의 함장과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함장 또한 자기 배의 구성원들을 바꾸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일이 힘든 것보다 인간관계가 힘든 것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는 말도 있고 우리 군의 경우에도 대체로 부대 규모가 작아질수록 내무생활 면에서 덜 쪼이는 경향이 있으니 저런 선호가 대략 이해는 갑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배라는 공간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소형함 쪽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진 않더군요. (하다못해 배에서는 육지와 달리 배멀미 같은 것도 걱정을 해야 할테니 말이죠) ‘환경이 좋지만 생활이 쪼이는 대형함으로 갈래? 아니면 정신적으로는 여유롭지만 물리적인 환경은 X같은 소형함으로 갈래?’ 라고 물어본다면 일언지하에 답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수병들의 저런 선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혹은 과거의 수병들만이 아니라 요즘의 우리나라 수병들에게 설문을 해봐도 저것과 비슷한 성향이 나타날까요?
p.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Christopher Mckee, Sober Men and Tru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 http://home.vicnet.net.au/~mildura/life_on_board.htm
- http://www.bbc.co.uk/ww2peopleswar/categories/c1184/
- http://www.de220.com/
- http://www.navsource.org/archives/12/010489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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