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해식량으로서의 비스킷
서양사람들의 주식은 보통 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과거의 수병들도 배에서 빵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빵이 공식적인 식단에 올라가는 것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했고 주식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죠. 그때까지 함상 식단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Hardtack, Ship Biscuit, Sea Biscuit, Hard Biscuit, Zwieback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던 두껍고 단단한 비스킷이었습니다. 비스킷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bis(두 번)“ + ”coctus(구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밀가루 반죽을 뒤집어가면서 2번 구워낸 딱딱하고 건조한 빵의 일종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휴대하기 간편하고 보존성도 좋아서 로마시대에는 장거리 행군중인 군대나 여행자들에 의해 휴대식량으로 종종 애용되곤 했죠. 그리고 로마 제국 멸망 후 비스킷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5세기 말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항해지식이 발달함에 따라 연안항해 위주이던 형태에서 벗어나 점점 더 대양항해가 보편화돼가던 상황이었는데, 항해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선주들과 해군 관리들에게는 식료품의 공급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이죠. 특히 항해중인 배에 식량을 공급하는데는 비교적 제약이 적은 육상과 달리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① 제한된 용량 : 16세기의 선박은 대략 600톤 정도의 하물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그 한계 내에서 배를 다룰 인원과 항해 장비, 무기, 식량 및 식수도 실어야 했음. 또한 육상과는 달리 대양 항해중인 선박에서는 보급품이 부족해졌을 때 주변에서 자체 조달하기가 거의 불가능함.
② 보존성 : 항해기간이 최소 10주에서 최대 수 개월이나 되는데다가 배 자체가 물을 흡수하는 재질로 만들어졌으므로 식품을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며, 많은 식재료들이 쉽게 변질됨.
③ 취사의 곤란 : 목조선박에는 항상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배 안에서 불을 피울 수 있게 허용된 곳은 오직 취사실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폭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칠 때는 불을 꺼야 했음. 또한 배에 실을 수 있는 연료도 제한되어 있으므로 별다른 조리 없이도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절실했음.
그에 따라 육류는 소금에 절인 고기를 싣거나 배가 클 경우 살아있는 짐승을 배에 태우는 것으로 해결되었고 맹물 대신 맥주나 진, 브랜디, 그리고 훗날의 럼주 등이 애용되었으며, 말린 콩 등도 주요 보급품으로 배에 실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주식인 밀은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요?
우선 빵을 그대로 배에 싣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잘 아시다시피 빵이란 물건이 습한 환경에서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는 물건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껍질이 얇은 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분 함량이 적은 유럽식의 거친 빵도 2~3개월이 지나면 겉에 곰팡이가 펴서 껍질은 버리고 속만 먹어야할 지경이니까요. 그렇다면 재료를 싣고 가서 그때그때 빵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이 방법은 우선 ‘취사’의 측면에서 볼 때, 빵을 굽는 것이 수프를 끓이는 것 등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번거롭고 연료가 많이 든다는 점에서 기각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스토브에 국통 몇 개 거는 것과 수십 명 분의 오븐을 설치하는 것은 얘기가 전혀 다르죠) 또한 보존성의 측면에서도 빵의 재료인 밀가루가 변질되기 쉽다는 점에서 배에서 직접 빵을 굽는 것은 무리가 많았죠. 결론적으로 장기간의 항해에서 밀을 안정적으로 섭취하기 위해서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먹을 만하게 유지될 수 있는 조리된 형태의 고형식품’ 이 필요했고, 그 해답이 바로 쉽 비스킷(Ship Biscuit)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6세기 중순에 이르면 대양항해에 나선 선박이 출항 후 2~3일간은 육지에서 가져온 빵을 먹고, 그 이후부터는 저장된 쉽 비스킷을 주식으로 하면서 보조적으로 가끔씩 밀가루로 죽이나 수프를 만들어 먹는 형태가 정착되었다고 하네요.
영국해군의 식단에 쉽 비스킷이 공식적으로 등재된 것은 1660년대의 일로써, 새뮤얼 페피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일일 배급량에 비스킷 1파운드(약 0.5kg)와 맥주 1갤런(약 3.8리터)을 포함시킨 것에서 기원합니다. 이후 쉽 비스킷은 위의 표와 마찬가지로 줄곧 함상식단에 포함되었고 넬슨 시대 및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병들의 주식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2. 쉽 비스킷을 먹는데 관련된 각종 애로사항들
일단 쉽 비스킷이 보존성이 높아서 항해식량으로 적합한 식품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런 사실이 맛이나 식감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보존성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보통의 밀가루나 빵에 비해 좀더 오래간다는 것일 뿐, 당시 배 안의 보관환경에서는 절대적인 유통기한을 보장하는게 아니었죠.
우선 쉽 비스킷은 오늘날의 비스킷이나 빵류와는 달리 단순히 밀가루와 물, 그리고 소금 약간을 혼합한 반죽을 구운 것에 불과했습니다. 빵의 부드러운 식감은 이스트나 베이킹 소다 등으로 반죽을 부풀려서 폭신폭신하게 만드는데서 나오며, 반죽에 버터나 우유, 설탕 등이 들어가야 맛이 부드러워지고 먹을만해지죠. 하지만 쉽 비스킷은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그런 재료들이 전혀 들어가지 않으므로 반죽이 전혀 부풀지 않습니다. 게다가 배에 실리는 쉽 비스킷 중에는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최소 2번, 심하면 4번까지도 굽는 것이 있으므로 그 딱딱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죠.
이 비스킷은 깨물 수 있기는커녕 손으로도 쪼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괴혈병으로 잇몸이 부실해지기 일쑤였던 당시 상황에서 이것을 씹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원이나 수병들이 쉽 비스킷을 그냥 먹기보다는 차나 커피, 수프 등에 적셔서 부드럽게 해서 먹곤 했죠. 또 비스킷을 잘게 부숴서 소금에 절인 고기와 식초를 섞은 다음 소량의 물로 끓여서 죽처럼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이런 요리법은 고기의 과도한 소금기를 흡수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맛은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_-;)
두 번째 문제점은 항해기간이 길어지면 비스킷에 벌레가 꾀인다는 것입니다. 수분이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에 부패하거나 곰팡이가 피는 일은 없었지만 바구미가 서식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죠. 보존기간이 오래돼서 눅눅해진 비스킷은 그야말로 애벌레 서식의 온상이었으므로 입으로 가져가는 비스킷에서 바구미가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선원들과 수병들은 비스킷을 먹기 전에 쪼개서 테이블에 톡톡 두드린다거나 물로 적셔서 벌레가 스스로 기어나오길 기다리곤 했고, 그렇지 않으면 부족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개의치 않고 그냥 바구미나 애벌레 째로 먹어치우기도 했죠. (그래도 차마 벌레를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지 대개 어두운 곳에서 비스킷을 씹었고, 그런 연유로 ‘밤에 먹는 것’ 이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고 함 -_-;) 또한 바구미가 비스킷을 파먹음으로써 비스킷의 딱딱함을 완화시키는 작용도 했다고 하지만 역시나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겁니다. 이런 피해를 줄여보기 위해 19세기 초반에는 비스킷에 방충작용이 있는 캐러웨이 씨앗을 넣어보기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아무튼.. 쉽 비스킷의 사촌인 하드택도 이런 특성을 공유하고 있었고, 남북전쟁 때의 병사들은 하드택에 ‘Iron Sheet(철판)’, 'Teeth Duller(이빨 분쇄기)‘, ’Worm Castle(벌레의 성)‘ 등등의 별명을 붙였다고 하니 정말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지급받은 비스킷을 먹지 않고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조각하거나 코담배를 넣어두는 담뱃갑으로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고 하니 쉽 비스킷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짐작할 만하군요.
다만 16~17세기의 항해 환경에서는 저런 비참한 음식마저 아쉬워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벌레가 들끓는 비스킷을 먹어야 하는건 예사고 심지어 배 안의 쥐를 사고팔거나 바구미의 머리를 모아놨다가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죠. 또한 배의 보급관이 일일 기준량을 일부러 낮은 단위로 환산해서(당시 1파운드=16온스였는데 일부러 14온스로 환산하는 식) 자기의 부수입으로 챙기는 일도 많았으니 수병들도 비스킷이 형편없다고 마냥 불평만 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3. 1850년대 이후의 쉽 비스킷
19세기에 접어든 이후, 산업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쉽 비스킷에도 다소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 시대에 비스킷 공급을 담당했던 소규모 제빵소는 점차 기계화된 공장으로 대체돼갔고, 비스킷 역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원형에서 육각형으로 바뀌어 낭비되는 반죽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죠. 하지만 기술발달의 방향은 비스킷을 개량하여 주역으로 남기기보다 다른 대체품을 주식으로 삼는 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즈음 증기기관이 도입되자 이제 배에서의 취사도 이전처럼 곤란하지 않게 되었고, 방부제의 등장은 해상에서도 잘 변질되지 않는 밀가루를 가능케 했습니다. 1840년대부터는 대형함에 오븐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1850년에는 드디어 일일 식량배급 기준표에 빵이 등재되었죠. 물론 아직까지 빵은 보조적인 지위를 차지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 당시 영국해군에서 ‘Bread'란 단어는 비스킷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일반적인 빵은 비스킷과 구별하기 위해 ’Soft Bread' 라는 명칭을 썼음) 오븐의 설치가 계속 진전되어 1880~90년대에 이르면 드디어 빵이 주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주식의 지위에서 밀려난 비스킷은 그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식단에서 퇴출돼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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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No'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빵이 주식의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되었지만, 비스킷 역시 ‘빵이 지급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에서의 대체 식단’으로써 살아남았던 것이죠. 우선 오븐의 설치가 확산되는 것이 너무나 더뎠습니다. 당시의 해군계는 증기기관이나 활강포, 장갑판 등 병기에 관해서는 10년 전의 기술이 퇴물이 될 정도로 전환 속도가 빨랐지만, 승조원의 편의나 생활에 관한 설비개선은 전반적으로 느린 편이었고 영국해군은 그중에서도 그런 경향이 좀 심한 편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븐 설치가 1840년대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1890년대가 되어도 구축함이나 슬루프, 포함 등 소형함 레벨에까지 확산되지 못했고 1907년경이 되어서야 해군의 모든 배에서 자체적으로 빵을 구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배의 크기 자체의 한계도 있겠지만 소형함에서는 오븐을 뒷받침 해줄 냉장고나 기타 식량 저장 설비가 여전히 미비했습니다. 그 결과 장거리 항해를 하게 되거나 해상상태가 오랫동안 나쁘면, 항해 초기에는 배의 오븐으로 빵을 구워먹다가 나중에는 다시 저장된 비스킷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죠. 심한 경우 항해기간중 빵을 먹은 날보다 비스킷을 먹은 날이 더 많은 배도 있다고 하니, 이런 배들에서는 명목상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의 대체식단’이 오히려 주식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 : 육류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반시장에 쇠고기 통조림이 등장한 것은 1813년이었지만 이것이 정식 식단에 등재된 것은 1847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신선한 고기가 일일배급 기준에 포함되었지만 저장육 및 소금에 절인 고기 역시 대체식단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고, 소형함에서 이들 저장육류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도 마찬가지였죠.)
일단 1차대전 당시의 공식적인 식량배급 기준은 위와 같았습니다만, 소형함에서의 실제 식량 공급이 과연 저대로 이뤄졌는가는 의문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내용은 20세기 초의 영국수병들의 사회사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는 책 Sober Men and True에서 발췌한 관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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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음식의 질은 다양하게 나뉘어질 수 있었다. 특히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지 항해중인지, 대형함인지 소형함인지, 냉장고가 설치돼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장교들이 수병들의 급식에 관심이 있는지 등에 따라서 공급되는 식단의 좋고 나쁨이 갈리곤 했다.
(중략) ... 하지만 배가 작고 출발지와 기항지 사이의 거리가 멀며, 자체적으로 식료품을 구할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식탁이 암담하게 바뀌었다. (평선원) 리처드 로즈는 1차대전 복무중의 형편없었던 음식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구축함은 오직 하루 분의 빵과 고기만을 실을 수 있었소. 감자나 다른 것들은 조금 사정이 낫긴 했지만. 어쨌든, 바다에 나온 첫날에는 고기와 감자와 빵이 나왔지만 그 다음부터는 비스킷(어느 때이건 간에 전혀 먹을 만하지 않은)과 bully-beef(삶은 염장 쇠고기)가 나오곤 했지요.”
“게다가 bully-beef도 떨어져 가면 그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내놓곤 했지요. 그리고 내 장담하건대, 이 세상에서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조각을 입에 넣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항상 그걸 배 바깥으로 던져버리곤 했지요. 나는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중 일부는 넬슨시대 때부터 통 속에 보관되어 온 것이었는데 때때로 녹색으로 변질돼있기도 했고 몹시 역겨운 맛이 났지요. 우리가 그걸 갖고 할 수 있는거라곤 고작 24시간동안 물에 담가서 소금기를 뺀 다음 취사장에 가져가서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뿐이었다오.”
(중략) ... 저 염장 돼지고기들이 실제로 넬슨시대 때부터 통 속에 담겨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저런 음식을 먹는 것이 20세기와 18~19세기의 수병들이 공유하는 체험이었음은 분명하다. 앨버트 헤론은 비스킷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항상 비스킷만은 충분하게 나왔지만 내가 봤던 비스킷들은 대부분 안에 바구미가 몇 마리 들어있곤 했지요. 하지만 당신도 곧 익숙해졌을거요. 우리는 모두들 바구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비스킷을-안에 있는 바구미도 함께-먹어치우곤 했으니까 말이오.” ... (후략)
(출처 : Christopher Mckee, Sober Men and True, pp. 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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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된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증기기관과 통조림과 냉장고가 보편화된 20세기 초에도 소형함의 수병들은 여전히 300년 전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게다가 맛과 식감도 끔찍한) 식료품을 먹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게다가 그들의 선배들이 겪었던 바구미나 부패된 고기 등의 체험도 똑같이 겪었다는 것이니, 아무리 여건이 안 좋아도 저 정도 수준까진 아니었던 미국 및 독일의 소형함들과는 차이가 확연하군요.(러시아 정도가 대략 비슷할 듯...-_-;) 당시의 수병들이 저런 경험 또한 해군생활의 일부로 수긍했다곤 해도 결코 유쾌하진 않았을 듯 합니다.
4. 결론
고전적인 형태의 쉽 비스킷이 함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형함의 생활여건이 개선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느 나라의 해군이든 간에 생활여건의 개선이 병기 면에서의 발전보다 늦는 편이고 소형함의 생활여건이 대형함의 그것보다 뒤처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영국해군은 타 열강보다도 그런 경향이 좀더 두드러지는 편입니다. 예전에 언급한 계급간의 격차 문제 및 위의 비스킷이나 염장육 건도 그렇거니와, 급식방식에서도 그런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중에 별도의 글로 자세히 서술할 예정이지만 영국해군은 범선 시대의 ‘Canteen Messing'이라는 방식을 가장 늦게까지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군이나 요즘 각국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밥을 먹는 방식은 ’General Messing' 이라고 하여 독립된 식당이 존재하고 전문 취사병이 존재하여 요리만을 전담하며, 일반 병사들은 그저 몸만 가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방식입니다. 이와 반대로 'Canteen Messing'은 6~12명의 승조원들이 한 조를 이루어 자체적으로 취사를 해결합니다. 독립되고 집중화된 식당은 존재하지 않으며 분산된 거주구에 각 조별로 식탁을 둬서 함께 밥을 먹습니다. 물론 전문 취사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해도 취사병은 고작 4~5명만 있을 뿐이며 이들은 취사장 관리만 할 뿐, 요리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죠.
그러면 요리는 누가 하느냐? 각 조별로 1명씩 인원을 빼내서 자기 조를 위한 요리를 합니다. 배 안에 80개의 조가 있다면 매 끼니 전마다 80명의 식사당번들이 일과 도중에 취사준비를 위해 빠져나와야만 했고, 식사당번들은 당번 전날에 잠을 쪼개서 다음날 할 요리 밑준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자율성은 있지만 전체 조직 면에서는 당연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죠. 타 열강들이 늦어도 1차대전 말까지는 이런 방식을 버리고 ‘전문 취사병+독립되고 집중화된 수병식당’ 체제로 갔던 반면에, 영국해군은 분업 및 집중화 정책이 지체되어 대형함은 1930년대까지, 소형함은 1950년대까지도 저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이래로 병기 면에서 영국해군의 기술적 우위와 선진성은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것이었지만, 생활여건과 처우 면에서도 반드시 그랬다고 볼 수만은 없을 듯 합니다. 이것은 기술개발이 늦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기술적인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혹은 변화하려 하지 않았던 영국해군의 보수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테죠.
p.s. 지난 주말에 쉽 비스킷을 구워봤습니다. 3개 중에 하나는 시험삼아 먹어봤고 나머지 2개는 고증을 위해(^^;) 좀더 묵혀둔 후에 시식기를 올려볼 예정입니다. 바구미는 안 생기겠지만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Christopher Mckee, Sober Men and Tru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 아오키 에이치, 최재수 譯, 『시파워의 세계사 1권』, 한국해사문제연구소, 1995
- 김신, 『대항해자의 시대』, 두남, 1997
- 마커스 레디커, 박연 譯,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까치, 2001
- 레이 태너힐, 손경희 譯, 『음식의 역사』, 우물이 있는 집, 2006
- http://www.navyandmarine.org/ondeck/1776salthorse.htm
- http://www.pbenyon.plus.com/Gazette/Technology/Biscuits_Made_By_Machinery.html
- http://www.hms.org.uk/nelsonsnavymaggot.htm
- http://www.twogreens.com/wakeup/lifeatsea/biscuit.htm
- http://www.nmm.ac.uk/server/show/conWebDoc.17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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