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배의 진수식에 얽힌 유래

구름위 2012. 12. 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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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나면 부모가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듯이 선박의 경우도 육상에서 건조된 선박을 물위에 최초로 띄우는 진수식 때 선박마다 고유의 이름과 선체번호를 부여하는 선박 명명식을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수식은 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진수식 하면 보통 생각나는 것이 ‘여성이 뱃머리에 샴페인 병을 던져서 깨는 것’ 인데 이건 또 언제부터 그렇게 했던 것일까요?


[예로부터 갑작스럽게 변하는 바다의 날씨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바다란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었던 모양입니다. 특히나 바다는 육지와 달리 매우 급격하게 날씨가 변하는 만큼, 항해 중에 갑작스럽게 폭풍우가 몰아치기라도 하면 모두들 해신의 노여움이라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곤 했죠. 그 때문에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바다를 생의 터전으로 삼는 모든 뱃사람들에게는 배의 안전을 비는 의식 같은 것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를테면 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는 배를 건조한 후에 인간의 피를 뿌리는 관습이 존재하기도 했고 중국에서는 현재까지 모든 돛단배에 신단을 모시고 용왕을 위문하는 화려한 진수식을 거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서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무당의 주관 하에 배와 선원의 안전 및 풍어를 기원하는 뱃굿의 전통이 전해 내려오고 있죠.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배를 완성한 다음 출항 전에 갑판 위에 제단을 차려놓고 해신(海神)에게 포도주를 따르며 안전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곤 했습니다.

다만 현재와 같은 형태의 군함 및 대형 상선에 대한 진수식 전통의 직접적 기원은 북유럽의 바이킹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바이킹들 또한 배를 새로 건조하게 되면 해신에게 배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곤 했는데, 이는 선주가 소유하고 있는 노예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이킹들이 서유럽 지역에 정착하고 가톨릭 교회가 이교적 관습과 전통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자 사람 대신 염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죠.


[17세기경의 진수식 모습. 소형함이라 썰렁하기 그지없죠?]

12~13세기경에 이르면 진수식은 이제 가톨릭의 성찬식과 접목되어, 새로 건조된 배를 물에 띄울 때 갑판에 포도주(=가톨릭의 의식에서는 희생제물의 의미가 있음)를 뿌리는 형태로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진수식의 절차는 선주 혹은 배의 대부가 ‘standing cup' 이라는 잔에 포도주를 가득 담은 후 이를 갑판 전체에 조금씩 나눠서 뿌리는 것이었고, 그 후 'standing cup'을 바다에 던져버린 다음 배의 이름을 크게 명명하는 것으로 완료되는 형태였죠.

그럼 대체 우리가 아는 ‘뱃머리에 병깨기’는 대체 언제부터 나타난걸까요? 이것도 나름대로 웃지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중세의 진수식에서는 'standing cup'이라는 잔에 포도주를 담아 뿌린 후 잔을 바다에 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잔이 이렇게 함부로 버릴 정도로 헐값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거든요. 가톨릭의 성찬식에 쓰이는 성배와 마찬가지로 귀금속으로 만들어지고 보석 같은걸로 화려하게 장식된지라 값이 꽤 만만찮았다고 하네요. 하여간에 16세기의 대항해시대 이후부터 각국에서 조선과 해군 육성 붐이 일어나자 진수식 빈도도 그에 발맞춰 늘어났고, 예전처럼 ‘standing cup'을 매 진수식마다 함부로 버렸다가는 예산이 간당간당해질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나름대로 꼼수를 써서, 진수식을 마치고 ‘standing cup'을 버리긴 버리되 사전에 미리 배 옆에 그물을 쳐놔서 버린 잔을 다시 회수할 수 있도록 했죠. 그러다가 17세기 말에 이르면 그마저도 번거롭다고 하여 ’standing cup' 대신에 오늘날처럼 그냥 병에 든 포도주를 뱃머리에 부딪쳐서 깨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주리의 진수식에 사용된 포도주 병 보관함 : 저런 은제 케이스에 병을 담아서 깨지지 않게 뒀다가 진수식 때 화끈하게 깨버리곤 했죠]

(*주 : ‘뱃머리에 병깨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세기 말 영국에서 행해진 사례인데, 당시 주빈을 맡았던 왕실의 귀부인은 병깨기에 골몰한 나머지 정확성을 깜빡하는 바람에 던진 포도주 병이 배를 완전히 빗맞히고 그 대신 근처에 서있던 참석자를 맞췄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진수식의 주빈으로 참여하는 것 또한 당초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해군의 경우 진수식의 주빈은 대개 상급 해군장교나 해군에 관계된 관료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고, 여성이 주빈이 되는 경우는 왕실의 일원(공주나 왕비 등)이 진수식에 참가할 때에 한할 뿐이었죠.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진수식에 가톨릭의 성찬식 외에도 세례식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비로소 선주의 딸 또는 부인(군함의 경우에는 고위 해군 관계자의 부인)이 대모 자격으로 진수식의 주빈으로 참석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배의 명명에 여성이 깊게 관여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배가 여성으로 간주돼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세례 의식에서는 남성의 대부는 같은 남성이, 그리고 여성의 대모는 같은 여성이 맡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진수식에 세례식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여성"인 선박의 대모 역할로써 여성이 진수식의 주역이 된 것이죠.


[저렇게 한 방에 깨져야 배의 운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반면에 한 번에 안 깨지면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죠.]


[이 분은 좀 힘을 과다하게 쓰신 듯. 이러면 민폐죠]

새로 태어난 배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여성 주빈은 보통 어떤 식으로든 그 함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선택되는게 보통입니다. 대량생산되는 수송선이라던가 오늘날의 일반 상선 등은 그 배가 건조된 조선소 사장의 부인 등이 선택되죠. 군함의 경우는... 함명이 도시나 지명을 따라 부여되는 경우는 해당 도시·지역 출신의 여류명사가 그 역할을 담당하며, (이를테면 미국 경순양함 아틀란타의 경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저자 마가렛 미첼 여사가 대모를 맡았죠.)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라 함명이 부여되는 경우는 그 인물의 유족 혹은 친족중의 여성이 함명을 부여하곤 합니다.

진수식의 핵심은 여성 주빈이 마지막으로 선박과 진수식장간에 연결된 밧줄을 절단하는 순간입니다. 밧줄을 절단하는 것은 선박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와 아기사이에 연결된 탯줄을 끊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선대라는 모태에서 바다라는 세상으로 나올 때 마지막으로 모태인 선대와 연결된 탯줄을 끊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선박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명명식 이전까지는 그저 "헐넘버(Hull No.) OOO" 식으로 부르다가 명명식 이후에는 공식 함명으로 부른다는 식이죠.


[진수식 준비가 끝난 상태 : 함수 전방에 있는 것이 함장과 주요 직위자, 그리고 함의 대모가 자리할 단상입니다]


[전통적인 명명관습에 따라 함의 대모가 함수에 샴페인 병을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명명이 끝나면 함을 고정하는 줄을 절단하여 함선은 선대로부터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겠죠.]


[탄생의 순간 : 함정은 이제 완전히 선대로부터 떨어져나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인 바다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은 기간동안 상부구조물과 기타 의장공사를 거친후 정식으로 취역할 날이 오겠죠.]

2차대전 종결 이후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최근에는 진수식이 반드시 저런 전통적인 형태로 행해지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여성이 진수도끼로 진수줄을 자르는 것도 20세기에 들어서는 이미 상징적 행위가 돼버렸지만 최근에는 그나마도 생략하고 그저 버튼 하나로 진수줄을 끊는 경우도 많다고 하죠. 또한 뱃머리에 포도주 병을 부딪치는 것 외에 여성 2~3명이 같이 물병, 해수병, 술병을 번갈아 부딪치거나 비둘기를 날리는 등 다양한 명명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건 진수식이 아니야~’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진수식 자체도 과거와 같은 종교의식적인 의미는 진작에 사라지고 그저 하나의 이벤트나 행사로써 행해질 뿐입니다. 바다는 과거와 같이 여전히 변화무쌍하고 만만치 않은 공간이지만 그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해신의 노여움 같은 것은 믿지 않죠. 그래도 유사한 성격의 의식인 적도제나 홀수 예포 등이 여전히 해상의 전통으로 살아남아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의미야 어쨌든 간에 앞으로도 각국의 신조함이 완성될 때마다 진수식이 치러지는 장면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해군관습과 예법』, 해군본부, 1991
- http://www.nmm.ac.uk/server/show/conWebDoc.17932
- http://www.history.navy.mil/faqs/faq108.htm
- http://en.wikipedia.org/wiki/Ship_naming_and_launching
- http://www.arthistoryclub.com/art_history/Ship_naming_and_launching